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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야후·마이크로 소프트 출신, 글로벌 플랫폼사 서은아 상무의 워킹 맘 성장 스토리

정세영 기자

2025. 03. 12

25년 차 워킹맘 서은아 상무는 매 순간을 쪼개 스케줄을 작성한다. 수백 번의 수정 후 완성한 매일의 리듬은 그가 일과 가정의 균형을 맞출 수 있었던 동력이다. 

서은아 씨는 30년 차 직장인이자 25년 차 워킹맘이다. 책, 문구, 사람, 여행 등 온갖 만물을 좋아하고 틈이 날 때마다 새로운 것에 도전한다. 그렇다고 일과 가정에 소홀하지 않다. 아이의 학원 등·하원을 책임지고, 저녁 식사는 가족과 함께하며, 매년 정기적으로 아이와 여행을 떠난다. 또 그는 글로벌 대기업 플랫폼 회사의 상무로 굵직한 행사를 리드하고, 동북아시아 및 호주, 뉴질랜드 등의 인터내셔널 마케팅을 총괄하며 커리어를 쌓고 있다.

탄탄대로를 걸어왔을 것 같은 서은아 상무에게도 여느 워킹맘처럼 실패와 좌절의 시기가 있었다. 일과 육아 어느 하나 집중하지 못하고 허둥대는 시절을 겪었던 것. 휴직 기간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없다는 자괴감에 괴로운 시간을 보냈다.

매일같이 ‘이 동굴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서은아 상무는 스스로 돌파구를 찾기 시작했다. 하루, 일주일, 1년 단위로 스케줄을 짜 철저하게 시간 관리를 해나간 것. 계획을 모두 실행하긴 버거웠지만, 작은 성공들을 통해 성취감을 맛보며 슬럼프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했다. 만약 야근, 해외 출장, 시험, 학원 등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하면 기존의 스케줄에서 촘촘하게 계획을 조정하며 규칙적인 리듬을 이어왔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일과 가정의 밸런스가 맞춰졌고 조각 같은 개인 시간까지 갖게 되면서 지금의 안정적인 삶을 이루었다.

현재 수많은 워킹맘은 일과 육아라는 혼란스럽고 깊은 동굴에서 탈출을 꿈꾼다. 정돈된 삶 속에서 자아를 찾고, 돌발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지혜를 터득하길 바란다. 그 조언을 구하고자 워킹맘 선배 서은아 상무를 동아일보 충정로 사옥에서 만났다.

인터뷰 당일은 살갗을 스치는 칼바람에 밖에 잠시 서 있기도 힘든 날이었다. 매서운 눈바람을 뚫고 충정로 사옥에 도착한 서은아 상무는 사람 좋은 미소로 인사를 건넸다. 사실 기자는 서은아 상무를 만나기 전 조금 긴장을 했다. 드라마에 나올 법한 딱딱하고 각 잡힌 기업 임원의 모습을 상상한 탓이다. 워킹맘을 주제로 공감을 이끌어내야 할 인터뷰가 포스에 눌려 형식적으로 흘러갈까 봐 내심 걱정도 됐다. 하지만 화장기 거의 없는 수더분한 얼굴에 캐주얼 차림으로 나타난 그는 몇 번 본 사이인 것처럼 먼저 반갑게 안부를 물었다. 오랫동안 이어진 인터뷰에도 차분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았고, 깊이 있고 배려심 넘치는 언행으로 따뜻한 에너지를 전했다.

좋아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일과 육아

진로를 마케팅으로 정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저는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어요. 그래서 대학교 학과도 책 읽는 게 시험공부나 마찬가지인 국어국문학과를 선택했죠. 학교를 정말 즐겁게 다녔는데, 졸업 시즌이 되면서 오랫동안 진로를 고민했던 것 같아요. 제가 좋아하는 것, 계속해나갈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신중하게 탐색해보니 ‘스토리텔링’이더라고요. 작가와 기자 등 스토리텔러로서 일할 수 있는 분야가 다양했지만, 비즈니스 이야기를 소비자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이 매력적으로 다가와 광고대행사에 지원했습니다. 대형 광고대행사와 작은 디지털 광고대행사에 서류를 넣었는데 운이 좋게 둘 다 합격했고, 디지털 광고대행사에 입사하기로 결정했어요. 당시 저는 ‘입사 후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어요. 결국 마케팅 등 업무 숙련자가 많은 대형 광고대행사보다 다소 생소했던 디지털 대행사에서 제 역량을 마음껏 펼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죠. 또 어릴 때부터 컴퓨터를 곧잘 다뤘기 때문에 선배들과 비슷한 위치에서 출발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 같아요.
용감했죠. 대형 광고대행사에 비해 연봉도 3분의 1밖에 안 되고, 제가 어떤 상황에 놓일지 가늠조차 안 됐거든요. 하지만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빨리 성공하고 싶었거든요(웃음). 학교 다닐 때 대기업 채용 설명회에 가면 관계자는 제 서류를 쳐다보지도 않았어요. “상경계열만 뽑아요. 여자는 안 뽑습니다” 등 성별에 의한 거절이 만연한 시절이었거든요. 태어나 처음으로 남녀 차별을 겪어봤죠. 이를 계기로 일을 하게 되면 이와 같은 불합리한 상황이 자주 펼쳐질 거라 예상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규모는 작지만 내 역량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회사에서 열심히 일해야겠다’고 결심했죠. 빨리 인정받아 제 선택이 맞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거든요.

