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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대생 살해사건’ 피해자 하양 아버지의 피맺힌 절규

■ 글·최호열 기자(honeypapa@donga.com) ■ 사진·정경진

입력 2002.10.07 16:03:00

지난 3월 명문 여대의 법대생이 납치된 지 11일 만에 잔혹하게 살해된 채 발견돼 충격을 주었던 ‘여대생 피살사건’의 구체적인 윤곽이 드러나고 있다. 죽은 하양의 이종사촌 오빠인 김씨의 장모가 하양의 납치를 사주한 혐의로 8월20일 구속된 것.
한때 하양의 남자관계가 복잡했다는 소문이 돌며 ‘치정사건’으로 비쳐지기도 했던 이 사건의 진상 & 딸의 명예회복을 위해 나선 하양 아버지의 울분과 고통.
‘여대생 살해사건’ 피해자 하양 아버지의 피맺힌 절규
지난 3월16일, 한 명문 여대의 법대생이 집앞에서 납치된 지 11일 만에 경기도 광주의 야산에서 잔혹하게 살해된 채 발견됐다. 부검 결과 피살된 하양(22·이화여대 법학과)은 머리에 공기총 네발을 맞고 사망한 상태에서 범인이 또다시 2발의 확인사살을 한 것으로 밝혀져 충격을 주었다. 경찰은 이를 근거로 깊은 원한 관계에 의한 살인으로 추정했다. 또한 구타나 고문·성폭력의 흔적은 물론 죽는 순간에도 별다른 저항을 한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면식범의 소행일 가능성에 초점을 두었다.
그런 상황에서 하양의 남자관계가 복잡하다는 말이 사건 수사 과정에서 흘러나왔다. 당시 하양과 ‘특별한 관계’에 있는 것으로 알려진 남자는 3명. 이들은 모두 서울대 법대 출신의 법조인이거나 서울대 법대 재학생인 것으로 밝혀져 세간의 호기심을 자아냈다.
첫째 남자는 만난지 3년 된 남자친구 홍씨(27). 두 사람은 양가에 인사까지 한 사이로 별다른 일이 없는 한 하양이 졸업한 후 결혼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하양은 홍씨를 사귀면서 변호사 김씨(31)와 맞선을 보았고, 몇 차례 만나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김변호사는 경찰 조사에서 “내가 먼저 결혼이야기를 꺼냈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또한 현직 판사로 있는 이종사촌오빠 김씨(31)가 있는데, 김씨의 경우 장모가 하양과의 관계를 의심해 사설탐정까지 동원해 뒷조사를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언뜻 복잡해 보이는 남자관계로 인해 세간에서는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랴’라며 하양의 품행에 의혹의 눈초리를 보냈고, 한때 하양사건은 ‘미모의 여법학도와 서울대 법대 출신 남자들의 4각 관계에 의한 치정살인’처럼 보도되기도 했다. 복잡한 남자관계가 사실이라면 세 남자 모두 배신감을 이기지 못해 살인을 저지를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수사가 진행되면서 남자친구 홍씨는 운전면허증이 없는 것으로 밝혀져 시체를 유기할 가능성이 없다는 점에서 혐의를 벗었고, 맞선을 봤던 김변호사와 이종사촌 오빠인 김판사 역시 별다른 혐의점을 찾을 수 없었다. 죽은 하양의 아버지 하씨(56)는 김판사의 장모 윤씨(57)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지만 뚜렷한 단서를 찾을 수 없었다.
