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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화제의 인물

‘아내가 결혼했다’ 작가 박현욱

대한민국 남편들의 공공의 적!

글·김수정 기자 /사진·조영철 기자 || ■ 장소협찬·올라리사

2008. 12. 22

요즘 슬금슬금 아내 눈치를 보며 극장 문을 나서는 남편들이 많다. 아내의 중혼을 소재로 한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 때문이다. 남성 위주의 전형적인 부부관계를 재치 있게 뒤엎은 작가 박현욱은 의외로 40대 독신남이다. 그가 또다시 낭만 없는 사랑과 불안정한 결혼생활을 담은 소설집 ‘그 여자의 침대’를 세상에 내놓았다.

‘아내가 결혼했다’ 작가 박현욱

“아, 그런가요?” “글쎄요, 저도 잘….(긁적긁적)”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의 원작자 박현욱 작가(41)와의 대화 중 가장 많이 나온 말이다. 느릿느릿하면서도 약간 어눌한 말투. 두 남자와 결혼한 아내라는 독특한 발상을 한 작가, “나,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어. 당신하고의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싶어. 그리고 그 사람하고도 결혼하고 싶어”라는 발칙한 표현을 쓴 작가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생각해보면 그리 특별한 인물도, 특별한 이야기도 아니지 않나요. 얼마든지 한 사람이 여러 사람을 동시에 좋아할 수 있는 거잖아요. 주변에 흔히 있는 삼각관계 커플을 부부로 바꿨을 뿐이에요. 사랑해서 결혼하는 게 잘못된 건지, 사랑하지 않으면서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게 바람직한 건지, 이런 의문에서 출발했죠.”

여주인공 설득력 있게 그리려고 애썼는데 스크린에서는 손예진 등장하는 순간 ‘한방’에 해결돼
소설에서는 여주인공 인아의 감정을 축구에 빗대 표현했다면 영화는 손예진의 미모와 애교를 최대한 활용해 인아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여자’로 만들었다. 인아의 성(氏)이 없던 소설과 달리 영화에서는 인아의 성을 주씨로 설정, “주인아씨”라고 부를 때마다 마치 모든 남자들이 마당쇠가 된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예진이라면 남편을 둘 갖겠다고 해도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는 남성들도 생겨났다.
‘아내가 결혼했다’ 작가 박현욱

“소설에서는 인아의 주장을 납득시키기 위해 며칠 동안 고민하고 몇 페이지에 걸쳐 설명해야 했는데, 영화에서는 예쁜 배우가 나오니까 한방에 해결되더라고요(웃음). 예쁘고 똑똑하고 집안일까지 잘하는 인아를 두고 ‘너무 완벽하다, 판타지적인 인물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럴 리가 있겠어요? 남편 덕훈의 눈에 비친 아내가 그럴 뿐이겠죠.”
그는 ‘아내가 결혼했다’ 시나리오 첫 페이지에 ‘주인아씨’라고 나오는 부분을 보고 ‘감각적이다’라고 생각한 뒤 바로 시나리오를 덮었다고 한다. 완성된 영화를 보고는 “똑같은 주제로 저렇게 폼나게 만들었구나” 싶어 배가 아프기도 했다고. 독자 입장에선 ‘원작에서 모티브만 차용하고 좀 더 과감하게 변형시켜도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고 한다.
“책이나 영화를 보고 통쾌하고 짜릿하다고 말하는 여자들이 대부분이지만 반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여자라면 참고 살아야지’ 하고 생각하는 분도 있더군요. 남편이 첩을 들인 건 수백 년 이어져온 일이기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여성이 그러는 건 용납할 수 없다는 거죠.”
그는 “남자와 여자가 다르다는 생각은 사회적 불평등에서 기인한다. 생물학적으로 볼 때 남자든 여자든 똑같은 인간이다. 서로의 입장을 바꿔 생각하면 얼마든지 납득할 수 있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아내가 결혼했다’ 작가 박현욱

