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볼 수만 있다면 철없던 나의 모습이 얼만큼 의미가 될 수 있는지…, 많은 날이 지나고 나의 마음 지쳐갈 때 내 마음속으로 스러져가는 너의 기억이 다시 찾아와 생각이 나겠지’(‘기억의 습작’ 중)
영화 ‘건축학 개론’이 끝난 후 관객들이 금방 자리를 뜨지 못했던 건, 엔딩 크레디트와 함께 흘러나오는 김동률의 노래 ‘기억의 습작’, 그리고 저마다 하나씩 안고 살아왔을 첫사랑의 기억 때문이었을 것이다. 남자끼리 왔던 관객들은 슬그머니 술집으로 발을 돌렸고, 커플들은 살짝 서먹해하며 극장 문을 나섰다.
오해와 서투름으로 어긋났던 그 시절 우리의 사랑
개봉 20 여 일 만에 3백만 명, 잔잔한 멜로 영화치고는 꽤 좋은 성적이다. 메가폰을 잡은 이용주(42) 감독은 연세대 건축학과 90학번으로, 졸업 후 몇 년간 건축사무소에서 일하다가 뒤늦게 영화판에 뛰어들었다. ‘건축학 개론’은 그가 ‘살인의 추억’ 연출부를 마친 2003년 입봉작으로 준비했던 작품으로 거의 10년 만에 빛을 보게 됐다.
영화는 건축사무소에서 일하는 승민 앞에 15년 전 대학 친구 서연이 집을 지어 달라며 나타나면서 시작된다. 승민의 일방적인 오해로 멀어진 두 사람은 제주도에 함께 집을 지으며 퍼즐처럼 기억의 조각을 맞춰나간다. 풋풋함과 서투름, 사소한 오해로 인한 어긋남, 하지만 돌아보면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그 시절…, 영화는 첫사랑에 대한 오마주 같다. 건축과 영화에 두루 발을 걸치고 있는, 섬세해 보이는 외모의 이용주 감독을 만나니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 영화를 보는 내내 자신의 첫사랑을 떠올렸다는 사람이 많다.
“이 영화를 첫사랑에 대한 반성문이란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극 중 승민이 서연에게 ‘꺼져줄래’라고 말하는 장면(선배가 술 취한 서연을 집에 데려다주는 모습을 본 후)이 있다. 서연은 잘못한 게 없는데 승민이 혼자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고 자신이 상처받을 게 두려워서 상대에게 생채기를 내고 도망가는 거다. 그래놓고 서연을 ‘쌍년’이라고 한다. 사실은 승민이 ‘쌍놈’이다, 비겁했으니까.”
▼ 시나리오를 직접 썼는데, 혹시 감독의 경험담 아닌가.
“아니다(웃음). 직접 겪지 않더라도 보편성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게 우리 직업 아닌가. 하지만 나 역시 첫사랑, 짝사랑을 해봤으니 영화 어딘가에 그런 기억이 뭉쳐져 있을 거다. 젊은 날 그런 기억 하나쯤은 다 있지 않나. 소개팅에서 이성을 만났는데 자기 스타일이 아니면 ‘애프터’를 하지 않는다. 아주 드물게 여자 쪽에서 먼저 연락을 해오는 경우가 있다. 그럼 바쁘다고 그냥 끊어버린다. 지금 생각하면 그 친구가 전화하기까지 많은 용기가 필요했을 텐데, 그걸 무시한 게 미안하고 창피하다. 그땐 서투름이 누군가에게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몰랐다.
내 경험이 반영된 부분은 어머니와 관련된 장면들이다. 우리 어머니가 항상 냉장고에 음식들을 버리지 않고 쌓아두셨다. 냉동실에는 3~4년 지난 고기도 있었다(웃음). 짜증을 내면 ‘네가 왜 그런 것까지 간섭하느냐’고 오히려 화를 내신다. 그게 싫어서 냉장고를 하나 새로 사드렸는데, 그것도 금방 차더라(웃음).”
▼ 그 장면에서 뜨끔해하는 주부들이 많았다.
“우리 어머니는 시장에서 평생 이불 장사를 하셨기 때문에 살림할 시간도 없었고, 옛날 분들이 다 그렇듯 물건을 잘 못 버리신다. 순댓국집을 하는 승민 엄마가 하루 2만원밖에 못 팔았다고 속상해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것도 우리 어머니 이야기다. 작년에 시장이 재개발되면서 장사를 그만두셨다. 마지막 날 가서 사진을 찍어드렸는데 마음이 짠하더라.”
▼ 보통은 남자들이 첫사랑을 잊지 못한다고 하지 않나. 그런데 영화에서는 서연이 승민을 찾아간다. 게다가 첫 장면에서 승민은 서연을 알아보지도 못한다.
