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슷한 역만 맡는 것처럼 비극은 없다. 배우는 새로운 인물을 스스로 창조하는, 매력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내가 할 일은 거의 우주와 같다.”
김정난(38)이 자신의 팬카페에 남긴 글의 일부다. 유명배우도, 무명배우도 아닌 위치에서 18년 동안 배우로 살면서 갑갑한 때도, 속상한 때도 있었지만 뜻하지 않은 기쁨에 감격에 겨워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지난 연말이 그랬다. 드라마 ‘너는 내 운명’으로 연기상을 수상한 것. 신인상 이후 처음이었다.
“3개 방송사 연기대상에 노미네이트된 적도 있지만 늘 결과가 좋지 않았어요. 그러다 보니 저절로 그런 자리에서 발길이 멀어지더라고요. 이번에도 갈까 말까 고민 많이 했어요. 예쁜 드레스 입고 잔뜩 기대하고 갔다가 상 못 타면 창피하잖아요.”
그는 수상소감을 다 이야기하지 못한 게 아쉬운 듯 “떨려서 혼났다. 고맙다는 인사를 다 전하지 못해 마음에 걸린다. 지난해보다 두세 걸음 더 전진하도록 노력하겠다”는 말을 쏟아냈다. 그 어느 때보다 벅찬 하루를 살고 있는 듯했다.
First keyword·운·명
“로또복권 1등 당첨돼도 연기 그만둘 수 없어요”
김정난은 ‘너는 내 운명’에 캐스팅되던 때를 떠올렸다. 그가 맡았던 반소영은 스무 살 딸을 둔 철부지 엄마. 욕심이 났지만 두려웠다고 한다. 결혼도 하지 않은 자신이 맡기에는 무리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겁이 났어요. 막막했죠. 그런데 신기하게도 출연을 결정하고 나니 그런 고민이 싹 사라지더라고요. 실제 엄마여야 엄마 역할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스스로를 격려하면서….”
그는 푼수 같으면서도 사춘기 시절 겪은 남모를 아픔을 숨기고 사는 반소영을 표현하기 위해 작가가 준 캐릭터에 살을 붙였다고 한다. 콧소리 섞인 억양과 익살스러운 표정은 그의 아이디어. 하지만 그는 “대본을 한 번 읽을 때 튀어나오는 아이디어와 두 번 읽을 때 튀어나오는 아이디어가 다르다. 세 번 볼 것을 한 번 보면 두 개의 아이디어를 잃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나는 게으른 배우였다”며 스스로를 나무랐다.
그에게 연기를 왜 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재미있어서 한다”며 천진난만한 표정을 짓다가도 “죽을 수 없기 때문에 한다”는 다소 극단적인 말을 남겼다. 할 줄 아는 게 연기뿐이기에 연기를 하지 않으면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것. 그에게 연기는 운명이다.
“남들은 이런 저를 ‘워커홀릭’이라고 하더라고요. 어쩔 수 없어요. 저는 연기를 하면서 내뿜는 에너지로 먹고사는 사람인 걸요. 잠시라도 활동을 쉬면 속이 허해요. 아무리 밥을 먹어도 배가 고프고, 물을 마셔도 목이 말라요.”
할아버지로부터 예술적 감각을 물려받았다는 그는 어릴 적부터 피아노를 잘 쳤고, 남들 앞에서 노래를 불러 박수를 받아야 직성이 풀렸다. 학교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말재주가 좋은, 인기 많은 아이였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무척 엄격하고 보수적인 분이었다. 딸이 외교관이 되길 바라던 어머니는 노래대회 대신 영어이야기대회에 내보냈고 영어책을 외우지 못하면 매를 들었다.
“그러던 엄마가 중학교 3학년 때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인생의 첫 번째 시련이었죠. 그로 인해 오랫동안 방황하고 엇나갔지만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 선생님과 친구들의 도움으로 점차 안정을 찾았어요. 그곳에서 숨은 끼를 마음껏 펼쳤고요. 방송반 아나운서, 중창단 리드보컬로 활동했고, 조회시간에는 전교생 앞에서 애국가를 선창했어요.”