“제가 이런 말을 하면 ‘그렇다면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되물어요. 하하하. 소설은 어디까지나 허구일 뿐이죠. 40년 이상 대한민국 보통남자로 살아왔는데 어디 쉽게 바뀌겠어요. 다양한 형태의 사랑과 결혼이 존재한다는 걸 인정하는 것과 현실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다른 거죠. 저는 일처다부제도 일부다처제도 아닌, 행복하고 편안한 가정을 꿈꾸는 평범한 40대 독신남이에요.”
하지만 지난 11월 초 발표한 소설집 ‘그 여자의 침대’는 이런 그에게 또다시 궁금증을 던지게 한다. 여기에 실린 8편의 단편소설이 전반적으로 관계의 어긋남에서 비롯된 고독과 상실감을 다루고 있기 때문. 이혼 후 새로 찾아온 사랑 역시 실패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하는 여자(‘그 여자의 침대’), 싫어하지도 않지만 사랑하지도 않았던 아내와 왜 결혼했는가 고민하는 남편(‘그 사이’), 연체된 책을 반납하면서 뒤늦게 이혼한 아내의 안부를 궁금해하는 남자(‘연체’) 등 불안정한 결혼생활의 주인공들이 등장해 마치 ‘아내가 결혼했다’의 속편 같은 느낌을 준다. “그들은 모두 행복한 결혼을 꿈꾸었다. 그 때문에 실패한 것이다. 바라는 바가 많지 않다면 혼자 사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낫다”(‘생명의 전화’)라는 부분에서는 작가가 애초 결혼생활에서 행복 따위는 기대하지 않는 듯했다.
“어유, 어떻게 사랑에 대한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개인적으로 연애와 결혼에는 낭만이 있다고 생각해요. 결혼은 한편으로는 구속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안정적이잖아요.”
그는 “아직 운명의 상대를 만나지 못했을 뿐 독신주의자는 절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그는 사람을 많이 만나는 편은 아니지만 깊게 사귀는 편이라고 한다. 친구들 가운데는 자신의 이야기를 써 보라며 슬쩍 결혼생활의 단면을 들려주는 이도 있고 부부문제를 하소연 하는 경우도 있다고.

“가장 못할 것 같았던 글쓰기가 생업 돼, 여전히 길을 잘못 든 게 아닌가 하는 생각한다”
“소설을 쓸 수 있도록 글감을 준 친구들에게 고마워요. 아, 그 친구들이 제 소설을 읽지 말아야 할 텐데…(웃음). 친구들이 한 얘기를 꾸미고 덧댔지만 어떤 부분이 자기의 이야기인지 금방 눈치 챌 것 같거든요.”
연세대 사회학과를 졸업한 뒤 4년 동안 일반기업체와 출판사를 다니던 그는 서른 살 무렵 회사를 그만두고 유학을 준비하다가 1년여 동안 장편소설을 집필, 지난 2001년 ‘동정 없는 세상’으로 문학동네 신인작가상을 수상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소설을 쓰기 전까지는 단 한번도 글을 잘 쓴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글짓기상 한 번 받은 적 없는 제가 작가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죠. 처음 소설을 쓴 것도 하는 일도, 하고 싶은 일도, 되는 일도 없던 시기라 생각이 많아져 단순히 그걸 글로 옮겼던 거예요. 부모님과 친구들, 심지어 저 자신도 제가 작가라는 사실에 아직도 깜짝 놀라요.”
그는 “팔자가 꼬였는지 가장 못할 것 같던 글쓰기가 생업이 됐다. 여전히 길을 잘못 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꼭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가끔 자신이 쓴 책을 모두 거둬들여 없애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고 한다. 그러다가도 자신의 글이 만족스럽게 느껴지거나 보다 잘 쓰고 싶다는 욕망이 생기기도 한다고.
그는 주로 집에서 글을 쓴다고 한다. 글을 쓸 때는 하루 몇 시간씩 진득하게 책상에 앉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친구와 만나 영화를 보거나 가끔 만화가게도 간다고. 축구 경기라면 사족을 못쓰고 월간지 ‘바둑’을 10년 넘게 정기구독하며 온라인 바둑 게임에 빠져 있기도 하다. 신문은 스포츠, 만화, 연재소설을 읽은 뒤에야 사회면을 읽는다고 한다.
차기작을 구상 중이라는 그에게 “혹시 이번에도 사랑과 연애, 결혼 이야기의 연장선이냐”고 묻자 “훌륭한 작가는 쓰고 싶은 걸 쓸 수 있지만 나는 쓰고 싶은 것 중 일부만 쓸 수 있는 작가”라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세상에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사람보다 ‘루저(loser)’들이 더 많아요. 한마디로 멋지고 성공하고 잘나가는 사람들이 소설 속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런 사람은 위인일 뿐이니까요. 제 소설에 주로 등장하는, 적당히 배우고 적당히 돈이 있는 사람은 분명 비주류는 아닐 거예요. 하지만 사회경제적으로 성공했다고 해도 연애, 결혼생활이 잘 풀리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루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마지막으로 그는 “‘아내가 결혼했다’가 드라마로 제작된다는 얘기를 들었다. 상상도 못할 일이 많이 생기는 세상이다. 유연한 사고를 가지면 제도나 통념도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만일 드라마로 방영된다면 그때는 사람들이‘아내가 결혼했다’는 말에 더이상 놀라지 않으면 좋겠다”며 인터뷰를 갈무리했다.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의 한 장면. 중혼을 원하는 아내가 설득력있게 그려져 화제를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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