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블랙핑크가 미국 최대 음악 축제 ‘코첼라 밸리 뮤직 앤드 아츠 페스티벌’(이하 코첼라) 출연자로 대미를 장식했다. 전 세계 팬들은 블랙핑크의 퍼포먼스에 열광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의 무대 의상인 한복에 큰 관심을 보였다. 코첼라 무대 후 ‘한복’ 인터넷 검색량이 증가했고, 한복을 입고 블랙핑크의 커버 댄스를 선보이는 해외 팬들의 모습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세계 언론사들 역시 블랙핑크의 코첼라 한복 의상을 헤드라인으로 장식하며 극찬했다. CNN 스타일은 “이번 주 룩: 코첼라 블랙핑크, 한국의 한복을 입다”라는 제목하에 “제니, 지수, 리사, 로제가 한복을 착용하고 한국의 헤리티지와 유산을 오마주하며 획기적인 모먼트를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이와 같은 관심은 해당 한복 브랜드와 디자이너에게도 이어졌다. 블랙핑크가 인트로 퍼포먼스 때 걸친 개량한복 의상은 한국 패턴 디자인 브랜드 오우르의 장하은 대표 작품이다. 히브리어로 ‘빛’을 뜻하는 오우르는 전통적인 가치를 보존하면서 현대적으로 새롭게 재창조한 한복, 액세서리, 오브제 등을 국내외에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 자체 개발한 한국적인 패턴을 활용하는 곳은 오우르가 국내 유일하다. 지난달에는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KCDF)이 주관하는 ‘2023 한복문화주간’에서 신진 한복인상을 수상하며 실력을 입증받았다.
장 대표는 롤 모델로 어머니이자 전통 한복의 대가 ‘금단제’ 수장 이일순 디자이너를 꼽았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며 30년 가까이 금단제를 이끄는 어머니가 멋있고 존경스러웠던 것. 장 대표가 현재 한복과 관련된 일을 하는 데는 집안 분위기가 큰 영향을 미쳤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한복에 사용하는 소재와 패턴 등을 보고 자랐기 때문이다.
지난달 장 대표를 만나기 위해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오우르 숍을 찾았다. 특별한 날에만 입는 옷으로 화석화되었던 한복을 재탄생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해온 스토리를 듣고 싶었기 때문. 블랙 시스루 드레스 위에 전통 한복 치마 스타일의 원피스를 레이어드한 그는 “한복을 더 이상 전통이라는 특정 범주에 가둬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숍에 걸려 있는 아이템과 컬렉션들은 지금껏 우리가 봐왔던 한복과는 다른 모습이다. 장 대표는 그렇게 천천히 사람들의 편견을 깨뜨리며 한복을 ‘입고 싶은 옷’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한복 디자이너가 된 건가요.
한복 디자이너가 되겠단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어요. 원래 꿈은 패션 디자이너였어요. 한복은 좋아했지만 제 영역은 아니라고 생각했죠. 확신이 바뀐 건 서울예고 미술과 졸업 후 미국 시카고예술대학에서 유학했을 때부터예요. 당시 패션디자인을 전공하고 섬유디자인과 제품디자인을 부전공했는데, 전공보다 원단을 다루는 섬유디자인에 더 관심이 가더라고요. 그러다 3학년 때 영국 런던에 위치한 예술대학,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에 교환학생으로 가면서 진로를 바꾸게 됐죠. 당시 ‘프린트’라는 원단에 들어가는 패턴을 공부하는데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비비드한 색채와 볼드한 문양 등 평소 강렬한 텍스타일을 좋아하는 제 취향과도 잘 맞았고요. 작업은 흥미로웠지만 결과물은 늘 아쉬웠어요. 장하은만의 결이 담긴 디자인을 선보이고 싶었죠. 그래서 오랜 시간 탐구하고, 공부하고, 시도해봤는데 수많은 외국 학생 사이에서 저만이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한국적인 요소더라고요.
현재 선보이는 제품들이 전통 한복 스타일은 아니에요.
