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글쓰기 일타’ 나민애 교수의 독서 교육
나민애 서울대 기초교육원 교수는 서울대 학생들을 대상으로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서울대 국문과와 동 대학원 석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2007년부터 매년 200명 이상의 학생을 만나왔다. 서울대 학생의 독서와 글쓰기 능력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셈이다. 나태주 시인의 딸로 알려진 나 교수는 고등학생 딸과 초등학생 아들을 키우는 엄마이기도 하다. 최근 출간한 ‘국어 잘하는 아이가 이깁니다’는 그간 독서로 쌓은 글쓰기 공력 그리고 학부모의 마음을 담아 집필한 책이다.
처음 나 교수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을 땐 논·서술형 평가 대비를 위한 글쓰기 능력을 묻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는 “쓰기는 읽기 능력에 바탕을 둔 것으로 적어도 중학생 이전에는 쓰기를 강제로 시키지 않길 바란다”며 “책 읽기의 즐거움을 잃어버리면 모든 게 의미가 없다”고 강조했다. 어릴 적 책을 읽은 경험은 대학 진학에도 영향을 준다. 그의 저서에는 서울대 신입생을 대상으로 조사한 통계가 나와 있다. ‘초등학교 때 책을 많이 읽는 편이었는가’라는 질문에 69%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할 게 없어 심심해야 책 읽어”
책은 왜 읽어야 하나요.성장하기 위해서죠. 주변에 중요한 가치를 일깨워주는 선생님이나 리더, 롤 모델이 있으면 도움을 받을 수 있잖아요. 그걸 책 안에서 찾을 수 있어요. 어떤 구절을 선생님 삼는 거죠. 나이와 상관없이 성장하고, 배우고 싶은 욕구가 있다면 책을 읽어야 하죠. 자라는 아이들에게 책은 더 중요합니다. 깨끗한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는 시기인데 책은 그 물감이 되는 겁니다.
아이들에게 책을 읽히는 건 어렵습니다.
우선 책이 멀리 있으면 안 돼요. 개인적으로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태블릿 PC를 제공하는 게 걱정스럽습니다. 책을 읽는 건 하얀 바탕에 있는 검정 글씨를 보는 거거든요. 글을 바탕으로 그림을 머릿속에서 그려보는 작업입니다. 가령 ‘자본의 흐름’이라는 말을 봤다고 하죠. 그럼 자본을 떠올리고 그 자본이 어떻게 사회 속에서 작동하는지를 상상해봐야 합니다. 그게 책 읽기거든요. 하지만 형형색색의 그림이 나오고 움직이기까지 하는 태블릿 PC를 보면 상상력을 발휘하기 어렵습니다.
현란한 게 눈앞에 있으면 책을 안 읽는다는 말이네요.
기본적으로 책은 영상보다 재미가 없어요. 영상을 볼 때보다 뇌가 더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하거든요. 뇌도 쉬고 싶을 거 아니에요. 특히 영상을 보는 것에 더 익숙해진 요즘, 책 읽기는 일부러 찾아서 해야 하는 행위가 됐죠.
아이들을 심심하게 만들어야 하나요.
저도 큰애를 키울 땐 뭐라도 해주고 싶었어요. 남들이 가는 곳에 우리 아이도 가야 할 것 같았죠. 지금 생각해보면 아이가 어릴 땐 명산에 가는 거나 집 앞의 동산에 가는 게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아요. 그런 체험 활동도 중요하지만 책에서 뭔가를 만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심지어 기름값도 아낄 수 있죠. 그래서 둘째를 키울 때는 체험하는 걸 줄이고 대신 책을 읽히려고 좀 더 노력했죠.
아이들이 심심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렇죠. 요즘은 운동도 미술도 잘해야 하고, 악기도 켤 수 있어야 할 것 같죠. 그래서 아이들 스케줄이 아이돌 스케줄 같아요. 그중에 중요한 건만 추리고 책을 읽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게 가정경제에도 좋고 아이들에게도 좋지 않나 생각해요.
