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내 첫사랑이며 동지적 유대감을 지닌 30여 년 지기다.”
안희정(52) 충남지사가 부인 민주원(53) 씨를 두고 한 말이다. 안 지사와 민씨는 고려대학교 83학번 동기로 둘 다 운동권 학생이었다. 캠퍼스 커플이던 이들은 안 지사가 반미청년회 사건으로 10개월간 옥살이를 한 이듬해인 1989년 웨딩마치를 울렸다. 당시 안 지사는 통일민주당의 김덕룡 국회의원 비서로 정치에 입문했다. 하지만 안 지사의 이후 행보는 평탄하지 않았다. 1990년 민주당 이철 사무총장 비서로 근무하다 기성 정치에 환멸을 느껴 정계를 떠났던 그는 1992년 제14대 총선에서 낙선한 노무현 전 대통령을 도우며 정치 활동을 재개하는데, 2003년 참여정부 집권 초기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구속돼 1년간 복역한다. 노 전 대통령의 대선 캠프에서 살림살이를 총괄하며 참여정부 출범에 혁혁한 공을 세웠으나 출소 후 그는 공직을 스스로 마다하고 거의 백수로 지냈다. 노 전 대통령에게 부담을 주기 싫다는 것이 이유였다.
안 지사가 정치인으로서 소신과 의리를 지키는 동안 살림과 육아는 고등학교 교사이던 민씨가 책임졌다. 이들 부부에겐 1993년, 1996년생인 두 아들이 있다. 직장맘의 삶이 녹록지 않았으련만 남편의 정치 행보를 지지한 민씨는 2010년 남편이 충남지사가 되고 나서도 지역 봉사 활동에 집중하며 소리 없는 내조를 고집했다.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그녀를 두고 주변 사람들은 “걸 크러시(여성이 동성에게 느끼는 강한 호감)를 유발하는 여걸”이라고 입을 모았는데,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왜 이런 말을 듣는지 짐작이 갔다. 그녀를 만난 곳은 안 지사의 새 저서 〈콜라보네이션〉과 추억의 사진들이 전시된 서울 마포구의 작은 책방이었다.
▼ 첫 인터뷰인데도 긴장하는 기색이 없으시네요.
티가 나지 않을 뿐이에요. 등에서 땀나고 있어요(웃음).
▼ 호적상으로는 안 지사보다 한 살 연상이시던데요.
동갑이에요. 저희 둘 다 1964년생인데 남편이 출생신고를 1년 늦게 해 제가 연상으로 알려져 있죠.
▼ 촛불 집회에 매주 참석하신다고 들었어요.
지난 두 주는 체력이 달려서 못 나갔어요. 갈 때마다 큰 감동을 받아요. 우리가 잊고 있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내가 나라의 주인’이라는 의식을 되찾아가는 시민들의 모습에서요. 고등학교 때는 시민혁명으로 시민 권력을 찾은 서양 역사가 부러웠고, 대학교 때는 ‘왜 위정자들이 겁 없이 함부로 시민과 국가를 통제할까? 우리나라는 왜 유럽처럼 민주주의가 정착하지 못할까?’라는 의문이 있었거든요. 제발 (탄핵 재판에서) 시민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결과가 나오길 바랍니다. 간절한 바람이 무산돼 뼛속 깊이 아픈 기억으로 남는 일이 없도록요.
▼ 안 지사가 1월 9일 자신의 도전은 “우리 사회의 젊은 도전”이라고 포부를 밝히셨습니다. 대권 도전 결심을 굳히기 전 부인과 상의했나요.
(더불어민주당의 대선 후보) 경선에 출마할 생각이라고 얘기하기에 처음에는 혼란스러웠어요.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같이 고민했죠. 남편은 “이 경쟁이 한쪽을 파괴하기 위한 거라면 피해야겠지만, 서로 성장할 수 있는 무대”라면서 “굳이 피하거나 나쁘게 생각할 일은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하더라고요. 남편의 생각을 듣고 보니 두려워하면서 피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승복하고 이긴 분을 열심히 응원할 거니까요.
▼ 한 사람의 유권자로서 안 지사를 지지하는 이유를 말씀해주신다면.
다방면에서 능력이 있고 소통을 잘하거든요. 1993년 어려운 시절에 캠프를 꾸릴 때부터 지금까지 어떤 문제가 닥쳤을 때 해결이 안된 적이 거의 없어요. 항상 문제를 잘 풀어가고 관계를 깊이 있게 맺어나가고 소통에 천재적인 소질이 있는 것 같아요. 지금 충남도의회에 새누리당 도의원이 더불어민주당 도의원보다 월등히 많은데도 (남편이 도정을 이끈) 6년 내내 한 번도 문제가 불거진 적이 없거든요. 업무 능력도 뛰어나서 최근 9개월 내내 도민들이 참여하는 전국 17개 광역 시도 단체장의 직무 수행 능력 평가에서 1등을 하고 있어요. 그런 점들 때문에 누구보다 일은 잘할 거라는 믿음이 생겼죠.
▼ 안 지사는 자신을 ‘밥’에 비유했는데 부인도 공감하십니까.
남편은 기본과 원칙을 굉장히 중요시하는 사람이에요. 어떤 상황에서든 능력을 발휘해 도움을 주는 사람이고요. 남편의 그런 성격이나 지향하는 바가 밥을 닮았어요. 밥은 한국인의 주식이고, 인간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에너지의 원천이잖아요. 콩나물비빔밥, 해장국밥, 잡채밥 등도 밥이 있어야 만들 수 있고, 갈비찜도 밥과 같이 먹으면 더 맛있듯이 우리에게 많은 도움이 되고 힘을 주는 꼭 필요한 존재라는 의미에서 밥 같은 사람이 맞는 것 같아요.
▼ 안 지사가 고교 시절 한 학교에서는 제적되고, 다른 학교는 중퇴를 해 결국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를 마쳤더군요.
남편이 중학교 3학년 때 우연히 함석헌 선생이 발간하던 잡지 〈씨알의 소리〉를 읽고 우리 사회 역사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게 됐대요. 그런데 이듬해인 1980년에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어요. 피 끓는 마음을 담아 (잡지사로) 편지를 보냈는데 편지 받은 분이 국가안전기획부에 잡혀 들어가면서 그 편지까지 문제가 된 거예요. 처음엔 편지 쓴 사람을 반정부 단체를 조직하려는 대학생으로 의심했는데 조사해보니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었던 거죠. 그런데도 교장 선생님에게 압력을 넣어 제적시킨 거예요. 이듬해 시부모님이 집에서 놀고 있는 아들을 설득해 서울서 대학을 다니던 시아주버님 집 근처 고등학교에 1학년으로 재입학을 시키셨고요. 남편은 1학년을 다시 다니는 것도 억울한데 고등학교에서 군사훈련을 시키니까 그런 분위기를 못 견디겠어서 스스로 학교를 그만둔 거예요. 대학은 가야겠다 싶어서 검정고시를 치른 거고요.
▼ 두 분이 대학교 1학년 때 도서관에서 처음 만났다고 들었어요.