전통 한복은 이미 글로벌화했어요. 저는 전통 한복에 개인적인 감각과 취향 등을 믹스한 새로운 카테고리를 만들고 싶었죠. 이 작업을 시작한 건 영국에서 교환학생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간 후예요. 본격적으로 섬유디자인을 공부했거든요. 모시, 춘포, 명주 등 한복에 사용하는 전통 소재로 다양한 작품을 만들었죠. 당시 결과물을 본 외국인 교수님과 학생들의 반응이 너무 좋았어요. 소재와 믹스 방법이 신선하고, 한국적인 모티프를 컨템퍼러리하게 풀어냈다고요. 긍정적인 반응에 확신이 생기면서 매 작업을 즐겁게 했던 것 같아요.
인테리어 회사에서도 일했다고 들었어요.
당시 거주했던 시카고는 건축의 도시예요. 조각 같은 건물과 감각적인 인테리어가 즐비하죠. 그 시기 주요 관심사는 비비드한 색감을 입은 인테리어 아이템이었어요. 자칫 촌스러워 보일 수 있는 진한 색상들을 대담하게 활용한 뒤 트렌디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감각을 배우고 싶었죠. 대학 졸업 후 시카고 유명 인테리어 회사에 지원했고 운 좋게 합격했어요. 그곳에서 컬러 믹스 매치, 패턴 활용법 등 많은 것을 습득했죠. 현장에 투입되느라 몸은 힘들었지만 새로운 것을 배우고 공부할 수 있는 값진 시간이었어요.
한국에는 언제 돌아왔나요.
인테리어 회사에서 1년 정도 일하고 돌아왔어요. 당시 고민이 굉장히 많았어요. 미국에서 경험을 더 쌓아야 할지, 하고 싶은 일을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추진해야 할지요. 한국행을 결심하게 된 건 인테리어 회사에서 만났던 한 클라이언트 덕분이에요. 한국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이태원 클라쓰’를 봤다면서 드라마 속 장면들을 레퍼런스 삼아 인테리어를 의뢰하셨거든요. 또 드라마 ‘킹덤’이 유행하자 출연자가 쓴 갓과 한복에도 관심을 갖는 외국인들을 보며 한국 전통 의복이 세계 시장에서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는 걸 확신했어요. 해외에서 체감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저만의 브랜드를 만드는 것도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죠.
당시 한국의 한복 시장은 어땠나요.
전통 한복에 대한 관심은 줄었지만 개량한복처럼 디자인적 요소가 가미된 한복을 찾는 분들은 많았어요. 한복이 더 이상 특별한 행사를 위한 의복이 아닌, 실생활에서 활용할 수 있는 일상복으로 바뀌기 시작한 거죠. 이런 변화들이 오우르 론칭에 힘을 실어줬던 것 같고요. 저는 트렌디하면서도 편안한 실루엣에 한국적인 패턴과 문양을 녹인 데일리 룩을 만들고 싶었거든요. 대중과 오우르가 추구하는 방향이 절충하는 시기였죠.
금단제의 서브 브랜드로 출발하는 게 더 쉬운 길이었을 것 같아요.
저와 어머니가 추구하는 브랜드의 철학은 확연히 달라요. 금단제는 전통을 고수하는 브랜드예요. 전통을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걸 용납하지 않죠. 반면에 저는 전통적인 요소를 활용한 영하고 캐주얼한 스타일을 선호하고요. 금단제 안에서는 제가 원하는 걸 마음껏 펼치기 힘들 것 같았어요. 서브 브랜드로 론칭한다 해도 금단제의 기본 철학과 스타일을 완전히 버릴 순 없잖아요. 또 전통 한복을 예쁘게 만드는 것보다는 좀 더 독특하고 특색 있는 걸 선보이고 싶은 욕망이 컸고요. 그동안 구상하고 준비해왔던 모든 걸 제대로 보여주려면 새로운 브랜드를 론칭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죠.
어머님 반대는 없었나요.
많이 반대하셨어요. 브랜드를 론칭해서 30년 가까이 키워오셨고, 한복을 포함한 패션 시장의 한계에 대해 너무 잘 알고 계시니까요. 또 디자인이 브랜드의 모든 건 아니잖아요. 유통, 운영, 마케팅, 홍보 등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너무 많죠. 이 모든 걸 혼자 짊어지게 하고 싶지 않으셨던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한번 마음먹으면 끝장을 봐야 하는 성격이에요. 결심한 이상 어떻게 해서라도 실행해야 하죠. 어머니께 계속 제가 하고 싶은 것과 계획 등을 어필했고, 어머니는 결국 승낙하셨어요. 쉽지 않은 과정이었고 론칭까지 힘들었지만 후회는 없어요.
