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세일즈맨의 죽음’ 출연진, 제작진(왼쪽)과 막바지 연습에 한창인 박상원.
탤런트 박상원(46)에게선 언제나 한결같은 느낌이 난다. 지난 86년 MBC 공채 18기로 연기 인생을 시작한 뒤 벌서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그의 믿음직스럽고 따뜻한 미소는 여전하다.
지난 9월 중순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 연습이 한창인 서울 남산 드라마센터 연습실에서 만난 박상원의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세월이 그만 피해 흐르는 듯, 여전히 청년기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박상원은 후텁지근한 공기가 가득한 연습실 안에서 차분한 목소리로 선배 배우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후배들의 연기를 지도하며 자연스레 연극의 중심을 잡고 있었다.
주로 TV 드라마를 통해 활동하던 그가 연극 무대에 선 것은 이번 작품이 극작가 동랑 유치진의 탄생 1백주년 기념작이기 때문. 동랑은 ‘토막’ ‘원술랑’ 등의 작품을 통해 한국 근대 연극을 태동시켰다고 평가받는 극작가로, 전문 연극인 육성을 위해 서울예대의 전신인 연극 아카데미와 드라마센터 등을 설립하기도 했다. 이번 연극은 그의 이러한 뜻을 기리기 위해 서울예대 선후배들이 함께 준비한 작품. 박상원은 이 공연을 주최하는 극단 ‘동랑연극앙상블’의 대표를 맡아 직접 공연을 기획하고, 스폰서를 구했으며, 감독과 배우를 캐스팅하는 등 이번 연극의 산파 역할을 해냈다.
“제가 서울예대 연극과 78학번이거든요. 배우의 꿈을 품고 학교에 입학한 뒤 처음 본 게 바로 이곳 남산 드라마센터와 우리 선배들로 구성된 극단 ‘동랑레퍼토리’였어요. 오직 좋은 배우, 멋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소망 하나만 품고 하루 종일 연습실에서 땀에 젖어 뒹굴던 시절, 저에게 이 극장과 극단은 꿈 그 자체였죠. 선배들을 훔쳐보며 ‘나도 저 무대에 서서 저렇게 연기할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어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제 마음속에 있던 그 꿈의 공간이 조금씩 죽어가고 있더라고요. 우리 후배들을 위해, 제가 마음속에 품고 있던 소중한 등대의 불을 다시 밝히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가 한 첫 일은 사실상 활동 중단 상태였던 ‘동랑레퍼토리’를 재창단해 극단 ‘동랑연극앙상블’을 만든 뒤 대표를 맡은 것. 동랑레퍼토리는 전무송, 신구, 독고영재, 정동환, 유동근, 이휘향, 최민수, 남경읍, 남경주, 정재영, 신하균 등 쟁쟁한 배우들이 거쳐간 극단이다. 박상원은 “이러한 명성 앞에 부끄럽지 않으려면 ‘동랑연극앙상블’도 연기력으로 승부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배우의 연기력에 따라 작품에 대한 칭찬과 비판이 명확하게 엇갈리는 작품 ‘세일즈맨의 죽음’을 첫 작품으로 선택했다”고 말했다.
극작가 아서 밀러 원작의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은 경제공황 이후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되어버린 미국 사회를 배경으로 쓰인 작품. 세일즈맨 윌리가 한평생 헌신해온 회사로부터 해고 통지를 받은 뒤 가족에게 마지막 책임을 다하기 위해 달리는 차에 몸을 던지고 보험금을 남긴다는 내용이다. 서울예대 선배인 중견배우 전무송이 아버지 윌리, 전양자가 그의 부인 린다로 무대에 서며 박상원은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하면서도 그와 갈등을 빚는 큰아들 비프 역을 맡았다. 이번 작품의 연출가는 최근 영화 ‘웰컴 투 동막골’과 ‘박수칠 때 떠나라’의 흥행 성공으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장진감독이다. 그는 서울예대 89학번으로 무대 위에 서는 배우들과 비교하면 까마득한 후배지만, 자신만의 재기발랄한 스타일로 색다른 ‘세일즈맨의 죽음’을 만들어가고 있다고 한다.
“드라마센터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아레나 스테이지(원형경기장 스타일 무대)예요. 무대에 서면 배우는 발가벗고 선을 보러 나간 것처럼 자신의 모든 모습을 속속들이 관객 앞에 노출시키게 되죠. 치밀하고 현장감 있는 연출이 필요한데, 진이가 제격이라고 생각했어요. 선배 배우들과 함께 작업하는 걸 부담스러워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의외로 흔쾌히 맡더라고요. 개인 개인이 하는 작품이 아니라 선후배의 힘을 모아 학교의 명예를 걸고 하는 연극이라는 점 때문에 부담이 크지만,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졸작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에요. 이번 작품이 출발이 돼서 후배들의 열정에 불을 지피는 다른 기획들이 계속 마련될 수 있도록 더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저를 이끌어가는 힘은 이류 정신, 늘 성실해야 한다고 저 자신을 다그쳐요”
작품을 소개하는 박상원의 얼굴에서는 이번 기획 공연에 대한 자랑스러움과 기대가 듬뿍 묻어났다. 그는 무대를 이야기할 때 가장 들뜨는 배우지만, 무대 밖의 활동도 소홀히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한국근육병재단 홍보이사, 월드비전 친선대사 등을 맡아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을 돕는 일에 앞장서고 있고, 지난 5월에는 히말라야에 방치돼 있는 한국 산악인들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떠난 엄홍길 대장의 ‘휴먼원정대’를 응원하러 에베레스트에도 다녀왔다. 브라운관 속의 ‘따뜻한 젠틀맨’ 이미지는 현실 속에서도 똑같이 발현된다.
“큰 뜻을 갖고 간 것은 아니에요. 죽은 친구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산에 오르는 산 사나이들의 우정에 깊은 감명을 받아 김치 한 조각이라도 전달해주고 싶은 마음에 길을 나섰던 겁니다. 마침 엄홍길 대장과 친분도 있었고요. 정상까지 가지는 못하고 5700m 지점에 있는 캠프에서 대원들을 만난 뒤 며칠 머무르다 돌아왔는데, 제 주위에 있는 소중한 것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는 참 소중한 기회가 됐어요. 전 많은 이들의 사랑 덕분에 이 자리에 섰잖아요. ‘내 연기를 사랑해주고 내게 힘을 주는 이들이 어려운 환경에 있다’고 생각하면 저도 그들에게 사랑을 돌려드리는 것으로 보답하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올라요.”
박상원은 오는 10월14일까지 서울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공연되는 ‘세일즈맨의 죽음’을 끝낸 뒤 바로 10월 말부터 드라마 ‘태왕사신기’를 촬영할 계획. 올 연말은 ‘태왕사신기’와 함께 숨가쁘게 흘러갈 것 같다고 한다.
“저를 이끌어가는 힘은 ‘이류 정신’이에요. 전 빼어나게 잘 생기지도 않고, 연기를 대단히 잘하지도 못하죠. 언제나 ‘난 성실해야 해. 조금만 게으름을 피워도 바로 도태될 거야’라고 저 자신을 다그쳐요. 배우가 된 뒤부터 늘 저를 따라다니는 이 긴장감과 위기의식이 항상 절 지켜준다고 믿어요. 앞으로도 성실하고 변치 않는 모습으로 관객 앞에 서는 배우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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