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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coverstory

이현이니까

editor_fashion 안미은 기자 editor_feature 정희순

2017. 06. 26

정지 사진으로만 만났던 이현이가 자기 이야기를 한다. 목소리가 신중하다. 익숙한 런웨이가 아니니 실수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에게선 어떤 주저함도 느껴지지 않는다. 톱 모델 이현이니까. 엄마 이현이니까.





“또 만났네요.”

그녀가 먼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지난달 기획 기사를 준비하면서 모델이라는 직업과 관련한 간단한 인터뷰를 한 지 꼭 한 달여 만이다. 당시 이현이(34)는 자신이 어떻게 모델이라는 직업을 사랑하게 됐는지, 또 사랑하고 있는지에 대해 솔직한 이야기를 전했다. 그러면서 해외 무대를 누비던 톱 모델치고 비교적 이른 결혼과 출산을 경험하면서 겪었던 내적 고민들도 자연스레 털어놓았는데, “선택을 후회한 적 없다”며 활짝 웃던 그녀의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물론, 후회가 생길 새도 없이 결혼 전보다 더 바빠진 ‘여전한 톱 모델’ 이현이이기에 가능한 대답이겠지만 말이다. 첫 번째 질문으로 한 달 새 달라진 일상이 있냐고 묻자 “수다가 늘었다”며 최근 라디오 프로그램의 고정 게스트가 된 이야기부터 전했다.

“라디오 출연이 참 재밌는 것 같아요. 청취자들의 사연을 소개하면서 제 이야기를 부담 없이 할 수 있으니까요. 얼마 전부터 KBS 쿨FM 〈  이수지의 가요광장 〉 토요일 코너에 황재근 패션 디자이너와 함께 출연하게 됐어요. 어떤 청취자께서 ‘남편이 삼시 세끼를 집에서 챙겨달라고 한다’는 사연을 보내주셨는데 그걸 소개하다가 제가 다 속이 터지더라고요(웃음). 한 끼 정도는 외식을 하거나 빵, 간식 등으로 간단히 때울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사연 속 남편분에 비하면 제 남편은 무척 훌륭하죠. 평일엔 회사 일이 바빠 삼시 세끼 모두 밖에서 해결하고 들어오거든요(웃음).”



그녀는 2012년 대기업 회사원이던 홍성기 씨와 결혼해 3년 뒤 아들 윤서 군을 출산했다. 그때만 해도 모델 업계에 종사하는 지인들은 이현이의 빠른 은퇴를 예언했지만 현재 그녀는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예능 프로그램은 물론이고 광고계의 러브 콜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살뜰한 성격의 남편은 요즘도 이현이의 스케줄을 줄줄 꿰고 있을 정도로 ‘내조 일등 공신’이다. 

“100점짜리 남편이자 아빠죠. 회사 일이 무척 바쁜데도 매일 퇴근 후에 아들을 직접 목욕시켜요. 모델 일을 하다 보면 주말에 촬영이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럴 때마다 흔쾌히 독박 육아를 감당해주는 고마운 사람이죠. 아, 물론 그만큼 생색도 많이 내는 편이에요(웃음). 예전엔 남편이 서운하리만큼 아이가 저만 따랐는데, 요즘은 아빠랑 자주 시간을 보내면서 교감하기 시작하더라고요. 아이와 분리된 침실을 사용하자던 남편도 요즘은 한시도 떨어져 있기 싫다면서 같이 데리고 자자고 할 정도죠.”

사실 알고 보면 아들 윤서는 SNS상에서 상당한 팔로어 수를 거느린 인플루언서(영향력 있는 개인)다. 부부가 작년 7월부터 운영 중인 윤서 군의 인스타그램 계정의 팔로어 수는 4만7천 명이 훌쩍 넘었다. ‘성장 앨범’이라는 타이틀답게 이곳에는 갓난아기 때 찍은 사진부터 요즘의 일상들까지도 사진으로 기록된다.

“처음엔 제 계정에 윤서 사진을 올리곤 했어요. 그런데 문득 언젠가 이 아이도 부모의 품을 떠나 분리될 존재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 이미지가 너무 아이 엄마로만 고착화되진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고요. 그런 고민을 하다가 아이의 추억만 남기는 계정을 별도로 만들게 된 거죠.”

이현이의 아이라고 하면 응당 화려한 룩을 선보이는 패션 키즈를 기대하게 되지만, 오히려 사진 속 윤서의 모습은 수수한 편이다. 아이는 아이다울 때 가장 예쁘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기 때문. 세상의 모든 화려한 옷은 다 입어본 모델이지만, 일상에선 집 근처 대형 마트에서 내복을 사다 입히고 이따금 좋은 자리에 초대받았을 때 지인에게 선물받은 옷을 꺼내 입히는 평범한 엄마다.