3월이니까 입학 한지 며칠 안 됐을 때예요. 도서관 책상 맞은편 자리에 강원도 춘천에서 온 고향 친구가 앉아 있었어요. 서로 반갑게 인사하고 잠깐 잠이 들었는데 깨어나 보니 다른 사람이 친구 자리를 차지한 거예요. 자리 주인이 오면 곧 쫓겨나겠지 했는데 남편이 고향 친구와 친한 사이였어요. 그때 남편을 처음 소개받아 안면을 텄죠.
▼ 첫인상은 어땠나요.
얼굴이 창백했다는 기억밖에 없어요. 지금은 피부가 까무잡잡하지만 그때는 엄청 하얬어요.
▼ 두 분이 어떻게 사귀게 됐나요.
저희가 대학 다닐 때는 ‘인간’과 ‘국가’라는 두 필수과목을 국가 주도로 만들어 이걸 모두 듣지 않으면 졸업을 할 수 없었어요. 2학년 때 할 수 없이 두 과목 수강 신청을 하고 3~4월 내내 빠지다 시험 보기 일주일 전 마지막 강의에 들어갔는데 남편이 있었어요. 반갑게 인사를 하고 나서 강의를 듣는데, 복종심을 강요하고 철학이 없어야 된다고 가르치니까 듣고 있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교수가 등 돌리고 칠판에 글씨를 쓸 때 남편과 뒷문으로 빠져나왔죠. 둘이 풀밭에 앉아서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저런 수업을 왜 들어야 하느냐?”로 시작해 많은 얘기를 나눴는데 그게 본격적인 만남의 시작이었죠.
▼ 그날이 ‘1일’인가요.
그건 아니지만 같이 듣던 필수과목 강의실에 전보다 자주 들어갔죠. 거기 가면 만날 수 있으니까요. 그 전엔 남편 인상이 별로였어요. 제 고향 친구가 부모님이 보내주시는 하숙비와 용돈을 하루이틀에 술값으로 다 없애고는 한 달 내내 굶고 다녔어요. 안쓰러운 마음에 만나면 가끔 밥을 사줬죠. 그때마다 남편이 어느새 귀신같이 옆에 와 있는 거예요. 그럼 둘 다 사줄 수밖에 없잖아요. 학교 근처 고려다방으로 3백원짜리 커피 마시러 갈 때도 쫓아왔고요. 거의 1년을 그렇게 얻어먹고도 자기가 밥 한번을 안 샀어요. 그 때문에 좋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자꾸 보니 되게 반듯하더라고요. 생각하는 것도, 행동거지도요. 점점 호감을 갖게 됐죠.
▼ 어떤 행동에 끌리셨나요.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손수레를 끌고 지나가면 언덕배기까지 밀어주고서야 돌아왔어요. 아이들이 울고 있으면 가서 삼촌처럼 다독이고요. 또 시국에 대한 걱정이 많았는데 만나면 만날수록 생각이 깊고, 아는 게 많고, 가치관이 저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학생 운동을 하며 사이가 더 돈독해졌나요.
그렇죠. 당시에는 나가서 행동으로 보여주는 친구가 있고, 마음은 동조하지만 몸은 동조할 수 없는 친구가 있었는데 대다수의 마음은 하나였다고 생각해요. 그 가운데 성격 급한 사람이 행동하러 나간 거죠. 저희처럼.
▼ 데이트는 어떻게 했나요.
돈이 없어서 만날 걸었어요. 하도 걷다 보니 서울 시내의 웬만한 길을 다 걸었더라고요. 지도를 사서 저희가 걸은 길을 사인펜으로 표시해본 적이 있거든요(웃음). 실은 걷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겨울 추위는 참을 만했는데, 여름에는 땀범벅이 되니까 에어컨 바람 나오는 카페에 들어가 냉커피나 마시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어요. 남편이 돈 없는 것을 아니까 그 얘기를 못 했죠. 매번 제가 사면 남편이 자존심 상할까 봐 처음에는 저도 돈 없는 척했는데 나중에는 그냥 돈 있는 사람이 샀어요.
▼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셨나요.
어려움을 전혀 모르고 지냈어요. 아버지는 퇴직하기 전 건설 회사에 다니셨어요. 어머니는 은행에 다니다 결혼하면서 직장을 그만두고 육아에 힘쓰셨고요. 제가 맏이고 남동생과 여동생이 한 명씩 있거든요. 어머니는 맛있는 걸 숨겨뒀다가 남동생에게 주기도 하셨지만 비교적 차별 없이 자식들을 대해주셨어요.
▼ 안 지사가 반미청년회 사건으로 수감된 동안에도 자주 만나러 갔나요.
일주일에 한 번은 면회하러 갔을 거예요. 춘천 집에서 지내며 자주 갔던 기억이 나요.
▼ 친정 부모님은 안 지사가 그때 군대 간 줄 아셨다고 들었어요.
제 졸업식 날 부모님에게 처음 남편을 인사시켰어요. 그런데 한두 달 뒤에 어른들에게 미처 인사드릴 겨를도 없이 잡혀 들어갔어요. 부모님에게 사실대로 말씀드리기가 곤란해 남자친구가 군대 갔다고 둘러댔죠. 그랬더니 아버지가 “인사도 안 하고 군대 가, 이놈이” 하면서 괘씸해하셨어요. 남편이 감옥에서 나온 다음엔 제대했다고 얘기했어요. 결혼할 때쯤 사실대로 말씀을 드렸죠.
▼ 친정 부모님이 결혼을 허락하시던가요.
어머니가 반대하셨어요. 고생할 게 눈에 훤하다고요. 아버지는 오히려 “남자가 고생하더라도 하고 싶은 일을 해야지. 옳다고 생각하면 해야지” 하시며 결혼을 승낙하셨어요.
▼ 결혼 준비를 하면서 어려움은 없었나요.
그 무렵 남편이 김덕룡 의원실에 들어갔어요. 결혼하려고요. 감옥에 갔다 오고 대학을 휴학 중이라 직장 구하기가 힘들었는데 고려대 선배인 김영춘 (현 더불어민주당 소속) 의원이 소개해주셨어요. 저는 당시 남편보다 1~2년 먼저 국회에 들어가 전남 무안이 지역구였던 박석무 의원의 비서관으로 일하고 있었고요. 남편은 집도, 패물도 준비할 형편이 안 됐어요. 제가 융자를 받아 전셋집을 구하고 큐빅 반지를 사서 나눠 꼈죠. 친정어머니에게는 남편이 다이아 반지를 해준 것처럼 말하고요. 어머니는 3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남편이 어머니에게 잘했어요. 멀리 떨어져 있어서 자주 뵙지 못한 게 가장 안타깝죠(그녀의 두 눈엔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 결혼 20주년을 기념한 ‘리마인드 웨딩’ 때는 진짜 다이아 반지를 받으셨나요.
결혼식을 다시 한 건 아니에요. 제 생일날 사진관에서 예복을 빌려 입고 기념사진을 찍었어요. 예전에 가짜 다이아 반지를 도둑맞아 반지만 새로 맞췄고요. 지금 낀 반지가 그거예요. 14k인데 제 반지엔 1부 다이아몬드를 박았어요. 깨알만 하지만 남편은 그것도 아깝다며 안 넣었고요.
▼ 서로 호칭을 어떻게 하나요.
