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자는 배우(俳優)의 배(俳)자가 사람인 변(人)에 아닐 비(非)를 쓴다 해서, 배우를 ‘사람이 아닌 존재’라고 풀이한다. 하지만 정혜선(69)처럼 5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늘어나는 잔주름, 뱃살까지 대중과 함께 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는 어느새 우리 삶에 스며들어 엄마로, 할머니로 함께 웃고 울어줄 것 같은 친근한 존재가 됐다. 서울에 함박눈이 내린 1월 중순, 종로구 삼청동에서 그를 만났다. 늦지 않으려고 서둘렀건만, 그가 먼저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손을 흔든다. 길이 미끄러워 자칫 약속 시간에 늦을까봐 택시를 타고 왔다고 했다. 예전에는 낯가림을 해서 택시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았는데, 예순이 넘으면서 노죽이 늘어 기사에게 먼저 아는 척을 하고 함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는 것도 즐겁다고 했다.
단정하게 부풀린 머리와 고운 화장에서 그가 아침부터 얼마나 부지런을 떨었을지 가늠이 됐다. 그는 집 앞 슈퍼를 가더라도 절대 대충대충 하고 나가지 않는다고 한다. 맨얼굴에 슬리퍼 차림인 그를 본 대중은, 비록 그게 단 한 번이라 해도 정혜선이라는 배우를 평생 그 모습으로 기억할 것이기 때문이다. 찰칵찰칵 카메라 셔터 소리에 맞춰 도도하게 포즈를 취하는 그에게서 여배우의 자존심이 느껴진다.
자면서도 대사 외우는 연기 베테랑
정혜선은 지난 연말 MBC 연기대상 시상식에서 공로상을 받았다. “연기자에게 고생은 자기가 짊어지고 가야할 짐이지만 늙어서까지 연기 공부를 하려니 참 힘들다. 자면서도 대사를 외운다”는 수상소감이 인상적이었다. 50년 베테랑 배우는 눈 감고 귀 막아도 대본만 입력하면 자동판매기에서 커피를 뽑듯 척척 연기가 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가 보다.
“제가 나온 드라마를 아직도 잘 못 봐요. 아무리 연기 변신을 한다고 해도 똑같은 얼굴에, 똑같은 목소리, 똑같은 사람이라는 한계가 있잖아요. 분장을 하고 목소리도 다르게 내려고 내 나름대로 노력하지만 시청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겁이 나요. 한 번도 ‘야, 정혜선 연기 잘한다’고 생각하며 맘 편하게 드라마를 본 적이 없어요. 누가 ‘어제 그 연기 너무 좋았어’라고 하면 그제야 ‘괜찮았나보다’라고 안도하죠.”
1961년 KBS 공채 1기 탤런트로 데뷔한 정혜선은 1973년 김수현 작가의 ‘새엄마’로 1회 MBC 방송대상을 수상하는 등 젊어서는 상복도 많았지만 그때는 그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했고, 빚에 쪼들려 전세로 월세로 옮겨다니다보니 변변하게 남아 있는 상패도 없다. 데뷔 50년을 앞두고 받은 이번 공로상은 그렇게 힘들게 살아온 지난날에 대한 보상이라 생각해 더욱 값지다.
촬영 끝나면 뿔뿔이 흩어지는 요즘 후배들, 진정한 연기 맛 몰라
지금은 신대방동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예전 그가 다니던 수도여고는 후암동 남산 자락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는 남산 드라마센터 앞을 지나 등교하며 ‘꼭 연기자가 돼 이 길을 다시 밟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운동은 운동 대로 음악은 음악 대로 잘해 체육 선생님은 체대 가라, 음악 선생님은 음대 가라 했으니 그때부터 끼가 있었나 봐요. 그래도 방송반 활동이 가장 애착이 갔어요. 두세 시간 일찍 학교에 가 다른 친구들 상쾌하게 등교하라고 행진곡 틀어주고, 방송 조회 멘트도 준비하고 했으니까.”