사회 초년생 시절은 어땠나요.
무척 발랄하고 호기심 많은 막내였어요. 사내에서는 항상 웃으며 열심히 뛰어다니는 사원으로 유명했죠. 당시에는 한 기업의 일원으로 일할 수 있다는 자체에 감사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항상 즐거웠던 건 아니에요. 정말 많은 실수와 실패를 경험했거든요. 좌절도 많이 했지만, 그 경험이 지금까지 일을 이어올 수 있는 근간이 됐다고 생각해요. 또 ‘어떤 어려움이 오더라도 나는 다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고요.

현재 직장에는 어떻게 입사하게 됐나요.
저는 지금까지 총 여섯 번의 이직을 했어요. 야심 차게 들어간 첫 회사는 망했고, 한 번은 친구 아버지 회사 일을 돕기 위해 캐나다로 떠났는데 그곳에 도착했을 땐 이미 프로젝트가 끝난 상태였죠. 그다음 회사에선 무서운 상사를 만나 매일 울다가 이직했어요. 당시 이직은 도망이자 생존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죠. 그 후 야후 등 몇몇 회사를 거쳐 마흔이 넘었을 무렵 마이크로소프트에 입사했습니다. 그즈음 미국 출장을 끝내고 아이와 함께 샌프란시스코로 휴가를 갔다가 현재 회사의 캠퍼스 투어를 하게 됐어요. 회사의 CEO인 마크 저커버그에 대해 호기심이 있던 때였거든요. 저는 아직도 회사의 캠퍼스에 입장했던 그 순간을 잊지 못해요. 그토록 가보고 싶었던 곳에 오니 너무 설레고 벅찼거든요. 주위를 둘러보다 딸아이를 마주했는데 얼굴이 상기돼 있더라고요. “엄마 여기 너무 좋아!” 하면서 감탄사를 연발했죠. “뭐가 그렇게 좋아?”라고 물으니 아이는 “좋으면 좋은 거지 이유가 뭐가 중요해”라고 딱 잘라 말하더라고요. 아이의 말에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어요. 저는 머릿속으로 ‘이 회사로 이직하면 연봉이나 직급 등이 얼마나 오를까’를 먼저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현실적인 부분만 셈하고 있는 제 모습이 부끄러웠죠. 캠퍼스를 둘러보며 이직에 대한 마음이 더욱 확고해졌고, 밖으로 나올 때는 가이드 직원에게 “다음엔 이곳의 직원으로 올게요”라고 인사했어요. 그 후 채용 공고가 떴고 6개월간 인터뷰를 거쳐 현재 회사에 입사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상무 자리까지 올랐죠.

몇 번의 이직은 있었지만 약 30년 동안 마케터라는 한 가지 일만 해왔어요. 그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좋아하는 마음이요. 저는 사람이든 물건이든 호감이 생기면 정말 열렬히 좋아해요. 이런 성향이 마케터라는 직업과도 잘 맞는 것 같아요. 마케터는 무언가를 사람들에게 알리고, 좋아하는 마음을 극대화하는 역할을 하잖아요. 저는 그걸 해내기 위한 과정이 너무 즐겁고 보람차요. 또 매번 새로운 콘텐츠를 접하기 때문에 지루하지도 않고요.

일을 좋아한다고 해서 모두 잘할 순 없지 않나요.
맞아요. 항상 좋아하는 일만 할 수도 없고요. 가장 어려운 게, 어렵고 싫어하는 일을 잘해내야 할 때인 것 같아요. 그런 상황에서 저는 일의 프로세스 중 좋아하고 관심 있는 부분을 찾기 위해 노력해요. 그리고 그 단계를 더욱 즐겁게 보낼 생각으로 힘든 시간을 견뎌냅니다. 일을 잘하는 건 결국 스스로가 좋아하는 부분을 찾아내는 데서 시작되는 것 같아요.

