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많이 아파요. 아니, 마음이 많이 아파요. 화병이에요. 아니, 울화병이에요. 울화병. 울화병이 뭔지 알아요? 그래요, 쉬운 말로 우울증이라고 합디다. 가슴이 답답해 죽겠어요. 이러다 죽는 게 아닐까 싶어요. 동료(교수)들이 무섭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하고 그래요. 학교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어요. 지금은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아요. 사람들이 무서워요. 정말 무서워요. 그러니 이 다음에 만나면 안될까요. 내가 마음을 추스리고 나서 만났으면 좋겠어요. 그때는 하고 싶은 말, 내 맘속에 꾹꾹 눌러놓았던 고통들 모두 다 털어놓을게요.”
지난 4월9일. 마광수교수(51)와 이뤄진 전화통화에서 그가 대뜸 건넨 말이다. ‘울화병’이라는 단어를 여러 차례 반복한 그는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다’며 요청한 인터뷰를 사양하면서 “몸이 좋아지면 즐거운 마음으로 만나자”고 했다. 목소리에 힘은 없었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또박또박 들려주던 그.
마교수와 전화통화가 이뤄진 다음날인 4월10일. 팔순의 노모와 단둘이 살고 있는 서울 용산구 동부이촌동의 아파트를 찾았다. 초인종을 누르자 노모가 “(아들이) 지금 병원에 가고 없다”면서 “기력이 쇠해서 병원에서 링거액을 맞고 있다. 1시간쯤 후에 집으로 돌아올 것”이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노모는 “아들이 몹시 아파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기운이 없어 누워만 있다”고 말했다. “아픈 동생과 엄마를 보살피기 위해 친정에 왔다”는 마교수의 누나도 동생의 건강상태가 몹시 악화되었음을 내비쳤다.
30분쯤 후 마교수의 집앞에서 마교수를 병원에 데려다주고 왔다는 ‘젊은 청년’을 만났다. 마교수 누나의 승용차 운전기사인 그는 “조금 있다가 병원에 가서 마교수를 모시고 와야 한다”고 말했다. “마교수가 어느 병원에 다니냐”고 묻자 “나는 잘 모른다”고 대답한 그는 잰걸음으로 자신이 운전하는 그랜저 승용차로 향했다.
마교수는 차가 없다. 그동안 지하철이나 버스 등 대중교통을 이용했던 것. 그는 그 흔한 휴대전화도 없다. 글을 쓸 때도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대신 만년필로 원고지 빈칸을 메운다. 그래야 글쓰는 맛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필자가 마교수를 처음 만난 것은 99년 12월 중순. 그가 <남자도 이혼을 꿈꾼다>를 출간한 직후였다. ‘마광수’라는 이름 석자 옆에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즐거운 사라>. 당시 마교수는 “그 책 한권이 내 인생을 완전히 뒤바꿔놓는 계기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면서 “<즐거운 사라>가 92년 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아 교수직에서 쫓겨난 후 98년 사면복권이 되어 복직한 터라 오랜만에 사람 사는 맛이 난다”고 했다.
취재차 서울 인사동의 한 식당에서 그와 마주했을 당시 마교수는 ‘즐거운 모습’ 그 자체였다. 소주 몇잔을 기분 좋게 마시면서 호탕하게 인터뷰에 응한 그는 오랜만에 “사랑과 이별, 결혼, 이혼, 연애 등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눠 기분이 좋다”면서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면서 그는 “외로워서 정말 ‘찐한’ 연애를 하고 싶다”고 털어놓았다.
“나를 만나는 사람 가운데 ‘결혼은 안하실 겁니까? 빨리 결혼하셔서 아이도 낳고 그러셔야지요’라고 묻는 사람이 많아요. 그러면 나는 ‘결혼은 다음 얘기고, 우선 연애부터 해야지요’라고 대답하곤 했어요. 결혼이고 자식이고 다 둘째 문제고, 그것보다는 먼저 서로가 눈이 뒤집힐 정도로 ‘뿅’ 반하는 사랑에 빠져들 수 있는 연애상대가 먼저 나타났으면 좋겠어요. 내가 그토록 자나깨나 오매불망 원하는 연애를 통 못하고 있어요. 그런데 연애 상대가 없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면 듣는 사람들은 도무지 믿어주지를 않아요. ‘아니, 주변에 여자들이 아주 많을 것 같아 보이는데…. 거짓말이시죠?’라며 되물어오는 게 다반사예요.”
