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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3관왕 이후 건넨 ‘우진아, 축하해’ 16년 만에 처음으로 말했죠”

조지윤 기자

2024. 08. 14

2024 파리 올림픽에서 양궁 국가대표팀이 전 종목을 석권했다. 세계 최고의 태극 궁사들을 이끈 홍승진 양궁 국가대표팀 총감독에게서 듣는 올림픽 비하인드. 

홍승진 양궁 국가대표팀 총감독

홍승진 양궁 국가대표팀 총감독

대한민국 양궁 국가대표팀이 역대급 금빛 승전보를 올렸다. 2024 파리 올림픽에서 금 5개, 은 1개, 동 1개로 역대 최고 성과를 거뒀다. 남녀 개인전과 단체전, 혼성전까지 전 종목에서 금메달 5개를 석권한 것. 이에 양궁은 지난 1984년부터 누적 금메달 32개라는 위업을 세웠다. 또 은메달 10개, 동메달 8개 등 총 50개의 올림픽 메달을 따며 새 역사를 썼다. 2016 리우 올림픽과 2020 도쿄 올림픽에서 연달아 단체전 금메달을 따낸 김우진 선수는 파리에서 금 3개를 더해 한국 올림피언 최초로 5관왕이 됐다.

이번 양궁 신화의 주역은 그간 흘린 구슬땀으로 쌓아 올린 역량을 아낌없이 펼친 선수들이다. 공정한 기록 경쟁을 통해 철저히 실력으로만 선수를 선발해온 대한양궁협회와 1985년 이래 40년간 선수 육성과 체계적 훈련을 돕는 회장사인 현대차그룹의 전폭적인 지원도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그 뒤를 묵묵하게 지켜온 한 사람이 있다. 청주시청 양궁부 감독 겸 파리 올림픽 양궁 국가대표팀 총감독을 맡은 홍승진 감독이다.

홍 감독은 1994년부터 16년여간 충북체육고등학교에서 코치 생활을 하며 임동현, 김우진 등 스타 양궁선수들을 발탁해 길러냈다. 2009년 창단된 청주시청 남자양궁 감독으로 지휘봉을 잡은 그는 지난 2020 도쿄 올림픽 대한민국 양궁 남자대표팀 감독으로서 올림픽 양궁 남자 단체전 2연패를 이끌었다. 홍 감독은 이번 파리 올림픽에도 남자대표팀 감독으로 지원했지만 협회로부터 총감독직을 제안받았다. 그는 “남자대표팀으로서 3관왕을 목표로 했는데 총감독이면 5관왕을 목표로 해야 하니까 부담이 됐다”며 웃어 보였다.

고심 끝에 수락한 그는 잠시간의 걱정은 뒤로하고 5관왕의 쾌거를 거뒀다. 지난 8월 9일 충북 청주시 김수녕양궁장에서 귀국한 지 4일 차인 홍승진 감독을 만났다. 시차 적응과 쏟아지는 취재 요청으로 하루에 2시간도 채 못 자고 있다는 이야기를 미리 들었지만 훈련장에서 만난 홍 감독은 시종일관 유쾌한 모습이었다. 다음 태극마크를 기다리며 차분히 훈련을 이어가는 청주시청 양궁부 소속 궁사들이 활시위를 겨누는 가운데 홍 감독에게 파리 올림픽 소회부터 김우진 선수와의 인연까지 깊은 이야기를 들어봤다.

감독이 믿어야 선수도 믿는다

대한민국 남자 양궁 대표팀 김우진 선수는 개인 통산 5번째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하며 올림픽 양궁 역사상 최다 금메달을 획득한 선수로 이름을 올렸다.

대한민국 남자 양궁 대표팀 김우진 선수는 개인 통산 5번째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하며 올림픽 양궁 역사상 최다 금메달을 획득한 선수로 이름을 올렸다.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소감을 먼저 듣고 싶어요.
끝나는 순간 머리가 멍했어요. 거칠게 말해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죠. 2020 도쿄 올림픽 당시 제가 남자팀 감독으로서 3관왕을 목표로 했는데 2관왕에 그쳤습니다. 그때 정의선 양궁협회장님께 기회가 된다면 남자팀 3관왕을 하는 것이 지도자로서 마지막 목표라고 말씀드리기도 했습니다. 목표했던 바를 이뤄서 정말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들었지만 동시에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생각도 들면서 복잡했습니다. 말 그대로 ‘멘붕(멘털 붕괴)’이 왔죠.

