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에 앉자마자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낸다. 11월8일 서울 힐튼호텔에서 동갑내기 사업가와 결혼하는 정경순(41)은 얼굴에 화색까지 돌았다. 이제야 내 짝을 만났다는 느낌, 행복해 죽겠다는 표정이다. 말하다 말고 고개를 뒤로 젖히며 까르르 웃음을 터트린다. 하긴 여자 나이 마흔한살에 결혼하기가 어디 그리 쉬운가.
“저는 독신주의자가 아니었어요. 30대 중반까지만 해도 일하는 데 바빠서 결혼에 대한 생각이 별로 없었던 거지, 결혼을 안하겠다는 주의는 아니었죠. 그러다 서른여섯살인가, 서른일곱살이 됐을 때부터 결혼이 하고 싶어졌어요. 첫조카가 태어나면서 나도 아이를 낳고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하지만 그런 그의 심리상태를 눈치채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혼자서도 늘 씩씩하게 살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독신주의자로 오해했고 그와 결혼은 ‘별개’라고 생각했다.
때로는 그게 섭섭할 때도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자기의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아서 속상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결혼은 하고 싶었지만 목을 맬 만큼 간절히 원했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나면 결혼하고 아니면 혼자 살지, 뭐…!’하는 주의였다고 할까.
“그동안 선도 많이 보고 소개도 많이 받았어요. 하지만 마음에 드는 남자는 별로 없었어요. 내가 눈이 높아서가 아니라, 여자는 나이가 들면 남자를 보는 기준이 높아져요. 아마 결혼한 친구들이 사는 모습도 많이 보고, 주변에서 듣는 얘기도 많아서 그럴 거예요. 더구나 20대였을 때하고는 달리 남자에 대한 환상이 없어지니까 만나도 이성으로 보이지 않고 다 친구가 돼버리는 거예요.”
‘친구 같은’ 편안함에 매력을 느껴
정경순의 마음을 사로잡은 유일한 단 한사람, 이건만씨와 함께 찍은 사진.
그런데 오직 한 남자, 그의 피앙세만은 안 그랬다. 그와 동갑내기인 이건만씨(41)는 3남1녀 중 장남으로 현재 문화상품 관련 기업을 운영하면서 홍익대 미술대 섬유미술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는데 처음 만난 것은 지난 5월께. 평소 친하게 지내는 교수들과 함께 모인 자리에서였다고 한다. 첫인상은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얘기를 나눠보니까 유머러스하고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고 털어놓는다.
이건만씨도 그랬던 모양이다. 그는 워낙 털털하고 화통해서 남자들 앞에서도 ‘내숭’이란 걸 떨지 못한다. 그날도 평소의 스타일대로 깔깔거리고 웃고 농담도 하고 그랬는데, 그게 오히려 매력적으로 보였는지 다음날 이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만나자고.
“20대 같았으면 ‘저 바빠요’하고 튕겼을 텐데, 나이가 드니까 이젠 튕기지도 않게 되요. 어른들 말처럼 ‘그래, 사람을 한번 보고 어떻게 알아. 최소한 두세 번은 봐야 알지…’라는 생각이 들어서 다음날 만나기로 약속을 했어요.”
그런데 첫인상하고는 달리 그는 만나면 만날수록 ‘한결같은’ 남자였다. 그런 점에 마음이 끌렸다고 한다. 그가 갖고 있는 조건이나 경제적인 능력보다도 그의 한결같음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럴 때마다 느껴지는 것이 이 사람하고는 왠지 오래갈 것 같은 느낌… 이런 걸 보고 인연이라고 하는 걸까.
“우리는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서 만났잖아요. 그래서 더 좋은 것 같아요. 인생의 안정된 시기에 만나니까 서로 더 배려하게 되고 이해를 많이 해주게 되잖아요. 우리도 물론 가끔씩 싸우기도 하죠. 그럴 때마다 주로 제가 많이 참는데 겉으로는 참으면서도 속으로는 ‘그래, 결혼한 후에 두고보자’ 하고 별러요(웃음). 하지만 연애할 때 많이 싸우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자기 훈련이 되잖아요. 저는 원래 뒤끝이 없는 성격이라서 그 사람하고 싸우다가도 금세 화해를 하는데 결혼을 해서도 그렇게 살려고 해요.”