“제가 다른 엄마들보다 아이 패션에 대해 정보가 많을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에요. 저보다 훨씬 정보가 많은 고수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물론 저 역시 다른 엄마들처럼 쇼핑할 때 아이 옷을 보는 비중이 높은 건 사실이지만, 생전 처음 들어보는 브랜드도 엄청 많더라고요. 요즘은 일주일에 한 번씩 윤서랑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아이와 함께하는 체육 수업을 수강하고 있어요. 그곳에서 만난 전업맘들에게 고급 정보를 많이 얻고 있죠.”

아들 윤서를 낳고 나서 그녀는 눈에 띄게 눈물이 없어졌다고 한다.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완전히 다른 차원의 사람이 된 것 같다고 했다.

“아 이를 키우면서 가장 크게 깨달은 건 ‘겪어보지 않고서 절대 함부로 말하지 말자’예요. 제가 퍼펙트맘을 꿈꿨던 건 아니지만, 나름의 육아 원칙을 세웠던 것들이 몇 가지 있어요. 아무리 육아가 힘들어도 휴대폰으로 영상을 보여주진 말자, 아무리 화가 나도 아이에게 소리는 지르지 말자 같은 것들요. 예전에는 그런 엄마들을 보면 ‘대체 왜 그러지?’ 하고 생각했는데 요즘 제 모습이 딱 그렇더라고요(웃음).”





보여주고 싶은 게 많은 엄마
모델이 아니었다면 이현이에겐 어떤 삶이 펼쳐졌을까. 경제학과를 졸업했으니 아마도 은행원이 되었거나 회사에 취직해 커리어우먼의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대학 졸업 전 모델로 데뷔한 그녀는 오늘의 자신을 ‘행운아’라고 말한다.

“전 세계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다른 이들이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만났고, 또 겪었으니까요. 그게 모델이라는 직업이 제게 준 가장 큰 장점이자 기회가 아닐까 싶어요.”

이 현이가 아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도 이와 같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가 아니라 ‘그럴 수도 있어’의 삶. 넓디넓은 세상 속에서 다양성을 존중하며 나름의 방식대로 삶의 가치관을 세우는 일을 응원하고 싶은 것이 엄마 이현이의 마음이다. 그런 점에서 이현이가 지나쳐온 세계의 여러 도시 중 아들 윤서에게 가장 보여주고 싶은 곳은 뉴욕이다. 개성 넘치는 사람들이 모여 각기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며 끊임없이 성장하는 곳. 예전에는 ‘속물적인 도시’라며 ‘파리 러버’를 자청했던 그녀지만, 다양성의 공존을 가르치기에 뉴욕만 한 곳이 또 없을 것 같다.

“남편이 워낙 여행을 좋아해서 요즘도 윤서를 데리고 종종 해외여행을 가곤 해요. 7월에도 또래 아이를 키우는 두 가족과 다낭으로 여행을 가기로 했죠. 윤서를 데리고 가면 둘이 떠날 때보다 몇 배는 더 힘들지만 거기서 오는 행복과 만족이 큰 것 같아요. 아이에게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기도 하고요.”

과거 해외 무대를 누비면서 그녀가 느꼈던 아쉬움은 외국에 비해 우리나라는 역사의 가치를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다는 것. 패션만 해도 해외에서는 브랜드가 지닌 역사까지도 존중하는 분위기인데 반해 우리나라는 급격한 경제 성장을 바탕으로 외국을 선망하는 데만 급급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요즘 출연 중인 KBS 교양 프로그램 〈 천상의 컬렉션 〉 녹화가 즐거운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해당 프로그램에서 이현이는 고려시대 유물부터 신라시대 금관, 창덕궁, 훈민정음 해례본 등 우리 문화재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10여 분 남짓의 시간 동안 청중 앞에서 프레젠테이션하는 역할을 맡았다.

“제가 전문 방송인도 아닌 데다 프로그램이 토크쇼 형식이 아니라서 적응하는 데 애를 먹었던 것 같아요. 혼자 10분 동안 청중이 지루하지 않도록 신경 쓰면서 내용을 효과적으로 전달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처음엔 A4 용지로 12페이지 분량 정도 되는 발표 내용을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달달 외웠어요. 전면에 발표 내용이 보이긴 하지만 혹시라도 긴장해서 그걸 까먹을까 봐요. 그런데 저처럼 외워서 발표하는 분들이 아무도 없더라고요. 다들 내용을 숙지하고, 그걸 자연스럽게 전달하는 데 집중하는 거예요. 덕분에 저도 많이 배울 수 있었죠.”

그녀의 말에서 이제 막 대학에 입학한 새내기 같은 설렘이 전해졌다. 런웨이에서, 카메라 앵글 속에서 늘 당당하던 톱 모델 이현이와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그녀가 시계를 보더니 “트니트니 갈 시간이네!” 하고 외쳤다. “어디요?” 하고 되묻자, “문화센터에서 하는 유아 체육 수업요” 하며 웃었다. 윤서를 만나러 가는 길, 엄마 이현이는 또다시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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