업계에서는 “한복 브랜드 혹은 디자이너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연줄이 있어야 한다”는 속설이 있어요. 맨땅에 헤딩하기 힘들다는 의미죠. 오우르가 관심을 받은 것이 어머님의 후광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물론 도움이 되는 부분은 있어요. 어머니가 전통 한복의 대가시고, 인맥도 넓고 관련 지식도 풍부하시니까요. 론칭부터 지금까지 다양한 방면에서 조언해주시죠. 하지만 모든 부분에서 도움이 되진 않아요. 금단제와 오우르는 제작 방법부터 달라요. 전통 한복은 평면 패턴이에요. 옷을 내려놓으면 종이처럼 일자로 펼쳐지죠. 오우르는 입체 패턴으로, 사람의 몸에 맞춰 3D로 제작해요. 재봉법, 컬러 배치, 장신구 사용 등도 금단제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합니다. 만약 어머니와 같은 길을 택했다면 모든 과정이 순탄했겠죠. 하지만 발품 팔아 업체를 찾아내고 SNS 관리, 패션 플랫폼 입점 등 새로운 루트를 직접 만들어 가면서 브랜드를 운영하고 있어요. 한마디로 창업을 한 거예요.
오우르 아이템은 모두 단벌로 제작되는 것 같아요.
한복 구성품을 모두 갖춰 입는 것이 이상했어요. 속치마, 치마, 저고리 등을 한꺼번에 입으면 너무 불편하잖아요. 가격도 비싸고요. 이 점을 해소하기 위해 정말 많이 고민했고, 한복을 소품처럼 활용하자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사람들에게 가장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은 레이어드였고요. 그래서 와이드 팬츠 위에 덧입는 스커트, 원피스에 매치할 수 있는 볼레로 스타일 저고리 등 일상복에 편하게 활용할 수 있는 레이어드 아이템 등을 제작했죠. 출시 후 생각했던 것보다 반응이 좋아 깜짝 놀랐어요.
화려한 패턴과 색감도 눈에 띄어요.
한복에 사용되는 패턴은 무궁무진해요. 개성 있고 독특한 문양도 정말 많죠. 오우르의 모든 패턴은 전통 한복 문양을 재해석한 결과물이에요. 기존 한복 문양에 제가 추구하는 화려하고 강한 색감과 패턴을 접목했죠. 숍에 오는 고객 대부분이 처음에는 “특이하다”고 이야기하세요. 그러다 패턴을 자세히 보시고는 “전통적인 느낌이 난다”고 덧붙이시죠. 대놓고 한국적이라고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요소들을 활용해 새로운 창작물을 만들어냈다고 평가해주시는 것 같아 만족스럽고 뿌듯합니다.
한복이 트렌드화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은 없나요.
아쉽죠. 전통 한복이 가진 고유성과 정체성은 위대하고 아름답잖아요. 어느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우리만의 깊고 진한 자산이죠. 가장 아쉬운 건 한복의 기본 베이스를 무시한 채 멋대로 변형해서 트렌드라는 단어를 붙이는 거예요. 한복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은 채 전통적인 느낌이 난다는 이유만으로 한복을 매칭하죠. 모든 일은 근본이 있잖아요. 그걸 바탕으로 가지를 쳐야 하고요. 전통 한복을 제대로 이해한 뒤 아이템을 개발했으면 좋겠습니다. 오우르 역시 이 점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고요. 아무리 트렌디한 아이템이라도 전통적인 무드를 절대 버리지 않으려 해요. 이를 위해 전통 한복 숍에 자주 드나들고 관련 책을 보며 꾸준히 공부해요. 선을 지키기 위해 조심하고 있죠.
한복의 모티프를 서양 복식의 장식으로 활용한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하나의 새로운 디자인이라기보다는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작품으로 보이기도 하고요.
어떤 전통 모티프에 착안해 재해석했는지 등 작품에 대한 설명을 명확하고 디테일하게 해줘야할 것 같아요. 예술은 주관적인 영역이라 가이드가 없으면 마음대로 해석하기 쉽거든요. 저 역시 이 점을 늘 유념하고 있고요. 잘못하면 브랜드는 물론이고 전통 가치까지 훼손할 수도 있으니까요. 작품마다 자세한 설명을 덧붙여준다면 그 본질도 명확하게 전달될 거라 생각합니다.