연애할 땐 나이가 같으니까 이름을 불렀어요. ‘주원아’ ‘희정아’ 하고요(웃음). 결혼한 뒤 남편은 ‘여보’라고 부르는데 저는 지금도 ‘희정 씨’라고 불러요. 그 때문에 시어머니에게 많이 야단맞았는데 잘 고쳐지지 않아서 호칭 없이 얘기할 때가 많아요.
▼ 평소 남편과 대화를 많이 하시는 편인가요.
연애할 때도, 결혼해서도 대화를 참 많이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되돌아보니 대화를 나눴다기보다 남편이 일방적으로 말하는 걸 제가 들어준 느낌이 들었어요(웃음).
▼ 집안일을 잘 도와주시나요.
20대 때는 시간이 좀 많아서 집안일을 거들어주곤 했어요. 남편이 마음먹으면 요리를 잘해요. 제가 교직에 있을 때 여교사들이 저희 집에서 모인 적이 있는데 달걀 프라이를 얹은 김치볶음밥 여덟 접시를 뚝딱 만들어 내온 적도 있어요. 지금은 생각할 게 많고 시간적으로도 여유가 없어서 엄두를 못 내고 있죠.
▼ 부인에게 안 지사는 어떤 존재입니까.
결혼 전에는 제 자신이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사람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결혼해서 아이를 키우다 보니 혼란스러웠어요. 1992년부터 10여 년간 고등학교에서 사회를 가르쳤는데, 교직에 있으면서 남자애 둘을 키우고 살림까지 하는 게 너무 힘들었거든요. 새벽에 일어나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맡기고 출근했다가 퇴근하면서 데려와 씻기고 먹이고 하다 보니 몸이 지치더라고요. 남편 도움 없이도 잘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의지대로 안 되니까 제 자신에 대한 회의가 들었어요. 남편에 대한 분노도 일었고요. 처음에는 ‘너 정말 나쁜 놈이다’ 하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어요. 그때 제 소원이 일주일에 두 번만 네 식구가 같이 밥 먹는 거였어요. 그 얘기를 전하면 딱 일주일 갔어요. 계속 피치 못할 일이 있다며 남편이 나가니까 제 소원은 결국 없던 일이 되는 거예요. 남편과의 힘든 결혼 생활을 통해 저를 돌아보면서 깨달은 게 많아요. ‘공부나 책으로 얻은 지식은 인생을 살면서 도움이 안 된다는 것, 부부가 동등한 주체로서 사는 방법이나 자세 같은 거요. 그런 의미에서 남편은 살면서 저를 돌아보게 한 인생의 거울이기도 하고, 제게 많은 걸 일깨워준 스승이기도 하죠. 우리 사회에서 여자가, 특히 엄마가 주체적으로 살려면 참 많은 것들이, 많은 도움이 필요하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남자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 안 지사는 언제부터 몹시 바빠졌나요.
1993년 큰아이를 낳으면서부터였을 거예요. 그때 노무현 대통령을 만났으니까요. 저는 결혼해서 남편과 같이 산 것 같지 않아요. 남편과 노무현 대통령과 제가 삼각관계를 이루며 항상 같이 사는 듯한 기분이었어요. (노 대통령을) 미워할 수는 없고 서운하긴 했죠. 남편을 뺏어간 것 같은 느낌이었거든요.
▼ 남편이 노 전 대통령을 만나 다시 정치 활동을 할 때 반대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는 주의인데 남편이 그 일을 하고 싶어했어요. 나중에도 (반대하지 않은 걸) 후회하진 않았던 것 같아요.
▼ 참여정부 시절 안 지사가 공직을 마다했는데요.
그때는 어쩔 수 없었던 부분이 있었죠. 복권도 되지 않았을 때고, 언론에서 노 대통령이 많이 시달리실 때여서 (공직에) 안 나가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나가면 잃는 게 더 많고, 대통령께도 너무 부담이 될 것 같았어요.
▼ 참여정부 집권 초기 안 지사가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1년간 복역했을 때 ‘독박을 썼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사실인가요.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정치 뇌물을 받은 게 아니에요. 선거에 필요한 후원금을 받아서 영수증 처리를 제대로 했으면 정치자금법에 안 걸릴 수 있었는데, 영수증 처리를 못 했기 때문에 나중에 그게 불법자금이 돼서 정치자금법 위반이 된 거예요. ‘독박 썼다’는 얘기는 과장된 것 같고, 창구를 이 사람으로 단일화해서 법적 책임을 졌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아요. 이 사람이 (후원금) 창구이기는 하지만 다른 분들도 (후원금을) 받았을 거 아니에요. 그걸 다 모아서 안희정으로 하나의 창구화를 한 거죠.
▼ 그때 심정이 어떠셨어요.
남편이 (노무현 대통령 옆에서) 1993년부터 햇수로 17년을 함께했어요. 노 대통령이 무명이어서 부산에서 홀대받으며 갖은 고생을 다 했죠. 그 17년 동안 다 떠나가서 남편 혼자 남아 있었던 적도 많아요. 그걸 다 이겨 냈더니 (후원금 문제를) 또 남편 혼자 책임져야 되니까 억울하고 분하고 속상하고 서운하기도 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는 흐름이라는 걸 인정하고 받아들였어요. 그렇게 정리하는 게 맞지 싶었고요.
▼ 안 지사가 감옥에 있는 동안 어떻게 생활하셨나요.
남편의 영치금으로 생활을 했어요. 많은 분들이 안타까우니까 영치금을 넣어주셨는데 남편이 감옥 안에서 그걸 잘 모아뒀다가 한 달에 한 번씩 저에게 줬어요. 그 돈으로 남편에게 책도 넣어주고 저와 아이들의 생활비로도 썼죠.
▼ 안 지사에게 남편이자 아빠로서 몇 점을 주고 싶으세요.
정치인으로서는 98점인데 남편과 아버지로서는 한 60점 정도예요.
▼ 아이들과 잘 놀아주시지 않았나요.
남편이 운동을 좋아해요. 중학교 시절엔 농구부 주장이었어요. 그런데 집에 있어야 놀아주죠. 아이들은 부모와 놀면서 즐거움을 배우는 거지 기술을 배우는 게 아니에요. 즐거운 기억이 있어야 애착을 갖게 되는데, 아빠하고 뭘 즐겁게 해본 경험이 없어서인지 작은애는 운동보다 게임을 좋아해요. 큰애는 축구를 좋아하고 굉장히 잘해요.
▼ 아이들이 말썽 부린 적은 없나요.
초등학교 때는 말썽 많이 부리고 개구지고 싸움하고 다니고 그랬어요. 제가 늘 주머니에 연고를 갖고 다녔을 정도예요. 둘이 번갈아가면서 다쳤어요. 정형외과에서 “어제 깁스 풀었는데 오늘은 또 왜 오셨어요?”라고 묻기에 “어제는 오른발이고 오늘은 왼발이에요”라고 한 적도 있어요. 두 아이를 쫓아다니느라 힘들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둘 다 사람이 됐죠. 사람은 역시 나이가 좀 들어야 해요(웃음).
▼ 아이들에게 사교육을 시키셨나요.
