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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사

유인경의 해피토크

쓸개 없는 인생, 브라보!

2009. 05. 11

쓸개 없는 인생, 브라보!

박방영 _ 꽃이 피는 날 _ 2009 _ 한지에 혼합재료 _ 105×70


“남자들 틈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가정생활까지 병행하려면 스트레스가 심하지 않으세요?”
사람들이 이렇게 물을 때마다 난 이렇게 답한다.
“평소 간, 쓸개를 냉장고에 빼놓고 다녀서 스트레스 잘 안 받아요. 흐흐흐.”
드디어 나는 ‘언행이 일치하는 삶’을 온몸으로 실천하는 인간이 됐다. 얼마 전 쓸개 제거 수술을 받아 정말 ‘쓸개 없는 사람’이 된 것이다. 지난해부터 속이 거북하고 독감에 걸릴 때면 꼭 위경련 증상을 동반해도 그저 나이가 들어서 그렇거니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식사량을 줄이거나 운동을 하려 노력하기는커녕 정확한 진단조차 받지 않았다.
지난해 건강검진을 받아보니 쓸개에 돌이 있다고 했다. 병원 측에서도 대수롭지 않게 “뭐, 돌은 저절로 없어지기도 하고…”라고 하기에 “뇌에 있던 돌이 아래로 내려왔나봐”라며 농담까지 했다.

돌보지 않은 몸으로부터의 복수
이렇게 무감각하고 무책임하고 무신경하게 살다가 몸으로부터 단단히 복수를 당했다. 수요일에 옆구리가 너무 아파 제대로 앉아 있기 힘든 지경이 됐다. 약속이 겹쳐 점심을 두 번이나 먹고, 출장차 찾은 춘천에서 막국수, 닭갈비 등으로 포식한 뒤였다. 그러고도 과식 탓으로 자가진단하며 소화제만 먹었다. 그런데 주말을 끙끙거리며 버티다가 출연한 월요일 아침 방송.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신문사로 돌아와 원고를 넘기고서야 길 건너 병원 응급실로 달려갔다.
여러 가지 검사를 한 뒤 의사는 단순명료하게 “쓸개를 떼내는 수술을 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수술이라곤 20여 년 전 제왕절개 수술만 받아 본 나는 너무 놀라서 “쓸개에 있는 돌만 제거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어느 병원에선 약으로 돌을 녹여낸다고 하던데…”라고 반항을 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같았다.
“초음파로 보니 돌도 너무 많고 또 현재 쓸개에 염증이 심해 그대로 두면 패혈증까지 일으킬 수 있어요.”
쓸개 없는 인생, 브라보!

박방영 _ 새벽 향기 _ 2009 _ 한지에 혼합재료 _ 72X132


그리곤 염증이 심하다는 쓸개에 관을 뚫어 쓸개즙을 빼내기 시작했다. 사위 삼고 싶을 정도로 인상 좋은 내과 전문의는 “쓸개에 돌이 생기는 담석증은 4F가 특징”이라고 알려줬다. “‘꽃보다 남자’의 주인공들인 F4는 알겠는데 4F는 뭐냐”고 물으니 친절히 설명해줬다. Forty(40대 이상) Female(여성) Fatty(뚱뚱하고) Fast(빨리 음식을 먹는) 사람들에게 쓸개에 돌이 잘 생긴다는 것이다. 딱 나였다.
입원하면 곧바로 수술을 할 줄 알았는데 1주일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 심한 염증과 천식증세 때문에 전신마취를 하기 위한 몸 상태를 만들어야 했다.
가장 곤란할 때는 병원을 방문한 사람들을 맞을 때였다. 분장 없이 시체 역할을 해도 좋을 만큼 초췌한 얼굴에 염색을 못해 솟아오른 흰머리 뿌리. 목욕을 하지 못해 머리는 떡이 졌고 손에는 링거가, 옆구리엔 쓸개즙관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요즘 아이들 표현대로 ‘꼬라지가 메롱’ 상태에서 찾아오는 이들, 아니 그들이 나를 쳐다보는 시선을 마주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절대 안정을 해야 하기 때문에 면회 사절”이라고 말했지만 환자 의사를 무시하고 찾아오는 이들이 많았다.

