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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작가의 공간 ⑦

전북의 시골마을에서 자연을 닮은 시 쓰는 안도현

■ 글·박상건 ■ 사진·김성남 기자

2002. 10. 08

전북 완주군 구이면에 위치한 ‘구이구산’은 안도현 시인의 작업실. 뒷뜰에 옥수수와 호박을 키우며, 자연속에 동화되어 살아가는 그를 만났다. 어려운 삶의 고비에서도 순수함을 잃지 않은 시인의 얼굴은 유난히 맑았다. 강물처럼 유장하게 흘러온 그의 삶과 연탄처럼 뜨거운 시 이야기.

전북의 시골마을에서 자연을 닮은 시 쓰는 안도현
돌고 돌아가는 산길 따라 전북 완주군 구이면 광곡 마을 안도현 시인의 작업실을 찾아가는 길. 가을 햇살이, 신작로에 쨍그랑 쨍그랑 나뒹군다. 푸른 숲 그늘 위에 폭죽소리처럼 터지는가 싶더니 낯선 이들의 발걸음마다 온갖 재롱을 떨고 물구나무를 서는 햇살들. 하지만 버스도 들어오지 않는 이 오지마을에 겨울이 오면 햇살은 산그늘에 얼씬도 못할 것이다. 눈발만이 슬금슬금 모여들어 햇살을 밀어낼 것이고 주민들의 발길을 얼어붙게 할 것이다. 그렇게 굽이치는 산모롱이를 돌아설 즈음, 저만치 고래 등을 닮았다 해서 붙여진 경각산이 보인다. 안도현 시인의 작업실은 이 산자락을 깔고 앉아 인조 조각품들로 가득한 도심의 빌딩 숲을 비웃고 있었다. 이른바 안도현 시인의 해방구로 들어가는 길목, 기와집의 작업실 이마에는 잘 조각된 목각 현판이 걸려 있는데, 구이구산(九耳九山)이라…. 친구들이 붙여준 이름인데 이 집이 구이면에 있다 해서 ‘구이’를 붙였고, ‘구산’은 달마의 선법을 전래하여 그 문풍을 유지해온 아홉 산문이라는 뜻과 아홉 명산이라는 뜻을 담고 있단다. 첩첩산중인 이곳에서 아홉 구(九)라는 숫자만큼이나 많은 글을 쓰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단다.
버스도 없는 오지마을에 산새소리 물소리 가득한 작업실
사립문 열고 들어서자 잘 가꾼 잔디마당이 정겹다. 그는 들어서자마자 며칠새 떨어진 썩은 감들을 주워 화단에 버리는 일부터 했다. 그 아래 옥잠화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며 며칠 만에 귀가한 주인과 나그네를 맞았다. 사립문 왼편에는 원두막, 그 아래 타다남은 장작더미가 며칠 전 바비큐 만찬이 있었음을 말해주었다. 비가 오는 날 질척이는 부담을 덜기 위해 놓인 돌 징검다리가 마당을 가로질러 토방으로 이어져 있다.
본디 이 집은 10여년 이상 빈집이었다. 그가 직접 단장한 작업실은 문지방을 넘자 사방으로 햇살이나 바람이 넘나들도록 개조되어 있었다. 이리저리 들창문이 나있고, 뒤뜰에는 알알이 익은 옥수수대 푸른 잎들이 아이들처럼 소리친다. 그 아랫도리께 핀 채송화와 함께 둘은 사이좋게 살랑대며 바람결에 입 맞추곤 했다. 툇마루에 앉아 시원한 냉수 한 사발에 담배 한 개비를 꼬나 물고 앉아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우리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저 앞산 머리. 푸르른 푸르른 젖가슴이어라. 동그만 산등성이가 일제히 출렁이는 것을 보아. 앞산 정수리에 송이송이 구름까지 피어올라 대낮부터 사람을 환장하게 한다. 담벼락 위로는 나팔꽃, 살구나무, 감나무, 매화나무, 소나무, 호박덩굴들이 뻗어나갔다. 담 너머 시냇물 흐르는 소리도 담장을 팔짝 팔짝 뛰어넘어 들어와 등줄기에 흐르는 땀방울을 식혀준다.
안시인은 상념이랑 그만 털고 옥수수나 따러 가자 한다. 삼태기를 들고 텃밭에서 옥수수와 호박을 땄다. 정성껏 심어 가꾼 호박 한 덩어리를 필자와 사진기자에게 주었다. 풋고추도 더 따가라는 말을 덧붙이며.
좋은 시는 아무 곳에서 아무한테나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한다. 수많은 작가들 가운데 이처럼 구석구석에 이녁의 영혼을 심으며 자연의 일원으로 사는 이가 얼마나 될까. 더 가까이, 더 솔직히 가슴 낮추고 자연의 정서와 호흡하는 일, 이를 섬세한 시어로 묶어내는 건 결코 쉬운 일은 아닐 터. 안시인의 작업실은 목가적이지만은 않다. 조금만 게으르게 집을 비워놓으면 이내 통풍이 안돼 습기와 곰팡이 냄새로 자욱해진다고 했다. 잔디 속에 잡초의 침입 속도도 만만찮다. 그는 이 집을 구하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 집 구하는 기준이 까다로웠던 탓이다. 사람이 많이 살지 않을 것, 교통이 붐비지 않고 축사, 돈분(豚糞)이 없는 마을일 것. 그 조건에 딱 맞는 곳이 여기였다. 산이 있고 집앞에 개울물이 흘러주는 곳. ‘향수’의 시인 정지용 시인 생가와 비슷한 지형이라고도 했다. 그렇기에 빈 집의 해진 문풍지, 그을음 가득한 부엌 천장, 복잡하기 그지없는 헛간, 사람 키를 넘기는 개망초 따위의 덤불숲, 부서진 마루 등 볼품없던 초가삼간을 흔쾌히 작업실로 정했다. 이후 한달 동안 집 고치기에 매달렸다. 집 고치는 일은 잠자고 있던 집에 숨결을 불어넣는 일. 원형을 보존하자는 차원에서 여닫을 때마다 삐꺽이는 부엌문은 그대로 놔뒀다. 뒤란에 팽개친 툇마루는 다시 원래 자리에 가져와 그 아귀를 맞췄다. 부엌과 안방 사이에 있던 벽장은 뜯어내고 대신 문을 달아 작업실 동선의 편리를 도모했다. 그렇게 글쓰기의 천국, ‘구이구산’이 태어났다.