출국 전 5관왕이 목표라고 했는데 정말 이뤘습니다.‌
대표선수들이 선발되고 제가 “금메달 5개는 자신 있다”고 인터뷰를 했는데 주변에서 자제시켰습니다. 5개 따겠다고 하고서 못 따면 욕먹지만, 3개 딴다고 하고 5개 따면 칭찬받으니까 목표를 적게 말하라고요(웃음). 말이 앞서면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을 저도 알지만, 그만큼 지도자가 선수들에 대한 자신감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못 따면 어쩌지’ 걱정하는 것이 감독 얼굴에 드러나면 선수들에게도 영향을 줍니다. 잘할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어줄 때, 선수들도 짐을 내려놓고 더 열심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30여 년 지도자로 살면서 모든 시합마다 늘 선수들보다 제가 더 자신 있어 했네요(웃음).

모든 경기가 떨렸지만 특히 남자 개인전 결승을 가슴 졸이면서 봤어요. 현장에서는 더욱 긴장됐겠어요.
김우진 선수가 슛오프에 갔을 때, 분명 이길 거라고 생각했지만 정말 떨렸습니다. 활의 세기를 ‘파운드’라고 하는데 국내 선수들보다 해외 선수들의 파운드가 더 강해요. 우진이는 49.5파운드 정도가 나오면 해외 선수들은 50파운드 이상이 나와서 바람이 불어도 화살이 덜 날리는 편이죠. 마지막 활을 쏠 때 눈 꼭 감고 ‘부처님, 좀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했죠. 활 쏘는 소리에 눈을 떴고, 결과를 보고 저도 모르게 소리를 꽥 질렀습니다. 사실 총감독으로서 이렇게 얘기하면 안 되지만, 제가 몸담고 있는 청주시청에서 함께해온 김우진 선수의 3관왕이 확정돼서 특히 기뻤죠.

총감독은 처음입니다. 남자팀 감독을 할 때와 어떻게 달랐나요.
제가 초등학교부터 일반부 선수들까지 모두 지도를 한 경험이 있고, 충북체육고등학교에서 16년 6개월간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남녀 선수 모두 지도한 적이 있어서 큰 차이는 못느꼈습니다. 각 팀 감독과 코치들도 함께해줬고요.

여성팀 전원과 이우석 선수는 이번에 올림픽 첫 출전이었습니다.
전훈영 선수와 남시현 선수는 국내 대회 경험은 있지만 국제 대회 경험은 없었습니다. 임시현 선수와 이우석 선수는 아시안게임 등 국제 대회에서 메달을 딴 전적이 있지만, 올림픽은 아시안게임에 비해 관중이 2~3배는 많죠. 선수들이 더 긴장할 수밖에 없는 환경입니다. 걱정이 없었다면 거짓말이죠. 하지만 대표팀 선발 이후 양창훈 감독 지도하에 선수들이 전체적으로 기록도 좋아지고 대담해졌습니다. 출국 전까지도 기록이 꾸준히 올라와서 걱정은 덜고 자신감 있게 출발했습니다.

양궁도 ‘한류’ 열풍, 걱정되지는 않아

2024 파리올림픽 양궁 국가대표 김우진, 이우석, 김제덕, 전훈영, 임시현, 남수현 선수(왼쪽부터).

2024 파리올림픽 양궁 국가대표 김우진, 이우석, 김제덕, 전훈영, 임시현, 남수현 선수(왼쪽부터).