“실제 못 알아본 것일 수도 있고, 못 알아보는 척하는 걸 수도 있다(웃음). 엄태웅 씨한테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딱 중간으로 해석될 수 있게끔 연기해달라고 했다. 영화에 전체적으로 여지를 많이 남겼다. 승민과 서연이 키스한 다음 어떻게 됐는지, 재욱과 서연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등등. 두 사람 사이에 실제 어떤 일이 있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무슨 일이 있었을까, 없었을까를 상상하는 과정 자체가 중요하다고 봤다.”
▼ 서연이 돈 많은 이혼녀라는 설정도 재미있다. 그런 첫사랑과 재회하는 건 남자들의 판타지일 수도 있겠다.
“자칫 밋밋해질 수 있는 멜로 영화여서 서연의 설정이 재미있어야 했다. 별의별 생각을 다 했다. 병에 걸려서 돌아오거나 보험 들라고 찾아오는 버전도 있었는데 그건 너무 잔인할 것 같았다. 지금 정도의 설정이 어둡지 않은 선에서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가는 데 딱 적당하다고 봤다.”
건축을 영화적으로 마무리하고 영화에 둥지 틀고 싶었다
‘건축학 개론’은 첫사랑 승민과 서연이 15년 만에 재회해 과거를 더듬어 가는 이야기다. 둘은 함께 집을 지으며 기억의 퍼즐을 맞춰 나간다. 이제훈과 수지가 엄태웅과 한가인의 어린 시절을 연기했다.
이용주 감독은 건축가 출신답게 영화와 건축의 최상의 조합을 보여줬다. 제주도의 아름다운 풍광을 배경으로 한 서연의 집은 관객들의 감성을 자극한다. 승민이 집을 수리하면서 서연의 키를 표시해놓은 벽과 시멘트에 찍힌 발자국 등 옛집의 흔적을 고스란히 남겨놓는다거나, 옛집을 허물지 않고 증축으로 공간을 확장한 점, 지붕에 기와를 살리고 넓어진 부분에 잔디를 심은 점 등은 과거와 현재의 조화로운 공존을 의미하는 듯하다. 승민과 서연을 잇는 중요한 다리인 이 집은 이 감독의 대학 동기인 구승회 크래프트디자인 소장의 작품이다. 시나리오를 쓰던 이 감독이 3~4년 전부터 “영화를 만들면 집은 네가 맡아달라”고 한 게 현실이 됐다고 한다.
▼ 건축가의 길을 포기하고 영화를 시작한 이유가 궁금하다.
“어릴 때부터 건축가가 되고 싶었다. 건축 일을 열심히 했고, 지금도 좋아하지만 건축하는 환경은 불합리하다고 생각한다. 건축사무소에서 일할 때 옆자리 과장님이 나의 3년 뒤 모습, 부장님이 7년 뒤 모습, 소장님이 20년 뒤 모습이라고 생각하니 숨이 막혔다. 열심히 해서 거기까지 가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어느 순간 나침반을 잃어버린 것이다. 건축 일이 겉으로는 낭만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힘든 부분이 많다. 투자하는 노동력에 비해 주어지는 소득이 많지 않다. ‘이럴 바에야 다른 일을 하는 게 낫겠다’ 싶어 사무소에 다니면서 PD 시험을 봤는데 떨어졌다. 1년만 더 준비하면 될 거 같았는데 나이 제한에 걸렸다. 그런데 한 번 마음이 동하니까 걷잡을 수 없게 되더라. 회사를 휴직하고 딱 2년만 해보겠다고 시작한 게 여기까지 왔다. 그 사이 단편영화 한 편과 ‘불신지옥’(2009년)을 찍었다.”
▼ 건축과 영화, 어느 쪽이 더 맞나.
“열악한 환경은 영화 쪽도 마찬가지다. 결국은 취향의 문제인데, 나 같은 수다쟁이에게는 영화가 더 잘 맞는 것 같다. 건축에서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문, 천장, 창문 이런 걸로 표현해야 하는데 그게 나한테는 좀 답답했다(웃음). 그에 반해 영화에서는 하고 싶은 말을 맘껏 할 수 있어서 좋다.”
▼ 영화를 하겠다고 했을 때 집에서 반대하지 않았나.
“물론 반대하셨다. 어머니가 어제(4월 4일) 친척분들과 함께 영화를 보셨는데 굉장히 좋아하셨다. 비로소 효도를 한 느낌이다. 이제 내가 영화를 하는 것에 대해 ‘그만했으면’ 하는 생각은 안 하시는 것 같다. 어머니도 아실 거다. 이거 안 하면 다른 일도 못한다는 것을(웃음).”
▼ 건축과 영화가 이렇게 잘 어울릴 줄 몰랐다. 어떻게 건축 이야기를 영화에 녹여낼 생각을 했나.
“내가 잘 아는 분야고, 열심히 했기 때문에 애정이 있다. 처음 영화판에 들어왔을 때 영화를 전공하고 나보다 어린 나이에 ‘입봉’한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나는 마치 이방인 같았다. 건축인 이용주를 지우고 영화인 이용주로 거듭나야 한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건축을 털고 영화 안에서 집을 지어야겠다, 건축을 영화적으로 마무리하고 싶다 그런 고민 끝에 탄생한 영화다.”
