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간 그가 맡아온 캐릭터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사랑 앞에 쉽게 나서지 못하고, 외로움과 상처를 홀로 삼키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김성철의 눈빛에서는 늘 깊은 공허와 슬픔이 비친다. 실제로 그는 “결핍 있는 인물을 유독 좋아한다”며 “그들의 깊은 감정선을 연기하는 것이 흥미롭다”고 말했다.
영화 ‘파과’ 속 ‘투우’는 그 정점에 선 인물이다. ‘파과’는 구병모의 동명 소설 ‘파과’를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개봉 전 제75회 베를린국제영화제와 제43회 브뤼셀판타스틱영화제에 초청돼 주목을 받았다. 영화는 늙고 쓸모없어졌다고 여겨지는 60대 여성 킬러 ‘조각’의 시선에서 바라본 삶과 죽음을 다룬다. 투우는 주인공 조각과 대척점에 서 있는 젊고 치명적인 존재지만, 그 역시 결핍에서 비롯된 인생을 살아간다. 소설 속 킬러 투우가 김성철의 눈빛과 액션으로 다시 태어났다. 4월 28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서 그를 만나 투우를 품었던 시간을 물었다.

이혜영, 김성철 주연의 파과가4월 30일 개봉했다.
이혜영은 경외심이 드는 배우
영화에 참여한 소감이 궁금해요.이 작품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했어요. ‘60대 여성 킬러’가 시도하기 힘든 콘셉트잖아요. 그런 새로운 시도에 함께했다는 것이 뜻깊습니다.
영화 ‘파과’가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초청되었잖아요. 세계 3대 영화제에 초청되었는데, 기분이 어떤가요.
주변에 영화 하는 친구들이 “베를린 갔잖아!”라는 말을 많이 했어요. 영화제에 초청된 것만으로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루었다는 반응이죠. 베를린국제영화제는 영화인에게는 상징적이니까요. 그런 영화인들의 축제에 제가 참여한 작품을 선보일 수 있어 정말 행복하죠. 저는 ‘그래도 영화가 흥행을 해야 할 텐데’라는 입장이에요.
이혜영 배우를 상대역으로 만난 소감은 어떤가요.
이혜영이라는 배우는 한국 영화계에서 보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해요. 저에게는 경외감이 드는 배우죠. 그런 선생님과 꽤 깊고 길게 함께 연기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과 저의 케미스트리가 좋을까’에 대한 걱정은 조금 있었어요. 투우와 조각이 함께 화면에 나올 때 미묘한 에너지가 흘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두 캐릭터의 부딪히는 기운이 섹시하게 표현됐으면 하는 바람이었죠. 촬영할 때 느낌은 굉장히 좋았습니다.
이혜영 배우와 액션 합은 어땠나요.
안젤리나 졸리 같은 배우라면 액션 연기를 많이 했으니까 보는 사람 입장에서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한데, 선생님의 액션 연기는 본 적도 없었고 정보도 전혀 없었어요. 그래서 어떤 장면이 나올지 굉장히 궁금했어요. 특히나 조각과 투우의 액션 신에서 투우는 다치지 않은 젊은 남성의 몸으로, 조각은 부상이 많은 60대 여성의 몸으로 싸움을 벌이잖아요. 투우가 너무 이기면 안 되는 상황이었지만 어느 정도의 사실성은 필요했죠. 그래서 그 미묘한 정도를 조절하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이혜영 배우가 연기적인 조언은 주지 않던가요.
별다른 연기적 조언은 해주지 않으셨고요. 현장에서는 일상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어요. 현장에 가면 선생님이 항상 “우리 뷰티풀 보이 왔어?”라면서 저를 반겨주셨고요. 저는 선생님께 “오늘도 아름다우십니다”라고 말하면서 인사를 드렸죠. 현장 분위기는 정말 좋았어요. 또 영화를 본 후 선생님께서 제게 “투우 살아 있네!”라고 말씀해주셨고요. 저를 인정하신다고 느껴져 기분이 좋았습니다.