“연애도 한때, 사랑도 역시 한때인가 보다”라면서 담배연기를 훅 내뱉던 마교수. 그는 “나이 마흔다섯을 넘기니까 도대체 연애 할 기회를 잡을 수가 없다”면서 “사람들은 평생토록 연애할 자신이 없어 훌쩍 결혼을 하고 근근히 연애하고 싶은 마음을 억제하면서 투덜투덜 살아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연애를 하지 못하는 세 가지 이유를 찬찬히 설명했다. 그 첫째 이유는 자신의 나이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여자들은 대개가 유부녀들이고, 또 설령 혼자 사는 여자가 있다 하더라도 너무 늙어서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는 것.
“젊었을 때는 동갑내기 여자는 물론 연상의 여자까지도 다 좋게만 보였는데, 요즘엔 그저 젊고 어린 여자들만 좋게 보여요. 나이가 먹은 남자들일수록 싱싱하고 발랄한 ‘영계’들한테 빠져 사족을 못쓰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요.”
설령 눈이 핑 돌 만큼 마음에 드는 여성을 발견했다 해도, 도무지 ‘작업’에 들어갈 용기가 자신에게 안 생긴다는 게 둘째 이유였다. 그것은 마교수뿐만 아니라 주변의 또래 남자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소리로, 말하자면 ‘절차’가 귀찮기 때문에 연애를 못한다는 것. 그러면서 그는 “늙어서 기운이 빠져 그럴 수도 있겠고, 그 ‘절차’에 들이는 피땀어린 노력이 과연 제대로 결실을 볼 수 있을지 의심이 나서 그럴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그가 연애를 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내 자신이 여성을 바라보는 ‘눈’이 이젠 달라졌기 때문이다”라면서 감춰둔 속내를 드러냈다.
“젊었을 때는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면 공주님 보듯 그저 황홀한 마음에 상대방이 나를 홀대하거나 경멸해도 오로지 ‘저자세’ 일변도로 치근치근 들러붙을 수 있었어요. 그런데 나이가 드니 생각이 달라지더라고요. 남자들이 흔히 얘기하는 대로 ‘여자 마음은 갈대’라는 식의 여성관이 마음속에 뿌리 박혀 버렸어요. 그 동안에 짧게, 또는 길게 사귄 꽤 많은 여성들을 통해서 여성을 제대로 다룬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건지 절감했기 때문인지도 몰라요. 또 거의 모든 남자들이 진심으로 바라고 있는 ‘따뜻하고 편안한 여자’가 이 세상에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기 때문일지도 모르죠.”
또한 한번 결혼을 했다가 실패한 경험으로 인해 확신에 찬 ‘결혼관’을 세우지 못한 것을 연애하지 못하는 셋째 이유로 꼽았다.
마교수는 “여자를 그저 살림 잘하고 아이나 잘 기르는 역할을 하는 정도로만 보는 사람의 입장이라면야 대충대충 여자를 선택해서 아이나 하나 낳고 그럭저럭 자식 보는 재미로 살아가면 그만일 테지만 난 아직도 철부지 소년 같은 낭만적 열정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것 자체가 문제인 것 같다”고 했다.
수많은 인파가 북적이는 인사동을 빠져나가는 그에게 “애인이 생기면 그때 다시 만나서 인터뷰 하자”는 말에 마교수는 “그럽시다. 나도 애인이 빨리 생겼으면 좋겠어요”라고 흔쾌히 약속하고는 유유히 인파 속에 파묻혔다.
그 이후 마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애인이 생겼어요?”라고 물으면 “아뇨. 생길 기미도 안 보여요. 어디 좋은 여자 없어요?”라고 하면서 그저 학교와 집을 오가며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덤덤히 털어놓곤 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애인은 없지만 별탈 없이 잘 살고 있다”는 그에게 2000년 6월, <즐거운 사라>로 인해 법정에 섰던 고통보다 한치 더 깊은 고통이 찾아왔다. 마교수가 재임용과정에서 ‘교수로서 자격이 없다’는 판정을 받은 것. 동료 교수들에게 인정받지 못해 교수직에서 쫓겨나게 된 것에 대한 충격은 마교수의 정신까지 갉아먹었다.
