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금속점을 운영하던 이종룡씨는 97년 외환위기 여파로 혹독한 어려움을 겪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를 그대로 둘걸 그랬어요. 전국적으로 사진이 찍힐 줄 알았나, 쪽팔려서 원….”
전북 전주시 완산구 삼천동에서 만난 이종룡씨(49). 그는 중요한 약속이 있거나 사진을 찍을 때면 주머니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낸다. 얼마 전 맞춘 간이 송곳니다. 간이 파라솔도 아니고 간이 화장실도 아닌 간이 치아라니. 그의 송곳니 2개는 어디로 간 걸까.
“생니를 제 손으로 뽑을 때의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피가 철철 나고 눈물이 줄줄 흐르고. 펜치로 이를 뽑은 뒤 한참을 바닥에 쓰러져 있었죠. 사람들이 왜 그렇게 무식한 방법을 썼느냐고 묻는데, 이를 뽑지 않고서는 과거의 저를 버릴 수 없을 것 같았어요. 의지는 모든 것을 바꾸는 디딤돌이잖아요. 매일 아침 이를 닦을 때 혀로 빈자리를 훑으며 ‘조금만 더 견디자’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겁니다.”
그가 이를 뽑은 것은 설명할 수 없는 괴로움 때문이었다. 미안함, 자괴감, 후회 등이 뒤섞인 큰 괴로움이 그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97년 외환위기. 많은 이들이 직장을 잃고 가족과 헤어지고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 그 또한 당시 여파로 사업에 어려움을 겪은 한 사람이었다.
“귀금속 가게를 했는데, IMF 때 사업을 접어야 했어요. 시작할 때 진 빚만 고스란히 남았죠. 빚쟁이들이 집으로 몰려오고 저는 도망 다니고. 갑상선암 수술을 받아 요양 중이던 아내는 충격을 받았고, 재수 중인 아들은 가출을 했죠. 아내의 몸과 마음을 지키지 못하고 아들이 저로 인해 대학의 꿈을 접었다는 죄책감. 그 미안함의 돌덩이가 가슴을 짓눌러 숨을 쉬기 힘들었습니다.”
반백수 반건달. 그는 소싯적 자신을 그렇게 표현했다. 술과 도박을 좋아했고 빌린 돈을 염치없이 꿀꺽하기도 했다. 학생인 아들에게는 “아버지와 한 잔 하자”며 호기롭게 소주를 권했다. 옷 가게, 술집, 과일 가게 등 이런저런 사업을 하며 바람 따라 길 따라 사는 풍운아를 지향했다. 그런 생활은 빚더미에 만신창이가 된 뒤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술에서 위안을 찾던 어느 날, 그는 TV에서 한 목소리를 듣는다.
“TV를 끄려는데 누군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두 팔 두 다리는 형편없어도 가만히 누워 죽을 날만 기다릴 순 없지 않아요? 살아 있다는 건 축복 아닙니까?’ 불편한 몸으로 고물을 줍는 장애인의 모습에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멀쩡한 사지육신으로 술과 노름에 허송세월한 자신이 부끄러워 참을 수 없었던 거죠.”
하루 20시간 7개 아르바이트, 빚더미 탈출 프로젝트 시작
그때부터 그의 도전은 시작된다. 다짐의 징표로 이도 뽑았다. 도전. 결심하긴 쉬워도 실천하긴 어려운 단어다. 도전해서 성공의 결실을 얻기란 더 어려운 일. 이씨는 빚 3억5천만원을 제 힘으로 갚겠다는 목표를 세운다. 그 방법으로 택한 것은 아르바이트.
“고졸에 기술 하나 없이 취직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죠. 집과 돈과 신용을 잃은데다가 주민등록증까지 말소돼 할 수 있는 일은 아르바이트가 유일했어요. 일단 살기 위해서 빚을 갚아야 했으니 닥치는 대로 일을 했어요. 생활정보지를 끼고 하루 24시간 쉼 없이 아르바이트 7, 8개를 하며 악착같이 돈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하루 24시간. 범인들은 하루 8, 9시간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잠을 자고 휴식을 취한다. 하지만 그는 20시간 일하고 4시간 쉰다. 사무를 보거나 자리를 지키는 정적인 일도 아니다. 신문을 돌리고, 떡을 배달하며, 사우나 청소를 하는 땀 뻘뻘 흘리는 고된 일이다. 10년간 그는 이렇게 살아왔다.