안도현 시인을 만나는 것은 그가 이제껏 발표해온 작품의 진정성을 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의 얼굴에는 그늘 한점 없다. 작은 체구에서 뿜어 나오는 가락은 힘이 있다. 도종환 시인은 그를 ‘강물 같은 시인’이라 불렀다. 몸속에 강물이 출렁이며 흘러 그 속에 은어떼 같은 맑은 감수성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것. 그랬다. 그는 푸른 멍이 들도록 꿈틀대며 흘러온 ‘금강’같은 시인이다. 지극히 서정적인 남도가락에 인간의 본질과 역사에 대한 재인식을 깔고 있다. ‘성묘’라는 시는 이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고 있다.

햇볕도 대추나무 끝에 좋은 날
어린 유경이를 데리고
아버지 산소 성묘 갔지요
억새꽃 삼천리로 피어 있고요
방아깨비는 슬픔처럼 톡톡 튀어오르고요
할아버지 만나러 간다는
내 어릴 적 가을 한때 생각하면
아버지 발자국 되밟으며 가만히 듣던
그 벅찬 숨소리 생각하면
오늘 유경이도 따라오며 듣겠구나
생각하면 어느덧 나는
시냇물 데리고 바다로 가는 강물이지요
모든 길이 무덤에 이르러 깊어지지요
(‘성묘’ 전문)

짧지만 한편의 가을동화를 읽는 것 같다. 어릴 적 삐비꽃 뽑던 무덤가, 팽나무 사이에 동아줄로 맨 그네, 소몰이하던 추억의 길 등 외가 동네 드넓은 유년의 공간이 떠오른다. 아버지와 할아버지 그리고 시인과 딸 유경이에 이르는 4대 정신이 새끼줄처럼 꼬여 강물처럼 흐른다. 이승과 저승의 대화가 속엣말로 들리는 듯하다.
그의 시에는 삶의 감동이 있고 시의 감동이 있다. 그는 앞으로도 삶에다 시를 밀착시키고 시에다 삶을 밀착시키는 글을 한동안 쓰고 싶단다. 툭! 치는 맛이 있는 시. 사회 부조화의 매듭을 시로 풀고 싶다고도 했다. 그건 곧 관조이며 자기반성, 자기검열로 귀결된다.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업보 뒤집어보기다. 이러니 그의 가슴은 크기 마련이다. 타인의 삶까지 온후하게 껴안는다. 그런 진솔함과 겸허함 때문에 그의 시는 읽을수록 싱그럽고 경쾌하게 도랑물 소리를 내는 것이리라.