재임용에서 탈락한 직후 필자와의 전화통화에서 그는 동료교수들에 대한 배신감에 치를 떨면서 “학과 및 문과대 인사위원회에서 ‘논문실적이 부실할 뿐만 아니라 학문적인 능력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이유로 재임용에서 부적격 판정을 받았는데 나는 교수이자 작가다. 작가로서의 입장도 인정해줘야 된다고 생각한다”며 울분을 토해냈다.
인사위원회의 부정적 평가와 “작가로서의 입장도 인정해 달라”는 마교수의 소명이 상충된다는 점을 들어 연세대학교 교원인사평가위원회가 재임용문제를 1년간 보류키로 결정했다. 하지만 마교수는 이 같은 결정에 대해 당사자가 이의신청을 제출할 수도 있지만 “동료 교수들의 행위에 너무 심한 충격을 받아 (이의신청을)제출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면서 “계약교수로 2년마다 재임용 심사를 받아야 하지만 ‘2년 동안 논문·비평·작품 등을 담은 업적평가서를 제출했으나 학과인사위원회는 시와 장편소설 등의 작품은 인정하지 않았다. 논문·비평 등도 질이 낮다며 낮은 점수를 주었다”고 주장하면서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92년 <즐거운 사라>로 인해 법원의 유죄판결을 받아 교수직에서 쫓겨난 이후 98년 5월 연세대학교 국문과 부교수로 복직한 마교수는 재임용 탈락 논란 후 심사가 보류되는 우여곡절 끝에 2000년 8월 휴직계를 내고 이촌동 집에 칩거해왔다.
재임용사건 이후부터 마교수의 목소리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종종 연결된 전화통화에서 약방의 감초처럼 빠지지 않고 건넸던 “애인이 생겼어요?”라는 질문을 더 이상 건넬 수 없게 된 것도 이즈음이었다. 마교수가 “이 지경에 이르니 연애고 뭐고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뜻을 내비쳤기 때문이다.
재임용 탈락 후 그는 “아침에 늦게 일어나 밥을 먹고 하루종일 책상 앞에 앉아서 글을 쓰고 담배를 피우다 홀짝홀짝 술을 마시는 게 하루 일과의 전부”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담배를 피우는 이유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난, 허무주의자이면서 쾌락주의자임을 자인해요. 그래서 내가 가장 즐기는 것은 역시 도피성 기호물인 술과 담배죠. 담배는 사실 정신을 마비시키는 효과는 별로 없어요. 단순히 습관성 중독이 되어 피우는 것이긴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담배 역시 ‘입이 심심해서’ 매달리게 되는 ‘섹스 대용’인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가 핥고 빠는 사랑의 행위를 지나칠 정도로 그리워하고 굶주려 있는 탓인지, 하루에 피우는 담배의 양이 점점 더 늘어만 가요. 주위의 내 나이 또래 친구들은 대부분 건강을 위해 담배를 끊고 있는데도 말이죠.”
술과 담배에 대한 어쩡쩡한 탐닉은 여자에 대해서도 그 양상이 마찬가지라고 주장하는 마교수. 그는 “자고로 주(酒)와 색(色)은 같이 붙어다니는 법이다”라고 설명하면서 그런데도 자신은 “지금까지 ‘색’을 마음대로 포식(?)해본 적이 없다”고 털어놓았다.
“여자가 담배나 술처럼 항상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설사 돈을 주고 여자를 산다고 해봤자 뒷맛이 찝찝하기 때문에 언제나 나는 색에 굶주린 상태로 있는 것 같아요. 아마도 내가 아직도 주제파악을 못하고 ‘싱싱하고 낭만적인 사랑’만을 찾아 헤매다니기 때문인가 봐요. 그래서 내가 쓰는 문학작품들의 내용이 과장적으로 에로틱한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실제로 안되면 상상으로라도 충족시켜야 하는 게 사랑이요, 성욕이니까 말이죠.”
