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상우, 최지우, 신현준, 김태희 등 네 젊은이의 사랑과 야망을 그린 SBS 드라마 ‘천국의 계단’에서 권상우의 어머니인 민회장을 연기하고 있는 연극배우 김지숙. 그에게 이번 드라마 출연은 꽤 오랜만의 방송 나들이다.
“96년 드라마 ‘연어가 돌아올 때’ 출연 이후 8년 만이네요. 그동안 연극에만 전념했어요. 몇 년 동안 연극 ‘지젤’을 들고 전국 고등학교 순회공연을 했고, 이후 ‘버자이너 모놀로그’와 ‘두 여자’ 무대에 연달아 섰죠. 앙코르 공연까지 하고 나니 무척 힘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지난해엔 나름대로 안식년을 선언하고 정말 푹 쉬었어요.”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해부터 성균관대 연기과 겸임 교수로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여름방학을 이용해 함께 유럽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성대 대학원생들과 한달 동안 프랑스, 체코, 영국, 독일, 벨기에 등 8개 나라를 돌았어요. 하루에 두세 편씩 약 40편의 연극을 봤죠. 돈도 아끼고 또 그들의 문화를 제대로 알고자 하는 마음으로 배낭여행을 했는데 지하철역에서 노숙한 것, 비 맞아가며 걸어서 이동한 것 등이 기억나네요. 학생들과 스무살 정도 나이 차이가 났지만 그래도 제가 가장 ‘짱짱하게’ 버텼어요.”
조연으로 출연하니 대사 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
근 1년 동안 연기를 쉬다 보니 서서히 몸이 근질거리기 시작할 무렵, 마침 방송국에서 연락이 왔다.
“그동안은 감독과의 인연이나 드라마 내용을 보고 방송출연을 결정했어요. 그러다 보니 방송엔 좀 뜸했죠. 하지만 이제부터는 TV에 자주 얼굴을 비칠 계획이에요. 연극무대와 방송의 거리도 좁혀졌고, 또 강단에서 학생들에게 연기를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TV연기를 체험해보지 않을 수 없잖아요.”
지난 77년 현대극단에 입단한 이후 20년이 훨씬 넘게 연극무대를 지켜온 베테랑 배우. 그러나 오랜만에 방송 카메라 앞에 서니 신인 연기자처럼 떨린다고 한다.
“연극무대와 방송은 많이 다른 것 같아요. 같은 공연을 해도 매회 다른 감정이 실리는 것이 연극무대라면 방송은 좀 획일적이죠. 독립운동 연기를 하던 사람이 카메라에 의해 만들어지는 연기를 하려니 좀 갑갑하긴 해요(웃음).”
가장 어색한 것이 발성. 관객석에 쩌렁쩌렁 울리도록 큰 목소리와 똑 부러지는 발음을 가진 연극배우들과 달리 TV 연기자들은 마이크 덕분인지 소근대더라고. 실제로 드라마를 보다보면 정확한 발음의 그가 오히려 어색해 보이기도 한다.
아들 역으로 출연중인 권상우가 혀 짧은 소리를 내는 탓에 네티즌들의 공격을 받고 있을 때 그가 권상우에게 “그게 너의 매력이니까 발음에 구애받지 말고 연기해라. 넌 여전히 멋있다”고 한 충고는 방송가에 화제가 되기도 했다.
대학로엔 찬바람이 쌩쌩 불었지만 그는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하늘거리는 얇은 원피스도 마다하지 않았다.
“배우는 ‘잘한다, 잘한다’ 북돋워주어야 자기가 가진 실력 이상의 것이 나온다고 생각해요. 또 열심히 연습만 하면 발음은 정확해질 수 있고요. 그 친구가 의기소침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그 멋진 미소로 ‘씩’ 웃더군요.”
모노드라마 ‘지젤’에선 두 시간 남짓 혼자 관객을 웃기고 울리며 ‘1인극’의 진수를 보여주었던 김지숙. 무대에서 늘 주인공 역할만 하던 그에게 남녀 주인공의 연적도 아닌, ‘주인공의 어머니’라는 배역은 불만스럽지 않을까?
“사실 대사를 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하고 가끔 몸도 뒤틀려요. 하지만 배우마다 다 자신의 역할이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방송은 초보잖아요. 그럼 초보답게 배워야죠. ‘난 신인 탤런트다’ 하는 각오로 촬영하고 있어요. 그들처럼 신인상, 방송 연기대상도 꿈꾸고요(웃음).”