책을 많이 읽으면 성적이 좋아지나요.
학부모에게 “책은 마음의 양식이니 읽히세요”라고 하면 잘 와 닿지 않아 하죠. 하지만 “책 많이 읽으면 공부를 잘하게 됩니다”라고 말하면 반응이 달라져요. 물론 책을 많이 읽는다고 서울대를 갈 수 있다고 말은 못 해요. 하지만 공부 잘하는 애들은 책 읽은 경험이 많아요. 읽기는 공부의 기본입니다. 적어도 교과서를 읽을 수 있어야 하고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는 게 기본이니까요.
책은 언제부터 읽혀야 하나요.
저는 책이 의무가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책의 재미를 알기 어렵습니다. 책 읽기는 가급적 생각날 때 그냥 하면 되는 거죠. 다만 저는 그런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어릴 때는 병풍책이라고 해서 고개만 가눌 수 있으면 머리맡에 두는 책이 있거든요. 그런 식으로 책은 언제든 접할 수 있게 했어요.
만화도 괜찮다, ‘이것’만 아니라면
나민애 서울대 기초교육원 교수는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해 국어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어릴 적 집에는 아버지를 위한 책밖에 없었어요. 저를 위한 책을 살 만큼 여유롭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이웃 언니 집에서 계몽사 전집을 발견하고 그걸 읽기 시작했어요. ‘이솝 이야기’ 같은 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죠. 그러면서 책을 많이, 빨리, 잘 읽게 됐습니다.”
흥미로 책을 읽은 건 나 교수가 가르친 서울대 학생도 마찬가지다. 그가 자신이 가르친 서울대 신입생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책을 많이 읽은 편이라고 답한 학생에게 왜 책을 읽었냐고 묻자 34%가 ‘재미있어서’라고 답했다. ‘부모님 때문에’(25%), ‘환경적으로 도서관에 자주 가서’(17%)가 뒤를 이었다.
아이가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면요.
아이에게 책의 재미를 알려주려면 부모가 책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부모가 책을 들고 다녀야 아이가 그걸 보고 배웁니다. 아이 입에서 “엄마 휴대폰 그만해, 카톡 좀 그만해” 이야기가 나온다면 반성하셔야 합니다. 저는 가끔 부모님이 “우리 애는 ‘해리 포터’만 봐요”라고 고민을 토로하면 축하드린다고 해요. 책에 재미를 느낀 거니 좋은 시그널이죠.
만화만 본다면 어떨까요.
조사가 중요한데요. 만화‘만’ 읽는다면 그건 안 됩니다. 저는 학습만화를 읽는 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학습만화‘만’ 보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다만 앉아서 뭔가를 보는 엉덩이 힘을 기를 수 있겠죠. 책에도 단계가 있습니다. 그림이 많은 책에서 적은 책으로, 컬러에서 흑백으로 성장해야 해요. 점차 요소를 덜어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반대로 꼭 고전을 읽어야 합니까.
고전을 읽어야 한다고 하면 학부모들은 걱정합니다. “우리 애에게는 이걸 안 읽혔는데 어떡하죠?” 같은 반응이죠. 독서를 선행학습 돌리듯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말 대신 고전의 좋은 점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어요. 고전은 오래 살아남은 이야기이고 여기엔 합당한 이유가 있어요. 배울 만한 게 있는 거죠. 가령 ‘춘향전’을 읽으면 고전 어휘를 알 수 있고 조선시대의 신분 관계나 시대상을 자연스럽게 배우게 돼요. 그리고 다른 책을 읽는 데도 도움이 되죠. 현대시 중에도 춘향이를 모티프로 쓰인 시가 있거든요. 고전이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쉬운 고전도 있습니다. ‘이솝 이야기’나 ‘탈무드’ ‘동양 신화’ 등이죠. 무조건 어려운 책을 읽히는 게 능사는 아닙니다.
문학과 비문학의 밸런스도 중요한가요.