애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적엔 제가 퇴근할 때까지 있을 데가 없어서 학원으로 돌렸는데 중·고등학교 때는 사교육을 시킨 적이 없어요. 학부모에게 사교육을 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입학을 허가하는 대안학교에 다녔거든요. 선생님들이 다 인품이 훌륭하셔서 아이들이 그 학교에 다니며 밝아진 거예요. 너무도 감사한 분들이죠.
▼ 두 아들 다 군 복무를 마쳤습니까.
큰애는 제대해서 복학했고, 작은애는 군대 가려고 휴학한 지 6개월 됐어요. 지난해 8월 운전병으로 강원도 철원에 있는 부대에 갔는데 이틀 있다가 돌아왔어요. 헌혈 4번에 봉사 활동 시간을 이수해서 운전병이 됐는데 스트레스 받고 힘들어서 건선이 재발한 거예요. 아이가 중대장님 손을 붙들고 꼭 ‘군필’ 해야 한다고 그랬더니, 상태가 심하니 치료받고 다시 오라고 했대요. 지금은 충남 홍성에 있는데, 3월 초에 재검 받고 다시 군대에 갈 거예요.
▼ 2010년 도지사가 됐을 때는 재산을 4억원으로 신고했는데 2014년 재선되고 나서는 8억원으로 신고했더라고요. 재산이 4년 사이 두 배가 됐습니다.
2014년에 재산이 8억원으로 신고된 건 부모님 아파트와 예·적금이 포함돼서 그래요. 실제 재산은 5억원 내외예요. 남편이 제게 월급을 꼬박꼬박 갖다 준 게 도지사가 되고 나서부터예요. 월급을 받아 매달 열심히 저축하고 있습니다.
▼ 충남지사 후보로 출마했을 때는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했어요. 정치인들이 국회의원 출마는 많이 하는데 행정직을 맡을 생각은 별로 안 하잖아요. 그런데 제 생각에는 행정을 해보지 않고서는 국민이 겪는 고충이나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 것 같아요. 굉장히 새로운 시도고 배울 것이 많을 것 같아서 “좋은 선택인 것 같다”고 칭찬해줬어요.
▼ 충남지사로서 남편의 최고 업적을 꼽는다면.
열심히 공들인 효과가 가장 눈에 띄지 않는 게 농업인데 지난 6년 내내 3농 혁신에 매진한 점을 높이 평가해요. 충남에서는 농업이 가장 중요하거든요. 또 요즘 미세먼지 문제가 심각한데 전국에서 화력발전소가 가장 많은 지역이 충남이래요. 그럼에도 충남은 서울에 비해 미세먼지에 대한 기준이 너무 약했는데 그 기준을 강화한 것도 남편의 업적이죠. 무엇보다 환자들의 생명을 골든 타임인 5분 안에 가서 구할 수 있게 닥터 헬기를 도입한 점을 칭찬해주고 싶어요. 이 헬기가 도내 어디든 5분 안에 갈 수 있거든요.
▼ 안 지사의 부모님이 논산에서 철물점을 하시기 전 농사를 지으셨다고 들었어요. 그래서인지 농부들의 마음을 잘 헤아리신다는 평가를 도민들로부터 받고 있더군요.
예전에 유세를 할 때도 자기가 정치를 하는 건 시골에서 아직 소를 키우는 외삼촌과 농사를 짓는 친구들에 대한 우정이라고 얘기했는데 그 말이 참 감동적이었어요(웃음).
▼ 공직자의 아내라면, 마음가짐도 좀 다를거 같아요.
남편의 월급은 세금이라는 생각을 늘 마음속에 새기고 살아요. 공관 유지비도 결국 세금으로 충당되는 거니까 아끼려는 노력을 많이 해요. 아주 춥지 않으면 공관을 돌아다니면서 보일러를 끄는데 관리해주시는 분이 자꾸 켜요. 이유를 여쭤봤더니 제가 하도 꺼서 보일러가 망가질 수 있다고, 망가지면 돈이 더 든다고, 제발 끄지 말라고 당부를 하시더라고요.
▼ 내조를 어떻게 하시나요.
집에서는 주로 아침밥을 잘 먹입니다. 남편이 아침은 집에서 먹거든요. 그리고 제가 잘하는 건 남편 얘기를 잘 들어주고 기분을 풀어주는 거예요. 열심히 했는데 주위에서 공격이나 비난을 받으면 화가 나잖아요. 그럴 때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들으면서 화가 풀리고 마음결이 정돈될 수 있게 조언을 해요. 그건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내조고, 지난 6년 동안 공직자 아내로서의 밥값이죠. 남편이 몸과 마음 모두 건강해야 도민들에게 유익한 도정을 해나갈 테니까요.
▼ 외부 활동도 하시나요.
제가 사람들 모르게 개인적으로 아동 복지시설을 몇 년 다녔어요. 재능기부로 아동 상담을 하고 있거든요. 그 보육원에서는 제가 누군지도 몰라요. 그냥 동네 아줌마가 봉사 활동하러 왔다고 하고 다녔거든요. 사모님 모임 같은 데는 가능하면 안 나갔어요. 낯가림이 심해서 저를 모르는 곳이 편하고 좋거든요. 그런 데 가서 봉사 활동을 하면서 심리 상담과 정신분석 공부를 계속하고 있어요. 그동안 석사 학위는 땄는데 박사과정은 못 할 것 같아서 혼자 공부해요.
▼ 만일 퍼스트레이디가 된다면 어떤 일을 꼭 해보고 싶습니까.
퍼스트레이디가 되든, 안 되든 제가 하고 싶은 일은 보육시설의 아이들에게 따뜻하고 든든한 울타리가 돼주는 거예요. 부모 없이 살아나가는 어린이들만큼 취약한 계층이 있을까 싶어요. 정말 힘든 아이들이 많거든요. 제가 상담하는 한 아이는 일곱 살 때 아버지가 자기를 버리고 가는 마지막 모습을 본 거예요. 자기가 버려진 걸 기억하면서 그 분노와 슬픔과 아픔과 불안감 때문에 손가락을 자꾸 물어서 열 손가락을 모두 밴드로 감아놨어요. 취약한 부분을 우리가 잘 보듬지 않으면 그 결과가 어디서 어떻게 폭발할지 몰라요.
그녀에게 ‘안희정은 OOO이다’에서 빈칸을 어떻게 채우고 싶은지 묻자 “국민에게 미래다. 아주 좋은 상품이니까”라는 답이 환한 미소와 함께 돌아왔다. 그녀는 남편이 대통령이 되면 “기본적으로 안보와 외교에 힘쓰면서 경제 살리기에 방점을 둘 것”으로 내다봤다. 그런 안희정 충남지사가 꿈꾸는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일까.
“배고픈 사람 없고, 억울한 사람 없고, 아픈데 병원 못 가는 사람 없는 나라요. 이웃을 믿을 수 있고 상식이 통하는 평범하지만 강하고 행복한 나라요.”
그녀는 새해 소망에도 평범하지만 강한 염원을 담았다.
“남편과 아이들, 시부모님, 친정아버지가 모두 건강하면 좋겠고 (대권에 도전하는) 남편이 갈 수 있는 데까지 열심히 달리면 좋겠어요. 결과가 무엇이든 후회하지 않게요.”