“초기에는 신문배달과 사우나 청소를 했는데, 그렇게 한 달 동안 번 돈이 1백50만원이었어요. 언제 빚을 다 갚느냐는 생각에 허탈했습니다. IMF가 터지지 않았다면, 주변에서 좀 도와줬더라면 하는 생각에 괜히 울컥하더군요. 제가 빌려준 돈도 많은데, 그걸 다 받을 수 있다면 이 고생 할 필요 없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고된 신문배달은 그에겐 운동시간(왼쪽). “주워 신은 신발이라 발이 더 편하다”고 말하는 이씨.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당시 머릿속에는 이 생각만 가득했다. 늘 인상을 찌푸리며 일했고 결심이 흔들리는 순간도 잦아졌다. 어느 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온 그는 컴컴한 어둠과 마주한다. 보증금 1천만원, 월세 20만원의 허름한 집에는 흐느끼는 소리가 홀로 울리고 있었다. 7남매 중 셋째 딸인 5세 연상의 아내, 집안의 반대에 맞서 그와 결혼해준 아내, 그의 방황에도 끝까지 옆을 지킨 아내의 울음소리였다.
“전기가 끊겨 불은 안 들어오고, 신문배달을 하다가 주워온 전기장판도 쓸 수 없어 방바닥은 얼음장 같고. 그 속에서 아내가 어깨를 떨며 눈물을 흘리는데…. 친구도 술도 자존심도 버렸지만 미안함은 버릴 수 없더군요. 지금도 ‘애썼다’는 말은 절대 안 해요. 가끔 웃어주면 그걸로 위안을 삼죠. 요즘은 ‘누님, 고마워. 다 당신 덕이야’ 그러면 ‘짜식, 이제 알아주느냐’라고 해요(웃음).”
그때부터 마음가짐을 달리했다.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뭘 하느냐”는 말은 귓등으로 흘렸다. 이왕 하려면 같은 시간에 효율적으로 해야 빨리 빚을 갚을 수 있다. 그는 자신만의 빚 갚기 작전을 차곡차곡 세워나간다.
“신문배달은 운동, 운전은 음악감상”
그의 일과는 이렇다. 오전 7시부터 낮 12시30분까지 떡 배달과 떡 포장을 한다. 오후 1시부터 오후 8시30분까지는 학원차 운전을 하고, 일이 끝나면 다시 지방으로 배달을 간다. 밤 11시30분에 배달이 끝나면 새벽 2시까지 사우나 청소를 한다. 새벽 2시부터 5시까지 신문배달을 하다가 떡 배달을 하러 가기 전 한두 시간 집으로 가서 잠깐 눈을 붙인다. 이처럼 그의 하루는 끝나는 동시에 다시 시작한다. 낮밤 없이 일하는 생활, 그에게 “정말 이렇게 사느냐”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예전에 제 생활이 궁금하다고 방송사에서 하루 동안 동행을 했어요. 그분들이 너무 힘들어하기에 오히려 제가 ‘괜찮냐’고 챙기기 바빴죠(웃음). 아침은 뛰어나가면서 사발면이나 간단히 밥을 먹었는데, 5년 전부터는 떡을 먹게 됐어요. 배달 가기 전 떡으로 요기를 하는 거죠.
사람들이 제일 의아해하는 게 잠자는 시간인데, 그건 습관 들이기 나름인 것 같아요. 몸을 녹초로 만들면 30분을 자도 3시간 잔 것처럼 개운해요. 저는 10분을 자도 ‘나 죽었다’라고 생각하며 자요. 몸이 깊은 잠을 잘 수 있게 단련된 거죠. 사우나에서 일을 빨리 끝내거나 운전을 하는 틈틈이 눈을 붙이기도 하고, 또 주말에는 쉴 수 있으니까요. 물론 처음에는 잠 때문에 나무에 차를 박을 뻔한 적도 있고, 잠이 올 때면 겨울에도 찬물을 끼얹기도 하고 고생이 많았죠(웃음).”
아르바이트를 오랜 기간 직업으로 삼다 보니 노하우도 생겼다. 그는 아침마다 생활정보지를 꼼꼼히 살핀다. 자연스레 업종별 비성수기의 흐름이 눈에 들어왔고, 아르바이트가 끊기기 전에 빠르게 대처할 수 있었다. 스스로 1인 기업이라 생각하며 신용을 쌓은 결과 그를 찾는 곳도 많아졌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아르바이트는 사우나 청소.