탄탄대로를 걷듯 이후 모든 일은 술술 풀렸다. 대학입시를 앞두고 어느 학과를 갈지 고민하던 그를 본 친구들은 연극영화과에 진학하라고 부추겼고, 그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원서를 썼다. 그의 갑작스러운 결정에도 놀라거나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해 동국대학교에 합격한 그는 2학년 때 KBS 공채 14기로 뽑혔다. 이병헌·김호진·손현주 등이 그의 동기. 데뷔 때부터 그를 지켜봤다는 한 드라마 PD는 “14기 중 1등으로 합격해 신인 때부터 두각을 드러냈다”고 말했다.
그렇게 시작한 배우생활이 올해로 18년째. 김정난은 “돌이켜보면 시간이 광속처럼 느껴진다. 비록 스타가 되진 못했지만 일을 놓치지 않고 했다는 점에서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드라마 속에서 주인공은 아닐지라도 그 인물에 있어서만큼은 내가 주인이었잖느냐”라고 말했다. 아버지와 새어머니는 그의 열성팬이다. TV에 나오는 딸을 보며 여전히 가슴 설레어한다는 그의 아버지는 “저 장면에서는 이렇게 해야 했는데…” 하면서 꼼꼼하게 모니터링을 한다고.
“엄마가 원하던 딸의 모습은 아니지만 지금쯤 대견하게 여기시지 않을까요. 엄마의 죽음은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았지만, 그것이 제가 가고 싶어하는 길을 선택할 수 있게 한 운명이라고 믿어요. 엄마를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해야 해요. 로또복권 1등에 당첨되더라도 연기를 그만둘 수 없는 진짜 이유죠.”
김정난은 옷가게, 와인가게 등을 열기도 했지만 모두 접었다. 지난해 초까지 라디오 프로그램 DJ를 맡았던 그는 “구속받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번다고 해도 부딪치고 힘들면 그 일은 내 일이 아니다”며 그만뒀다. 입시생을 과외지도한 적도 있지만 이 역시 얼마 가지 못했다. 연기 이외의 다른 일을 하면 그는 꼭 녹다운됐다고 한다.
“연기하면서 매너리즘에 빠진 적은 있지만 후회한 적은 단 한번도 없어요. ‘연기자’는 남들이 저를 정의하는 한 단어에 불과하지만, 제게는 삶의 이유고 전부예요. 저는 연기를 시작하면서 인생의 계획을 세웠어요. 마흔이면 레드카펫을 밟고 영화제에 참석해 멋지게 수상 소감을 말하는 꿈 말이죠. 갈 길이 멀고 험하지만 걸어가야 할 길이 뚫려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위안이 돼요.”
Second keyword·인·내
“젊은 시절 나를 지배했던 오기와 자존심, 지금의 나를 지배하는 겸손과 온유”
‘차갑다’는 김정난의 첫인상이 오해였다는 걸 안 것은 인터뷰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다. 그는 곤란할 수 있는 질문에도 “괜찮아요” 하며 미소를 지었고, 기자에게 “놀러오라”며 자신의 집주소와 전화번호를 공개했다.
“깐깐할 것 같다, 독해 보인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지금도 얌체, 깍쟁이 같다는 오해를 받죠.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에요. 전쟁터 같은 연예계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다 보니 저도 모르게 날카로워지더라고요. 그래도 지금은 인상이 편안해졌다는 말을 자주 들어요.”
그는 “누군가 20대로 돌아가고 싶냐고 묻는다면 나는 1초도 고민하지 않고 ‘No’라고 대답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김정난은 지난 92년 청춘드라마 ‘내일은 사랑’으로 연기대상 신인상을 받으며 주목받았지만 곧 주춤거렸다. 95년부터 2년간 한 편의 드라마도 찍지 않았다. 그는 이때를 “알을 깨고 나온 시기”라고 표현했다.
“한 주말연속극의 주인공으로 캐스팅된 후 대본을 받고 제작진과 미팅까지 가졌는데 다음 날 주인공이 다른 연기자로 바뀌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어요. 화장실에 가서 엉엉 소리내 울었던 기억이 나요. 부족한 점이 있어서 밀렸겠지만 당시에는 연기력 이외의 다른 요인이 작용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거든요. 인생의 두 번째 시련이었죠.”
방송국을 뒤로한 채 그는 학교로 돌아왔고, 연극무대에 섰다. 학비를 벌기 위해 국군방송 DJ로 잠시 활동했을 뿐 바깥 출입을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한다. 몇몇 프로그램에서 출연 제의를 받았지만 거절했고, 그러는 동안 차츰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갔다. “얼마나 교만하고 나태했는지…” 하며 당시를 회상하던 그는 “그러나 그 시기가 없었다면 지금도 허리를 굽힐 줄 몰랐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현아라는 본명을 김정난으로 바꾼 것도 그 즈음. 고요할 ‘정’에 따뜻할 ‘난’자를 써서 그런지 이름을 바꾼 후부터는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한다. 우연한 기회에 지난 97년 아침 프로그램 리포터로 복귀했다.