2000년 8월, 1년간 휴직계를 내고 쉬었다가 지난해 가을학기에 복직해 한 강좌를 맡았던 마교수는 올초 다시 1년간 휴직계를 내고 쉬고 있는 상태. 휴직 이유는 건강 악화였다. 그가 문밖출입을 삼갈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 것은 지난해 연말. 지난 4월10일, 마교수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경비는 “(마교수가) 연초부터는 혼자 걷는 것조차 힘들어해 저 사람(누나의 운전기사를 가리키며)이 부축해 병원을 오가고 있다”고 말했다.
마교수는 지난해 연말 큰 매형을 먼저 저세상으로 보냈다. ‘젊은 청년’이 운전하는 그랜저는 마교수의 매형이 사용하던 차다. 마교수의 누나는 사업하던 남편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차와 운전기사가 필요치 않게 되었음에도 아픈 동생의 병 수발을 위해 운전기사를 그대로 고용하고 있다고 한다.
지난 4월 마교수의 누나는 필자에게 “동생이 아프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복직하는 데 문제가 될 수도 있으니 알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빨리 나아서 다시 교단에 서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소망을 내비쳤다.
이후 마교수와의 전화통화는 쉽지 않았다. 노모와 누나가 번갈아 전화를 받았지만 마교수를 직접 연결시켜주지는 않았다. 마교수의 집에 찾아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마교수의 와병설이 언론에 보도된 이후 마교수와 가족들은 극도로 말을 아꼈다.
9월13일 오전. 마교수 집에 전화를 걸자 노모가 전화를 받았다. “<여성동아>란다. 전화 받을래?”라는 노모의 목소리 끝에 마교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5개월여 만에 이뤄진 통화였다.
“지금도 많이 힘들어요. 죽겠어요. 지금도 죽고만 싶은 심정이에요. 괴로워서 죽겠어요. 괴롭다니까요.”
힘 없는 목소리에 울분이 잔뜩 묻어났다. 뭐라고 말을 더 건네기가 힘들 만큼 그는 지쳐 있었다.
“많이 아파요. 위가 안 좋아서 제대로 밥을 먹을 수도 없고, 간까지 안 좋아서 쉽게 피로감을 느껴요. 거의 누워서만 지내요. 문밖출입을 안한 지도 오래됐어요. 그래요. 이렇게 아파 죽겠어요. 괴롭고 또 괴로워요. 그러니 긴말을 하고 싶지가 않아요. 용건만 간단히 말해요. 말하는 것도 힘이 들어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TV도 안 보고, 책도 못 보고. 그냥 멍하니 누워서 천장만 쳐다보고 있어요.”
마교수는 대화 중간중간 긴 한숨을 내쉬었다. “와병설이 보도된 이후 동료 교수들이 병문안을 왔느냐”는 질문에 대답하는 마교수의 목소리에 갑자기 힘이 실렸다.
“없어요. 아무도 없어요. 나 아프다고 찾아온 동료가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오지 않았어요. 그런 것도 묻지 마세요. 괴로워요. 다 괴로워요.”
그의 목소리에는 동료들에 대한 배신감이 여전히 짙게 배어났다. 지난 4월에 비해 목소리는 더 가라앉았고, 숨소리도 거칠었다.
“제자들요? 제자들도 없어요. 아니 찾아온다고 해도 내가 지금 만날 수가 없어요. 아무도 안 와요. 아무도 안 오고, 안 만나고 싶어요. 여전히 잠도 못 자요. 아니 잠이 안 와요.”
85년 결혼해 2년6개월 만에 별거를 시작해 90년 1월에 이혼한 마교수는 학교가 직장이자 가정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모교인 연세대학교 국문학과는 그가 69년에 입학한 이래 홍익대 조교수를 지낸 몇 년을 빼고는 30년 가까이 몸담은 곳이다. 그가 극도의 상실감에 빠져 있는 건 단지 교수직을 잃어서가 아니라 직장과 가정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이유에서다.