어린 눈발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겨울 강가에서’ 전문)



따뜻한 시선과 섬세하고 건강한 언어로 빚어낸 시적 성취가 그만의 독창적 매력을 십분 느끼게 해준다. 김용택 시인의 표현처럼 “그의 시선이 가서 머물고 닿으면 그것이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일지라도 금세 눈부신 날개를 단다.” 그렇다. 가슴 낮게 강물에 내려놓고 함께 호흡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눈발 뛰어내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으랴.
이 한편으로도 그가 살아온 날들과 살아갈 날들을 쉽게 가늠해볼 수 있다. 해직의 고통을 이기고 첫 출근한 학교는 지리산자락에 걸터앉은 전북 장수 산서고등학교. 그 흔한 하숙집 하나 없어 한달에 3만원 내는 방에서 자취를 했다. 복직 조건은 전교조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쓸 것. 마음 편했을 리 만무하다. “들꽃들아/그날이 오면 닭 울 때/흰 무명 띠 머리에 두르고 동진강 어귀에 모여/척왜척화 척왜척화 물결소리에/귀를 기울이라”며(‘서울로 가는 전봉준’) 등단작부터 ‘전봉준’을 노래했던 그 아닌가.

전북의 시골마을에서 자연을 닮은 시 쓰는 안도현

시인은 버려진 빈 집을 개조해 살고 있다.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후 89년 이리중학교 국어 교사가 됐고, 이내 전교조에 가입했다. 밤새도록 절망을 모닥불에 태우고 태우며 지새던 시절. 이끼 푸른 희망의 아침은 쉬이 오지 않았다. “구두를 신으면서 아내한테 차비 좀, 하면 만원을 준다/전주까지 왔다갔다 하려면 시내버스 210원 곱하기 4에다/더하기 직행버스 870원 곱하기 2에다가/더하기 점심 자장면 한 그릇 값 1,800원 하면/좀 남는다 나는 남는 돈으로 무얼 할까 생각하면서/벼랑 끝에 내몰린 나의 경제야, 아주 나지막하게/불러본다 또 어떤 날은 차비 좀, 하면 오만원도 준다/일주일 동안 써야 된다고 아내는 콩콩거리며 일찍 들어와요 하지만”(‘나의 경제’) 이 대목을 읽노라면 해직교사 시절이 흑백필름의 파노라마로 스친다. 이 시에 등장하는 소설가 이병천씨는 “도현이는 의리를 잃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기도(?) 하고 그 꺼칠하던 세월에도 불구하고 늘 맑고 티없이 지내왔다”고 말했다.
아픈 상처에 새 살이 되고자 하는 시인의 꿈
그의 시를 읽으면 내면의 슬픔 같은 것들이 갑자기 대장간 망치 두들기는 소리처럼 들려올 때가 있다. 불현듯 그어진 불씨가 불꽃으로 타오르고, 불꽃 속에 담금질된 쇠가 물 속에서 내는 치이직하는 소리처럼 가라앉는 슬픔. 그의 시는 날이 갈수록 깊어지는 눈치다. 인간들아, 제발 정신 좀 차리고 살라 하는 듯하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너는/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반문한다(‘너에게 묻는다’ 전문). “그리하여 남에게 먼 불빛이 된다는 것은/나는 오늘 하루 밥값을 했는가/못했는가 생각할수록 어두워지는구나”(‘먼 불빛’). 때로는 이렇게 단호하게 말한다. “밤에 전라선을 타보지 않은 者하고는/인생을 논하지 말자”(‘인생’ 전문). ‘자’(者)를 한자로 강조하는 것을 보니 그의 성격으로 미루어 보면 아예 쌍욕이라도 하고 싶었을 게다. 사람들아, 선입견 좀 버려라. 체험 없이 지혜는 자라나지 않는다면서. 그러기에 “우리가 눈발이라면/허공에서 쭈빗쭈빗 흩날리는/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새 살이 되자”라고 강조한다(‘우리가 눈발이라면’).
안시인은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이 흐르는 경북 예천에서 태어났다. 단칸방에서 여섯 식구와 어린 시절을 보냈다. 5학년 때 이미 단봇짐을 둘러메고 대구에서 사촌형 누나들과 섞여 자취생활을 해야 했던 그였다. 큰 상점을 하던 그의 집은 연쇄점 체제가 등장하면서 여지없이 무너졌다. 81년 대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런닝구’라는 시를 보면 “황달에 걸린 것처럼 누런 런닝구” “白旗 들고 항복하는 자세로 걸려 있던 런닝구” “마흔일곱 살까지 입은 뒤에 다시는 입지 않는 런닝구”라 씌어 있다. 마흔일곱이라는 젊은 날에 그렇게 이승을 떠난 아버지. 그 이후 그는 등록금을 걱정하며 대학을 다녔다. 퉁퉁 부은 라면을 먹어 보지 않은 자하고는 인생을 논하지 말자고 할 정도로 어린 시절부터 라면은 그의 주식이었다. 그렇게 속울음 울컥이며 질곡의 세월을 살아왔다.
그리고 여태 돌아가지 못한 고향 땅. 비록 가난했지만, 저녁 무렵 올망졸망한 지붕 위로 피어오르는 푸근한 연기, 처마 끝 낙숫물 소리, 군불 지피던 아궁이, 울어 썩어야 제 역할을 다하는 거름 냄새, 감나무 호두나무 밤나무 대추나무 풍성하던 외갓집 풍경… 고향은 늘 그리웠고 이런 정서는 훗날 시의 체온을 데워주는 큰 원동력이 된다.

