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 김무생, 양택조, 송재호, 선우용녀, 박영규 출연. 신세대 연기자들에게 익숙해 있는 사람들은 “어? 그럼 주연은 누구야?” 하고 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로 이들이 모두 영화 ‘고독이 몸부림칠 때’의 주연들이다.
영화 ‘고독이 몸부림칠 때’는 요즘 한국영화에선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노년물’로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중견 배우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인 것으로 화제가 되고 있다. 영화는 경상남도 남해군에 위치한 물건리를 배경으로 고독한 노인네들이 벌이는 아웅다웅 티격태격 다툼을 그리고 있다. 특히 앙숙인 두 노인 주현과 김무생이 펼치는 피말리는 승부와 박영규의 예상을 뛰어넘는 러브 스토리가 포인트.
기자가 촬영장을 찾은 날은 타조농장을 운영하는 배중달(주현)이 친구이자 평소 앙숙관계인 조진봉(김무생)과 격투기를 방불케 하는 주먹다짐을 벌이고 있는 중간, 곱게 차려 입은 노부인 송인주(선우용녀)가 등장하는 장면. 구름 한점 없이 해맑은 가을 오후 주현과 김무생을 비롯한 주연 배우들은 몸을 아끼지 않는 투혼을 발휘하며 흙바닥을 뒹굴며 ‘열연’하고 있었다.
터프 가이 주현<br>이름 : 배중달<br>나이 : 60대 초반<br>직업 : 타조농장주
“나 배중달이, 50세가 다 돼가는 총각인 내 동생 배중범이 장가만 가믄 고독한 시절 확 한방에 끝내뿔고 사랑이라는 것도 한번 해봄서 인간답게 살라카는데. 아, 진짜 상황 안 받쳐주네!”
주현(61)이 연기한 배중달은 고독한 노인네다. 유황오리, 기러기, 황소개구리 등 온갖 보양용 동물을 사육해봤지만 실패를 거듭하고 마지막으로 타조농장을 새롭게 시작한 그에게 동생 중범과 항상 자신을 못마땅해하며 시비를 거는 조진봉은 인생의 걸림돌이다. 그러다 물건리에 나타난 송인주에게 한방에 필이 꽂혀버리는데….
“연기생활 수십년 만에 같은 연배 친구들을 만나 이렇게 즐겁게 연기하는 건 처음이야. 늘 젊은 연기자들 아버지 역할만 하다가 주연으로 나선 게 얼마 만인지….”
연기를 위해 여기저기 구멍이 송송 난 러닝셔츠를 입은 그는 영락없는 시골 촌부의 모습이다. 드라마 ‘서울뚝배기’에서 독특한 억양으로 ‘껄랑요∼’라는 사투리를 유행시킨 그는 이번 영화에서도 걸쭉한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한다.
“만날 답답한 세트장 안에만 있다가 밖으로 나오니까 좋아. 참, 몇 달 전에 담배를 끊었어요. 그랬더니 요즘 살이 많이 불었어. 이 배 나온 것 좀 봐. 운동을 해야 하는데 이거 시간도 없고 게을러서….”
연기자 사이에서 ‘화려한 입담의 소유자’로 통하는 주현은 요 몇 년 사이 TV와 스크린을 오가며 그간의 연기생활 중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영화 ‘친구’ ‘굳세어라 금순아’에 이어 최근 ‘조폭마누라2’에도 출연했다. 그는 뜻밖에도 정치외교학과(건국대) 출신이다.
심술 가이 김무생<br>이름 : 조진봉<br>나이 : 60대 초반<br>직업 : 무위도식
“내 살아생전에 배중달이 안 쥑이면 사람이 아니제. 저게 어찌 사람새끼라고 할 수 있겠나. 내가 뭐? 과대망상? 이승복이 동상을 깨∼끗허니 매일 닦아주고 국가에 충성하는 거이 그기 뭐가 어때서!”
얼굴에 심술이 가득한 노인네 조진봉은 자식들에게 버림(?)받고 물건리에 내려온 인물로 유신시대를 그리워하는 과격한 성격 탓에 물건리 사람들에게 왕따를 당한다. 어느 날 마주친 인주를 사이에 두고 물건리의 괴짜들과 일대 격전을 벌인다.
항상 완고하고 대쪽같은 이미지의 아버지 역할을 주로 해왔던 김무생(61)은 이번 영화를 통해 ‘연기 변신’에 나선다. 그간 시도해보지 않은 코믹 연기에 과감히 도전하는 것. 그는 드라마 ‘옥탑방 고양이’에 출연하기 전, 고혈압으로 쓰러져 주변 사람을 안타깝게 했다.