▼ 서연의 집이 영화의 큰 축으로 등장한다. 그 집에 무엇을 담으려고 했나.
“인물을 공간에 대입하려고 했다. 낡은 집과 녹슨 대문은 승민 어머니, 고시원은 납득이 이런 식으로. 서연의 집은 서연과 승민의 과거다. 영화를 만들고 그 집을 지으면서 가장 고민했던 부분은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새로 넣을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서연의 옛집을 증축하면서 구 소장에게 요구했던 건 두 가지였다. 서연이 어릴 때 키를 쟀던 외벽이 남아서 내벽화되는 것, 그리고 기와지붕을 살리는 것.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내면화되는 것, 그것이 추억이고 삶이 아닌가.”
▼ 영화가 흥행하면서 서연의 집도 유명해져서 찾는 사람이 많다고 하던데.
“제주도 서귀포 올레길 근처에 있는 집이다. 구 소장과 제주도를 돌며 매물로 나온 집을 찾아다니다가 발견했다. 증축한 부분은 세트여서 곧 허물어질 거다. 제작사인 명필름이 부지를 사들였는데, 신축해서 시나리오 작업실로 쓸 예정이라고 한다.”
▼ 그런 전망 좋은 집에서 한번 살아봤으면 하는 사람들이 많다.
“제주도에 가면 그런 집 많다. 가격도 별로 안 비싸다. 아담한 2층집이 8천만~1억2천만원 정도 된다. 경치도 아름답고, 다 좋은데 밤이 되면 너무 캄캄하다.”
미완성으로 남아서 더 아름다운 첫사랑
건축학도 출신인 이용주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건축을 영화적으로 마무리하고 싶었다고 한다.
집과 사랑이라는 신선한 발상, 탄탄한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의 화룡점정은 캐스팅이다. 이제훈과 수지, 엄태웅과 한가인은 영화의 색깔과 감정의 결을 잘 살린 균형 잡힌 연기를 보여줬다. 이 감독은 “혼자 있어도 빛나는 별들이 함께 서 있으면 어떤 시너지 효과를 불러일으키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이 감독은 캐스팅이 안 돼 난항을 겪던 작품에 출연해준 배우들에게 거듭 고맙다는 말을 했다. 한 편의 아름다운 영화로 필모그래피를 장식한 배우들도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해야 할 것 같다.
▼ 승민과 서연의 스무 살 시절과 서른다섯 살 시절을 각각 다른 배우에게 맡긴 이유는 뭔가.
“연출적인 측면과 현실적인 측면이 있다. 배역을 나누지 않으려면 주인공의 연령대가 낮아져야 하는데, 그런 배우 중에 우리 작품에 출연하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더블 캐스팅은 캐스팅의 폭을 넓혀주고, 돌이킬 수 없는 시절에 대한 느낌을 살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반쪽 주연이라 하겠다는 사람을 찾는 게 쉽지 않았다. 그 와중에 한가인, 엄태웅 씨가 하겠다고 나서준 거다.”
▼ 결과적으로 캐스팅은 성공적이다.
“한가인 씨는 드라마 ‘해를 품은 달’에 앞서 우리 영화를 먼저 찍었다. 가인 씨는 휴식기가 너무 길었던 반면 태웅 씨는 다작이어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이제훈과 수지가 들어오면서 균형이 맞았다.”
▼ 엄태웅 한가인 이제훈 수지 등 네 명의 배우에 대해 평을 하자면.
“한가인과 엄태웅은 힘든 연기였는데 잘 소화해줬다. 이제훈은 감정의 하이라이트를 책임지고 있는 인물이어서 도드라져 보이는 게 있다. 수지는 정말 감동스러울 정도로 열심히 하고, 준비도 많이 했고, 학생처럼 공부하듯 성실히 했다. 좋은 배우의 자질이 있다고 본다.”
▼ 한가인의 경우 ‘해를 품은 달’에서 연기력 논란이 있었는데, 영화에서는 안정적이고 자연스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 작품에서는 처음부터 잘했다(웃음). 성실하고 본인이 준비를 많이 해오는 스타일이어서 현장이 여유가 있을 때 더 좋은 연기가 나오는데 드라마 제작 환경은 그렇지 못하니까 힘들었던 것 같다.”
▼ 특히 이 영화를 봐줬으면 싶은 사람이 있나.
“많은 사람들이 보면 좋겠다(웃음). 영화를 보면서 딴 생각이 좀 들기도 하면서 옆에 있는 사람이 소중하다는 걸 깨달았으면 좋겠다.”
▼ 승민과 서연을 다시 이어주지 않은 건 첫사랑의 완성이 이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가.
“첫사랑이 이뤄지는 게 좋은 건지 아닌 건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승민과 서연을 다시 연결시켜주는 건 ‘돌이킬 수 없는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애초 기획 의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이 다시 이어지면 통속극 아닌가. 둘이 잘되더라도 나중에 다른 일로 또 싸웠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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