블랙핑크가 코첼라 무대에서 입은 블랙 재킷을 제작해 화제가 됐어요. 어떻게 시작된 건가요.
금단제가 블랙핑크와 같은 소속사 가수인 송민호 씨의 노래 ‘아낙네’ 뮤직비디오 작업에 참여한 적이 있어요. 검정색 구장복(황제 이하 왕·문무백관이 착용하였던 제복의 한 종류)을 걸치고 나온 신이 있는데, 그 의상을 금단제가 제작했거든요. 이걸 계기로 블랙핑크가 코첼라 무대에서 입을 한복 의상 제작을 요청해주셨죠. 콘셉트는 블랙핑크의 이미지와 부합하는 트렌디한 퓨전 한복이었어요. 금단제는 전통 한복만 만드는 브랜드이기 때문에 이 작업을 할 수 없고, 대신 좀 더 트렌디한 아이템을 선보이는 오우르와의 진행을 추천해주셨죠. 스타일리스트와의 미팅 후 제가 직접 디자인을 잡았고 여러 논의 끝에 코첼라 의상이 완성됐어요.
가장 신경 쓴 부분은 무엇인가요.
퀄리티요. 미국 최대 페스티벌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의상도 무조건 하이 퀄리티로 제작하고 싶었거든요. 블랙핑크가 코첼라 무대에서 입은 의상은 전통 한복의 한 종류인 철릭(무사가 입던 두루마기 종류)에서 영감받아 제작했어요. 철릭은 무사가 사냥을 하는 등 야외 활동할 때 입는 겉옷이에요. 역동적인 춤을 추는 블랙핑크와 잘 어울릴 거라 생각했죠. 명주 실크에 블랙 십장생, 단청, 모란 등을 고급스럽게 수놓았고 비즈, 레이스 등을 달아 우아하면서도 세련된 느낌을 줬어요. 사실 저도 무대를 보기 전까지 아우터가 어떤 의상과 매치될지 몰랐어요. 스타일리스트 팀의 감각과 실력을 잘 알기에 기대는 하고 있었죠. 무대를 라이브로 보는데 정말 소름이 돋더라고요. 제가 디자인한 옷을 입은 블랙핑크의 모습과 감각적인 코디로 스타일링의 완성도를 높여준 스타일리스트 팀에 감탄했죠. 모든 것이 완벽했던 작업이었다고 생각해요.
멤버별로 디자인이 조금씩 달라요.
맞아요. 제가 생각하는 멤버들의 이미지를 의상에 조금씩 녹였거든요. 지수 씨는 미니스커트 기장에 비즈를 장식해 여성스러운 무드를 강조했어요. 리사 씨는 워낙 춤을 잘 춰서 움직일 때마다 우아하게 흩날리는 소재를 밑단에 달았고요. 로제 씨 하면 노래를 빼놓을 수 없잖아요. 노래를 어떤 식으로 표현하면 좋을지 고민하다 언밸런스한 디자인으로 리듬감을 표현했죠. 또 무대의 무브먼트에 어울릴 수 있도록 날리는 소재도 활용했고요.
제니 씨는요.
제니 씨는 노래, 랩, 춤 등 다양한 재능을 갖춘 여왕 느낌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보통 앞이 짧고 뒤가 길어서 끌리는 드레스가 많잖아요. 그걸 참고해 앞뒤의 기장이 다른 딱 떨어지는 느낌의 디자인을 완성했죠. 의상을 모두 멋지게 소화해주신 것 같아 굉장히 뿌듯했습니다.
K-팝처럼 한복도 하나의 콘텐츠로 발전할까요.
네. 한국 문화가 해외에 알려지게 된 가장 큰 계기는 K-팝과 K-드라마라고 생각해요. 더불어 관심을 받은 게 패션이거든요. 아티스트들은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로 패션이나 액세서리를 선택하고요. 그중 어필할 수 있는 가장 한국적인 것은 단연 한복 아닐까요. 또 3~4년 전 해외에서 일할 때 클라이언트들이 사극이나 퓨전 한복을 보여주며 비슷한 스타일로 제작해달라는 의뢰를 많이 했었어요. 현재 의뢰 빈도수가 더 늘어난 걸로 알고 있고요. 이런 상황들을 고려했을 때 한복도 조만간 글로벌 콘텐츠로 성장할 거라고 예상합니다. 꼭 그렇게 돼야 하고요.