“그동안 바쁜 스케줄 탓에 한시도 쉬지 못해서 피로가 누적되어 그렇다고 하더군요. 요즘도 정기적으로 병원에 다니고 먹는 것도 조절중이지. 운동도 심하게 해선 안되고…. 아이고 저 몸 좋은 주현이랑 한바탕 하고 나니 숨이 차서….”
그에게 빠뜨릴 수 없는 질문, 아들 김주혁과 김지수와의 관계는? “요즘 김주혁의 인기가 높다”는 기자의 말에 “이제 시작인데 인기는 무슨. 주혁이 연기생활엔 전혀 관여하지 않아요. 세대가 다르고 또 배우의 모습도 많이 달라졌거든. 그래서 잔소리 안하려고” 하며 손사래를 쳤다.
“잘 모르겠어. 다른 사람들보다 더 가깝게 지내기는 하는 것 같은데, 사실 남녀일이라는 게 예측할 수 있나? 우리 때도 그랬는데 요즘 젊은이들이야 오죽 하려고. 지들 좋고 의지할 수 있으면 결혼문제까지 깊이 생각하겠지. 지수야 밝고 영리하고 예의바른 후배라 며느릿감으로 좋지.”
주책 가이 양택조<br>이름 : 홍찬경<br>나이 : 60대 초반<br>직업 : 동네 점방 주인
“저놈의 미련둥이 여편네는 어째 그리 정신이 오락가락하는지 저게 어찌 건망증일 수가 있나. 치매지. 요양원이 어딘지 알려만 주면 바로 집어 넣을꺼구마.”
홍찬경, 물건리 최고의 주책바가지다. 친구들 중 유일하게 혼자가 아니지만, 찬경은 미련둥이 마누라가 왜 그리도 싫은 건지. 그의 유일한 흥미거리이자 목표는 스쿠터 면허 시험 통과하기. 그런데 홍찬경에게 새로운 미션이 생겼다. 인주! 그녀를 본 순간 넋이 나간 그는 “우째 이리 고울꼬…”를 연발하며 껄떡댄다.
97년 드라마 ‘그대 그리고 나’에서 감칠맛 나는 조연으로 주인공보다 더욱 빛났던 감초 연기의 진수, 양택조(65). 그는 이만희 감독의 영화 ‘만추’에서 조연출을 맡았던 전적이 있을 만큼 영화계와 인연이 깊다.
“한마디로 착각 속에 빠져 사는 사람들이야. 늙었으면서도 20대 여자가 자기를 보고 웃으면 ‘나를 좋아하는구나’ 하고 착각하는 사람들 말이야. 그런데 그게 착각인 줄 알게 되면 그 순간 완전히 고독해지는 거지. 다른 게 있다면 우리는 나이를 먹었기 때문에 절제를 할 줄 안다는 거지. 대시하려다가 그냥 참는 거야. 내가 기자양반만 같았으면 그냥….”
한시도 쉬지 않고 말을 해가며 촬영장 분위기를 띄우는 그는 번쩍거리는 황금시계, 하와이안 남방셔츠, 냄새 안 나는 특수양말까지 ‘언제나’ 껄떡거릴 준비가 된 모습이다.
“나한테 연기 변신이란 건 없어. 내 인생은 지금 이 순간에도 달라지고 있거든. 늘 새롭게 변하려는 노력 탓에 젊게 사는 거 아닐까? 근데 왜 나는 사진 조금밖에 안 찍어?”
샤이 가이 송재호<br>이름 : 이필국<br>나이 : 60대 초반<br>직업 : 소형 어선주
“내는 욕심 없다. 저 어린 고사리 손으로 지 할배 젊어보여야 한다꼬 억지로 앉히가 머리 검게 물들여주는 세상에서 제일 귀한 우리 손녀 영희랑 이렇게 지금까지처럼 소리없이 평화로이 사는 거 그거 말고 무신 소원이 있것노.”
송재호(62)가 연기하는 이필국은 푸근하고 인자해 보이는 노인네다. 아내와 자식을 모두 잃고 열한살 난 손녀딸 영희와 조용히 살아가는 그는, 북적거리는 것도 싫고 싸움도 싫은데, 오늘도 싸움질을 계속하는 중달과 진봉이 짜증난다. 게다가 중달과 진봉, 심지어 찬경까지 물건리에 등장한 인주에게 푹 빠져 있는 꼴이라니.
특유의 눈가 주름과 미소로 촬영현장의 스태프들에게 가장 인기가 높은 송재호. 나이 어린 스태프들에겐 ‘아버지’로 통할만큼 열렬한 애정을 받고 있다.