딸의 꿈을 이해했던 아버지는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방송국 탤런트 응시원서를 내밀었고, 그는 1만2천여 명의 응시자 가운데 26명을 선발하는 시험에서 당당히 합격해 방송과 인연을 맺었다. 김혜자 태현실 박주아 등이 그의 동기다. 데뷔 초는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방송국 카메라가 몇 대 안 되고 집집마다 TV 수상기도 드물어 알아주는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 뜨거운 열정과 낭만이 있었던 시절이다.
“가난했지만 매일매일 ‘연기가 이렇게 멋있는 거구나’라는 걸 느끼며 살았어요. 녹화가 끝나면 배우들이 전부 명동으로 몰려가 백원짜리 자장면으로 회식하고, 그 옆 호프집에서 맥주 마시며 연기를 논했죠. 내가 데뷔하고 몇년 지나 남산 드라마센터 옆에 경양식집이 새로 생겼는데, 러시안 수프와 돈가스가 그렇게 맛있었어요. 한번은 그때 중학생이던 안성기를 데리고 그 경양식집에 간 적이 있었는데 얼마 전 그가 자긴 어릴 때 그 집에서 먹었던 수프와 돈가스 맛이 지금도 문득문득 그립다고 하더군요(웃음).”
명동의 커피숍, 효자동 선술집…, 기회만 있으면 아니, 일부러 건수를 만들어서라도 동료배우들과 우르르 몰려다녔던 그로서는 자신의 촬영 분량만 끝나면 매니저 앞세워 차를 타고 가기 바쁜 요즘 후배들을 보면 조금 안타깝다고 한다.
“같이 고생했으면 따뜻한 물 한잔이라도 나누고 헤어져야 하는데, 밥 한 끼를 같이 안 먹는 거예요. 하긴 줄줄이 달린 식구들이 많으니까 다른 배우들과 어울리기도 힘들겠지요. 요즘은 매니저다 코디다 해서 배우 한 명당 스태프가 적어도 2~3명, 많으면 7명까지 되니까요.”
지금 톱스타들은 그런 낭만이 없는 대신 재벌 못지않게 부를 축적할 수 있지 않으냐고 묻자, “그러면 뭐하나, 인생의 맛을 모르는 걸”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우울증을 앓는 연예인들이 점점 증가하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닌지 몰라요. 그때는 누구 집 부엌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 것까지 알 정도로 서로 사정을 훤하게 꿰고 있었지요. 힘든 일이 생기면 서로 위로하고 도울 수도 있었고. 물질적으로는 가난했지만 마음은 풍족했고, 그게 여태 이 바닥에서 살 수 있는 밑거름이 됐어요. 그때도 지금처럼 풍족했다면 오히려 재미없었을 거예요.”
연기 인생은 특별한 굴곡 없이 물 흐르듯 순탄했다. 데뷔 초부터 주연으로 발탁돼 인정을 받았고 그가 출연한 작품은 대부분 평균 이상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될 작품과 안 될 작품을 골라내는 안목이 탁월한가 싶은데 의외로 그는 한 번도 작품을 골라 출연한 적이 없다고 한다.
“40년 전 어떤 드라마를 하기로 했는데 첫날 녹화에 갔더니 갑자기 배역이 바뀌었더라고. 다른 배우가 내 배역이 탐나 연출자에게 전화를 걸어 그렇게 한 모양이에요. 그래도 아무 불평 없이 연기했어요. 난 어떤 배역이 주어지면 ‘내게 주어진 복인가보다’라고 받아들이지 거절하는 법이 없어요. 단, 젊은 시절에는 너무 노출이 심한 배역은 안 했고, 요즘 들어서는 들어오는 족족 다 하면 나도 너무 힘들고 시청자들 보기에도 안 좋으니까 분량을 조금 조절할 뿐이죠. 지난해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국무총리 표창, MBC 공로상 등 상을 많이 받았는데 내 나름대로 악한 마음 없이 고지식하게 산 것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해요.”