“나이 들어서 남자를 만나니까 더 좋은 것 같아요. 서로 더 배려하게 되고 이해해주니까요.”
두 사람은 만난 지 한달 만에 강원도로 1박2일 여행을 다녀왔다. 프러포즈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데이트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가령, 이런 식이다.
길을 가다가 근사한 집을 발견하면 그가 뜬금없이 “우리도 나중에 저런 집에서 살면 좋겠다. 자기는 내 차를 가져. 난 저 집을 살께” 하고 말했다. 그 말에 “그럼, 우리 같이 사는 거야” 하고 정경순이 물으면 “그래, 우리 같이 살면 좋겠다”고 대답하는 식이었다.
그야말로 맹숭맹숭한 프러포즈가 아닐 수 없는데,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그들 나이에 어울리는 프러포즈였던 것 같기도 하다. 만약 두 사람이 20대들처럼 깜짝 이벤트를 만들어서 프러포즈를 했다면 그것도 좀 ‘닭살’이지 않았을까.
아이는 생기는 대로 낳을 계획
“우리는 비슷한 구석이 많아요. 성격도 똑같이 급하고 가치관도 같고 그 사람도 미술을 전공해서인지 감성적인 부분에서 저하고 잘 맞아요.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좀 예민하고 민감하잖아요.”
하지만 물론 다른 점도 있다. 정경순보다 그가 더 보수적이라고 하는데 같이 TV를 보더라도 극중에서 결혼한 여자주인공이 바람 피우는 장면이 나오면 그는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펄쩍펄쩍 뛴다.
그럴 때마다 정경순이 “여자도 바람 피울 수도 있지…” 하고 한마디라도 하면 거기서부터 티격태격 싸움이 시작된다. “내 여자는 절대로 다른 남자에게 한눈을 팔아서는 안된다”는 게 이씨의 주장이기 때문이다.
그 말 끝에 정경순이 “한국남자 치고 보수적이지 않은 남자가 어디 있겠어요. 다 보수적이죠” 하며 이해한다는 식으로 웃었다.
“부부의 인연이란 참 묘한 것 같아요. 제가 그 사람하고 이렇게 빨리 결혼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사실 말을 안해서 그렇지, 그 사람과 결혼하기로 마음먹기까지 마음의 갈등도 약간 있었어요. 장남인데 결혼하면 아이를 낳아야 하잖아요. 아무래도 제가 나이가 많으니까 그게 좀 부담스러운데 다행히 요즘은 의학이 발달해서 마흔살이 넘은 여성들도 아이를 낳는 건 노산도 아니래요. 아이는 생기는 대로 낳을 생각인데… 열심히 노력해야겠죠.”
정경순은 나이 들어서 결혼하는 것에 대한 후회는 없지만 ‘결혼식날 나이든 신부 친구들을 보고 하객들이 뭐라고 할까…’ 하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신부는 화사한데(?) 그 친구들은 중년의 아줌마들이니 말이다. 그의 친구들 중에는 일찍 결혼해서 벌써 자녀가 대학교 1학년인 친구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케만큼은 나이 어린 후배에게 줄 생각이라며 정경순은 또 “하하하” 웃었다.
“저는 만약 올해에도 결혼을 안하게 되면 내년쯤 미국으로 유학을 가려고 했어요. 거기서 1, 2년 정도 영화 공부를 하고 오려고 했는데 이번에 결혼을 하게 되면서 그 계획을 취소시켰죠. 결혼하면 가정에 충실해야 되잖아요. 배우생활을 하면서 살림을 하려면 얼마나 바쁘겠어요.”
벌써부터 각오가 대단하다. 정경순은 결혼하기 전에 요리학원에 다녀서 남편에게 맛있는 요리도 해주고 싶다고 한다. 그 말 끝에 혼잣말처럼 “아침밥도 해줘야지…” 하고 말하는 모습이 몹시 귀여웠다. 마흔한살의 나이에 사랑하는 이를 만나 결혼식을 앞두고 있는 정경순, 요즘 그의 하루하루는 결혼에 대한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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