“항간에 사표를 냈다고 알려졌는데 아직 사표는 (학교에) 안 보냈어요. 그것은 잘못 알려진 거예요. 작성만 해놓고 있어요. 이제 그만 끊을게요. 전화할 기력도 없어요.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마교수와의 첫 만남 이후 2년9개월여 동안 10여 차례에 걸쳐 전화통화를 했지만 마교수는 전화를 끊기 전 한번도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말을 잊지 않았다. 몸과 마음이 아파도 “고맙습니다” 라는 인사말을 빼놓지 않는 그가 하루 빨리 자리를 털고 일어나 “애인이 생기면 인터뷰에 응해 주겠다”는 약속을 꼭 지켜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지난 4월9일. 마광수교수(51)와 이뤄진 전화통화에서 그가 대뜸 건넨 말이다. ‘울화병’이라는 단어를 여러 차례 반복한 그는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다’며 요청한 인터뷰를 사양하면서 “몸이 좋아지면 즐거운 마음으로 만나자”고 했다. 목소리에 힘은 없었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또박또박 들려주던 그.
마교수와 전화통화가 이뤄진 다음날인 4월10일. 팔순의 노모와 단둘이 살고 있는 서울 용산구 동부이촌동의 아파트를 찾았다. 초인종을 누르자 노모가 “(아들이) 지금 병원에 가고 없다”면서 “기력이 쇠해서 병원에서 링거액을 맞고 있다. 1시간쯤 후에 집으로 돌아올 것”이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노모는 “아들이 몹시 아파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기운이 없어 누워만 있다”고 말했다. “아픈 동생과 엄마를 보살피기 위해 친정에 왔다”는 마교수의 누나도 동생의 건강상태가 몹시 악화되었음을 내비쳤다.
30분쯤 후 마교수의 집앞에서 마교수를 병원에 데려다주고 왔다는 ‘젊은 청년’을 만났다. 마교수 누나의 승용차 운전기사인 그는 “조금 있다가 병원에 가서 마교수를 모시고 와야 한다”고 말했다. “마교수가 어느 병원에 다니냐”고 묻자 “나는 잘 모른다”고 대답한 그는 잰걸음으로 자신이 운전하는 그랜저 승용차로 향했다.
마교수는 차가 없다. 그동안 지하철이나 버스 등 대중교통을 이용했던 것. 그는 그 흔한 휴대전화도 없다. 글을 쓸 때도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대신 만년필로 원고지 빈칸을 메운다. 그래야 글쓰는 맛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필자가 마교수를 처음 만난 것은 99년 12월 중순. 그가 <남자도 이혼을 꿈꾼다>를 출간한 직후였다. ‘마광수’라는 이름 석자 옆에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즐거운 사라>. 당시 마교수는 “그 책 한권이 내 인생을 완전히 뒤바꿔놓는 계기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면서 “<즐거운 사라>가 92년 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아 교수직에서 쫓겨난 후 98년 사면복권이 되어 복직한 터라 오랜만에 사람 사는 맛이 난다”고 했다.
취재차 서울 인사동의 한 식당에서 그와 마주했을 당시 마교수는 ‘즐거운 모습’ 그 자체였다. 소주 몇잔을 기분 좋게 마시면서 호탕하게 인터뷰에 응한 그는 오랜만에 “사랑과 이별, 결혼, 이혼, 연애 등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눠 기분이 좋다”면서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면서 그는 “외로워서 정말 ‘찐한’ 연애를 하고 싶다”고 털어놓았다.
“나를 만나는 사람 가운데 ‘결혼은 안하실 겁니까? 빨리 결혼하셔서 아이도 낳고 그러셔야지요’라고 묻는 사람이 많아요. 그러면 나는 ‘결혼은 다음 얘기고, 우선 연애부터 해야지요’라고 대답하곤 했어요. 결혼이고 자식이고 다 둘째 문제고, 그것보다는 먼저 서로가 눈이 뒤집힐 정도로 ‘뿅’ 반하는 사랑에 빠져들 수 있는 연애상대가 먼저 나타났으면 좋겠어요. 내가 그토록 자나깨나 오매불망 원하는 연애를 통 못하고 있어요. 그런데 연애 상대가 없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면 듣는 사람들은 도무지 믿어주지를 않아요. ‘아니, 주변에 여자들이 아주 많을 것 같아 보이는데…. 거짓말이시죠?’라며 되물어오는 게 다반사예요.”
