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2년 11월, 뉴욕 패션 위크의 신성으로 불리다 일약 세계 패션계의 거성으로 성장한 디자이너 알렉산더 왕이 프랑스를 대표하는 패션 하우스 발렌시아가의 대표 디자이너로 발탁됐다. 이는 당시 그야말로 쇼킹한 뉴스였다. 1997년부터 16년간 브랜드를 진두지휘하며 죽어가던 하우스를 부활시킨 천재 디자이너 니콜라 제스키에르가 발렌시아가를 떠난 후, 과연 누가 차기 수장이 될 것인가는 업계 초미의 관심사였고 그 자리를 뉴욕 컬렉션의 스타였던 중국계 미국인 디자이너 알렉산더 왕이 꿰찼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의미심장한 사건이었다. 자존심 강한 프랑스 패션 하우스의 수장이 뉴욕에서 건너온 디자이너였다는 것도 브랜드로서는 새로운 도전이자 커다란 변화였지만, 그보다도 새롭게 브랜드를 이끌게 된 책임 디자이너가 아시아인이라는 것이 시사하는 바가 컸다.

하지만 불과 3년도 채우지 못한 2015년 7월, 알렉산더 왕은 파리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가 발렌시아가의 새 디자이너로 영입되었다는 뉴스만큼 대대적으로 보도가 되지는 않았지만, 그가 이렇게 단기간에 발렌시아가를 떠난다는 뉴스 역시 패션계에 충격을 주었다.

이런 큰 성장률에도 불구하고 결별의 이유가 매출 부진이라는 소문이 돌게 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전임 디자이너인 니콜라 제스키에르가 약관 25세의 나이에 발렌시아가에 합류한 뒤 선보인 이른바 ‘모터 백’이 가방의 역사에 길이 남을 잇 백이 된 데 비해, 알렉산더 왕은 발렌시아가를 통해 이렇다 할 히트작을 내지 못한 것.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내건 브랜드 알렉산더 왕과 T by 알렉산더 왕이 조금 쇠퇴하는 듯한 경향을 보인 것이 소문의 이유라면 이유가 됐을 것이다.

마치 바다로 갔던 연어가 산란을 위해서 자기가 태어났던 강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처럼, 더 넓은 세계를 경험하고 돌아온 알렉산더 왕은 자신의 뿌리가 있는 자리로 돌아와 H&M과 콜래보레이션을 단행했다. 이를 통해 알렉산더 왕이라는 디자이너 브랜드가 그 힘과 매력을 잃지 않았다는 강렬한 메시지를 발신한 셈이다.
이렇듯 거물급 디자이너들이 자신의 이름을 건 브랜드에 전력투구하기 위해 세계적 패션 브랜드의 책임 디자이너 자리를 내놓는 경우가 상당히 많아졌다.

오래전 셀린느의 책임 디자이너로 활약했던 마이클 코어스는 파리 하우스와의 동행을 뒤로하고 본거지인 뉴욕으로 돌아와 자신의 이름을 건 브랜드에 전력을 쏟아 명실상부 세계적인 톱 브랜드로 키운 사례가 있다. 1997년 마크 제이콥스는 루이비통, 마이클 코어스는 셀린느의 책임 디자이너로 취임했지만 2003년에 셀린느를 그만두게 된 마이클 코어스를 두고, 마크 제이콥스에 비해 역량이 부족하다는 소문까지 돌기도 했지만 돌이켜보면 당시 마이클 코어스의 선택은 신의 한 수였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그때의 결정으로 마이클 코어스는 미국 출신의 단일 디자이너 네임 브랜드 중, 전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수익을 내는 브랜드로 등극했을 정도로 그 기세가 상당하다. 이는 이전까지 최고였던 랄프 로렌을 누른 것으로, 영원한 라이벌이라고 불리는 마크 제이콥스 역시 마이클 코어스의 이 괄목할 만한 성장에 자극받아 루이비통 디자이너 자리에서 물러나는 초강수를 두었으니 향후 자신의 이름을 건 브랜드의 확대에 전력을 다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사람들이 많다.
디자이너들의 회귀본능은 결국 선택과 집중의 결과물이다. 한때는 동시에 몇 가지 일을 척척 추진해가는 이른바 멀티 태스커가 더 각광받기도 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한 가지를 잘하는 것, 대신 그 한 가지를 아주 센스 있고 감각이 ‘쩔게’ 발전시키는 사람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이른바 크래프츠맨십(Craftsmanship), 즉 장인 정신적인 평가가 통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기에 천재 디자이너들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최고의 결과물을 고급지게 뽑아내는 것이 이 시대가 요구하는 최선이라는 것을 간파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회귀본능을 따른 디자이너들의 다음 목적지에 주목하며 2016년을 맞이할 일이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광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안젤리나 졸리, 기네스 팰트로, 줄리아 로버츠, 아만다 사이프리드, 미란다 커 등 세기의 뮤즈들과 함께 작업해왔다. 현재 ‘pertwo’를 이끌며 패션 광고를 만들고 있다. ‘레드 카펫’을 번역하고 ‘패션 뮤즈’를 펴냈으며 한국과 일본의 미디어에 칼럼을 기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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