슬픔, 절망, 고난의 디딤돌을 밟을수록 삶은 숙성되어 갔을 터. 성숙함은 시에 유머와 사투리를 간간이 양념으로 뿌리는 여유를 갖게 했다. 다부진 시의 속살마다 낙동강에 비치는 햇살처럼 해맑고 정겨운 언어들이 나부꼈다. 경상도의 정적 정서와 전라도의 동적 정서가 반반씩 버무러져 유장한 가락으로 파닥이기도 했다.
그는 고교 시절부터 ‘소년시인’으로 불리며, 전국 백일장을 휩쓸었다. 대학은 싫어하는 수학 문제를 풀지 않아도 되는, 좋아하는 시를 하루도 빼지 않고 읽고 쓸 수 있는 이상향 같은 곳이었다. 시인만이 꿈이었기에, 원광대에 문예장학생으로 입학했고 윤흥길, 박범신, 양귀자 선배 뒤를 이으며 이병천, 백학기 선배들과 함께 문학청년 시절을 구가했다. 소주에 새우깡이면 그저 술자리는 즐거웠다. 보들레르, 하이데거, 김수영, 황동규 시인을 이야기하고 이따금 서슬퍼런 독재 정권 아래서 포복처럼 흘러다니던 시국 이야기를 술안주로 삼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자 친구에게 빌린 <한국 근대사>라는 책을 다 읽고난 즈음 뒷표지에 붙은 한장의 사진을 보았다. 사진을 설명하는 짤막한 캡션은 ‘서울로 압송되는 전봉준.’ 이것이 등단작의 모티브가 되었다. 그리고 얼마간 ‘외롭고 높고 쓸쓸한’ 날들을 지나 지금 예까지 온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국민시인으로 태어난 안도현 시인. ‘우리가 눈발이라면’이라는 시가 중학교 1학년 2학기 교과서에 실렸고, 어른을 위한 동화 ‘증기기관차 미카’가 초등학교 4학년 2학기 국어 교과서에 실렸다. 시력 30년이 될 때까지 시선집을 내지 않겠다는 그의 겸손함 뒤에는 벌써 시력 30년만큼 묵직한 수많은 국민이 독자군단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그에 대해 “대중을 얻고 비평가를 잃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건 언어 도단이다. 잘 여문 시의 대중화는 올바른 시의 저변확대를 위해 박수를 받아야 할 일 아닌가. 서정적 가락이 배제된 시가 후일 문학적으로 후한 평가를 받는 경우는 드물었다. 가락 속에 구호가 있을 수 있으나, 구호는 가락일 수 없다. 노래는 가슴으로 부른다.
오늘도 그는 인간과 자연의 세계를 뫼비우스 띠처럼 돌고 돌며 시의 원액을 짜내고 시의 씨앗을 파종하고 있다. 그의 작업실로 오고 가며 몇 번이고 되뇌었던 시가 있다. “산길은,/ 걸어갈수록 좁아지지만/또한 깊어지는 것//내가 산길을 걷는 것은/인간들의 마을에서 쫓겨났기 때문이 아니라/인간들의 마을로 결국은 돌아가기 위해서다”(‘눈 그친 산길을 걸으며’). 그래서 아파트촌을 벗어나 시골 작업실을 찾는 것일까.