#오우르 #블랙핑크 #코첼라 #여성동아
사진 김도균
사진제공 YG엔터테인먼트
세계 언론사들 역시 블랙핑크의 코첼라 한복 의상을 헤드라인으로 장식하며 극찬했다. CNN 스타일은 “이번 주 룩: 코첼라 블랙핑크, 한국의 한복을 입다”라는 제목하에 “제니, 지수, 리사, 로제가 한복을 착용하고 한국의 헤리티지와 유산을 오마주하며 획기적인 모먼트를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코첼라 무대에서 장하은 대표의 한복을 입은 블랙핑크.
장 대표는 롤 모델로 어머니이자 전통 한복의 대가 ‘금단제’ 수장 이일순 디자이너를 꼽았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며 30년 가까이 금단제를 이끄는 어머니가 멋있고 존경스러웠던 것. 장 대표가 현재 한복과 관련된 일을 하는 데는 집안 분위기가 큰 영향을 미쳤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한복에 사용하는 소재와 패턴 등을 보고 자랐기 때문이다.
지난달 장 대표를 만나기 위해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오우르 숍을 찾았다. 특별한 날에만 입는 옷으로 화석화되었던 한복을 재탄생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해온 스토리를 듣고 싶었기 때문. 블랙 시스루 드레스 위에 전통 한복 치마 스타일의 원피스를 레이어드한 그는 “한복을 더 이상 전통이라는 특정 범주에 가둬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숍에 걸려 있는 아이템과 컬렉션들은 지금껏 우리가 봐왔던 한복과는 다른 모습이다. 장 대표는 그렇게 천천히 사람들의 편견을 깨뜨리며 한복을 ‘입고 싶은 옷’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전통에 트렌드를 믹스한 새로운 한복 카테고리
장하은 대표는 일상복에 믹스 앤 매치할 수 있는 레이어드 아이템을 제작한다.
한복 디자이너가 되겠단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어요. 원래 꿈은 패션 디자이너였어요. 한복은 좋아했지만 제 영역은 아니라고 생각했죠. 확신이 바뀐 건 서울예고 미술과 졸업 후 미국 시카고예술대학에서 유학했을 때부터예요. 당시 패션디자인을 전공하고 섬유디자인과 제품디자인을 부전공했는데, 전공보다 원단을 다루는 섬유디자인에 더 관심이 가더라고요. 그러다 3학년 때 영국 런던에 위치한 예술대학,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에 교환학생으로 가면서 진로를 바꾸게 됐죠. 당시 ‘프린트’라는 원단에 들어가는 패턴을 공부하는데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비비드한 색채와 볼드한 문양 등 평소 강렬한 텍스타일을 좋아하는 제 취향과도 잘 맞았고요. 작업은 흥미로웠지만 결과물은 늘 아쉬웠어요. 장하은만의 결이 담긴 디자인을 선보이고 싶었죠. 그래서 오랜 시간 탐구하고, 공부하고, 시도해봤는데 수많은 외국 학생 사이에서 저만이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한국적인 요소더라고요.
현재 선보이는 제품들이 전통 한복 스타일은 아니에요.
전통 한복은 이미 글로벌화했어요. 저는 전통 한복에 개인적인 감각과 취향 등을 믹스한 새로운 카테고리를 만들고 싶었죠. 이 작업을 시작한 건 영국에서 교환학생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간 후예요. 본격적으로 섬유디자인을 공부했거든요. 모시, 춘포, 명주 등 한복에 사용하는 전통 소재로 다양한 작품을 만들었죠. 당시 결과물을 본 외국인 교수님과 학생들의 반응이 너무 좋았어요. 소재와 믹스 방법이 신선하고, 한국적인 모티프를 컨템퍼러리하게 풀어냈다고요. 긍정적인 반응에 확신이 생기면서 매 작업을 즐겁게 했던 것 같아요.