사진 조영철 기자
디자인 김영화
안희정(52) 충남지사가 부인 민주원(53) 씨를 두고 한 말이다. 안 지사와 민씨는 고려대학교 83학번 동기로 둘 다 운동권 학생이었다. 캠퍼스 커플이던 이들은 안 지사가 반미청년회 사건으로 10개월간 옥살이를 한 이듬해인 1989년 웨딩마치를 울렸다. 당시 안 지사는 통일민주당의 김덕룡 국회의원 비서로 정치에 입문했다. 하지만 안 지사의 이후 행보는 평탄하지 않았다. 1990년 민주당 이철 사무총장 비서로 근무하다 기성 정치에 환멸을 느껴 정계를 떠났던 그는 1992년 제14대 총선에서 낙선한 노무현 전 대통령을 도우며 정치 활동을 재개하는데, 2003년 참여정부 집권 초기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구속돼 1년간 복역한다. 노 전 대통령의 대선 캠프에서 살림살이를 총괄하며 참여정부 출범에 혁혁한 공을 세웠으나 출소 후 그는 공직을 스스로 마다하고 거의 백수로 지냈다. 노 전 대통령에게 부담을 주기 싫다는 것이 이유였다.
안 지사가 정치인으로서 소신과 의리를 지키는 동안 살림과 육아는 고등학교 교사이던 민씨가 책임졌다. 이들 부부에겐 1993년, 1996년생인 두 아들이 있다. 직장맘의 삶이 녹록지 않았으련만 남편의 정치 행보를 지지한 민씨는 2010년 남편이 충남지사가 되고 나서도 지역 봉사 활동에 집중하며 소리 없는 내조를 고집했다.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그녀를 두고 주변 사람들은 “걸 크러시(여성이 동성에게 느끼는 강한 호감)를 유발하는 여걸”이라고 입을 모았는데,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왜 이런 말을 듣는지 짐작이 갔다. 그녀를 만난 곳은 안 지사의 새 저서 〈콜라보네이션〉과 추억의 사진들이 전시된 서울 마포구의 작은 책방이었다.
▼ 첫 인터뷰인데도 긴장하는 기색이 없으시네요.
티가 나지 않을 뿐이에요. 등에서 땀나고 있어요(웃음).
▼ 호적상으로는 안 지사보다 한 살 연상이시던데요.
동갑이에요. 저희 둘 다 1964년생인데 남편이 출생신고를 1년 늦게 해 제가 연상으로 알려져 있죠.
▼ 촛불 집회에 매주 참석하신다고 들었어요.
지난 두 주는 체력이 달려서 못 나갔어요. 갈 때마다 큰 감동을 받아요. 우리가 잊고 있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내가 나라의 주인’이라는 의식을 되찾아가는 시민들의 모습에서요. 고등학교 때는 시민혁명으로 시민 권력을 찾은 서양 역사가 부러웠고, 대학교 때는 ‘왜 위정자들이 겁 없이 함부로 시민과 국가를 통제할까? 우리나라는 왜 유럽처럼 민주주의가 정착하지 못할까?’라는 의문이 있었거든요. 제발 (탄핵 재판에서) 시민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결과가 나오길 바랍니다. 간절한 바람이 무산돼 뼛속 깊이 아픈 기억으로 남는 일이 없도록요.
▼ 안 지사가 1월 9일 자신의 도전은 “우리 사회의 젊은 도전”이라고 포부를 밝히셨습니다. 대권 도전 결심을 굳히기 전 부인과 상의했나요.
(더불어민주당의 대선 후보) 경선에 출마할 생각이라고 얘기하기에 처음에는 혼란스러웠어요.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같이 고민했죠. 남편은 “이 경쟁이 한쪽을 파괴하기 위한 거라면 피해야겠지만, 서로 성장할 수 있는 무대”라면서 “굳이 피하거나 나쁘게 생각할 일은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하더라고요. 남편의 생각을 듣고 보니 두려워하면서 피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승복하고 이긴 분을 열심히 응원할 거니까요.
▼ 한 사람의 유권자로서 안 지사를 지지하는 이유를 말씀해주신다면.
다방면에서 능력이 있고 소통을 잘하거든요. 1993년 어려운 시절에 캠프를 꾸릴 때부터 지금까지 어떤 문제가 닥쳤을 때 해결이 안된 적이 거의 없어요. 항상 문제를 잘 풀어가고 관계를 깊이 있게 맺어나가고 소통에 천재적인 소질이 있는 것 같아요. 지금 충남도의회에 새누리당 도의원이 더불어민주당 도의원보다 월등히 많은데도 (남편이 도정을 이끈) 6년 내내 한 번도 문제가 불거진 적이 없거든요. 업무 능력도 뛰어나서 최근 9개월 내내 도민들이 참여하는 전국 17개 광역 시도 단체장의 직무 수행 능력 평가에서 1등을 하고 있어요. 그런 점들 때문에 누구보다 일은 잘할 거라는 믿음이 생겼죠.
▼ 안 지사는 자신을 ‘밥’에 비유했는데 부인도 공감하십니까.
남편은 기본과 원칙을 굉장히 중요시하는 사람이에요. 어떤 상황에서든 능력을 발휘해 도움을 주는 사람이고요. 남편의 그런 성격이나 지향하는 바가 밥을 닮았어요. 밥은 한국인의 주식이고, 인간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에너지의 원천이잖아요. 콩나물비빔밥, 해장국밥, 잡채밥 등도 밥이 있어야 만들 수 있고, 갈비찜도 밥과 같이 먹으면 더 맛있듯이 우리에게 많은 도움이 되고 힘을 주는 꼭 필요한 존재라는 의미에서 밥 같은 사람이 맞는 것 같아요.
▼ 안 지사가 고교 시절 한 학교에서는 제적되고, 다른 학교는 중퇴를 해 결국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를 마쳤더군요.
남편이 중학교 3학년 때 우연히 함석헌 선생이 발간하던 잡지 〈씨알의 소리〉를 읽고 우리 사회 역사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게 됐대요. 그런데 이듬해인 1980년에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어요. 피 끓는 마음을 담아 (잡지사로) 편지를 보냈는데 편지 받은 분이 국가안전기획부에 잡혀 들어가면서 그 편지까지 문제가 된 거예요. 처음엔 편지 쓴 사람을 반정부 단체를 조직하려는 대학생으로 의심했는데 조사해보니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었던 거죠. 그런데도 교장 선생님에게 압력을 넣어 제적시킨 거예요. 이듬해 시부모님이 집에서 놀고 있는 아들을 설득해 서울서 대학을 다니던 시아주버님 집 근처 고등학교에 1학년으로 재입학을 시키셨고요. 남편은 1학년을 다시 다니는 것도 억울한데 고등학교에서 군사훈련을 시키니까 그런 분위기를 못 견디겠어서 스스로 학교를 그만둔 거예요. 대학은 가야겠다 싶어서 검정고시를 치른 거고요.
▼ 두 분이 대학교 1학년 때 도서관에서 처음 만났다고 들었어요.