감독-코치-선수-협회의 ‘원팀’ 정신을 강조합니다.
국가대표팀 지도자는 총 5명입니다. 다들 나이 먹은 어른이지만 서로 의견이 다르고 삐딱하게 군다면 선수들한테도 부정적인 기운이 다 전달돼요. 가정에서 부모님이 싸우면 자식들이 눈치를 보거나 회사에서 팀장이 인상 쓰면 팀 전체 분위기가 가라앉는 것과 마찬가지죠. 저는 그런 것들이 제일 싫어요. 그래서 아무리 화가 나도 다들 한 발자국씩만 뒤로 물러나고, 서로 참고 대화로 풀도록 청주시청 양궁부에서부터 조성해왔어요. ‘미안해’ 한마디면 되잖아요. 서로 소통하고 웃으면서 합을 맞추는 것이 원팀을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합니다.

프랑스가 한국과 지형이 달라서 예상하지 못한 상황도 있었다고요.
한국은 산이 있어서 바람이 불어도 중간중간 세력이 약해집니다. 그런데 파리는 갑자기 돌풍이 부는 경우가 있어요. 선수들은 양궁 과녁 앞의 풍향계를 보고 활을 쏘는데, 중간에 바람 세기가 달라지면 낭패죠. 우리 선수들이 한 번씩 7점, 8점 나오는 것은 실수해서가 아니라 바람이 갑자기 불어 화살 방향이 꺾였기 때문이에요. 양궁은 사실 운도 무시할 수가 없죠.

지난 9일 청주 김수녕 양궁훈련장에서 양궁 훈련에 임하는 선수들.

지난 9일 청주 김수녕 양궁훈련장에서 양궁 훈련에 임하는 선수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대표 선수들의 심박수가 평온했어요.
우선 선수들의 대회 경험이 많은 덕분이고요. 진천국가대표선수촌에 파리 올림픽 양궁 경기장과 똑같은 세트를 만들어 훈련하면서 현지 상황에 익숙해지기도 했습니다. 심리 훈련도 받고요. 그래도 다들 연습보다는 시합에서 훨씬 더 긴장하기는 합니다. 실제로 선수들의 연습 기록이 실전에서도 나온다고 하면 웬만한 신기록은 다 깰 정도죠.

사선에 서기 전 선수들 컨디션을 80~90%만 만든다고요.
시합을 나가기 전에 기록이 너무 좋으면 자만에 빠질 수 있어요. 100% 컨디션으로 직전 기록을 내놓고 실제 경기에서는 70% 수준으로 뚝 떨어지기도 합니다. 오히려 출전 일주일 전에 기록이 조금 떨어진 상태에서 본 시합에 나가면 더 집중해서 100% 역량을 끌어냅니다. 30여 년간 많은 선수를 지도하면서 느낀 바입니다.

최근 한국인 지도자가 외국 양궁대표팀을 이끄는 경우가 늘면서 세계 양궁 실력도 상향평준화가 됐습니다.
이번 파리 올림픽에서 한국을 제외하고 8개 국가 양궁대표팀 지도자가 한국인이었습니다. 지도자로서 선수들의 실력을 끌어올리고 싶은 욕심이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 덕분에 세계 양궁선수들의 기량이 많이 좋아졌어요. 이번 올림픽에서도 나라별 평균 기록이 이전보다 나아졌고요.

걱정되지는 않나요.
전혀요. 거기에 맞서서 우리는 또 훈련하고 준비하면 되니까요.

이번 경기에서 아프리카 차드 국가대표 ‘마다예’ 선수도 주목받았습니다.
사실 국제 양궁 대회에서 흑인 선수들을 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양궁장에서 보고 저희도 다들 기뻐하고 반가워했죠. 독학으로 양궁을 배웠고 이번이 첫 올림픽 출전이라는 이야기는 기사를 통해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선수는 제대로 지도를 받으면 정말 훨씬 좋아질 수 있습니다. 다행히 국내 양궁 장비 제조업체 파이빅스가 마다예 선수를 지원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사실 백종대 파이빅스 대표도 고등학생 때 제가 가르친 학생으로, 양궁을 했던 친구예요. 저한테도 마음이 짠하다며 후원하기로 했다고 메시지를 보냈어요. 양궁은 누구나 실력만 갖춘다면 할 수 있는 스포츠인 만큼 좋은 기회로 이어져서 다행입니다.