사건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우연한 계기에 의해서였다. 하씨는 “사건이 발생하기 몇달 전부터 자신에게 함께 사업을 하자고 접근해온 남자가 있었다”며 그의 명함을 경찰에 건네주었다. 어쩌면 그냥 지나칠 수 있었던 이 명함 한장을 토대로 탐문수사를 한 결과 명함의 주인공이 사업가가 아닌 김판사의 장모 윤씨가 운영하는 부산의 나이트클럽 종업원이며, 사건 당일 현장 주변에서 휴대전화로 자주 통화한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이를 단서로 추적하기 시작한 경찰은 4월과 6월 두 차례에 걸쳐 하양을 납치한 범인과 살인에 사용된 공기총을 보관해온 공범을 체포, 자백을 받아낼 수 있었다. 또한 용의자들의 진술과 수사를 통해 김판사의 장모 윤씨가 사건에 개입했다는 단서를 확보, 8월20일 윤씨를 ‘하양을 납치 감금하도록 한 혐의’로 구속하고, 살해관련 여부를 밝히는 데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다. 물론 윤씨는 범행을 완강하게 부인하고 있는 상태. 윤씨의 변호인인 최재원 변호사는 “본인이 혐의를 전면 부인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사건은 하양을 살해한 후 베트남으로 도피한 것으로 보이는 윤씨 조카와 공범 김씨가 검거된 뒤에야 전모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범행 동기와 과정이 밝혀진다 해도 여전히 남는 의문이 있다. 하양은 정말 자신의 미모와 법대생이라는 학벌을 이용해 엘리트들과 문란한 교제를 해온 것일까? 만약 그 소문의 진상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는다면 진범이 밝혀진다 하더라도 가족의 울분은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하양의 집을 찾았을 때 하양의 부모 둘 다 집에 있었다. 하지만 하양의 어머니(55)는 사건이 있은 지 6개월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몸져누운 상태였고, 아버지 하씨(56)만이 기자를 맞아주었다. 그동안의 마음고생 때문인지 얼굴이 무척 수척해 보였다.
“우리 가족에게 지난 6개월은 죽은 시간이에요. 하루 하루가 죽음과도 같은 시간들이었죠.”

‘여대생 살해사건’ 피해자 하양 아버지의 피맺힌 절규
지금도 가족들 심정은 살아 있어도 사는 게 아닐 것이다. 하씨는 하루하루를 술로 연명하고 있고, 끊었던 담배도 다시 피우고 있다고 한다. 3시간 가까운 긴 인터뷰 내내 손에서 담배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집사람은 저보다 더 힘들어하죠. 수면제와 술이 없으면 잠을 못 자요. 하루 종일 저렇게 누워 있기만 하고…. 그동안 두번이나 동맥을 끊고 자살을 기도해 119가 출동했어요. 병원에서 준 수면제를 모아두었다 수십알을 한꺼번에 먹고 자살을 기도한 적도 있어요.”
하양의 어머니는 지금도 “딸이 있는 곳에 가야 한다”는 말만 입버릇처럼 되뇌인다고 한다. 딸을 볼 수만 있다면 지옥의 불구덩이라도 따라 들어가 옆에서 지켜주고 싶다는 것. 그런 말을 들어야 하는 하씨도 괴로움을 견디기 힘들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처음엔 범인만 잡히면 마음이 한결 나아질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예요. 범인이 모든 것을 자백한다고 해서 죽은 제 딸이 돌아오는 건 아니니까요. 요즘은 절망감과 상실감이 더 커요.”
살아서 못 보는 그리움을 꿈속에서라도 풀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이다. 꿈에 딸이 나타나지 않냐고 조심스럽게 묻자 고개를 가로젓는다. 꿈에서라도 보고 싶은데 한번도 나온 적이 없었다는 것. 반면 아내의 꿈에는 딸이 자주 나타나는 편이라고 했다. 그나마 아내의 꿈에 나타나는 딸의 모습이 슬픈 표정이 아니라 밝고 편해 보였다는 말이 한가닥 위안이 된다고 한다. 그런데 요즘은 아내의 꿈에도 나타나지 않는다고.