3월이니까 입학 한지 며칠 안 됐을 때예요. 도서관 책상 맞은편 자리에 강원도 춘천에서 온 고향 친구가 앉아 있었어요. 서로 반갑게 인사하고 잠깐 잠이 들었는데 깨어나 보니 다른 사람이 친구 자리를 차지한 거예요. 자리 주인이 오면 곧 쫓겨나겠지 했는데 남편이 고향 친구와 친한 사이였어요. 그때 남편을 처음 소개받아 안면을 텄죠.
▼ 첫인상은 어땠나요.
얼굴이 창백했다는 기억밖에 없어요. 지금은 피부가 까무잡잡하지만 그때는 엄청 하얬어요.
▼ 두 분이 어떻게 사귀게 됐나요.
저희가 대학 다닐 때는 ‘인간’과 ‘국가’라는 두 필수과목을 국가 주도로 만들어 이걸 모두 듣지 않으면 졸업을 할 수 없었어요. 2학년 때 할 수 없이 두 과목 수강 신청을 하고 3~4월 내내 빠지다 시험 보기 일주일 전 마지막 강의에 들어갔는데 남편이 있었어요. 반갑게 인사를 하고 나서 강의를 듣는데, 복종심을 강요하고 철학이 없어야 된다고 가르치니까 듣고 있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교수가 등 돌리고 칠판에 글씨를 쓸 때 남편과 뒷문으로 빠져나왔죠. 둘이 풀밭에 앉아서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저런 수업을 왜 들어야 하느냐?”로 시작해 많은 얘기를 나눴는데 그게 본격적인 만남의 시작이었죠.
▼ 그날이 ‘1일’인가요.
그건 아니지만 같이 듣던 필수과목 강의실에 전보다 자주 들어갔죠. 거기 가면 만날 수 있으니까요. 그 전엔 남편 인상이 별로였어요. 제 고향 친구가 부모님이 보내주시는 하숙비와 용돈을 하루이틀에 술값으로 다 없애고는 한 달 내내 굶고 다녔어요. 안쓰러운 마음에 만나면 가끔 밥을 사줬죠. 그때마다 남편이 어느새 귀신같이 옆에 와 있는 거예요. 그럼 둘 다 사줄 수밖에 없잖아요. 학교 근처 고려다방으로 3백원짜리 커피 마시러 갈 때도 쫓아왔고요. 거의 1년을 그렇게 얻어먹고도 자기가 밥 한번을 안 샀어요. 그 때문에 좋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자꾸 보니 되게 반듯하더라고요. 생각하는 것도, 행동거지도요. 점점 호감을 갖게 됐죠.
▼ 어떤 행동에 끌리셨나요.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손수레를 끌고 지나가면 언덕배기까지 밀어주고서야 돌아왔어요. 아이들이 울고 있으면 가서 삼촌처럼 다독이고요. 또 시국에 대한 걱정이 많았는데 만나면 만날수록 생각이 깊고, 아는 게 많고, 가치관이 저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학생 운동을 하며 사이가 더 돈독해졌나요.
그렇죠. 당시에는 나가서 행동으로 보여주는 친구가 있고, 마음은 동조하지만 몸은 동조할 수 없는 친구가 있었는데 대다수의 마음은 하나였다고 생각해요. 그 가운데 성격 급한 사람이 행동하러 나간 거죠. 저희처럼.
▼ 데이트는 어떻게 했나요.
돈이 없어서 만날 걸었어요. 하도 걷다 보니 서울 시내의 웬만한 길을 다 걸었더라고요. 지도를 사서 저희가 걸은 길을 사인펜으로 표시해본 적이 있거든요(웃음). 실은 걷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겨울 추위는 참을 만했는데, 여름에는 땀범벅이 되니까 에어컨 바람 나오는 카페에 들어가 냉커피나 마시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어요. 남편이 돈 없는 것을 아니까 그 얘기를 못 했죠. 매번 제가 사면 남편이 자존심 상할까 봐 처음에는 저도 돈 없는 척했는데 나중에는 그냥 돈 있는 사람이 샀어요.
▼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셨나요.
어려움을 전혀 모르고 지냈어요. 아버지는 퇴직하기 전 건설 회사에 다니셨어요. 어머니는 은행에 다니다 결혼하면서 직장을 그만두고 육아에 힘쓰셨고요. 제가 맏이고 남동생과 여동생이 한 명씩 있거든요. 어머니는 맛있는 걸 숨겨뒀다가 남동생에게 주기도 하셨지만 비교적 차별 없이 자식들을 대해주셨어요.
▼ 안 지사가 반미청년회 사건으로 수감된 동안에도 자주 만나러 갔나요.
일주일에 한 번은 면회하러 갔을 거예요. 춘천 집에서 지내며 자주 갔던 기억이 나요.
▼ 친정 부모님은 안 지사가 그때 군대 간 줄 아셨다고 들었어요.
제 졸업식 날 부모님에게 처음 남편을 인사시켰어요. 그런데 한두 달 뒤에 어른들에게 미처 인사드릴 겨를도 없이 잡혀 들어갔어요. 부모님에게 사실대로 말씀드리기가 곤란해 남자친구가 군대 갔다고 둘러댔죠. 그랬더니 아버지가 “인사도 안 하고 군대 가, 이놈이” 하면서 괘씸해하셨어요. 남편이 감옥에서 나온 다음엔 제대했다고 얘기했어요. 결혼할 때쯤 사실대로 말씀을 드렸죠.
▼ 친정 부모님이 결혼을 허락하시던가요.
어머니가 반대하셨어요. 고생할 게 눈에 훤하다고요. 아버지는 오히려 “남자가 고생하더라도 하고 싶은 일을 해야지. 옳다고 생각하면 해야지” 하시며 결혼을 승낙하셨어요.
▼ 결혼 준비를 하면서 어려움은 없었나요.
그 무렵 남편이 김덕룡 의원실에 들어갔어요. 결혼하려고요. 감옥에 갔다 오고 대학을 휴학 중이라 직장 구하기가 힘들었는데 고려대 선배인 김영춘 (현 더불어민주당 소속) 의원이 소개해주셨어요. 저는 당시 남편보다 1~2년 먼저 국회에 들어가 전남 무안이 지역구였던 박석무 의원의 비서관으로 일하고 있었고요. 남편은 집도, 패물도 준비할 형편이 안 됐어요. 제가 융자를 받아 전셋집을 구하고 큐빅 반지를 사서 나눠 꼈죠. 친정어머니에게는 남편이 다이아 반지를 해준 것처럼 말하고요. 어머니는 3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남편이 어머니에게 잘했어요. 멀리 떨어져 있어서 자주 뵙지 못한 게 가장 안타깝죠(그녀의 두 눈엔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 결혼 20주년을 기념한 ‘리마인드 웨딩’ 때는 진짜 다이아 반지를 받으셨나요.
결혼식을 다시 한 건 아니에요. 제 생일날 사진관에서 예복을 빌려 입고 기념사진을 찍었어요. 예전에 가짜 다이아 반지를 도둑맞아 반지만 새로 맞췄고요. 지금 낀 반지가 그거예요. 14k인데 제 반지엔 1부 다이아몬드를 박았어요. 깨알만 하지만 남편은 그것도 아깝다며 안 넣었고요.
▼ 서로 호칭을 어떻게 하나요.