장기를 떼낸 후에야 얻은 교훈
어느 날 계모임 가지듯 단체로 방문한 대학 동창들. “너도 아플 때가 있구나” “너한테 환자복은 너무 안 어울린다” “퇴원하면 염색부터 해라” “그래도 얼굴에 주름살은 없네” 라며 환자인 나의 인물평을 쏟아냈다. 또 다른 친구는 “너 아직도 쓸개 있었어? 하도 히히덕대며 살기에 원래 쓸개 없는 줄 알았지”라고도 했다. “쓸개 없는 사람들이 살기 편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여기저기 비위만 맞추고 살면 되거든. 앞으로 사는 게 편해질 거야”라는 한 유머감각 넘치는 사장님의 말에는 너무 웃어 옆구리가 아팠다. 최유라씨는 “친구 중 한명이 쓸개 뗀 후에 너무 고통스러워했다”며 “가능하면 돌만 빼내라”고 조언했다. 어떤 이들은 “우리 할머니는 50대에 쓸개를 떼냈는데 98세인 지금도 정정하니 걱정 말라”고 했고, 쓸개 없는(?) 유명인의 명단을 알려주며 위로하는 이들도 있었다.
가장 충격을 받은 사람은 내 딸이다. 올초 프랑스에 교환학생으로 간 딸아이는 자기가 없는 동안 엄마가 수술을 받게 된 것을 속상해했다. 또 쓸개를 제거하면 당분간(병원에선 한두 달 정도라고 하지만) 지방성분이 강한 쇠고기, 돼지고기, 치즈 등을 못 먹는다는 것을 걱정했다. 내가 평생 외길 육식 인생을 살아온데다가 크림치즈 한 통을 한 시간 만에 혼자 먹는 이력 등을 아는지라, 지방성분을 공급 못 받을 경우 내 성격이 바뀌거나 스트레스를 받을까봐서였다.
“엄마. 이번 수술은 정말 하나님의 계시이자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주신 선물이야. 그동안 그렇게 식사량을 줄이라고, 좀 천천히 드시라고, 운동도 하라고 강조해도 육식에 과식에 폭식까지 하고, 게다가 운동도 전혀 안 한 엄마에게 쓸개를 잘라내서 교훈을 주는 거라고. 그러니 이젠 좀 조금씩 천천히 먹고 채소를 많이 드세요. 엄마가 건강해야 내 자식들 봐줄 거 아냐.”
내 식습관이나 생활에 문제가 많았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하나님이나 하늘에 계신 엄마도 그렇지, 적절한 메시지나 교훈을 주시면 좋을 것을 굳이 수술까지 받고 장기를 제거하면서까지 가르침을 주셔야 했을까. 아무리 내가 둔하고 말을 안 듣는다 해도 좀 가혹한 것 같다.
보름간 입원해 수술을 받느라 활동을 못해 수입은 줄어든 대신 수백만원에 달하는 병원비를 비롯해 돈 쓸 일이 생겨 경제 사정이 최악이다. 게다가 퇴원한 뒤 스스로에게 기분전환을 위한 선물을 하고 싶어서 봄 코트와 구두까지 하나씩 샀다. 뭐 난 쓸개 없는 인간이니까. 그런데 돌이 잔뜩 든 쓸개를 빼냈는데 왜 체중은 그대로인지 궁금하다.




쓸개 없는 인생, 브라보!

▼ 유인경씨는…
경향신문사에서 선임기자로 일하며 인터뷰 섹션을 맡아 흥미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다. 직장 여성에 관한 책을 준비 중인데 성공이나 행복을 위한 가이드북이 아니라 웃으며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 있는 실수담이나 실패담을 담을 예정이다. 그의 홈페이지(www. soodasooda.com)에 가면 그가 쓴 칼럼과 기사를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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