“처음엔 ‘리포터? 배우가 리포터를 왜 해?’ 그랬어요(웃음). 그러다 ‘다시 시작하려면 겸손해져야 한다’며 스스로를 다그쳤죠. 6개월 동안 전국을 다니면서 촬영했는데 달리 마음먹어서인지 불평하지 않고 할 수 있었어요. 시청자 반응이 좋아 그 프로그램 메인 MC가 됐고, 매일 아침 4시에 집에서 나와 방송국에서 먹고 자고 살다시피 했어요.”
그는 그곳에서 인내하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다시 드라마 촬영장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분명 달라져 있었다. 침착해졌고 어떤 일을 하더라도 몰입하는 버릇이 생겼다고. 배역을 대할 때도 경중을 가리지 않았고, 사람을 대할 때도 여유가 생겼다고 한다.
“그 이후에도 견딜 수 없을 정도의 모멸감과 수치심을 느낀 적이 있었지만 슬기롭게 이기고 지는 법을 터득하게 됐어요. 예를 들어 운동경기를 할 때 우리나라가 상대국에 1점 차로 지면 판정이 좋았느니 나빴느니 하며 안타까워하지만, 월등한 실력으로 큰 점수 차가 나면 판정 시비에 상관없이 이길 수 있잖아요. 돌이켜보면 젊은 시절, 저는 판정시비에만 급급했을 뿐 무엇이 부족했는지 잘 몰랐던 것 같아요.”
그는 미망인, 입양아, 술집마담, 공주병에 걸린 선생 등 다양한 배역으로 연기력을 쌓았다. “비슷한 캐릭터는 연달아 맡지 않는다”는 연기철칙을 갖고 있는 그는 인터뷰가 무르익을 즈음 자신이 코 성형수술을 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외모로 인한 배역의 한계를 겪지 않기 위해서 선택한 일이었다.
“배우라면 차가운 이미지, 섹시한 이미지, 차분한 이미지 등을 모두 갖춰야 한다고 생각해요. ‘김정난만의 개성이 없다’는 의견도 있지만 저는 ‘김정난 이미지는 이러이러하다’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요. 얼굴에 큰 특징이 없어서인지 헤어스타일이나 메이크업을 바꾸면 친한 친구들도 저를 잘 못 알아봐요. 얼굴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아요. 카메라 앞에 서면 ‘어, 나한테 이런 모습도 있었네?’ 하고 놀랄 만큼 이것저것 다 해보거든요. 제 안에 여러 가지 이미지가 있는 건 그런 노력의 결과기도 해요.”
그는 “인생의 두 번째 분기점에 다다랐다”고 말한다.
“한 후배연기자가 어느 인터뷰에서 ‘김정난처럼 되고 싶다’고 했다더라고요. 누군가의 롤모델이 되는 것만큼 가슴 벅찬 일이 또 있을까 싶어요. 서른 살이 첫 번째 분기점이었다면 지금 저는 두 번째 분기점을 향해 치닫고 있어요. 수채화 같은 삶을 살고 싶어요. 연필 자국, 지우개 자국이 보인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억지로 꾸미지 않는 모습에서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우러나오는 것이니까요.”
Third keyword·여·자
“고민거리 생기면 ‘Enjoy my life!’ 하고 외쳐요”
암벽등반을 하고 스쿠버다이빙 자격증을 취득하고 인라인스케이트에 행글라이더도 즐겨 탈 만큼 운동마니아였던 그는 요즘 피아노와 성악을 배우고 있다. 40대 중반쯤 작은 소극장에서 피아노 치고 노래 부르면서 모노드라마를 하고 싶어서다. 얼마 전 이탈리아 요리 전문가 자격증을 취득하기도 한 그는 종종 친구들을 불러 파티를 연다.
“어떤 목적을 위해서 자격증을 딴 게 아니라 재미있어서 배웠고 내친김에 땄어요. 비용이 만만치 않아 자주는 못하지만 고마운 사람이 생기면 선물하기보다는 집으로 초대해 음식을 만들어줘요. 복잡한 건 못해도 웬만한 파스타와 수프는 만들 수 있어요.”
