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 동화 작가 전이수
‘영재 발굴단’에 출연한 그때도, 지금도 전이수 작가 가족은 제주도에 산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홈스쿨링 중인 전 군에게 제주의 푸른 바다와 따사로운 햇살, 초록 나무는 선생님이자 친구다. 덕분에 학교 밖 세상에 관심이 많다. 최근 발표한 동화책 ‘모든 걸 기억하진 못해도’는 치매를 소재로 삼았다. 또 책을 내놓은 다음 날인 9월 26일부터 약 한 달간 열린 ‘16년 6월 24일-전이수의 푸른 고백’은 작품 판매 수익금 전액을 기부한 특별 전시다. 기부금은 국제구호개발 NGO 월드비전을 통해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위해 쓰일 예정이다.
“그림을 배우면 오히려 내 것을 잃을까 두려워요”
여전히 평범하지 않은 청소년기를 그려나가고 있는 전 군을 서울 종로구 JCC아트센터에서 만났다. 그는 자주색 스웨터와 청바지를 입고, 자신이 직접 만든 나무 가방과 페도라로 포인트를 준 차림새였다. 패션 감각을 칭찬하며 “직접 골라 입은 것이냐” 묻자, 동행한 엄마 김나윤 씨는 “이수는 뭐든지 자기가 알아서 한다. 그런데 코디랄 게 없다. 옷이 10벌 정도라 저기서 스웨터를 벗으면 여름 옷차림”이라며 웃었다. 최소한의 옷으로 환경보호를 실천하는 것처럼 인터뷰도 그런 식이었다. 말과 행동이 똑같았다.
이번 책에서 동화에서는 보기 쉽지 않은 소재인 치매를 다룬 이유는 무엇인가요.
제주광역치매센터에서 치매에 대한 동화책을 만들어달라는 요청이 있었어요. 처음엔 제가 자세히 알지 못하는 치매에 관한 책을 어떻게 만들까 고민이 되더라고요. 그러다가 이런 기회가 온 것에 대해 기쁘게 생각하게 됐어요. 덕분에 생각보다 치매 때문에 힘들어하는 분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됐고요. 더더욱 ‘책을 만들어야겠구나’라고 다짐하게 됐죠. 이 책이 가족들과 함께 읽고 치매에 관해 얘기 나눌 수 있는 계기가 되면 좋겠어요. 또 그로 인해 갈등보다는 화합과 사랑으로 서로를 바라볼 수 있게 되면 더 좋겠고요.
사랑하는 부모님이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어떤 기분일까요.
아,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에요. 얼마나 가슴이 아플지…. 사실 제 일이 아니면 절실히 느끼지 못하잖아요. 그래서 누군가의 아픔을 이해하기 위해 이런 책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글과 그림이 유기적인 연결 관계를 갖는 것 같아요. 평소에도 일기를 쓰는 동안 연상되는 그림을 그려보는 식이라면서요.
네, 맞아요. 저는 글을 먼저 쓰고 그림을 그려요. 글도, 그림도 똑같은 하나의 표현 도구이기 때문에 무엇이 먼저이든 중요한 건 아니라고 봐요. 저는 글을 쓰다 보면 그림이 그려져요. 그래서 제 전시에는 늘 그림과 글이 함께일 수밖에 없고, 글 또한 하나의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글과 그림 둘 중에 어떤 것에 더 자신이 있나요.
둘 다 자신 있어요. 글과 그림이 저에겐 하나니까요.
글짓기나 그림을 전문적으로 배워보고 싶은 생각도 있나요.
아니요. 지금은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어요. 예전에 서점에서 산 드로잉 책을 보고 그렸다가 제 것을 잃어버리는 경험을 한 적이 있거든요. 그래서 조금은 겁이 나요. 여러 종류의 나무를 드로잉하는 과정과 기술, 색칠법까지 순차적으로 설명해놓은 책이었어요. 그 책을 사서 집에서 다 보고 났더니 그다음부터는 나무를 못 그리겠더라고요. 저는 어떤 사물을 보면 그 사물을 제 안에 풍덩 담갔다가 저만의 걸로 바꿔서 종이 위에 그려요. 그런데 나무는 책에서 본 게 자꾸 생각나요. 저는 잘 그리기보단 제 감정을 있는 그대로 잘 표현하고 싶어요.
그럼 다른 작가의 작품도 잘 접하지 않는 편인가요.
호크니와 뱅크시를 좋아해서 그들의 작품을 많이 봐요. 다만 누군가가 “이렇게 그려야 해” 하는 미술교육은 받고 싶지 않다는 거예요. 미술학교가 있다면 좀 더 자유롭고 각자의 색깔을 인정해주는 곳이면 좋겠어요.