“목욕탕은 저에게 별장이에요. 사우나 청소를 하면서 땀을 흘리면 하루의 피로가 싹 풀려요. 운전을 하고 신문 광고지 작업을 하면 몸이 결리고 손목이 시큰거리는데, 아무도 없는 사우나에 앉아 있으면 마음까지 개운해지죠. 신문 돌리는 시간도 행복해요. 지방지, 중앙지 모두 같이 쫙 돌리는데, 엘리베이터 15층부터 층층이 내려올 때 기분이 괜찮죠. 엘리베이터에서 거울도 한번 보고 신문도 보고. 컴컴한 새벽 혼자 달리고 있노라면 제가 온 동네 전세 낸 기분이에요.”
자존심과 과거는 쓰레기통에 버려라!
긍정의 힘. 초인적인 체력과 정신력이 필요한 그의 생활을 지탱해준 것은 바로 긍정적인 마인드였다. 그는 힘들 때면 이렇게 외친다. ‘아이고 힘들어서 잘 살겠다’ ‘아침밥을 안 먹으니 든든하구나’. 목욕탕은 ‘별장’으로, 신문배달은 ‘운동’으로 생각한다.
“아르바이트는 금세 그만두는 사람이 많아요. 고돼서 못하겠다고요. 저도 처음에는 그랬어요. 찌든 때와 싸워야 하는 사우나 청소, 떠들어대는 아이들을 싣고 교통체증을 견뎌야 하는 운전 모두가 힘들었죠. 하지만 그 시간을 다르게 생각하니 스트레스가 달아났어요. 운전은 음악감상 시간으로 생각하고 신문에 광고지를 껴넣는 작업을 할 때는 과장되게 몸을 흔들죠.”
그는 요즘도 눈물을 흘린다. 포기하고 싶을 때도, 모른 척 유혹에 넘어가고 싶을 때도 많다. 자신과 한 약속이 후회스러울 때도 있지만, 아내와 아들을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이 뿌듯하다. 그의 노력이 계속되자 차갑던 아내도 조금씩 마음을 풀었다.
“사업이 망한 뒤 아내는 제게 눈길도 주지 않고 아침밥만 차려줬어요. 반찬 없이 말 그대로 밥만 줬죠. 그런데 제가 꾸준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자 반찬이 하나하나 나오더군요. 하루는 계란말이가 나왔는데, 그 계란말이를 보자마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어요. 계란말이 보고 운 놈은 세상천지 저밖에 없을 겁니다(웃음).”
그는 이제 빚이 없다. 딱 10년 만에 3억5천만원을 갚았다. 마지막 1백만원을 송금하는 순간, 그는 펑펑 울었다. 그때처럼 눈물을 흘린 적이 없다고 한다.
“기름값 빼고 한 달 버는 3백50만원을 죄다 빚 갚는 데 썼죠. 이자까지 합치면 4억원이 넘는 금액이에요. 빚도 사람 사이의 일이라, 제가 이렇게 일하는 모습을 보고 이자를 감해준 분들도 계셨죠. 돈 빌린 데가 10곳 이상이었는데, 차차 갚아나가는 재미도 있었고요. 마지막 빚을 갚는 순간, 그 해방감은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모를 거예요. 그동안 옷, 신발 죄다 주워다 쓰며 빚만 갚았는데, 이제 돈을 모을 수 있게 된 겁니다.”
그는 곧 이사를 간다. 빚을 갚은 뒤 20만원, 15만원, 5만원짜리 등 적금통장에 차곡차곡 돈을 모아 전세 4천만원짜리 보금자리를 갖게 된 것. 호화롭진 않지만 가재도구 놓을 자리가 없어 새우잠 자던 생활은 졸업하게 됐다. 말소됐던 주민등록증도 다시 살렸다. 그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이제 빚도 갚았으니 다른 일을 하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요. 하지만 스스로 선고한 집행유예까지 10년이 더 남았는데, 유혹을 잘 이겨내야죠. 또 집에서 도움 한 번 받지 않고도 잘 자라준 아들 결혼도 시켜야 하고요. 아들을 보면 그저 미안한 마음이에요.
‘아! 옛날이여’를 외치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요. 재기의 시작은 현재를 재빨리 인정하는 것이죠. 예전의 저는 옷을 다려 입고 머리에 무스 바르길 즐기는 ‘폼생폼사’였어요. 하지만 지금은 모자 하나 푹 눌러쓰고 땀이 흐르거나 말거나 신경도 안 쓰죠. 과거에 발 묶여 허송세월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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