인테리어 회사에서도 일했다고 들었어요.
당시 거주했던 시카고는 건축의 도시예요. 조각 같은 건물과 감각적인 인테리어가 즐비하죠. 그 시기 주요 관심사는 비비드한 색감을 입은 인테리어 아이템이었어요. 자칫 촌스러워 보일 수 있는 진한 색상들을 대담하게 활용한 뒤 트렌디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감각을 배우고 싶었죠. 대학 졸업 후 시카고 유명 인테리어 회사에 지원했고 운 좋게 합격했어요. 그곳에서 컬러 믹스 매치, 패턴 활용법 등 많은 것을 습득했죠. 현장에 투입되느라 몸은 힘들었지만 새로운 것을 배우고 공부할 수 있는 값진 시간이었어요.
한국에는 언제 돌아왔나요.
인테리어 회사에서 1년 정도 일하고 돌아왔어요. 당시 고민이 굉장히 많았어요. 미국에서 경험을 더 쌓아야 할지, 하고 싶은 일을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추진해야 할지요. 한국행을 결심하게 된 건 인테리어 회사에서 만났던 한 클라이언트 덕분이에요. 한국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이태원 클라쓰’를 봤다면서 드라마 속 장면들을 레퍼런스 삼아 인테리어를 의뢰하셨거든요. 또 드라마 ‘킹덤’이 유행하자 출연자가 쓴 갓과 한복에도 관심을 갖는 외국인들을 보며 한국 전통 의복이 세계 시장에서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는 걸 확신했어요. 해외에서 체감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저만의 브랜드를 만드는 것도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죠.
당시 한국의 한복 시장은 어땠나요.
전통 한복에 대한 관심은 줄었지만 개량한복처럼 디자인적 요소가 가미된 한복을 찾는 분들은 많았어요. 한복이 더 이상 특별한 행사를 위한 의복이 아닌, 실생활에서 활용할 수 있는 일상복으로 바뀌기 시작한 거죠. 이런 변화들이 오우르 론칭에 힘을 실어줬던 것 같고요. 저는 트렌디하면서도 편안한 실루엣에 한국적인 패턴과 문양을 녹인 데일리 룩을 만들고 싶었거든요. 대중과 오우르가 추구하는 방향이 절충하는 시기였죠.
금단제의 서브 브랜드로 출발하는 게 더 쉬운 길이었을 것 같아요.
저와 어머니가 추구하는 브랜드의 철학은 확연히 달라요. 금단제는 전통을 고수하는 브랜드예요. 전통을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걸 용납하지 않죠. 반면에 저는 전통적인 요소를 활용한 영하고 캐주얼한 스타일을 선호하고요. 금단제 안에서는 제가 원하는 걸 마음껏 펼치기 힘들 것 같았어요. 서브 브랜드로 론칭한다 해도 금단제의 기본 철학과 스타일을 완전히 버릴 순 없잖아요. 또 전통 한복을 예쁘게 만드는 것보다는 좀 더 독특하고 특색 있는 걸 선보이고 싶은 욕망이 컸고요. 그동안 구상하고 준비해왔던 모든 걸 제대로 보여주려면 새로운 브랜드를 론칭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죠.
어머님 반대는 없었나요.
많이 반대하셨어요. 브랜드를 론칭해서 30년 가까이 키워오셨고, 한복을 포함한 패션 시장의 한계에 대해 너무 잘 알고 계시니까요. 또 디자인이 브랜드의 모든 건 아니잖아요. 유통, 운영, 마케팅, 홍보 등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너무 많죠. 이 모든 걸 혼자 짊어지게 하고 싶지 않으셨던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한번 마음먹으면 끝장을 봐야 하는 성격이에요. 결심한 이상 어떻게 해서라도 실행해야 하죠. 어머니께 계속 제가 하고 싶은 것과 계획 등을 어필했고, 어머니는 결국 승낙하셨어요. 쉽지 않은 과정이었고 론칭까지 힘들었지만 후회는 없어요.