가장 기억에 남는 콘텐츠가 있다면요.
제 아이의 아이돌 덕질을 도와준 거요. 콘텐츠라고 하기엔 조금 애매할 수도 있겠네요(웃음).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주위에서 “열 살쯤 되면 남자 아이돌을 좋아할 거야”라는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저는 ‘우리 아이는 그럴 것 같진 않은데’라고 생각했죠. 아이돌에 전혀 관심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아이가 초등학교 저학년이 되자 여자 아이돌을 좋아하는 거예요. 그 후 딱 열 살에 사랑의 화살이 남자 아이돌을 향했죠. 그 모습에 마케터적 마인드가 살아나면서 ‘ 이 변화의 마음에 영향을 준 건 무엇일까?’에 대해 관찰하게 됐어요. 그리고 아이의 좋아하는 마음이 더욱 커질 수 있게 함께 공연장에 가고, 팬 미팅 줄을 서고, 주말마다 아이돌 생일 카페에 가는 등 물심양면으로 도와줬죠.

아이가 좋아하는 것에 진심이었네요.
맞아요. 아이가 한창 인형 뽑기에 빠졌던 중학교 시절에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함께 열심히 인형을 뽑았어요. 그리고 인형들을 놓을 방을 마련해 “여기는 네가 좋아하는 그 아이들(인형)이 살 곳이야”라고 이야기했죠. 아이는 아직도 그 방을 마치 보물 상자처럼 소중히 대해요.

아이가 지금은 고등학생인데, 엄마 입장에서 걱정도 됐을 것 같아요. 학업에 집중해야 할 시기니까요.
저는 아이를 정말 힘들게 가졌어요. 오랜 기다림 끝에 기적처럼 찾아왔죠. 이렇게 소중한 아이에게 성적과 직업적 위치 등을 운운하는 건 욕심이라고 생각해요. 부모로서 아이에게 유산처럼 물려줄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하면 좋은 학교와 직업은 부수적인 결과물일 뿐이에요. 전 아이가 스스로 행복한 마음을 만들어내고 무엇이 자신을 진정으로 가슴 벅차게 하는지를 아는 사람이 됐으면 해요. 이를 위해 아이가 진심을 다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적극 지원해주죠. 자신의 마음을 잘 알고 감정을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은 누구보다 좋은 삶을 살아낼 거라고 믿거든요.

디테일한 스케줄로 완성한 밀도 있는 매일

서은아 상무가 아이와 함께 공부하는 작업 공간. 늦은 밤 본사와 회의가 있을 땐 직원들과 함께 이곳에서 일한다.

서은아 상무가 아이와 함께 공부하는 작업 공간. 늦은 밤 본사와 회의가 있을 땐 직원들과 함께 이곳에서 일한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요.
너무 많았죠(웃음). 아이가 태어난 뒤 3개월 육아휴직을 하고 복직했을 땐 친정어머니가 아이를 돌봐주셨어요. 직업 특성상 새벽에 본사와 연락을 하거나 프로젝트가 있으면 며칠씩 집에 들어오지 못했죠. 그 모습을 본 어머니가 “회사를 그만뒀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시더라고요. 일보다는 가정에 집중하는 삶을 살길 바란다면서요. 당시 하루에 정말 1000번씩은 고민했던 것 같아요. 어머니가 평일에는 저희 집에 계시다 주말에 본가로 돌아가셨는데, 그때마다 많이 지쳐 보였거든요. 또 아이는 매일 아침 저를 보며 “엄마 오늘 회사 가?”라고 물어봤어요. 그러곤 “가지 말라”면서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울며 떼쓰는 날이 허다했죠. 일, 가정 어디에도 집중할 수 없는 ‘혼돈의 도가니탕’이었어요.

보통 그 시기에 퇴사를 결심하게 되죠.
저 역시 마찬가지였어요. 무너지는 날들의 연속이었거든요. 사실 그즈음에 재직했던 야후의 팀장님께 “그만두겠다”는 말도 했었어요. 그때 팀장님께서 제 눈을 오랫동안 자세히 보시더니 더 이상 묻지 않고 “4개월 정도 쉬고 오는 건 어떠냐”고 말씀해주셨죠. 위태로웠던 제 모습이 안쓰러워 먼저 제안해주신 거예요. 지금 생각해도 무척 감사해요. 당시에는 휴직이 보편화하지 않았거든요. 출산휴가도 3개월밖에 안 됐으니까요. 팀장님께서는 저와 가정이 안정을 찾을 수 있는 특별한 시간과 기회를 주신 거고요.

휴직 기간은 어떻게 보냈나요.
아이에게 올인했죠. 무엇이든 다 해주고 싶었거든요. 하루를 치열하게 보낸 뒤 아이가 잠들면 저를 위해서도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영화나 책을 보는 등 스스로를 위한 시간을 가졌어요. 4개월 동안 거의 잠을 못 자서 살도 많이 빠졌고요. 당시 깨달은 건 ‘난 성취감이 중요한 사람’이라는 거예요. 사실 휴직 기간에 회사를 정리하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잠을 쪼개서라도 이런 시간을 갖는 저 자신을 보며 ‘좋아하는 일을 포기하면 안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또 나중에 제 아이가 지금의 저를 떠올리며 똑같은 결정을 내릴까 봐 두려웠고요. 그래서 휴직이 끝나면 무조건 복직하기로 결심했어요.