“연애도 한때, 사랑도 역시 한때인가 보다”라면서 담배연기를 훅 내뱉던 마교수. 그는 “나이 마흔다섯을 넘기니까 도대체 연애 할 기회를 잡을 수가 없다”면서 “사람들은 평생토록 연애할 자신이 없어 훌쩍 결혼을 하고 근근히 연애하고 싶은 마음을 억제하면서 투덜투덜 살아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연애를 하지 못하는 세 가지 이유를 찬찬히 설명했다. 그 첫째 이유는 자신의 나이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여자들은 대개가 유부녀들이고, 또 설령 혼자 사는 여자가 있다 하더라도 너무 늙어서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는 것.
“젊었을 때는 동갑내기 여자는 물론 연상의 여자까지도 다 좋게만 보였는데, 요즘엔 그저 젊고 어린 여자들만 좋게 보여요. 나이가 먹은 남자들일수록 싱싱하고 발랄한 ‘영계’들한테 빠져 사족을 못쓰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요.”
설령 눈이 핑 돌 만큼 마음에 드는 여성을 발견했다 해도, 도무지 ‘작업’에 들어갈 용기가 자신에게 안 생긴다는 게 둘째 이유였다. 그것은 마교수뿐만 아니라 주변의 또래 남자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소리로, 말하자면 ‘절차’가 귀찮기 때문에 연애를 못한다는 것. 그러면서 그는 “늙어서 기운이 빠져 그럴 수도 있겠고, 그 ‘절차’에 들이는 피땀어린 노력이 과연 제대로 결실을 볼 수 있을지 의심이 나서 그럴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그가 연애를 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내 자신이 여성을 바라보는 ‘눈’이 이젠 달라졌기 때문이다”라면서 감춰둔 속내를 드러냈다.
“젊었을 때는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면 공주님 보듯 그저 황홀한 마음에 상대방이 나를 홀대하거나 경멸해도 오로지 ‘저자세’ 일변도로 치근치근 들러붙을 수 있었어요. 그런데 나이가 드니 생각이 달라지더라고요. 남자들이 흔히 얘기하는 대로 ‘여자 마음은 갈대’라는 식의 여성관이 마음속에 뿌리 박혀 버렸어요. 그 동안에 짧게, 또는 길게 사귄 꽤 많은 여성들을 통해서 여성을 제대로 다룬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건지 절감했기 때문인지도 몰라요. 또 거의 모든 남자들이 진심으로 바라고 있는 ‘따뜻하고 편안한 여자’가 이 세상에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기 때문일지도 모르죠.”
또한 한번 결혼을 했다가 실패한 경험으로 인해 확신에 찬 ‘결혼관’을 세우지 못한 것을 연애하지 못하는 셋째 이유로 꼽았다.
마교수는 “여자를 그저 살림 잘하고 아이나 잘 기르는 역할을 하는 정도로만 보는 사람의 입장이라면야 대충대충 여자를 선택해서 아이나 하나 낳고 그럭저럭 자식 보는 재미로 살아가면 그만일 테지만 난 아직도 철부지 소년 같은 낭만적 열정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것 자체가 문제인 것 같다”고 했다.
수많은 인파가 북적이는 인사동을 빠져나가는 그에게 “애인이 생기면 그때 다시 만나서 인터뷰 하자”는 말에 마교수는 “그럽시다. 나도 애인이 빨리 생겼으면 좋겠어요”라고 흔쾌히 약속하고는 유유히 인파 속에 파묻혔다.
그 이후 마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애인이 생겼어요?”라고 물으면 “아뇨. 생길 기미도 안 보여요. 어디 좋은 여자 없어요?”라고 하면서 그저 학교와 집을 오가며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덤덤히 털어놓곤 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애인은 없지만 별탈 없이 잘 살고 있다”는 그에게 2000년 6월, <즐거운 사라>로 인해 법정에 섰던 고통보다 한치 더 깊은 고통이 찾아왔다. 마교수가 재임용과정에서 ‘교수로서 자격이 없다’는 판정을 받은 것. 동료 교수들에게 인정받지 못해 교수직에서 쫓겨나게 된 것에 대한 충격은 마교수의 정신까지 갉아먹었다.