연애할 땐 나이가 같으니까 이름을 불렀어요. ‘주원아’ ‘희정아’ 하고요(웃음). 결혼한 뒤 남편은 ‘여보’라고 부르는데 저는 지금도 ‘희정 씨’라고 불러요. 그 때문에 시어머니에게 많이 야단맞았는데 잘 고쳐지지 않아서 호칭 없이 얘기할 때가 많아요.
▼ 평소 남편과 대화를 많이 하시는 편인가요.
연애할 때도, 결혼해서도 대화를 참 많이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되돌아보니 대화를 나눴다기보다 남편이 일방적으로 말하는 걸 제가 들어준 느낌이 들었어요(웃음).
▼ 집안일을 잘 도와주시나요.
20대 때는 시간이 좀 많아서 집안일을 거들어주곤 했어요. 남편이 마음먹으면 요리를 잘해요. 제가 교직에 있을 때 여교사들이 저희 집에서 모인 적이 있는데 달걀 프라이를 얹은 김치볶음밥 여덟 접시를 뚝딱 만들어 내온 적도 있어요. 지금은 생각할 게 많고 시간적으로도 여유가 없어서 엄두를 못 내고 있죠.
▼ 부인에게 안 지사는 어떤 존재입니까.
결혼 전에는 제 자신이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사람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결혼해서 아이를 키우다 보니 혼란스러웠어요. 1992년부터 10여 년간 고등학교에서 사회를 가르쳤는데, 교직에 있으면서 남자애 둘을 키우고 살림까지 하는 게 너무 힘들었거든요. 새벽에 일어나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맡기고 출근했다가 퇴근하면서 데려와 씻기고 먹이고 하다 보니 몸이 지치더라고요. 남편 도움 없이도 잘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의지대로 안 되니까 제 자신에 대한 회의가 들었어요. 남편에 대한 분노도 일었고요. 처음에는 ‘너 정말 나쁜 놈이다’ 하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어요. 그때 제 소원이 일주일에 두 번만 네 식구가 같이 밥 먹는 거였어요. 그 얘기를 전하면 딱 일주일 갔어요. 계속 피치 못할 일이 있다며 남편이 나가니까 제 소원은 결국 없던 일이 되는 거예요. 남편과의 힘든 결혼 생활을 통해 저를 돌아보면서 깨달은 게 많아요. ‘공부나 책으로 얻은 지식은 인생을 살면서 도움이 안 된다는 것, 부부가 동등한 주체로서 사는 방법이나 자세 같은 거요. 그런 의미에서 남편은 살면서 저를 돌아보게 한 인생의 거울이기도 하고, 제게 많은 걸 일깨워준 스승이기도 하죠. 우리 사회에서 여자가, 특히 엄마가 주체적으로 살려면 참 많은 것들이, 많은 도움이 필요하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남자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 안 지사는 언제부터 몹시 바빠졌나요.
1993년 큰아이를 낳으면서부터였을 거예요. 그때 노무현 대통령을 만났으니까요. 저는 결혼해서 남편과 같이 산 것 같지 않아요. 남편과 노무현 대통령과 제가 삼각관계를 이루며 항상 같이 사는 듯한 기분이었어요. (노 대통령을) 미워할 수는 없고 서운하긴 했죠. 남편을 뺏어간 것 같은 느낌이었거든요.
▼ 남편이 노 전 대통령을 만나 다시 정치 활동을 할 때 반대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는 주의인데 남편이 그 일을 하고 싶어했어요. 나중에도 (반대하지 않은 걸) 후회하진 않았던 것 같아요.
▼ 참여정부 시절 안 지사가 공직을 마다했는데요.
그때는 어쩔 수 없었던 부분이 있었죠. 복권도 되지 않았을 때고, 언론에서 노 대통령이 많이 시달리실 때여서 (공직에) 안 나가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나가면 잃는 게 더 많고, 대통령께도 너무 부담이 될 것 같았어요.
▼ 참여정부 집권 초기 안 지사가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1년간 복역했을 때 ‘독박을 썼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사실인가요.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정치 뇌물을 받은 게 아니에요. 선거에 필요한 후원금을 받아서 영수증 처리를 제대로 했으면 정치자금법에 안 걸릴 수 있었는데, 영수증 처리를 못 했기 때문에 나중에 그게 불법자금이 돼서 정치자금법 위반이 된 거예요. ‘독박 썼다’는 얘기는 과장된 것 같고, 창구를 이 사람으로 단일화해서 법적 책임을 졌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아요. 이 사람이 (후원금) 창구이기는 하지만 다른 분들도 (후원금을) 받았을 거 아니에요. 그걸 다 모아서 안희정으로 하나의 창구화를 한 거죠.
▼ 그때 심정이 어떠셨어요.
남편이 (노무현 대통령 옆에서) 1993년부터 햇수로 17년을 함께했어요. 노 대통령이 무명이어서 부산에서 홀대받으며 갖은 고생을 다 했죠. 그 17년 동안 다 떠나가서 남편 혼자 남아 있었던 적도 많아요. 그걸 다 이겨 냈더니 (후원금 문제를) 또 남편 혼자 책임져야 되니까 억울하고 분하고 속상하고 서운하기도 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는 흐름이라는 걸 인정하고 받아들였어요. 그렇게 정리하는 게 맞지 싶었고요.
▼ 안 지사가 감옥에 있는 동안 어떻게 생활하셨나요.
남편의 영치금으로 생활을 했어요. 많은 분들이 안타까우니까 영치금을 넣어주셨는데 남편이 감옥 안에서 그걸 잘 모아뒀다가 한 달에 한 번씩 저에게 줬어요. 그 돈으로 남편에게 책도 넣어주고 저와 아이들의 생활비로도 썼죠.
▼ 안 지사에게 남편이자 아빠로서 몇 점을 주고 싶으세요.
정치인으로서는 98점인데 남편과 아버지로서는 한 60점 정도예요.
▼ 아이들과 잘 놀아주시지 않았나요.
남편이 운동을 좋아해요. 중학교 시절엔 농구부 주장이었어요. 그런데 집에 있어야 놀아주죠. 아이들은 부모와 놀면서 즐거움을 배우는 거지 기술을 배우는 게 아니에요. 즐거운 기억이 있어야 애착을 갖게 되는데, 아빠하고 뭘 즐겁게 해본 경험이 없어서인지 작은애는 운동보다 게임을 좋아해요. 큰애는 축구를 좋아하고 굉장히 잘해요.
▼ 아이들이 말썽 부린 적은 없나요.
초등학교 때는 말썽 많이 부리고 개구지고 싸움하고 다니고 그랬어요. 제가 늘 주머니에 연고를 갖고 다녔을 정도예요. 둘이 번갈아가면서 다쳤어요. 정형외과에서 “어제 깁스 풀었는데 오늘은 또 왜 오셨어요?”라고 묻기에 “어제는 오른발이고 오늘은 왼발이에요”라고 한 적도 있어요. 두 아이를 쫓아다니느라 힘들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둘 다 사람이 됐죠. 사람은 역시 나이가 좀 들어야 해요(웃음).
▼ 아이들에게 사교육을 시키셨나요.
