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란 단어는 참 묘하다. 듣기만 해도 따뜻해지면서 한편으론 가슴 뭉클해진다. 탤런트 오미연(57) 이 그런 ‘엄마’ 역할로 연극 무대에 섰다. 그는 지난 73년 MBC 공채 탤런트로 데뷔하기 전, 72년 연극배우로 먼저 무대에 섰다. 그런데 79년부터 MBC에서 방송과 연극 병행을 금지했고 그렇게 연극판을 떠났던 그가 31년 만에 ‘엄마, 여행 갈래요?’란 작품으로 무대에 돌아온 것이다.
연극은 자식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만이 삶의 이유요 기쁨이었던 어머니와 뒤늦게 그 어머니의 사랑을 확인하고 안타까워하는 자식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마지막 공연을 하루 앞둔 지난 1월15일, 경기도 일산 한 레스토랑에서 그를 만났다.
“오래 전부터 더 나이 들어 힘이 없어지기 전에 무대에 한번 오르고 싶었어요. 그것도 제가 잘 할 수 있는 역할로요. 대본 보니까 그냥 우리 이웃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엄마 역할이었어요. 바로 제 모습이기도 했죠. 그래서 잘 할 수 있겠다 싶어 선택했어요.”
어려움에 현명하게 대처하는 엄마가 좋은 엄마
그가 맡은 엄마 권순희는 시집간 딸 뒤치다꺼리하고, 아들을 태양처럼 떠받드는 그런 평범한 인물. 관객이나 배우들도 하나같이 “우리 엄마가 저기 있네”라고 이야기한다고.
“연극에 나오는 엄마는 제주도 가는데 여권이 필요하다고 할 만큼 못 배운 엄마예요. 그래도 어려움에 처했을 때 자신만의 삶의 노하우로 자식을 달래고 어를 줄 아는 현명한 엄마죠. 좋은 엄마와 나쁜 엄마는 얼마나 잘나고 못났느냐를 가지고 판단하는 게 아니라, 어려움에 처했을 때 문제를 얼마나 건강하게 잘 헤쳐 나가는지 그 방법의 차이를 가지고 판단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 역시 어려움을 여러 차례 겪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무너지지 않고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엄마’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MBC 드라마 ‘한 지붕 세 가족’으로 한창 인기를 얻던 지난 87년, 그는 예기치 않은 교통사고를 당했다. 당시 셋째를 임신 중이었던 그는 전신에 심한 중상을 입었고, 그 바람에 막내딸은 달수를 채우지 못하고 31주 만에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태어나자마자 뇌에 물이 차는 뇌수종으로 대수술을 받아야 했다. 다행히 수술은 잘 됐지만, 수술 후유증으로 막내딸은 심한 천식에 시달렸다고 한다.
불운은 계속됐다. 집안일을 도와주던 가정부가 갓 돌을 넘긴 막내딸을 납치한 사건이 벌어진 것. 하루 만에 딸을 찾을 수 있었지만, 그 충격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다시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그의 집에 강도가 든 것이다. 현금만 빼앗기고 가족 모두 무사했지만, 강도에게 잡혀 있던 2시간 반 동안의 소름끼쳤던 기억은 좀처럼 잊혀지지 않았다고.
“다행히 큰아들과 둘째 아들은 학교와 유치원에 가고 없었지만, 불행히도 막내딸은 당시 상황을 다 목격했어요. 줄에 꽁꽁 묶인 채 이불을 뒤집어쓰자 딸이 뭐하는 거냐고 묻더라고요. 안 그래도 몸이 약해 늘 조바심을 태우는데, 딸이 놀랄까봐 아저씨들과 술래잡기를 하는 거라고 얘기해줬죠.”