여자로서의 인생은 60점
엄마 연기에도 계보가 있다. 감수성 예민한 엄마 김혜자, 푼수 엄마 박원숙, 이지적인 엄마 정애리, 푸근한 엄마 김해숙 등. 정혜선은 추상 같은 엄마의 대명사다. 지난해 ‘제빵왕 김탁구’ ‘황금물고기’에서 모두 자식들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려는 재벌가 안주인 역을 맡았다. 딸 둘, 아들 하나를 둔 그는 실제 어떤 엄마인지 궁금하다.
“우리 아이들이 ‘엄마가 자식이고 우리가 부모야’라고 할 정도로 세상 물정 모르고 겁 많은 엄마(웃음). 작은 물건 하나도 어떻게 사야 하는지 몰라 쩔쩔 매요. 우리 아이들이 날 보면 물가에 서 있는 아이처럼 위태로워 보인대요(웃음).”
그의 웃음 뒤로 ‘국민엄마’라는 명예로운 호칭 뒤에 숨은 아픔이 엿보였다. 그래도 그는 “나도 아이들에게 할 만큼 했기에 후회 없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땐 잠은 오지, 대본은 외워야지, 아이는 보채지, 하는 수 없이 의자에 나와 아이를 함께 묶어 놓고 대본을 외운 적도 있어요. 녹화를 하다가도 아이들 학교에 갈 일이 있으면 스태프에게 양해를 얻어 분장한 채로 다녀오기도 했고요. 아이들 소풍 가서 찍은 사진을 보면 내가 다 사극 차림이에요. 한복 입고 쪽을 진, 그래도 아이들은 ‘우리 엄마 왔다’고 좋아했어요.”
그렇게 힘들여 키웠는데, 자식들은 다 스스로 큰 줄 안다. 자식을 탓하자는 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그렇다는 것이다. 그 역시 한때 자신만을 바라보며 사는 친정 엄마가 미웠던 적이 있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데다 내가 무남독녀라 어머니가 저를 많이 의지하셨어요. 내가 결혼한다고 했을 때는 그 충격으로 약을 드시기도 했으니까. 그 당시 왜 엄마는 나를 행복하게 두지 않는지, 왜 이렇게 비참하게 만드는지 원망했는데 지금은 그 마음이 이해가 돼요. 이 세상 전부라고 믿었던 자식과 연결된 끈이 끊어졌다고 생각한 거지. 결혼을 천천히 했어야 했는데 뭐가 그리 좋다고 일찍 했나 싶은 후회도 들고…. 얼마 전 남산에 갔는데 드라마센터 근처 식당 주인이 도시락을 바리바리 싸들고 방송국으로 드나들던 우리 어머니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나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다시 어머니 생각이 나 눈물이 나더라고.”
3남매는 모두 결혼해 각자 가정을 꾸렸다. 그는 서울 부암동에서 큰딸 가족과 살고 있다. 공간은 함께 쓰지만 살림은 각자 한다고 한다. 그는 친정 엄마가 돌아가신 뒤인 9년 전부터 도우미를 쓰지 않고 청소며 빨래, 음식 등을 직접 한다. 배우로서의 삶에는 100% 만족하지만 여자로서는 60점 정도 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결혼생활에 실패한 게 점수가 깎인 요인이다. 그는 “50점만 줄까 하다가 그래도 ‘너는 홀가분해서 좋겠다’며 부러워하는 친구들이 있어 10점 더 얹어 줬다”고 말했다.
“이렇게 사는 게 편해요. 마음 맞는 사람들과 골프 치고 여행 다니고 그렇게 재충전해서 다음 배역은 또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하고…, 나는 한 번도 연기를 직업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그냥 내가 좋아하는 예술을 하는데 돈과 명예까지 따라주니 행복한 거지. 건강이 따라주는 한, 그리고 나를 찾는 사람이 있는 한 계속 연기할 생각이에요.”
인터뷰를 마치고 정혜선은 좀 걷고 싶다며 삼청동 길을 되짚어 올라갔다. 우아한 걸음걸이, 알은체 하는 사람들을 향한 가벼운 눈인사, 그는 천생 배우의 뒷모습으로 시야에서 멀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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