배우 ‘김성철’이 영화 파과에서 미스터리한 킬러 투우로 분했다.
김성철이 설계한 ‘투우’
지금 영화 ‘파과’에 담긴 투우의 모습에는 공감하나요.잘 담겼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표현한 투우는 목표는 있지만 목적은 없는 삶을 살았죠. 어떻게 인생을 살지 고민하기보다 오로지 조각을 찾겠다는 목표 하나로 버티는 사람이에요. 그러다 보니 주변도 둘러보지 못하고 살인에 대해 죄책감도 크게 안 느꼈을 것 같아요. 조각을 만나기까지의 시간을 그저 합리화할 것 같다는 생각으로 캐릭터를 쌓아나갔습니다.
강선생을 향한 투우의 감정은 질투에 가까운 건가요.
단순한 질투는 아닌 것 같아요. 투우가 조각과 25년 만에 마주했을 때 ‘못 알아보면 어떡해?’라는 걱정을 했잖아요. 그리고 실제로 조각은 투우를 알아보지 못하죠. 그래서 투우는 조각을 ‘남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 사람’이라고 정의 내렸어요. 그런데 조각이 강선생한테는 정을 주는 모습을 보이니 도대체 강선생이 어떤 사람인가 궁금한 거죠. 알고 보니 투우 기준에는 강선생이 너무 재미없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강선생 같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한테 관심을 가져주고 나는 알아보지도 못한다고?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지?’ 이런 자기 회한에 가까운 감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투우는 25년 동안 무엇을 하면서 살았을까요.
제가 감독님과 함께 논의할 때는 여러 가지 버전이 있었는데요. 저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투우가 정신병원에 3, 4년을 갇혀 있다가 탈출하고 다른 가정에 입양돼요. 그 가정과 트러블이 생겨 가족들을 다 죽인 후 미국으로 건너가 네이비 실에서 용병 생활을 하다가 한국에 돌아온 거죠. 이런 설정이 조각을 찾는 일에 미쳐버린 투우 캐릭터에 적합하다고 생각했어요.
마지막 롱테이크 액션 신이 정말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사실 현장에서 가장 힘들었던 건 더위였어요. 그때가 한여름이 시작되는 시기여서 정말 더웠거든요. 당시 입었던 바람막이 옷이 살에 다 달라붙고, 피칠도 해야 하니까 너무 끈적끈적하더라고요. 그리고 현장에 아역 배우도 있고 선생님도 많이 지쳐 계셔서 제가 열심히 케어했습니다(웃음).
‘파과’는 감정이 많이 묻어나는 액션물인데요. 감정 연기와 액션 연기 가운데 어떤 연기가 더 힘든가요.
어떤 연기가 더 힘들다기보다는 힘든 부분이 다르죠. 감정 연기는 집중이 흐트러질 때 힘들어요. 저의 재능은 ‘잘 믿는다’는 것이에요. 사실 대본은 다 꾸며낸 이야기, 일종의 거짓말이잖아요. 그런 대본을 저는 잘 믿을 수가 있거든요. 가끔 그게 잘 안될 때가 있습니다. 그럼 집중력이 깨지는 거죠. 그리고 너무 오랫동안 감정 신을 찍을 때도 집중력이 깨지곤 해요. 제 안의 감정이 다 소진돼서 밖으로 표출될 것이 없기 때문이죠. 액션 신은 혹여라도 상대가 다칠까 봐 걱정되는 것이 가장 힘들죠.
이번 액션 신에서도 그런 걱정을 했겠어요.
특히나 제가 아역 배우 귀에 칼을 들이대는 장면에서 그랬죠. 솔직히 아이가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래서 아역 배우한테 칼을 만져보게 해서 안전하다는 것을 직접 확인시켰어요. 그 친구가 너무 덥다고 하면 스태프에게 “빨리 얼음 팩을 가져다 달라” 요청하기도 하고요.
뮤지컬, 연극, 영화, 드라마 등 다양한 장르를 소화하고 있어요. 장르마다 장단점이 있다면요.
각자 다른 매력이 있어요. 뮤지컬, 공연은 3시간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작품을 쭉 이어나갈 수 있고 무대 위에서 에너지를 마음껏 분출할 수 있죠. 또 관객들의 반응을 즉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고요. 시리즈 같은 경우에는 5개월~1년 동안 촬영하면서 팀원들과 가족처럼 지내기도 하고요. 천천히 스토리가 풀려나가는 것을 기다리는 재미가 있어요.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스토리를 다 아는 상태에서 연기하니까, 끝을 생각하면서 점차 캐릭터를 빌드 업하는 과정이 흥미롭습니다. 또 감독님과 제가 좀 더 조율할 시간적 여유가 있어요. 스태프의 다양한 의견을 듣고 새로운 시도도 해볼 수 있고요.
어떤 기준으로 작품을 선택하나요.
첫 번째는 제가 재미를 느낄 수 있는 대본이어야 하고요. 두 번째는 팀원이에요. 같이 연기할 동료 배우들, 스태프와의 조합을 봐요. 그리고 저는 기본적으로 저와 같이 일하는 분들의 마음을 믿어요. 분명 저의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드셔서 캐스팅하셨을 것이란 말이죠. 나를 이렇게 믿고 좋아해준다면 촬영할 때 그분들과 많은 소통을 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재미있는 작업이 될 것이라는 신뢰감이 생기는 거죠.

‘지킬 앤 하이드’ 공연 20주년을 맞아 ‘뉴 지킬’로 참여했는데요. 저는 항상 신선한 것을 추구하는 편인데, 20년간 공연했던 ‘지킬 앤 하이드’를 새롭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있었어요. 그런데 관객분들이 신선하게 봐주신 거 같아서 만족스럽습니다. 그리고 뮤지컬을 하면 에너지를 정말 많이 분출하거든요. ‘지킬 앤 하이드’는 공연을 끝마칠 때 탈진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요. 정말 개운하고 좋았습니다.
차기작에서는 어떤 모습을 볼 수 있을까요.
이번 작품에서 ‘야산에 버려진 늑대’ 이미지를 상상하면서 투우를 연기했다면, 다음 작품에서는 색다른 밝은 얼굴을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결핍이 있는 캐릭터를 연기할 때 매력을 뿜어내는데요.
제가 확실히 결핍이 있는 캐릭터를 좋아해요. 결핍 있게 자라진 않았지만, 선천적으로 화가 많고 감정도 풍부한 편이거든요. 내 안의 울분과 화를 분출하는 것이 좋아서 연기도 시작했고요. 그래서 결핍 있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이 재미있어요. 보통 사람들의 감정선보다 더 깊거든요. 마치 하수구에서 흘러나오는 검정 물 위를 혼자 걷는 기분이랄까요. 하지만 이제는 이미지 변신을 위해서 좀 더 환한 역할에도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파과 #투우 #김성철 #여성동아
사진제공 NEW 수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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