교통사고와 납치사건, 강도사건 등 잇따라 끔찍한 경험을 한 그와 가족들은 더 이상 한국에서 살 자신이 없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고민 끝에 그의 가족은 지난 94년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
캐나다에서는 모든 일이 잘 됐다. 남편 사업도 잘 되고 아이들 셋도 건강하게 잘 자라줬다. 더 이상 불운이 오지 않고 가족 모두 무탈하기만 하면 바랄 것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무언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온전히 주부로만 살다보니 ‘연기자 오미연’은 점점 사라지는 거예요. 점점 무기력해지더라고요. 아내와 엄마 그리고 연기자 사이에서 고민했는데, 그런 저를 가족들이 이해해주고 배려해줬어요. 덕분에 남편과 아이들보다 2년 먼저 귀국해 연기활동을 다시 시작했죠. 지금 생각해도 남편과 아이들에게 고마워요. 특히, 저 없는 2년 동안 아빠 노릇에다 엄마 노릇까지 잘 해줬으니까요.”
그가 귀국하고 2년 뒤인 지난 2004년, 10년 만에 가족들도 모두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2005년 남편과 그는 건강 관련 회사를 차려 사업을 시작했다. 현재 두 아들이 사업을 돕고 있다.
“아이들에게 물건 배달하는 일부터 가르쳤어요. 아버지가 사장이라고 해서 결코 봐주는 법이 없죠. 오히려 제대로 못하면 다른 사원들보다 더 심하게 혼내요. 아직은 부족하지만, 그래도 두 아들이 있어 든든하죠.”
그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평생 애틋하다”고 이야기한다. 연기를 하느라 엄마의 자리를 항상 채워주지 못 했기 때문이다.
“일하면서 아이를 키우는 건 저뿐만 아니라 모든 맞벌이 주부들의 고민이기 때문에 힘들다고 말할 일은 아닌 것 같아요. 그저 아이들이 잘 자라준 게 고마울 따름이죠.”
“아이들에겐 늘 애틋하고 고마운 마음”
연극을 하면서 그는 ‘나는 어떤 엄마인가’에 대해 검토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생각해 보면, 저는 교양 있는 엄마가 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감정이 앞서기 보다는 이성적으로 아이들을 대하려고 노력했죠. 아이들이 속 썩이면 ‘너, 진짜~’ 하고 욱하잖아요. 그래도 꾹 참고 ‘니가 이러면 되겠니~?’ 하고 될 수 있으면 부드럽게 타이르곤 했어요.”
특히, 오랜 외국생활을 한 아이들이 혹시나 간섭을 받는다고 생각할까봐 엇나가지 않는 한 무조건 지켜본 편이라고. 또한 마찰이 생기면 ‘내가 저 나이 때 무엇을 원했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며 아이들 마음을 헤아리려 애썼다고 한다.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말이 있어요. 쭉쭉 뻗은 잘난 소나무들은 모두 베어져 나가고 굽고 못난 소나무들이 남아서 조상의 산소를 지킨다는 말이죠. 저는 아이들이 너무 잘나서 제 곁을 떠나는 것보다 조금 못나도 그냥 제 곁에 있는 것이 좋아요(웃음).”
그는 욕심이 없다고 한다. 자식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공부해라, 출세해라 그런 잔소리를 해본 적이 없다. 대신 인성 교육에 있어서는 철저했다. 아이들에게 재능은 많지만 사랑을 못 받는 사람보다는 재능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사랑 받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다는 것. 그래서 남에게 민폐 끼치지 마라, 거짓말 하지 마라 그런 잔소리는 꽤 많이 했다고. 또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서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처음엔 책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자연스럽게 일주일 동안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게 된다고.
“부모와 자식 사이에 가장 중요한 것은 소통이에요. 소통은 서로 주고받는 것이지 결코 일방적인 것이 아니죠. 예를 들어, 아이에게 무조건 담배 피우지 말라고 명령하는 것보다는 담배 피우는 것이 왜 안 좋은지 충분히 설명부터 해야 하죠. 그리고 아이의 생각도 들어보고 오랜 대화를 통해 아이 스스로 그것이 나쁘다는 것을 깨우쳐줘야 해요.”
부모와 자식 간의 단절이 가장 무서운 것이라고 말하는 그는, 아이들이 화나서 자기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가면 서운하고 화가 난다고 한다.
돌이켜 보면, 아이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도 정작 꼭 해야 할 말을 하지 않았다고 그는 털어놓는다. 바로 ‘사랑한다’는 말이다.