“아이가 죽으니까 별 생각을 다하게 되더군요. 애가 문자메시지를 보낼 때 자기 애칭을 꼭 하동댁이라고 썼어요. 하씨라서 그렇게 지은 모양이에요. 그런데 사고를 당하기 직전에 갑자기 보름달로 애칭을 바꾸더라고요. 아내가 그래요, 이런 일이 있을 줄 미리 알고 자기가 죽은 후 보름달이 뜨면 자기인 줄 알라고 그렇게 지었나 싶다고. 그 말을 들으니 더욱 가슴이 아프고….”
가족들로서는 아직도 딸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든 모양이다. 하양의 방은 사건이 나기 전 그대로다. 책꽂이에 꽂혀 있는 각종 법률서적도, 인형이나 자잘한 소품, 옷가지도 깨끗하게 정돈된 그대로였다. 특이한 것은 그녀의 침대. 얇은 이불이 깔려 있는데, 천으로 얼기설기 만든 인형이 마치 하양인 것처럼 이불을 덮고 누워 있다.
고시공부에 열중하면서도 엄마를 끔찍이 위했던 하양
“아내는 아픈 와중에도 딸애 방은 매일 정리해요. 인형은 한 점쟁이가 딸애의 원혼을 달랜다며 만들어준 거예요. 미신을 믿지는 않지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게 부모의 심정이더라고요.”
책상 위에 놓인 노트를 펼치자 맨 앞장에 ‘My Life’라는 제목 아래 2002년 4월1일 휴학, 사시공부, 2003년 1차 시험 합격, 2005년 2차 시험 합격, 2007년 사법연수원 졸업 등 인생의 계획을 정해놓은 게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날그날 공부한 분량을 하루도 빠짐 없이 꼼꼼하게 기록해 놓았는데, 실종되기 하루 전인 3월5일에서 멈춰 있어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더욱 기가 막힌 게 뭔지 아세요. 사고나기 직전 딸애가 공부한 게 바로 형법에서 부재·실종 부분이었어요. 기막힌 우연이죠.”
어떤 딸이 그렇지 않을까마는 하양 역시 하씨 부부가 극진하게 여기는 딸이었다. 특히 바깥나들이를 잘 하지 않는 하양 어머니에게 하양은 가장 친한 친구고, 일에 바쁜 남편 하씨를 대신한 보호자였다. 대부분의 대학생들이 친구나 애인과 함께 영화·오페라를 보는 데 비해 하양은 가족, 특히 어머니와 함께 보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의 방에는 지금도 작년 가을에 온가족이 함께 본 영화 포스터가 걸려있다.
“엄마에게 스포츠댄스를 배우게 하려고 수강증을 자기 것과 엄마 것을 함께 끊어서 같이 다녔어요. 그러다 엄마가 재미를 붙여 혼자 다닐 수 있을 정도가 되니까 그제서야 자기는 그만두더라고요. 또 나이 50이 넘으면 무력감에 빠지기 쉬우니까 뭔가를 해야 한다며 엄마를 위해 방송통신대 원서까지 챙겨왔어요. 그래서 아내가 2년 동안 일어를 전공해 2급 일어회화 자격증까지 땄어요. 그런 애가 어떻게 남자관계가 난잡하고 치정에 얽힐 수가 있겠어요.”
하양의 책상 위에 있는 탁상달력엔 사촌의 결혼기념일에서부터 어머니의 곗날까지 꼼꼼히 기록되어 있었다. 모처럼 어머니가 외출하는 곗날엔 일찍 들어와 가족의 저녁을 준비했다고 한다.
하양의 일기장엔 ‘나의 단점 30가지’라는 글이 있다.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을 때가 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가 있다’ ‘남에게 화를 낼 때가 있다’ 등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법한 단점들을 30개나 나열한 후 ‘앞으로 이런 나쁜 버릇을 고쳐 지성인이 되겠다’는 각오를 적고 있다.