“고독은 누구에게나 오는 것이지만 그걸 인생의 긴 여정 속의 하나라고 생각하며 견뎌내는 게 중요하죠. 이 영화는 오랜 친구들과 함께 부대끼며 견디는 것을 보여주지. 세상 사람들이 모두 고독에 몸부림치지만 그래도 칠 땐 쳐야지. 그거 참으려고 하면 병나요.”
영화 ‘학사주점’ ‘영자의 전성시대’ ‘꼬방동네 사람들’ ‘겨울여자’ ‘무사’ ‘몽중인’ ‘이중간첩’ ‘살인의 추억’ 등 출연작으로 확인되듯, 그는 실력 있는 감독들이 함께 작업하고 싶어하는 배우다. 이번 영화에서도 감독이 그를 염두에 두고 이필국이라는 인물을 만들었을 정도.
“나이가 좀 있어서 다들 힘들겠지만 그래도 감독이 가장 힘들 것 같아요. 이거 도통 말을 들어야지. 다 나름대로 수십년 연기를 해온 사람들이라 고집이 있거든. 현장에서 가장 고독한 사람이 바로 감독일 거야.”
엘레강스 우먼 선우용녀<br>이름 : 송인주<br>나이 : 60대 초반<br>직업 : 무직
“이 늦은 나이에 이혼까지 해야 했느냐고? 남의 사정 모른다고 그렇게 말하는 건 아니지. 그렇게 묻는 건 올바른 자세는 아니라고 본다. 이 동네 사람들 보면 볼수록 귀엽다. 어쩜 그렇게 속이 훤히 비치는지…. 내가 살던 서울 사람들하고는 정말 다르다. 그래서 더 여기가 점점 좋아진다.”
송인주는 물건리 노인네들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는 노부인이다. 그녀는 예쁜 카페를 차려 아름다운 말년을 보내려는 핑크빛 상상에 사로잡혀 있다. 그런데 이곳 물건리 노인네들이 인주에게 대하는 태도가 영 남다르다.
이번 영화에서 이슈 중의 이슈인 선우용녀(58). 그녀가 고고한 멜로배우로 변신한다. 그간 ‘여간해서’ 보여주지 않았던 단아한 여성미를 맘껏 드러낼 예정. ‘시트콤 계의 대모’라는 별칭을 갖고 있지만 사실 그는 TBC(동양방송) 연기자로 입문한 뒤 한때 안인숙, 윤소정과 함께 트로이카로 명성을 날렸던 미모의 연기자다.
“이렇게 ‘오빠’들 하고 연기하니까 너무 좋다. 내가 더 젊어지는 것 같고, 사랑받는 것 같아. 앞으로 이런 영화가 많이 만들어져야겠어. 근데 이 오빠들 너무 귀여운 것 같지 않아요? 어쩜 저렇게들 열연을 하는지, 호호호.”
시크릿 가이 박영규<br>이름 : 배중범<br>나이 : 49세<br>직업 : 타조 농장에서 형을 도와주고 있음
“나는 총각이다. 나이가 50이 되든 60이 되든 결혼을 안했으면 총각이 아닌가? 총각은 연애를 할 권리가 있다. 결혼도 마찬가지다. 내가 하고 싶어야 하지.”
배중범, 배중달의 동생이다. 50이 다 되었는데 아직 총각이다. 중범이 여태껏 장가를 못간 꼴이 항상 불만인 형 중달은 중범을 다그친다. 그런데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중범, 그동안 숨겨놓은 비밀을 형에게 폭로하고 만다.
“이게 얼마 만에 연기하는 총각역할이야. 게다가 청춘스타 진희경씨랑. 잠깐 아직 청춘스타 맞지? 여기서 제가 가장 어려요. 그래서 어리광도 많이 부리지.”
‘순풍 산부인과’의 미달이 아빠 박영규(50)는 이번 영화에서 여심에 버금가는 세심함과 유약함이 매력 포인트인 인물로 변신했다. 하지만 그는 ‘고독’ 그런 거 안할 것 같은데.
“세상에 고독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자신만 고독한 줄 알거든. 다 고독한데 그 고독을 어떻게 잘 견딜 수 있느냐가 중요해요. 거봐, 난 그걸 잘 극복하니까 그렇게 안 보이는 거야. 나 얼마나 고독한데. 고독이 넘쳐 가지고 비틀어졌어. 그걸 내색하지 않으려고 할 뿐이야.”
노래 ‘카멜레온’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기도 했던 그는 요즘 2집 음반을 준비중이라고 한다. 내년 봄 발표를 목표로 이미 선곡 작업에 들어갔다고.
“노래방에 가면 젊은 친구들이 ‘카멜레온’을 부르는 모습을 가끔 봐요. 그 노래 명곡은 명곡인가 봐. 그런 노래 하나 더 발표해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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