“저는 참 무뚝뚝한 엄마였어요. 이젠 아이들한테 사랑한다는 말도 좀 하고 그러려는데, 그게 쉽지가 않네요. 오늘은 꼭 사랑한다는 말을 해야지 마음을 먹어도 막상 하려면 안 되더라고요. 언젠가는 말할 수 있겠죠? 저의 미션이에요(웃음).”
큰아들은 부모 말에 순종하는 편이고, 둘째 아들은 여리면서도 고집이 센 편이라고 한다. 어릴 때는 병원을 제집처럼 드나들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건강하게 잘 자라준 막내딸은 애교가 많다고. 그는 자식 셋 중에 특히 둘째에게 마음이 많이 간다고 귀띔한다.
“제가 표현하지 않는 편인데, 둘째가 꼭 그래요.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준다고 울고 떼쓰고 표현해야 무어라도 하나 더 얻잖아요. 그런데 둘째는 어려서부터 칭얼대고 우는 법이 없었어요. 지금도 아무리 힘들어도 표현하질 않고 저 혼자 꾹 참아요. 그래서 늘 손해 보는 타입이라, 안쓰럽고 마음이 가죠.”
“엄마는 언제나 짝사랑만 하는 역할”
그는 요즘 고민이 많다고 한다. 올해 5월, 서른 살 된 큰아들이 곧 결혼을 하기 때문이다.
“시어머니로서 어디까지 며느리를 고려해줘야 서로가 불편하지 않을까 고민이 돼요. 이를 테면, 김치를 담가 가져다주는 것도 제 입장에서는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거꾸로 며느리 입장에서 생각하면 힘들어서 쉬고 싶을 때 시어머니가 김치 가지고 왔다 그러면 불편할 수 있잖아요.”
드라마에서 시어머니 역할을 많이 해본 덕분에 며느리를 얻으면 좋은 시어머니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더라고.
그는 솔직히, 아들이 예비며느리에게 잘해주면 ‘어쭈, 나한테는 안 해주더니…’ 하는 생각이 들면서 서운하기도 하고 시샘도 난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 아들이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면 자신은 몇 배로 더 행복하다고 한다. 그는 “엄마란 언제나 짝사랑만 하는 역할인 것 같다”며 웃는다.
또한 그는, 엄마로서의 AS는 끝이 없고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커진다고 덧붙인다.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땐 우유 먹이고 미니카 사주면 그만이었지만, 이제는 진짜 차와 진짜 집을 사줘야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앞으로 아이들이 결혼하면 며느리와 사위, 그리고 손주들까지 AS 범위는 확대된다는 것.
“저희 엄마만 봐도 알 수 있어요. 올해 연세가 여든을 넘기셨음에도 불구하고, 바쁜 딸 대신 살림도 해주시고, 아이들도 챙겨 주시죠. 전 엄마 없는 삶은 꿈도 꿀 수 없어요. 엄마로서의 AS로 치자면 저는 우리 엄마 발바닥도 못 따라갈 거예요.”
연극은 막을 내렸지만 그의 엄마 연기는 끝나지 않는다. MBC 아침드라마 ‘분홍립스틱’에서 또 다른 엄마 연기를 선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보여줄 엄마는 욕심이 아주 많은, 그래서 절대 이웃하고 싶지 않은 모습이라고.
올해로 연기 경력 39년, 엄마 경력 30년 째. 그에게 연기자와 엄마 중 어느 역할이 더 어렵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주저 없이 ‘엄마’ 역할이라고 대답한다.
“연기도 힘들지만, 그래도 연기는 나 혼자 책임지면 되잖아요. 반면 엄마 역할은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잖아요. 가족 전체의 행복이 달려 있는 것이니 만큼 어깨가 무겁죠.”
현실에서의 ‘엄마’ 역할은 힘들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연기자로서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이 ‘엄마’ 역할이라고 한다. 앞으로도 다양한 모습의 ‘엄마’ 역할로 계속 대중들 앞에 서고 싶다는 그의 활약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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