부모로부터 독립한 그는 고양이 세 마리와 함께 지내고 있다.
“외로움을 잘 타지 않는 것 같아요. 혼자 있으면 혼자 있는 대로, 여럿이 있으면 여럿이 있는 대로 그 순간을 즐기거든요. 고양이를 기른 지 2년 정도 됐는데 꼭 자식 같아요. 청소하고 밥 주고 모래 갈고 놀아주다 보면 금세 하루가 가요. 제가 피아노를 치면 한 마리는 의자에, 한 마리는 발 밑에, 한 마리는 피아노 위에서 음악을 듣죠. 책을 읽을 때나 잘 때나 항상 제 주위를 맴돌아요. 고양이는 적당히 애교를 부리면서도 사람을 썩 귀찮게 하지 않아서 좋아요. 사람들은 제가 고양이 때문에 외로움을 못 느끼는 거래요. 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이죠. ‘고양이 말고 남자를 키워라’(웃음).”
그는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법이다. 방송국에 함께 입사한 여자동기들은 거의 활동을 중단했다. 아마도 가정을 이뤄 행복하게 살고 있을 것”이라면서 “나는 비록 가정을 못 이뤘지만 대신 연기자의 꿈을 이뤘기 때문에 지금의 삶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무인도에 한 가지만 가지고 가야 한다면 반인반수를 데리고 가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갖고 있기도 했다.
“하하하. 단순하게 생각한 거예요. 일단 의사소통이 되니까 심심하지 않잖아요. 급할 때는 이동수단이 되고, 양손이 있으니까 함께 일을 할 수 있죠. 짓궂고 엽기적인가요? 결혼에 대한 의무감은 없어요. 그렇다고 안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요. 인연이 닿으면 좋지만, 혼자 살 각오도 돼 있어요. 결혼을 안 한다고 해서 괴롭다거나 고통스러울 것도 없다고 생각해요. 혼자 살면 어떻게 해야 행복해지는가, 둘이 살면 어떻게 해야 행복해지는가 하고 스스로에게 묻곤 하는데, 아직까지 둘이 살 자신은 없어요.”
“아무리 조건 좋은 남자라도 시집이 연기를 그만두라고 한다면 결혼을 거절할 것이다” “동물을 사랑하는 남자면 좋겠다” 같은 몇 가지 결혼 전제조건을 들던 그는 “결혼은 여전히 남의 일처럼 느껴진다. 아직 철이 덜 들었나보다”라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
“누군가 결혼·출산을 경험하지 않고 어떻게 진심으로 연기할 수 있냐고 물어요. 경험도 중요하지만 ‘만약 내가 이런 상황이라면?’ 하고 상상하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고 믿죠. 미치지 않은 사람이 미친 사람이 되는 게 진짜 연기 아닐까요.”
그는 자신을 전형적인 AB형의 소유자라고 정의 내렸다. 금방이라도 기분이 최고조에 이르렀다가 어느 순간 세상 살기가 귀찮아지는 염세주의자가 된다는 것. 시간 나는 대로 틈틈이 여행을 다니거나 책을 잃고 좋은 구절을 적어두는 것으로 우울함에서 벗어난다고 한다. 생활신조는 ‘즐겁게 살자’다.
“결혼이든 사업이든 뭔가를 이룬 30대 여성을 보면 부러우면서도 저 자신이 한심스러워요. 무감각한 게 아닌가, 연기자로서 더 입지를 다져야 하지 않았을까 반성하다가도 ‘하루이틀 하고 그만둘 일이 아닌데, 뭐…’ 그러죠. 고민이요? (머뭇거리더니) 없어요. 감기가 낫지 않아 몸이 고단할 뿐이에요. 예전에는 작은 일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는데 지금은 고민거리 생기면 ‘Enjoy my life!(내 인생을 즐겨라)’라고 외쳐요. ‘머리 쓴다고 해결되나, 늙기만 할 뿐이지!’ 하면서…(웃음). 견딜 수 없을 만큼 힘이 들 땐 신에게 의지하는데, 신앙생활마저도 게을러요. 새벽예배 나오라고 하면 추워서 못 나간다고 말하고, 주일예배도 스케줄이 있으면 빠지죠. 정해진 것 없이 느낌대로 사는 것, 그게 여자 김정난이 사는 방식이에요.”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