“딸애는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려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의 소소한 일들도 챙겨주고 도와주려고 했던 애예요. 어느 날 딸애가 ‘공부 잘하는 친구가 있는데 학비가 없어 휴학을 할 것 같다’며 안타까워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 친구 등록금을 대주겠다고 하니까 ‘그럼 친구가 상처를 받을지 모른다’며 적절한 방법을 생각해 보자고 할 정도로 생각이 깊은 아이였어요. 저도 그 생각이 나서 앞으로 이화여대에 장학금을 지원하고, 불우이웃돕기에도 힘을 보태려고 해요. 그게 아이의 뜻이니까요.”
하씨의 말은 물론 하양의 대학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봐도 소문처럼 사생활이 문란하다는 정황을 발견하기 힘들었다. 그의 생활은 자로 잰 듯 규칙적이었다. 그럼 왜 그런 소문이 나돌게 된 것일까.
“딸의 죽음보다 더 힘들었던 게 스캔들이니 치정이니 하며 선정적으로만 몰아가려는 언론보도였어요. 딸을 두번 죽이는 것이잖아요. 얼마 전에도 한 일간지에서 기사제목을 ‘알고 지내던 남자의 장모 구속’으로 뽑았더라고요. 그게 말이 돼요? 사촌오빠를 알고 지내는 남자라고 한다면 아빠도 알고 지내는 남자고, 엄마도 알고 지내는 여자가 되겠네요. 호기심을 자극하려고 일부러 그렇게 선정적으로 뽑은 거죠.”
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씨는 8월 초 딸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진실을 밝히겠다며 이화여대 총학생회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이 글에서 하씨는 “이 사건은 딸이 행동을 잘못해서가 아니라, 이종사촌 오빠인 김판사가 자신의 문제를 회피하려고 딸을 끌어들인 것이 발단”이라고 주장했다.
하씨의 주장에 따르면 김씨와 하양은 이종사촌지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는 것. 그런데 99년 김씨가 수백억원의 재산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부산의 한 기업가의 딸과 중매로 결혼을 하면서부터 비극이 싹텄다고 한다.
하양은 김씨가 결혼한 뒤 두 차례 정도 김씨의 집으로 전화를 했었다. 그런데 장모 윤씨가 달가워하지 않았다. 하양 가족은 나중에 김씨 어머니가 집에 와서 이야기를 해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처제(김씨 어머니) 이야기가 ‘사돈이 사위를 의심한다’는 거예요. 심지어 퇴근길에 차가 막혀 조금 늦으면 ‘왜 10분이나 늦었냐, 누구를 만나고 왔냐’고 다그칠 정도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우리 애에게 전화를 안했으면 좋겠다고 하는 거예요. 무슨 소리냐고 하니까 김판사가 대학시절 사귀던 여자에게서 받은 전화를 이종사촌 동생 전화라고 둘러대는 바람에 장모가 둘 사이를 의심한다고 하더군요.”

기가 막힌 하씨 가족은 그후 김씨와 연락을 끊었다. 하지만 장모 윤씨의 의심은 깊어만 갔다. 사위에게 수차례에 걸쳐 둘이 어떤 사이인지를 추궁했고, 전·현직 경찰관 등 사람을 시켜 하양의 뒤를 밟도록 하기도 했다. 그러는 와중에 느닷없이 김판사와 윤씨의 딸을 중매한 중매인이 찾아와 하양을 중매하겠다며 김변호사와 맞선을 주선하기도 했다. 하씨는 이것도 하양과 김판사의 관계를 의심한 윤씨의 사주가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하양은 김변호사와 몇 차례 만난 후 “아직 나이가 어려 결혼할 생각이 없다”며 헤어졌다고 한다.
윤씨의 집착은 집요했다. 사위가 근무하는 사무실에 숨어 하양이 드나드는지 여부를 확인하기도 하고, 수시로 하양의 집과 기숙사로 전화를 걸어 하양의 소재를 확인하기도 했다. 윤씨가 하양을 미행하고 있다는 것을 안 하씨는 오해를 풀기 위해 윤씨의 집을 찾아가 김판사에게 직접 장모가 오해를 풀도록 설명하라고 했다. 그런데 왠일인지 김판사는 묵묵부답이었다.