재임용에서 탈락한 직후 필자와의 전화통화에서 그는 동료교수들에 대한 배신감에 치를 떨면서 “학과 및 문과대 인사위원회에서 ‘논문실적이 부실할 뿐만 아니라 학문적인 능력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이유로 재임용에서 부적격 판정을 받았는데 나는 교수이자 작가다. 작가로서의 입장도 인정해줘야 된다고 생각한다”며 울분을 토해냈다.
인사위원회의 부정적 평가와 “작가로서의 입장도 인정해 달라”는 마교수의 소명이 상충된다는 점을 들어 연세대학교 교원인사평가위원회가 재임용문제를 1년간 보류키로 결정했다. 하지만 마교수는 이 같은 결정에 대해 당사자가 이의신청을 제출할 수도 있지만 “동료 교수들의 행위에 너무 심한 충격을 받아 (이의신청을)제출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면서 “계약교수로 2년마다 재임용 심사를 받아야 하지만 ‘2년 동안 논문·비평·작품 등을 담은 업적평가서를 제출했으나 학과인사위원회는 시와 장편소설 등의 작품은 인정하지 않았다. 논문·비평 등도 질이 낮다며 낮은 점수를 주었다”고 주장하면서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92년 <즐거운 사라>로 인해 법원의 유죄판결을 받아 교수직에서 쫓겨난 이후 98년 5월 연세대학교 국문과 부교수로 복직한 마교수는 재임용 탈락 논란 후 심사가 보류되는 우여곡절 끝에 2000년 8월 휴직계를 내고 이촌동 집에 칩거해왔다.
재임용사건 이후부터 마교수의 목소리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종종 연결된 전화통화에서 약방의 감초처럼 빠지지 않고 건넸던 “애인이 생겼어요?”라는 질문을 더 이상 건넬 수 없게 된 것도 이즈음이었다. 마교수가 “이 지경에 이르니 연애고 뭐고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뜻을 내비쳤기 때문이다.
재임용 탈락 후 그는 “아침에 늦게 일어나 밥을 먹고 하루종일 책상 앞에 앉아서 글을 쓰고 담배를 피우다 홀짝홀짝 술을 마시는 게 하루 일과의 전부”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담배를 피우는 이유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난, 허무주의자이면서 쾌락주의자임을 자인해요. 그래서 내가 가장 즐기는 것은 역시 도피성 기호물인 술과 담배죠. 담배는 사실 정신을 마비시키는 효과는 별로 없어요. 단순히 습관성 중독이 되어 피우는 것이긴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담배 역시 ‘입이 심심해서’ 매달리게 되는 ‘섹스 대용’인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가 핥고 빠는 사랑의 행위를 지나칠 정도로 그리워하고 굶주려 있는 탓인지, 하루에 피우는 담배의 양이 점점 더 늘어만 가요. 주위의 내 나이 또래 친구들은 대부분 건강을 위해 담배를 끊고 있는데도 말이죠.”
술과 담배에 대한 어쩡쩡한 탐닉은 여자에 대해서도 그 양상이 마찬가지라고 주장하는 마교수. 그는 “자고로 주(酒)와 색(色)은 같이 붙어다니는 법이다”라고 설명하면서 그런데도 자신은 “지금까지 ‘색’을 마음대로 포식(?)해본 적이 없다”고 털어놓았다.
“여자가 담배나 술처럼 항상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설사 돈을 주고 여자를 산다고 해봤자 뒷맛이 찝찝하기 때문에 언제나 나는 색에 굶주린 상태로 있는 것 같아요. 아마도 내가 아직도 주제파악을 못하고 ‘싱싱하고 낭만적인 사랑’만을 찾아 헤매다니기 때문인가 봐요. 그래서 내가 쓰는 문학작품들의 내용이 과장적으로 에로틱한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실제로 안되면 상상으로라도 충족시켜야 하는 게 사랑이요, 성욕이니까 말이죠.”
2000년 8월, 1년간 휴직계를 내고 쉬었다가 지난해 가을학기에 복직해 한 강좌를 맡았던 마교수는 올초 다시 1년간 휴직계를 내고 쉬고 있는 상태. 휴직 이유는 건강 악화였다. 그가 문밖출입을 삼갈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 것은 지난해 연말. 지난 4월10일, 마교수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경비는 “(마교수가) 연초부터는 혼자 걷는 것조차 힘들어해 저 사람(누나의 운전기사를 가리키며)이 부축해 병원을 오가고 있다”고 말했다.