업계에서는 “한복 브랜드 혹은 디자이너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연줄이 있어야 한다”는 속설이 있어요. 맨땅에 헤딩하기 힘들다는 의미죠. 오우르가 관심을 받은 것이 어머님의 후광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물론 도움이 되는 부분은 있어요. 어머니가 전통 한복의 대가시고, 인맥도 넓고 관련 지식도 풍부하시니까요. 론칭부터 지금까지 다양한 방면에서 조언해주시죠. 하지만 모든 부분에서 도움이 되진 않아요. 금단제와 오우르는 제작 방법부터 달라요. 전통 한복은 평면 패턴이에요. 옷을 내려놓으면 종이처럼 일자로 펼쳐지죠. 오우르는 입체 패턴으로, 사람의 몸에 맞춰 3D로 제작해요. 재봉법, 컬러 배치, 장신구 사용 등도 금단제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합니다. 만약 어머니와 같은 길을 택했다면 모든 과정이 순탄했겠죠. 하지만 발품 팔아 업체를 찾아내고 SNS 관리, 패션 플랫폼 입점 등 새로운 루트를 직접 만들어 가면서 브랜드를 운영하고 있어요. 한마디로 창업을 한 거예요.
오우르 아이템은 모두 단벌로 제작되는 것 같아요.
한복 구성품을 모두 갖춰 입는 것이 이상했어요. 속치마, 치마, 저고리 등을 한꺼번에 입으면 너무 불편하잖아요. 가격도 비싸고요. 이 점을 해소하기 위해 정말 많이 고민했고, 한복을 소품처럼 활용하자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사람들에게 가장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은 레이어드였고요. 그래서 와이드 팬츠 위에 덧입는 스커트, 원피스에 매치할 수 있는 볼레로 스타일 저고리 등 일상복에 편하게 활용할 수 있는 레이어드 아이템 등을 제작했죠. 출시 후 생각했던 것보다 반응이 좋아 깜짝 놀랐어요.
화려한 패턴과 색감도 눈에 띄어요.
한복에 사용되는 패턴은 무궁무진해요. 개성 있고 독특한 문양도 정말 많죠. 오우르의 모든 패턴은 전통 한복 문양을 재해석한 결과물이에요. 기존 한복 문양에 제가 추구하는 화려하고 강한 색감과 패턴을 접목했죠. 숍에 오는 고객 대부분이 처음에는 “특이하다”고 이야기하세요. 그러다 패턴을 자세히 보시고는 “전통적인 느낌이 난다”고 덧붙이시죠. 대놓고 한국적이라고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요소들을 활용해 새로운 창작물을 만들어냈다고 평가해주시는 것 같아 만족스럽고 뿌듯합니다.
한복이 트렌드화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은 없나요.
아쉽죠. 전통 한복이 가진 고유성과 정체성은 위대하고 아름답잖아요. 어느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우리만의 깊고 진한 자산이죠. 가장 아쉬운 건 한복의 기본 베이스를 무시한 채 멋대로 변형해서 트렌드라는 단어를 붙이는 거예요. 한복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은 채 전통적인 느낌이 난다는 이유만으로 한복을 매칭하죠. 모든 일은 근본이 있잖아요. 그걸 바탕으로 가지를 쳐야 하고요. 전통 한복을 제대로 이해한 뒤 아이템을 개발했으면 좋겠습니다. 오우르 역시 이 점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고요. 아무리 트렌디한 아이템이라도 전통적인 무드를 절대 버리지 않으려 해요. 이를 위해 전통 한복 숍에 자주 드나들고 관련 책을 보며 꾸준히 공부해요. 선을 지키기 위해 조심하고 있죠.
한복의 모티프를 서양 복식의 장식으로 활용한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하나의 새로운 디자인이라기보다는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작품으로 보이기도 하고요.
어떤 전통 모티프에 착안해 재해석했는지 등 작품에 대한 설명을 명확하고 디테일하게 해줘야할 것 같아요. 예술은 주관적인 영역이라 가이드가 없으면 마음대로 해석하기 쉽거든요. 저 역시 이 점을 늘 유념하고 있고요. 잘못하면 브랜드는 물론이고 전통 가치까지 훼손할 수도 있으니까요. 작품마다 자세한 설명을 덧붙여준다면 그 본질도 명확하게 전달될 거라 생각합니다.
K-패션의 중심으로 자리 잡은 한복
오우르에서는 액세서리, 인테리어 소품 등도 판매한다.