“우리 우진이는 말이에요”

홍승진 감독은 김우진 선수가 고등학생이던 시절부터 그와 인연을 맺었다. 충북체고에서 시작해 청주시청 양궁부에 이르기까지 16년간 지도자와 선수로서 합을 맞춰오고 있다. 홍 감독은 김우진 선수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면 “우리 우진이”라며 애정을 아끼지 않았다. 귀국 후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김우진 선수는 다시 2028 LA 올림픽 준비에 돌입했다고. 예능 프로그램에서 섭외 러브 콜이 쏟아지지만 묵묵히 훈련을 이어갈 예정이라고 한다.



이번 김우진 선수의 3관왕은 감독님께도 감회가 남다를 것 같아요.
김우진 선수가 예전에 저한테 화를 낸 적이 있어요. “왜 감독님은 제가 메달을 따도 한 번도 축하한다는 말을 안 해주냐”는 이야기였죠. 제가 “마음속으로 축하해주고 기뻐하면 되는 거지”라고 했더니 “그래도 서운하다”고 말하더라고요. 이번에 3관왕이 됐을 때 제가 “우진아, 축하한다. 잘했어”라고 했더니 김우진 선수가 “선생님, 고맙습니다” 하더군요. 사실 국가대표팀 감독이 된다는 것은 지도자로서 최고의 성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김우진 선수의 3관왕 달성이 제 마음속 가장 큰 목표였어요. 이제는 정말 더할 나위 없이 기쁘고 행복합니다.

2012 런던 올림픽 출전 좌절 이후 김우진 선수가 슬럼프를 겪던 시기에도 묵묵히 지켜봤습니다.
국가대표 선발 당시 김우진 선수가 32강에서 탈락해 1년간 쉰 적이 있습니다. 그때 김 선수가 어리기도 했고 큰 욕심도 없어서 그랬던 거지, 사실 옆에서 지켜본 입장에서는 슬럼프까지는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늘 잘하는 선수였어요.

메달을 따는 선수들의 특별한 점이 있을까요.
쉽게 말해 집중력이 좋습니다. 잘하는 선수가 옆에 있다고 해서 몸이 굳거나 자세가 흐트러지지도 않고 흔들림이 없어요. 양궁뿐만 아니라 모든 종목에서 메달을 따는 선수들은 성격도 굳건하고 집중력이 좋은 듯합니다.

집중력은 노력하면 기를 수 있나요.
그럼요.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선수들도 있겠지만 우리 김우진 선수 같은 경우는 제가 “훈련 좀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말할 정도로 연습을 해요. 본인 생각에 오늘 기록이 저조하다 싶으면 훈련 스케줄 다 끝나고 혼자 몰래 나와서 연습해요. 그러면 후배들도 자연스럽게 따라 나와서 훈련을 합니다. 강제적인 것은 절대 아니고요. 기록이 좋은 김우진 선수도 그렇게 훈련을 열심히 해서 기록이 더 좋아지니까 다른 선수들도 자극을 받는 거죠.

청주시청 양궁부가 강팀인 이유네요.
개인적으로 자부심을 느끼는 것이 청주시청 양궁부에 입단한 이래로 기록이 떨어진 선수가 지금까지 하나도 없어요. 양궁 메인 대회에 청주시청 소속 선수가 안 나간 적이 한 번도 없고요. 그렇다고 최상급 선수들만 입단하는 것도 아닙니다. 실력이 중간만 돼도 저희는 100% 받아들이는데, 그렇게 온 선수들은 모두 성적이 정상급으로 올라왔습니다. 팀 자체 분위기가 다들 열심히 하고 노력하도록 조성돼 있어서죠.

저도 입단이 가능할까요.
양궁을 시작해 중간 정도까지만 실력을 키워서 오신다면, 저는 오는 선수들은 100% 다 받아주니까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웃음).

마지막으로 감독님의 다음 목표는 무엇인가요.
김우진 다음 주자를 만드는 것이 목표입니다. 냉정히 말해 아직은 그런 선수가 없고요. 제가 정년퇴직이 2년 남았는데, 힘닿는 데까지 매진해서 좋은 선수를 발굴하고 길러내기 위해 노력해보려 합니다.


#홍승진감독 #양궁 #파리올림픽 #여성동아

‌사진 지호영 기자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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