애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적엔 제가 퇴근할 때까지 있을 데가 없어서 학원으로 돌렸는데 중·고등학교 때는 사교육을 시킨 적이 없어요. 학부모에게 사교육을 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입학을 허가하는 대안학교에 다녔거든요. 선생님들이 다 인품이 훌륭하셔서 아이들이 그 학교에 다니며 밝아진 거예요. 너무도 감사한 분들이죠.
▼ 두 아들 다 군 복무를 마쳤습니까.
큰애는 제대해서 복학했고, 작은애는 군대 가려고 휴학한 지 6개월 됐어요. 지난해 8월 운전병으로 강원도 철원에 있는 부대에 갔는데 이틀 있다가 돌아왔어요. 헌혈 4번에 봉사 활동 시간을 이수해서 운전병이 됐는데 스트레스 받고 힘들어서 건선이 재발한 거예요. 아이가 중대장님 손을 붙들고 꼭 ‘군필’ 해야 한다고 그랬더니, 상태가 심하니 치료받고 다시 오라고 했대요. 지금은 충남 홍성에 있는데, 3월 초에 재검 받고 다시 군대에 갈 거예요.
▼ 2010년 도지사가 됐을 때는 재산을 4억원으로 신고했는데 2014년 재선되고 나서는 8억원으로 신고했더라고요. 재산이 4년 사이 두 배가 됐습니다.
2014년에 재산이 8억원으로 신고된 건 부모님 아파트와 예·적금이 포함돼서 그래요. 실제 재산은 5억원 내외예요. 남편이 제게 월급을 꼬박꼬박 갖다 준 게 도지사가 되고 나서부터예요. 월급을 받아 매달 열심히 저축하고 있습니다.
▼ 충남지사 후보로 출마했을 때는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했어요. 정치인들이 국회의원 출마는 많이 하는데 행정직을 맡을 생각은 별로 안 하잖아요. 그런데 제 생각에는 행정을 해보지 않고서는 국민이 겪는 고충이나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 것 같아요. 굉장히 새로운 시도고 배울 것이 많을 것 같아서 “좋은 선택인 것 같다”고 칭찬해줬어요.
▼ 충남지사로서 남편의 최고 업적을 꼽는다면.
열심히 공들인 효과가 가장 눈에 띄지 않는 게 농업인데 지난 6년 내내 3농 혁신에 매진한 점을 높이 평가해요. 충남에서는 농업이 가장 중요하거든요. 또 요즘 미세먼지 문제가 심각한데 전국에서 화력발전소가 가장 많은 지역이 충남이래요. 그럼에도 충남은 서울에 비해 미세먼지에 대한 기준이 너무 약했는데 그 기준을 강화한 것도 남편의 업적이죠. 무엇보다 환자들의 생명을 골든 타임인 5분 안에 가서 구할 수 있게 닥터 헬기를 도입한 점을 칭찬해주고 싶어요. 이 헬기가 도내 어디든 5분 안에 갈 수 있거든요.
▼ 안 지사의 부모님이 논산에서 철물점을 하시기 전 농사를 지으셨다고 들었어요. 그래서인지 농부들의 마음을 잘 헤아리신다는 평가를 도민들로부터 받고 있더군요.
예전에 유세를 할 때도 자기가 정치를 하는 건 시골에서 아직 소를 키우는 외삼촌과 농사를 짓는 친구들에 대한 우정이라고 얘기했는데 그 말이 참 감동적이었어요(웃음).
▼ 공직자의 아내라면, 마음가짐도 좀 다를거 같아요.
남편의 월급은 세금이라는 생각을 늘 마음속에 새기고 살아요. 공관 유지비도 결국 세금으로 충당되는 거니까 아끼려는 노력을 많이 해요. 아주 춥지 않으면 공관을 돌아다니면서 보일러를 끄는데 관리해주시는 분이 자꾸 켜요. 이유를 여쭤봤더니 제가 하도 꺼서 보일러가 망가질 수 있다고, 망가지면 돈이 더 든다고, 제발 끄지 말라고 당부를 하시더라고요.
▼ 내조를 어떻게 하시나요.
집에서는 주로 아침밥을 잘 먹입니다. 남편이 아침은 집에서 먹거든요. 그리고 제가 잘하는 건 남편 얘기를 잘 들어주고 기분을 풀어주는 거예요. 열심히 했는데 주위에서 공격이나 비난을 받으면 화가 나잖아요. 그럴 때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들으면서 화가 풀리고 마음결이 정돈될 수 있게 조언을 해요. 그건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내조고, 지난 6년 동안 공직자 아내로서의 밥값이죠. 남편이 몸과 마음 모두 건강해야 도민들에게 유익한 도정을 해나갈 테니까요.
▼ 외부 활동도 하시나요.
제가 사람들 모르게 개인적으로 아동 복지시설을 몇 년 다녔어요. 재능기부로 아동 상담을 하고 있거든요. 그 보육원에서는 제가 누군지도 몰라요. 그냥 동네 아줌마가 봉사 활동하러 왔다고 하고 다녔거든요. 사모님 모임 같은 데는 가능하면 안 나갔어요. 낯가림이 심해서 저를 모르는 곳이 편하고 좋거든요. 그런 데 가서 봉사 활동을 하면서 심리 상담과 정신분석 공부를 계속하고 있어요. 그동안 석사 학위는 땄는데 박사과정은 못 할 것 같아서 혼자 공부해요.
▼ 만일 퍼스트레이디가 된다면 어떤 일을 꼭 해보고 싶습니까.
퍼스트레이디가 되든, 안 되든 제가 하고 싶은 일은 보육시설의 아이들에게 따뜻하고 든든한 울타리가 돼주는 거예요. 부모 없이 살아나가는 어린이들만큼 취약한 계층이 있을까 싶어요. 정말 힘든 아이들이 많거든요. 제가 상담하는 한 아이는 일곱 살 때 아버지가 자기를 버리고 가는 마지막 모습을 본 거예요. 자기가 버려진 걸 기억하면서 그 분노와 슬픔과 아픔과 불안감 때문에 손가락을 자꾸 물어서 열 손가락을 모두 밴드로 감아놨어요. 취약한 부분을 우리가 잘 보듬지 않으면 그 결과가 어디서 어떻게 폭발할지 몰라요.
그녀에게 ‘안희정은 OOO이다’에서 빈칸을 어떻게 채우고 싶은지 묻자 “국민에게 미래다. 아주 좋은 상품이니까”라는 답이 환한 미소와 함께 돌아왔다. 그녀는 남편이 대통령이 되면 “기본적으로 안보와 외교에 힘쓰면서 경제 살리기에 방점을 둘 것”으로 내다봤다. 그런 안희정 충남지사가 꿈꾸는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일까.
“배고픈 사람 없고, 억울한 사람 없고, 아픈데 병원 못 가는 사람 없는 나라요. 이웃을 믿을 수 있고 상식이 통하는 평범하지만 강하고 행복한 나라요.”
그녀는 새해 소망에도 평범하지만 강한 염원을 담았다.
“남편과 아이들, 시부모님, 친정아버지가 모두 건강하면 좋겠고 (대권에 도전하는) 남편이 갈 수 있는 데까지 열심히 달리면 좋겠어요. 결과가 무엇이든 후회하지 않게요.”
사진 조영철 기자
디자인 김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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