금단제가 블랙핑크와 같은 소속사 가수인 송민호 씨의 노래 ‘아낙네’ 뮤직비디오 작업에 참여한 적이 있어요. 검정색 구장복(황제 이하 왕·문무백관이 착용하였던 제복의 한 종류)을 걸치고 나온 신이 있는데, 그 의상을 금단제가 제작했거든요. 이걸 계기로 블랙핑크가 코첼라 무대에서 입을 한복 의상 제작을 요청해주셨죠. 콘셉트는 블랙핑크의 이미지와 부합하는 트렌디한 퓨전 한복이었어요. 금단제는 전통 한복만 만드는 브랜드이기 때문에 이 작업을 할 수 없고, 대신 좀 더 트렌디한 아이템을 선보이는 오우르와의 진행을 추천해주셨죠. 스타일리스트와의 미팅 후 제가 직접 디자인을 잡았고 여러 논의 끝에 코첼라 의상이 완성됐어요.
가장 신경 쓴 부분은 무엇인가요.
퀄리티요. 미국 최대 페스티벌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의상도 무조건 하이 퀄리티로 제작하고 싶었거든요. 블랙핑크가 코첼라 무대에서 입은 의상은 전통 한복의 한 종류인 철릭(무사가 입던 두루마기 종류)에서 영감받아 제작했어요. 철릭은 무사가 사냥을 하는 등 야외 활동할 때 입는 겉옷이에요. 역동적인 춤을 추는 블랙핑크와 잘 어울릴 거라 생각했죠. 명주 실크에 블랙 십장생, 단청, 모란 등을 고급스럽게 수놓았고 비즈, 레이스 등을 달아 우아하면서도 세련된 느낌을 줬어요. 사실 저도 무대를 보기 전까지 아우터가 어떤 의상과 매치될지 몰랐어요. 스타일리스트 팀의 감각과 실력을 잘 알기에 기대는 하고 있었죠. 무대를 라이브로 보는데 정말 소름이 돋더라고요. 제가 디자인한 옷을 입은 블랙핑크의 모습과 감각적인 코디로 스타일링의 완성도를 높여준 스타일리스트 팀에 감탄했죠. 모든 것이 완벽했던 작업이었다고 생각해요.
멤버별로 디자인이 조금씩 달라요.
맞아요. 제가 생각하는 멤버들의 이미지를 의상에 조금씩 녹였거든요. 지수 씨는 미니스커트 기장에 비즈를 장식해 여성스러운 무드를 강조했어요. 리사 씨는 워낙 춤을 잘 춰서 움직일 때마다 우아하게 흩날리는 소재를 밑단에 달았고요. 로제 씨 하면 노래를 빼놓을 수 없잖아요. 노래를 어떤 식으로 표현하면 좋을지 고민하다 언밸런스한 디자인으로 리듬감을 표현했죠. 또 무대의 무브먼트에 어울릴 수 있도록 날리는 소재도 활용했고요.
제니 씨는요.
제니 씨는 노래, 랩, 춤 등 다양한 재능을 갖춘 여왕 느낌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보통 앞이 짧고 뒤가 길어서 끌리는 드레스가 많잖아요. 그걸 참고해 앞뒤의 기장이 다른 딱 떨어지는 느낌의 디자인을 완성했죠. 의상을 모두 멋지게 소화해주신 것 같아 굉장히 뿌듯했습니다.
K-팝처럼 한복도 하나의 콘텐츠로 발전할까요.
네. 한국 문화가 해외에 알려지게 된 가장 큰 계기는 K-팝과 K-드라마라고 생각해요. 더불어 관심을 받은 게 패션이거든요. 아티스트들은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로 패션이나 액세서리를 선택하고요. 그중 어필할 수 있는 가장 한국적인 것은 단연 한복 아닐까요. 또 3~4년 전 해외에서 일할 때 클라이언트들이 사극이나 퓨전 한복을 보여주며 비슷한 스타일로 제작해달라는 의뢰를 많이 했었어요. 현재 의뢰 빈도수가 더 늘어난 걸로 알고 있고요. 이런 상황들을 고려했을 때 한복도 조만간 글로벌 콘텐츠로 성장할 거라고 예상합니다. 꼭 그렇게 돼야 하고요.
#오우르 #블랙핑크 #코첼라 #여성동아
사진 김도균
사진제공 YG엔터테인먼트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