스마트폰보다 워크맨을 좋아하고, 전쟁을 걱정하는 10대
제주도 함덕해수욕장 근처에 위치한 갤러리 ‘걸어가는 늑대들’. 전이수 작가의 손길이 곳곳에 닿아 있다.
“내 표정이 내 마음을 대변하고, 내 감정이 오늘 하루를 만들며 또 나를 만든다. 사람들이 말하는 사춘기를 지나고 있다 할지라도 난 세상을 다 알기엔 아주 조금밖에 살아보지 못했고, 경험도 많이 부족하다. 누군가의 말들을 듣기에 나의 기준도 아직 확고히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걸 겸손하게 배우고 겸허하게 바라봐야 한다는 걸 안다. 결국은 이 기준이라는 것도 사실 필요 없음을 깨닫게 될 때 난 이미 많이 커 있겠지? 내게 사춘기는 이 겸손함을 더 철저하게 배우는 시간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전이수 작가는 사춘기마저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보내고 있는 게 틀림없다. 김나윤 씨는 그런 아들을 지켜보며 함께할 뿐이다. 전 군 외에도 현재 둘째 우태, 막내 유담이까지 세 아이가 홈스쿨링으로 원하는 공부를 하고 있고, 셋째 유정이는 특수학교에 다닌다. 이날 전시 도슨트로 나선 아들을 김나윤 씨는 관람객 뒤에 서서 지켜봤다. 일대일로 말을 할 때는 쑥스러워하던 전 군은 마이크를 잡으니 딴사람이 됐다. 김나윤 씨가 아들을 믿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김나윤 씨는 “이수가 중학교 검정고시는 이미 통과했고, 내년 정도에 고등학교 검정고시에 도전해볼까 생각 중”이라면서도 “이수가 홈스쿨링을 하고 싶다고 말해서 시작한 것처럼 검정고시도 원할 때 보려 한다”고 말했다.
이번 책 마지막 장에 카세트 플레이어 사진이 있던데, 실제로 사용하나요.
제가 쓰는 워크맨이에요. 제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워크맨이 사라졌다고 들었어요. 전 예전의 기기들에 더 호감을 느끼는 취향이라 너무 안타깝더라고요. 이 워크맨은 빈티지 가게 삼촌이 하나 구해주겠다고 해서 5개월이나 기다렸다가 받은 거예요. 퀸과 마이클 잭슨의 노래들, ‘On the Line’ ‘Visiting Hours’ ‘The Last Goodbye’ 등 제가 좋아하는 곡들을 공테이프 10개에 녹음해 듣고 있어요.
스마트폰으로 들으면 간편하잖아요.
저는 스마트기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빠르고 모든 걸 다 담고 있지만, 그 안에 저를 망칠 수 있는 요소를 품고 있으니까요. 쉽게 얻는 건 빠르게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특히 스마트폰이나 스마트 패드, 컴퓨터 같은 기기들은 편리함을 위해 개발한 물건인데, 오히려 많은 사람이 그 기기에 시간을 빼앗기고 있어요. 물론 저도 스마트폰과 아이패드, 컴퓨터가 있지만 제 일에 유익하게 이용하고 싶어요. 그 안에는 많은 유혹이 있고, 그 유혹들은 쾌락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 시간을 그런 쾌락과 바꾸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여유로운 제주도 생활이 더 잘 맞나 봐요. 제주도로 이주한 지 벌써 10년이 됐어요. 도시에서 살고 싶단 생각을 한 적도 있나요.
도시에서 살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가끔 놀러 갈 수 있는 도시가 좋아요. 제주도에서는 산과 바다와 계곡, 숲이 아주 가까이에 있어서 얼마든지 원할 때 쉽게 다녀올 수 있어요. 다만 제주도에서 10년을 살았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도 살아보고 싶긴 해요.
보통 하루 스케줄이 어떻게 되나요. 홈스쿨링은 할 만한가요.
또래 친구들과 조금은 다르게 생활하지만, 크게 다를 건 없다고 생각해요. 우리 가족은 아침마다 하루를 여는 ‘열기’를 통해 계획을 짜고, 자기가 세운 계획대로 하고 싶은 공부랑 작업을 해요. 홈스쿨링의 장점은 제가 하고 싶은 공부를 먼저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주로 목공, 피아노, 기타, 소설 쓰기, 조각, 토론, 영어 등을 공부해요. 나들이도 하고요. 가족들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 좋아요. 홈스쿨링의 단점은 잘 모르겠어요.
10대 청소년들은 성적 때문에 고민하는 경우가 많은데, 현재 이수 군의 고민은 무엇인가요.