토끼 발자국, 상수리 열매를 되새떼가 알알이 뿌려놓고 간 겨울 산. 그곳에 눈 내리고 그 눈길을 밟는 시인. 귓불을 빨갛게 달구는 겨울바람. 그것만으로도 외롭지 않다고 노래하는 이가 안도현 시인이다. 시인은 그 산길을 경배하며 걷는다. 송사리떼에게도 저 산의 경이로움을 보여주고 싶었을까? “송사리떼에게 거슬러 오르는 일을 가르치려고/시냇물은 스스로 저의 폭을 좁히고/자갈을 깔아 여울을 만들었네”(‘여울가에서’)라고 노래한다. 이런 ‘발상의 전환’은 자연과 호흡을 일치하고 있다. 송사리도 거역의 세월을 살아가는 삼라만상의 한 생명. 그래서 “삶이란/나 아닌 그 누군가에게/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이라는 담론을 끌어내기에 이른다(‘연탄 한 장’).
거창하게 이웃사랑, 사회 공동체 문화를 운운할 필요가 없다. 짤막한 한마디에 눈앞이 환히 트인다. 읽는 이의 뒤안길을 스스로 돌아보게끔 한다. 그래서 “거슬러 오른다는 것은 지금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간다는 뜻이지. 꿈이랄까. 희망 같은 거 말이야. 힘겹지만 아름다운 일이란다”<연어>. 이처럼 하찮은 미물에도 따뜻한 시선을 주는 시인의 사랑. 타인과 관계에서 맺는 지순한 사랑이, 우리 일상에서 놓치기 쉬운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주는 애틋한 눈길의 사랑을 독자들은 누구보다 눈 밝게 읽는 것일 게다.
요즈음 그는 낮에는 쏘다니거나 한숨 푹 자고 밤에 주로 시 창작을 한다. 쉽게 시를 쓴다는 일부의 지적과는 달리 보통 한편의 시를 쓰려면 사오십장 넘는 파지를 내는 완벽주의자다. 산골짜기에 들어온 이후로 그는 자연과 내통하는 횟수가 더욱 잦아졌다. 봄이면 뻐꾹새 울음에 귀 기울이고, 여름이면 묵정밭에서 땀 흘리거나 마루에서 낮잠을 잔다. 가을에는 방아깨비들을 톡톡 튕겨 가며 소일하고 겨울에는 작업실 지붕까지 뒤집어쓴 눈발 아래서 다람쥐처럼 자판기 두들기며 시를 쓰다 잠들곤 한다.
그렇게 자연 속에 시인은 동화되어 가고 있다. “한숨 자고/고구마 하나 깎아 먹고//한숨 자고/무 하나 더 깎아 먹고//더 먹을 게 없어지면/겨울밤은 하얗게 깊었고(‘그 겨울밤’전문), “몸의 급수탱크에도 물이 가득 차면, 詩, 그것이 바람난 살구꽃처럼 터지려나” 하는 열망의 시간들 속에 산다. 물론 터질 것이다. 그래서 그이의 몸속에 뜨거운 물이 한겨울 내내 그르렁그르렁 돌아다녀 완주골 제2의 창작시대가 열릴 것이다. 물론 우리네 삶 언저리에 그 영혼의 노래 한곡씩을 들려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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