20대가 부럽지 않은 날씬한 몸매, 깨끗하고 탄력 있는 피부를 가진 그는 도무지 나이를 가늠할 수 없다. 그는 그것을 ‘배우로서 지켜야 할 자세’라고 말했다.
“나이는 묻지 마세요. 전 스물아홉 이후 나이를 잊어버렸으니까(웃음). 배우는 관객에게 자신을 노출시키는 사람이죠. 그렇기 때문에 늘 긴장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연기뿐만 아니라 얼굴과 몸도 관리해야죠. 저는 달리기를 열심히 해요. 또 오후 6시 이후엔 먹는 것을 삼가는 편이죠.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스트레스를 어떻게 푸느냐에 달린 것 같아요. 전 ‘꽁’ 하는 성격이 못되거든요. 기쁨이든 분노든, 또 슬픔이든 바로바로 풀어버리는 타입인데 그것이 자기 관리에 가장 효과적인 것 같아요.”
아직도 ‘내 님’ 기다리는 소녀 같은 배우
사람들은 마흔이 넘은 나이의 그에게 여전히 결혼에 관한 질문을 많이 던진다고 한다. “왜 결혼을 안 하느냐?” “현재 사귀는 사람은 없느냐?” “혹시 눈이 너무 높은 것 아니냐?” 하는 질문들이 그것. 그는 남자친구는 많지만 특별한 관계에 있는 사람은 없다고 털어놓았다.
“글쎄요. 아직 연이 안 닿았다고 할까요. 그동안 쉼 없이 무대에 오르느라 사람 만날 기회를 많이 놓친 것 같아요. 그래서 오랜 친구들에게도 ‘널 잘 모르겠어’ 하는 소리를 들어요. 아무리 바빠도 다 제 짝을 찾아가는 법인데 전 아직 때가 아닌가 봐요. 하지만 결혼을 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어요. 어느 날 거리에서 ‘번쩍’ 하며 ‘내 님’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죠.”
오랜 세월 동안 혼자 지냈는데 외롭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우문현답’을 해준다.
“대학 때 연극하겠다고 가출한 이후 지금까지 혼자 살아서 이젠 많이 덤덤해졌지만 여전히 외로워요. 하지만 외로움은 인간의 본질인 것 같아요. 결혼을 했다고 외롭지 않나요? 다만 기댈 곳이 있는 거죠. 전 함께 무대에 오르는 동료 배우들에게 많이 기댄 것 같아요.”
연극이 고향임을 잊지 않겠지만 그는 방송과 영화 등에도 자주 출연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젠 연기를 즐기고 싶기 때문이라고.
영화 ‘조용한 가족’ ‘반칙왕’에 이어 지난해 ‘장화, 홍련’으로 관객 3백만명을 동원한 영화감독 김지운이 그의 동생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 한때는 ‘김지숙과 그의 동생’으로 불렸던 두 사람은 지난해를 기점으로 ‘김지운과 그의 누나’로 관계가 역전됐다. 김지운 감독이 거둔 잇따른 성공 때문.
“저로서는 무척이나 기쁜 일이죠. 동생이 무명시절 제 밑에서 심부름을 하며 고생을 많이 했는데 이제 그 결실을 보는 것 같아 고마워요. 누나가 아닌, 가까이서 지켜본 한 사람으로서 참 재능 있는 감독이라고 생각해요.”
방송 드라마에 뜻을 두니 길이 열렸다. 올해 최고의 드라마로 기대되는 SBS 대하드라마 ‘토지’에 이미 출연이 확정됐고, 두세 편의 드라마 출연이 논의되고 있다고. 연극도 두 작품을 무대에 올린다는 계획이다.
“지난 겨울 제 평생 처음으로 연예기획사에 소속됐어요. 수십년 연극을 해온 배우로서 일종의 ‘외도’라고 할까요. 이왕에 승부수를 던졌으니 불륜이 아닌 로맨스가 돼야겠죠. 물론 제 삶의 뿌리는 연극무대예요. 하지만 가끔 로맨스도 즐기고 싶어요.”
그동안 연극무대에만 자신을 가두어두었다고 말하는 배우 김지숙. 그가 펼칠 로맨스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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