두루 읽힐 수 있으면 좋죠. 저는 개인적으로 자녀들에게 문학도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 때 소설, 해방 이후 소설, 최근 유행하는 소설 등 다양하게 읽히기를 권합니다. 비문학도 읽어보면 좋죠. 아무래도 비문학을 읽혀야 사회 분야 지식이 쌓이거든요. 문학을 두 권 읽으면 비문학을 한 권은 읽어보라고 했어요.
책을 읽고 난 뒤 기록해야 하나요.
저는 10년 넘은 보물 같은 독서 기록을 갖고 있습니다. 일을 하거나 글을 쓸 때 과거에 읽었던 책을 복기하기 위함이죠.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도 독서 기록을 하길 권합니다. 하지만 초중학생들은 책을 읽고 기록할 필요는 없어요. 애들은 원래 잘 까먹어요. 그리고 잊어버려야 새로운 게 들어오거든요. 노화로 인한 어른의 망각과는 다릅니다. 책을 읽고 적어두는 건 고등학생 때부터 해도 늦지 않습니다.
부모는 아이가 책을 읽었는지 확인하기를 원합니다.
부모님 중에 아이가 책을 너무 빨리 읽는 것 같다고 걱정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그러면 아이에게 밑줄을 그어보라는 조언합니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을 형광펜으로 줄 쳐보라고 하는 거죠. 그러면 아이가 책을 내밀며 모르는 걸 이렇게 많이 찾아왔다고 뿌듯해해요. 부모 입장에서는 속이 터질 수도 있지만 어쨌든 아이가 모르는 걸 체크해가며 책을 읽은 걸 확인할 수 있죠. 행복한 책 읽기를 위해서는 그 정도로 만족하셔야 합니다.
글쓰기 연습은 빨라도 중학생 이후부터
입시에서 글쓰기 능력이 중요해지고 있습니다.저는 글쓰기를 가르치지만 그 대상은 대학생입니다. 이미 읽은 게 많다는 전제하에 글쓰기를 배우는 겁니다. 초중학생 학부모들은 아이가 많이 읽는 데 초점을 둬야 합니다. 많이 읽으면 어휘나 문장력이 자연스럽게 트이게 됩니다. 글쓰기 스킬은 암기한다고 되는 영역이 아닙니다.
고교 내신에서 논·서술형 시험 비중이 커진다고 하는데요.
글쓰기 능력이 너무 걱정되면 적어도 쓰는 연습은 중학교 이후부터 시키면 좋겠습니다. 이 이야기도 조심스럽습니다. 읽기가 안 되는 아이에게 글쓰기를 시키면 아이는 읽기조차 싫어할 수 있거든요. 독서의 재미를 잃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서울대 학생들은 글을 잘 쓰나요.
서울대 학생들도 똑같아요. 당연히 잘하는 학생이 있고 그렇지 않은 학생이 있죠. 그럼에도 문장의 흐름이나 단어의 퀄리티가 좋은 학생들을 종종 만나요.
글쓰기 능력은 타고나는 건가요.
글쎄요. 제 경우엔 아버지가 시인이니 타고났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그러면 그게 유전자에 각인된 것이냐 하면 그건 잘 모르겠어요. 아버지는 6남매 중에 유일하게 글을 쓰십니다.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글쓰기에 신경을 쓰지도 않으셨고요. 다만 아버지는 외할머니 집에서 자랐는데, 너무 할 게 없었대요. 그래서 비는 시간이 많았고, 그때 책을 많이 읽었다고 하시더라고요. 저도 지금은 글쓰기를 가르치고 달변이라는 이야기를 듣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닌 것 같아요.
아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국어 학원도 보내야 하는지 고민이 커집니다.
저는 둘째가 4학년이 됐을 때 국어 학원을 보냈어요. 첫째와 달리 둘째는 책 읽는 습관이 잡히지 않더라고요. 아이를 파악해서 필요한 학원에 보내는 건 부모님의 선택입니다. 다만 다른 아이가 학원에 다니니까 우리 아이도 보내는 건 너무 쉬운 선택이죠. 또 아이가 국어 학원을 다녀보고 싫어한다면 보내지 않는 게 좋습니다. 거기에서 책을 읽는 것 자체가 고난이라는 이야기거든요. 그럴 땐 부모와 함께 책 읽는 시간을 가지는 게 더 좋습니다. 아이가 책을 싫어하게 되는 게 제일 나쁜 상황입니다.