대책은 있었나요.
일단 친정 부모님을 저희 집에서 모시고 살기로 결정했어요. 제가 경제적 지원을 한다는 조건하에요. 그 과정이 쉽진 않았지만 결국엔 일에 대한 제 진심을 알고 부모님이 합가를 허락하셨죠. 아이에게는 들쭉날쭉한 스케줄을 이해시키기 위해 노력했어요. 하지만 어린아이에게 무조건 이해해달라고 하는 건 너무 이기적이더라고요. 그래서 아이와 약속했죠. 일주일에 하루는 무조건 함께하기, 야근은 두 번만 하고 그 외의 날들은 일찍 들어오기, 프로젝트가 끝나면 여행 가기 등으로요. 가장 중요한 약속은 ‘이 규칙은 반드시 지킨다’였고요. 복직 후 이 항목들을 실행하려면 철저하게 일정 관리를 할 수밖에 없었어요.

평소 시간 관리는 어떻게 하나요.
제 스케줄표는 30분 단위로 정리돼 있어요. 또 하루, 주간, 월간으로 나눠 계획을 짜놓았죠. 루틴도 명확한 편이에요. 월요일은 재택, 화요일은 점심 미팅, 수요일은 1:1 미팅, 인터뷰와 강연은 한 달에 2~3개 내외로 하는 걸로요. 저는 직업 특성상 매년 3주가 미친 듯이 바빠요. 그땐 가족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온전히 일에만 집중하고, 일이 끝나면 바로 2주 동안 휴가를 다녀와요. 이 루틴을 약 18년 동안 지켜오고 있어요.

보통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나요.
평일은 거의 일정한 루틴으로 움직여요. 아침에는 아이를 챙겨서 학교에 보낸 뒤 저도 출근하고 오후 6시에 퇴근하죠. 일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면 오후 8~10시에는 아이를 영어 학원에 데려다주고 저는 학원 맞은편에 있는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요. 여의치 않으면 학원 자습실, 주차장 계단에 앉아 업무를 보기도 하고요. 글로벌 회사여서 일찍 출근하거나 늦은 밤 회의를 할 경우도 있는데 그럴 땐 유기적으로 움직여요. 아이가 늦게까지 공부할 때는 함께 책상에 앉아 시간을 보냅니다. 아이 옆에서 책을 읽거나 일을 하는 식으로요.

매일을 꽉 채워 생활하는 느낌인데요.
저는 하루를 정말 길고 밀도 있게 사용하려 해요. 바쁜 날, 노는 날, 쉬는 날 등 목적에 따라 꽉 채워 생활하죠. 그래서 요즘은 잠과 운동에 신경을 많이 써요. 오랫동안 이 생활을 유지하려면 체력은 필수니까요.

올해 꼭 이루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요.
저희 팀에 워킹맘이 정말 많아요. 18개월 된 쌍둥이를 키우거나, 열 살 아들과 함께 이민을 준비하는 등 상황이 제각각이죠. 저도 엄마로서 어려운 시절을 겪어 그 힘듦을 누구보다 잘 알아요. 그래서 올해는 워킹맘들이 각자 삶의 루틴을 만들 수 있도록 적극 도와줄 생각이에요. 육아 때문에 낑낑대지 않게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배려할 계획입니다. 그들이 매일을 보통의 날로 여기고 잘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 올해 저의 가장 큰 계획이에요.

하루하루 간신히 버티고 있는 워킹맘들이 많아요. 이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강의나 강연장에서 제 편안한 삶이 부럽다고 이야기하는 분들이 많아요. 그럴 때마다 “이미 전쟁 같은 시간을 거쳐왔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죠. 저는 30대 중반에 아이를 낳고 오랫동안 엄청난 노력으로 지금의 루틴을 만들어왔어요. 그 과정을 통해 쓸데없는 시간을 줄이며 일과 가정의 균형을 맞췄죠. 무슨 일이든 한 번에 이루어지는 건 거의 없어요. 고민과 좌절도 분명 존재하죠. 하지만 그 시간은 분명 지나갑니다. 만약 지금 일과 육아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작은 단위로 하루의 일정을 짜보세요. 그리고 각각을 해내는 성취감을 통해 슬럼프에서 벗어나는 거죠. 또 일이나 육아에 관한 고민을 가족은 물론 팀장, 팀원과 공유하며 이를 해결할 수 있는 효율적인 방법을 찾았으면 좋겠어요.

#서은아 #응원대장 #올리부 #여성동아

‌사진 홍태식 
‌사진제공 서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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