마교수는 지난해 연말 큰 매형을 먼저 저세상으로 보냈다. ‘젊은 청년’이 운전하는 그랜저는 마교수의 매형이 사용하던 차다. 마교수의 누나는 사업하던 남편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차와 운전기사가 필요치 않게 되었음에도 아픈 동생의 병 수발을 위해 운전기사를 그대로 고용하고 있다고 한다.
지난 4월 마교수의 누나는 필자에게 “동생이 아프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복직하는 데 문제가 될 수도 있으니 알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빨리 나아서 다시 교단에 서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소망을 내비쳤다.
이후 마교수와의 전화통화는 쉽지 않았다. 노모와 누나가 번갈아 전화를 받았지만 마교수를 직접 연결시켜주지는 않았다. 마교수의 집에 찾아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마교수의 와병설이 언론에 보도된 이후 마교수와 가족들은 극도로 말을 아꼈다.
9월13일 오전. 마교수 집에 전화를 걸자 노모가 전화를 받았다. “<여성동아>란다. 전화 받을래?”라는 노모의 목소리 끝에 마교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5개월여 만에 이뤄진 통화였다.
“지금도 많이 힘들어요. 죽겠어요. 지금도 죽고만 싶은 심정이에요. 괴로워서 죽겠어요. 괴롭다니까요.”
힘 없는 목소리에 울분이 잔뜩 묻어났다. 뭐라고 말을 더 건네기가 힘들 만큼 그는 지쳐 있었다.
“많이 아파요. 위가 안 좋아서 제대로 밥을 먹을 수도 없고, 간까지 안 좋아서 쉽게 피로감을 느껴요. 거의 누워서만 지내요. 문밖출입을 안한 지도 오래됐어요. 그래요. 이렇게 아파 죽겠어요. 괴롭고 또 괴로워요. 그러니 긴말을 하고 싶지가 않아요. 용건만 간단히 말해요. 말하는 것도 힘이 들어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TV도 안 보고, 책도 못 보고. 그냥 멍하니 누워서 천장만 쳐다보고 있어요.”
마교수는 대화 중간중간 긴 한숨을 내쉬었다. “와병설이 보도된 이후 동료 교수들이 병문안을 왔느냐”는 질문에 대답하는 마교수의 목소리에 갑자기 힘이 실렸다.
“없어요. 아무도 없어요. 나 아프다고 찾아온 동료가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오지 않았어요. 그런 것도 묻지 마세요. 괴로워요. 다 괴로워요.”
그의 목소리에는 동료들에 대한 배신감이 여전히 짙게 배어났다. 지난 4월에 비해 목소리는 더 가라앉았고, 숨소리도 거칠었다.
“제자들요? 제자들도 없어요. 아니 찾아온다고 해도 내가 지금 만날 수가 없어요. 아무도 안 와요. 아무도 안 오고, 안 만나고 싶어요. 여전히 잠도 못 자요. 아니 잠이 안 와요.”
85년 결혼해 2년6개월 만에 별거를 시작해 90년 1월에 이혼한 마교수는 학교가 직장이자 가정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모교인 연세대학교 국문학과는 그가 69년에 입학한 이래 홍익대 조교수를 지낸 몇 년을 빼고는 30년 가까이 몸담은 곳이다. 그가 극도의 상실감에 빠져 있는 건 단지 교수직을 잃어서가 아니라 직장과 가정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이유에서다.
“항간에 사표를 냈다고 알려졌는데 아직 사표는 (학교에) 안 보냈어요. 그것은 잘못 알려진 거예요. 작성만 해놓고 있어요. 이제 그만 끊을게요. 전화할 기력도 없어요.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마교수와의 첫 만남 이후 2년9개월여 동안 10여 차례에 걸쳐 전화통화를 했지만 마교수는 전화를 끊기 전 한번도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말을 잊지 않았다. 몸과 마음이 아파도 “고맙습니다” 라는 인사말을 빼놓지 않는 그가 하루 빨리 자리를 털고 일어나 “애인이 생기면 인터뷰에 응해 주겠다”는 약속을 꼭 지켜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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