그의 책에 따르면 서울대 학생들 역시 초등학생 때 30%만 독서·논술 학원을 다녔고, 중학생이 되면 그 비율은 13%로 줄어든다. 물론 내신을 위한 학원을 다닌 비율이 18.4%지만 혼자 국어 공부를 했다는 비율이 68.4%로 가장 높다. 국어는 혼자 할 수 있는 과목인 만큼, 어릴 때부터 독서 습관을 길러 국어에 대한 기초를 쌓는 것이 가장 현명한 국어 대비법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어릴 때 독서 습관을 길러두지 않았다면 고등학생이 된 아이가 당황할 수도 있다. 학생부종합전형(학종)을 준비할 때 독서가 중요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2024학년도 입시부터 학생부상 ‘독서 영역’은 대입에 반영되지 않지만 ‘세부능력 및 특기사항’ ‘창의적 체험활동’ 등 다른 영역에 독서 관련 내용을 기재할 수 있다. 전공 적합성을 드러내는 독서는 흥미를 위한 독서와 결이 다를 수밖에 없다. 나 교수가 쓴 ‘국어 잘하는 아이가 이깁니다’는 서울대 학생이 직접 꼽은 중고등학교 추천 도서를 부록으로 제공한다. 인문학, 사회과학, 경영학, 이학, 공학, 메디컬 계열 등 각 전공별 추천 도서 목록과 상세한 설명이 붙어 있다. 그는 “사실 이 책은 부록을 위해 시작했다”고 말했다.
부록이 메인인 셈이네요.
처음엔 고등학생과 그 학부모들을 위해 썼어요. 요즘 고등학생들은 입시에서 전공을 고르라는 압박을 받아요. 이럴 때 부모님들도 걱정이 되니까 아이들을 재촉해서 진로를 생각하게 만들어야 하죠. 그럴 때 책이 맛보기로 작용합니다. 그때 이용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리스트를 만들었어요. 전공별로 나눠 총 120권을 소개해요. 학생부를 풍부하게 만들거나, 면접을 보려면 관련 학과 책을 보고 공부해야 하거든요. 그걸 검색하면 비슷비슷한 책이 나와요. 모두가 그 책을 읽고 입시에 임하면 손해잖아요. 그래서 제가 각 단과대 학생들에게 직접 물어보고 읽어본 뒤 리스트를 만들었습니다.
과거 서울대 필독서 리스트가 유행하기도 했는데, 대부분 성인도 어렵게 느끼겠던데요.
그건 교수님들이 고른 책이거든요. 교수 입장에서 대부분의 책은 쉽게 느껴지죠. 저는 학부모 마인드로 책을 뽑았습니다. 그래서 리스트를 만들 때 다양한 난이도의 책을 넣었고요. 스스로 수준에 따라, 관심에 따라 읽으면 됩니다.
자녀 교육에 대해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
트렌드를 너무 따라가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사람들이 한 방향으로 달려 나갈 때 그걸 따라하는 게 미래에도 좋을지를 생각해봐야 해요. 지금 모두가 선망하는 산업에 사람들이 몰리면 종사자들의 연봉은 줄겠죠. 앞으로는 AI 시대라고 하고, 매체는 더 많아질 겁니다. 그러면 책을 읽는 인구는 줄어들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책 읽기가 불필요한 세상이 오지는 않습니다. 100명 중 1명이 어려운 텍스트를 이해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분명 살아남게 되겠죠. 게임을 잘한다고 게임을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듯이, 중요한 걸 만들어내려면 다양한 분야의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때 어려운 내용을 독해하는 능력은 필수적이죠. 책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은 어떤 분야든 분명 플러스알파가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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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홍태식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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