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시험을 보는 건 당연하지만, 학생들이 대학을 필요로 해서 가는 거면 좋겠어요. 모두가 다 대학을 간다고 나도 꼭 가야만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는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는 일은 없어요. 다만 전쟁이 계속 일어나서 그건 걱정이에요. 전쟁이 없으면 좋겠어요.
전쟁 때문에 걱정하는 청소년이라니. 이뿐만이 아니다. 이수 군은 전쟁 외에도 어두운 사회 곳곳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되기 위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 크고 작은 캠페인에 재능 기부를 하는가 하면, 제주도에서 운영 중인 갤러리 겸 카페 ‘걸어가는 늑대들’ 수익의 일부는 제주 미혼모 보호시설과 국경없는의사회, 아프리카 아이들을 위해 기부하고 있다.
월드비전 최초의 아동 홍보대사로서도 3년 넘게 활동을 이어가는 중. 지난해 8월에는 아프리카 르완다에 직접 다녀오기도 했다. 다녀와서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을까 고민한 결과가 바로 이번에 연 기부 전시다. 전이수 작가는 나누는 삶에 대해 “아무래도 내가 어린 나이에 작품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어른들처럼 돈을 모으는 것보다는 나누는 일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추는 듯하다”고 설명했다.
많은 이에게 힘이 되는 그림 그리는 게 목표
이날 전이수 작가는 작품 설명 시작 전 동생들과 작은 무대를 꾸몄다.
오랫동안 후원하고 있는 친구를 찾아갈 때 이왕이면 원하는 선물을 주고 싶어서 물어봤어요. 갖고 싶은 게 뭔지 답이 왔을 때 무척 놀랐어요. 바로 고기와 염소였어요. 한편으로는 많이 슬프기도 했어요. 여기 (한국의) 친구들은 갖고 싶은 선물로 반짝반짝한 것만 생각할 텐데 고기랑 염소라뇨. 가족과 집 형편을 걱정할 수밖에 없는 친구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어요. 그리고 저를 생각했어요. 감사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됐죠.
이번 기부 전시는 일회성이지만, 제주도 ‘걸어가는 늑대들’은 상설 갤러리잖아요. 수익금의 일부를 기부하는 건 누구 아이디어인가요.
저의 그림과 글이 좋은 역할로 쓰이고, 또 많은 사람에게 힘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제가 엄마한테 얘기했어요. 그렇게 하면 좀 더 좋은 마음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 같다고요. 1년에 한 번 전시장 그림을 바꾸는데, 매년 찾아와주는 분들이 늘고 있어요. 같은 전시더라도 “우울할 때, 슬플 때, 혼자 생각하고 싶을 때마다 위로받고 나를 돌아보고 싶어서 온다”며 여러 차례 방문하는 분도 계세요. 제 그림들이 힘을 잘 발휘해주는 듯해 그럴 땐 참 뿌듯해요.
사회에 관심이 많네요. 요즘도 부모님과 사회 이슈에 대해 토론을 하나요.
요즘은 계속되는 전쟁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나누고 있어요, 욕심 때문에 전쟁이 끝나지 않는다고요. 또 아직도 만연한 인종차별 문제에 관한 얘기를 하기도 해요. 인종차별을 주제로 그린 ‘무엇이 다를까?’라는 그림도 있어요. 한번 찾아서 봐주시면 좋겠어요. 저는 부모님과 차 마시며 대화하는 게 정말 재미있어요. 시간 가는 줄 몰라요. 그렇게 알게 된 사회적인 이슈들이 작품 안에 녹아들기도 하고요.
여러모로 부모님이 멋진 분들 같아요. 일반적인 부모들과 좀 다르다는 걸 아나요.
네. 특히 엄마는 다른 엄마들과 달라요. 우리 형제들이 편하게 무엇이든 얘기할 수 있고, 어떤 문제든 같이 의논할 수 있어서 정말 좋아요.
지금 사는 세상에서 이것만큼은 꼭 달라졌으면 좋겠다는 부분이 있나요.
제가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할머니와 할아버지로부터 예전엔 정이 많은 사회였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요즘은 사람들이 너무 인색하대요. 이기적이고요.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조금 더 커졌으면 좋겠어요.
10대가 이런 생각을 하다니 이수 군의 미래가 궁금해지네요. 20대, 30대의 전이수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더 큰 목표를 위해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모으고 있을 거예요. 자기가 말한 바를 지켜내고 이루어내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 그래서 (테슬라 CEO) 일론 머스크를 먼저 만나보고 싶어요. 제가 이루고 싶은 큰 목표는 일론 머스크가 가진 목표와 같거든요. 저의 궁극적인 목표는 인류에게 공헌하고, 자연을 보호하는 거예요.
#전이수 #월드비전 #여성동아
사진 김승환
사진출처 ‘걸어가는 늑대들’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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