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4월 BNP 파리바 오픈 결승전에 똑같은 나이키 유니폼을 입고 출전한 잭 드레이퍼(위)와 홀거 루네.
전 세계 테니스 팬들은 지난 3월 16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인디언웰스에서 열린 ‘BNP 파리바 오픈’ 남자 결승전을 관람하기 위해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야만 했다. 결승에 올라온 덴마크의 홀거 루네와 영국 선수 잭 드레이퍼가 똑같은 디자인, 똑같은 컬러의 경기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선수는 190cm에 가까운 키를 비롯해 신체 조건도 비슷한 데다 모자를 뒤집어쓰는 습관까지 똑같아 TV 중계 화면으로는 누가 누군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나마 다른 것이라곤 반바지와 운동화 색깔 정도. 빨간색 운동화는 잭 드레이퍼, 흰색 운동화는 홀거 루네로 간신히 구별할 수 있었지만, 선수 확인에 급급해 경기에 제대로 몰입할 수 없었다. 이에 앞서 지난 1월 시드니에서 열린 ‘2025 호주 오픈’ 여자 결승전에서도 벨라루스 출신 아리나 사발렌카와 미국의 매디슨 키스가 동일한 스타일의 나이키 원피스를 입고 경기를 치렀다. 다만 이들은 각각 옐로와 그린으로 컬러를 차별화한 덕분에 멀리서도 식별이 가능했다. BNP 파리바 오픈에 비하면 호주 오픈은 양반이었던 셈이다.
호주 오픈 여자 결승전에서도 ‘유니폼 도플갱어’ 논란
잭 드레이퍼와 홀거 루네는 각각 프로에 데뷔한 2018년과 2020년 이래 줄곧 나이키로부터 의상 후원을 받아왔다. 이번 BNP 파리바 오픈에서 두 선수가 선택한 유니폼은 네이비와 블루, 스카이블루, 화이트 컬러가 조합된 나이키의 이번 시즌 신상이다. 앞서 4강전에서 잭 드레이퍼와 맞붙은 스페인의 카를로스 알카라스도 이들과 똑같은 디자인의 셔츠를 입었지만, 알카라스는 레드 계열로 컬러가 달랐던 덕분에 그마나 구별이 가능했다.BNP 파리바 오픈 결승 우승컵은 영국의 잭 드레이퍼에게 돌아갔다. 결승에 오른 두 선수 모두 나이키를 입었으니 홍보 효과도 2배 이상이 됐을까. 팬들의 반응을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만은 않다. “세상에 쓸모없는 경기복”이라든가, “경기 내내 선수를 확인하느라 애먹었다”는 등의 부정적인 반응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홀거 루네와 잭 드레이퍼가 ‘유니폼 도플갱어’가 된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란 점이다. 나이키의 후원을 받는 두 선수는 지난 1월 호주 오픈에서도 화이트 반팔 셔츠에 스트라이프 무늬가 들어간 반바지까지 완전히 똑같은 옷차림으로 경기에 나선 바 있다.


지난 1월 호주 오픈 결승전에서 메디슨 키스(아래쪽)와 이리나 사발렌카도 같은 디자인에 색깔만 다른 나이키 유니폼을 입었다.
경기복의 개성을 살리기 위해 일부 선수들은 직접 테니스복을 제작하기도 한다. 그랜드슬램 대회에서 총 36회 우승한 세레나 윌리엄스는 발레복, 정장, 레깅스 등 다양한 스타일의 테니스복을 제작해 입었고, 비너스 윌리엄스도 파격에 가까운 스타일로 관중에게 보는 재미를 선사했다. 러시아 출신의 아나스타샤 파블류첸코바는 지난 1월 호주 오픈에서 브이 네크라인에 사이드 슬릿이 있는 라벤더 컬러 원피스 스타일 경기복을 직접 제작해 입었다. 옐로 컬러 라인 포인트에, 선바이저와 손목 밴드를 옐로로 통일해 트렌디하면서도 개성이 넘친다는 평을 얻었다. 일본 선수 오사카 나오미는 출산 후 첫 복귀 무대인 지난해 US 오픈에서 짧은 캉캉 치마 스타일에 커다란 리본이 달린 재킷을 매치해 눈길을 끌었다. 그녀는 “좋아하는 스타일의 의상을 입으면 경기에서 편안함과 자신감을 갖게 된다”고 독특한 의상을 준비한 배경을 밝혔다. 나이키우먼과 앰부시를 이끌고 있는 한국계 디자이너 윤안이 협업해 제작한 이 의상에 대해 “양배추 같다”는 혹평도 있었지만, 테니스 코트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신선한 시도에 박수를 보내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직접 디자인한 경기복을 입은 오사카 나오미.
테니스복 규정 개정 필요성도 제기돼
다른 스포츠에 비해 테니스 선수들의 경기복이 유난히 겹치는 경우가 많은 이유는 나이키가 광범위한 선수와 의상 협찬 스폰서십을 맺고 있어서다. 로저 페더러가 투자한 스포츠 브랜드 온(ON)의 경우 이가 시비옹테크, 벤 쉘튼, 주앙 폰세카 등 극소수의 선수만 후원한다. 반면 나이키는 야닉 시너, 카를로스 알카라스, 홀거 루네, 잭 드레이퍼, 세바스찬 코르다(이상 남성), 아리나 사발렌카, 매디슨 키스, 젱 친웬, 오사카 나오미, 파울라 바도사, 안나 칼린스카야, 미라 안드레예바, 빅토리아 아자렌카, 알렉스 이알라(이상 여성) 등의 의상을 후원하고 있다.테니스에 의상 컬러와 관련된 별도의 규정이 없는 것도 이유다. 탁구에선 관중이 쉽게 구별할 수 있도록 양 팀 선수들이 서로 다른 컬러의 셔츠를 입어야 한다. 양 팀이 비슷한 셔츠를 갖고 있고, 어느 팀이 의상을 바꿀지 합의할 수 없다면 추첨을 통해 결정한다. 스쿼시에서도 선수들이 서로 다른 컬러의 의상을 입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다만 두 선수가 비슷한 의상을 고집한다면, 더 높은 시드를 받은 선수에게 선택권이 주어진다. 세계배드민턴연맹도 대회에서 맞붙는 선수들의 의상 컬러가 겹칠 경우 랭킹이 낮은 팀이 ‘확연히 다른 컬러(significantly different coloured clothing)’로 바꿔 입어야 한다는 규정을 두고 있다. 하지만 테니스에는 윔블던 대회의 ‘올 화이트’와 같은 드레스 코드는 있지만 컬러 겹치기를 막는 규정이 없다. 때문에 BNP 파리바 오픈을 계기로 일각에선 이참에 경기복 컬러와 관련된 규칙 개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잭드레이퍼 #홀거루네 #테니스 #여성동아
사진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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