“윤씨는 계속 말도 안되는 주장만 하는데, 김판사는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는 거예요. 분통이 터져 그 집을 나오는데 김판사가 그러더군요. 자기가 무슨 말을 해도 장모가 믿어주지 않는다고. 그런 식으로 남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자기만 빠져나가려고 하는 게 너무 화가 나더라고요.”
계속되는 미행에 견디다 못한 하씨는 윤씨에 대해 접근금지 가처분 신청을 했다. 하씨의 신청서에는 ‘피신청인의 행태를 그대로 방치할 경우 신청인의 딸의 신변에 장차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겠다는 불안감과 위협감을 감당할 수 없어…. 위험 요소를 사전에 예방해야겠다는 절실한 심정에서 신청하게 되었다’는 부분이 있다. 마치 하양의 비극적인 죽음을 예견이라도 한 듯한 섬뜩한 대목이다. 재판은 하씨의 승리로 끝났다.
윤씨는 1년 넘게 미행을 하고 뒷조사를 했지만 두 사람의 특별한 관계를 입증할 아무런 증거를 잡지 못했다. 경찰 조사에서 하양을 미행한 심부름센터 직원들도 둘이 만나는 것을 한번도 본적이 없다고 진술했다. 그런데도 윤씨는 왜 이렇게 두 사람 사이를 집요할 정도로 의심했던 것일까. 윤씨는 경찰 조사에서 중매인으로부터 ‘두사람이 특별한 관계인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고 진술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어디에서 들었든 윤씨 혼자 의심을 키워 결국 하양을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비극을 낳은 것으로 보인다.
하씨는 자기가 죽어야 하는데 딸이 대신 죽은 것 같다며 흐느꼈다. 1차 살인목표는 딸이 아닌 자신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윤씨를 고소한 것이 자신이고, 재판에서 패배한 윤씨는 자존심이 상해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딸이 살해되기 몇달 전, 그러니까 소송에서 제가 이긴 후 갑자기 저에게 접근한 사람이 있었어요. 아는 사람에게 소개를 받았다며 사업을 도와달라고 찾아왔어요. 그러면서 인천에 배가 들어왔으니 같이 가서 물건을 보자, 일본으로 사업구상을 하러 같이 가자는 거예요. 사기꾼 같아 피했죠. 그런데 딸이 죽은 후 수사하는 과정에서 바로 그 사람이 윤씨 조카와 함께 제 딸을 죽이고 베트남으로 도망친 김씨라는 게 밝혀졌어요. 저를 납치하려다 안되니까 대신 딸을 납치한 게 아닌가 싶어요.”
김판사는 하양이 죽은 후 장례식에 오지 않은 것은 물론 지금까지 사과나 위로 전화 한통 없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하씨는 이화여대 총학생회 게시판에 올린 글을 통해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장모의 오해가 점점 집요해지는 것을 방관하고 외면한 김판사의 행동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질 것”을 촉구하고 있다. 그의 글을 통해 사건 뒤에 감춰진 이면을 알게 된 이화여대생들은 “억울하게 고인이 된 하양의 추모제를 열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그는 마지막으로 딸과의 추억 하나를 이야기했다.
“지난해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시체부검 실습을 나갔다 큰 충격을 받았나 봐요. 제게 몇번이고 그때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부검을 위한 시체가 침대 위에 누워 있는데 밖에선 그 시신의 아버지가 울면서 서 있더라고.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 제가 서서 울고 있고, 딸애는 부검을 위해 부검실에 누워 있는 상황이 된 거예요. 그 순간 아이의 말이 생각나서 가슴이 탁 막히더군요. 그 애의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한데….”
기어이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는 하씨의 등뒤로 걸려 있는 사진 액자엔 아버지를 위로하는 듯 하양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여성동아 2002년 10월 4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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