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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여성동아 아카이브에서 찾아낸 33인의 파워우먼

김명희 기자 두경아 프리랜서 기자

2023. 10. 31

개화기 여성운동가부터 독립운동가, 한국 문화의 격을 높인 작가와 디자이너, 한류를 이끈 대중문화의 아이콘까지 ‘여성동아’가 90년간 만난 33인의 빛나는 여성. 

1. 에델 와고너 언더우드
(1888~1949) 1933년 2월호

여성 교육과 빈민 구제 활동을 펼친 미국인 교육가. 1885년 조선에 입국해 연세대의 전신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한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원두우)의 며느리이자 연희전문학교 총장을 지낸 원한경의 부인이다. 미국 미시간 출신인 그는 10세 때 부모를 여의고 고학으로 교사 공부를 마쳤다. 1912년 서울외국인학교 교사로 초빙돼 한국에 온 그는 원한경과 결혼, 연희전문학교와 이화여자전문학교 등에서 영어와 심리학 등을 가르치는 한편 많은 봉사활동을 펼쳤다. 그는 ‘신가정’ 1933년 2월호 ‘내가 만일 조선 여자라면’이라는 기고에서 “내가 만일 조선 여자라면 조선에서 자라는 가장 중대한 책임을 지닌 학생들을 위해 여학생 기숙사를 경영하겠다”고 밝혔다. “조선에서 그 존재가 가장 귀하고 중한 여학생들을 위해 큰 기숙사를 지어 성교육, 예의, 생활 방법 등을 가르쳐 모든 방면으로 완전한 인격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고 싶다. 운동으로 건강을 다지고 판단력을 키워 학교 졸업 후 거리낌 없이 사회에 나갈 수 있도록 돕고 싶다”는 내용을 보면 그가 한국 여성의 교육에 얼마나 애정과 열정이 컸는지 짐작된다. 1942년 일제에 의해 추방됐다가 1947년 다시 돌아와서도 봉사활동을 이어가던 그는 1949년 공산주의 테러 리스트의 습격으로 사망했다.

2. 나혜석
(1896~1948) 1933년 5월호

서양화가이자 작가 그리고 근대적 여권론을 펼친 우리나라 최초의 페미니스트. 1927년 외교관이던 남편 김우영과 함께 세계 여행을 하며 서구 여성운동과 여성의 지위 등에 눈떴다. ‘모(母) 된 감상기’(1923)라는 글에서 “자식이란 모체의 살점을 떼어가는 악마”라고 표현하는가 하면 ‘이혼 고백장’(1934)을 통해서는 자신의 결혼과 이혼에 대해 솔직히 털어놓으며 조선 사회 가부장제의 모순을 비판했다. 나혜석은 어머니의 날 특집으로 꾸며진 ‘신가정’ 1933년 5월호에 ‘파리의 어머니날’이라는 에세이를 기고했다. 파리에서 머물던 주인집의 풍경을 전하며 아침 식사 후 가족들이 각자 먹은 그릇을 내다 놓으며 “고마워요 어머니”라고 감사를 전하더란 대목에선 부러움이 묻어난다. 당시 나혜석이 최린과의 파리 불륜 스캔들 이후 김우영과 이혼하고 서울에서 머물며 미술 작업에 몰두할 때였다. 같은 호 ‘협전(서화협회전)·선전(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여류 화가 방문기’에도 나혜석이 등장한다. 기자가 직접 나혜석의 작업실을 방문해 근황 인터뷰를 한 것이다. “작업실이 조용하고 밝아 그림 그리기에 좋겠다”는 기자의 질문에 나혜석은 “네. 그러기에 날마다 그림이나 그리지요. 이것도 지금 막 그리는 것인데 초상화이지요”라고 답한다. 기자는 자신의 그림을 쓰다듬는 나혜석의 모습이 쓸쓸하고 맥없다고 표현한다. “유럽 여행이 미술 작업에 도움이 되고 있냐”는 질문에는 “예술을 감상하는 눈이 훨씬 높아지고 이해력이 풍부해지더군요. 무엇보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 마음을 돌리는 힘이 생겨요”라고 답한다. 그림에만 몰두하는 그에게 고독하지 않은지 묻자 나혜석은 “쓸쓸한 것도 일종의 즐거움”이라면서 “미술학교를 경영해보고 싶은 생각도 있으나 세상일이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답한다. 나혜석은 그해 서울 종로에 여자미술학사를 개설하고 직접 여학생들을 지도했으나 경영난으로 지속하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3. 현덕신
(1896~1963) 1935년 11월호

독립운동가이자 의사인 현덕신은 이화학당 졸업 후 일본 동경여자의과대학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동대문부인병원(이화여대병원)에서 근무하며 여성 보건에 헌신했다. 일본 유학 시절이던 1919년 2·8독립선언 자금을 보탰으며, 일본 도쿄 조선 YMCA회관에서 개최된 2·8독립선언에 참여해 체포되기도 했다. ‘신가정’ 1935년 11월호에 기고한 ‘여의사가 되기까지의 고심기’에는 그가 의사가 되기로 한 이유가 나온다. “어떻게 하면 조선 사회, 조선 여성을 위해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있을까 고심 끝에 교육계로 나갈 생각도 했으나, 병이 들어서 죽을지언정 남자 의사에게 몸을 보이려 하지 않는 조선 여성들을 위해 봉사하고자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그는 또 “세브란스를 세운 에비슨 박사와 같이 조선 여자들이 의학을 배워 그들로 하여금 여성 의학 교육을 하도록 하고 싶다”는 뜻도 밝힌다. 기고에는 “해부학 수업 후 며칠 동안 밥을 먹지 못했다. 이것이 과연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인가 회의도 들었다”는 에피소드도 나온다. 이후 그는 광주 현덕신병원을 개원하고 의료 활동뿐 아니라 문맹퇴치, 공창 폐지 운동, 보육 활동 등 다양한 분야의 여성운동을 전개했다.

4. 박자혜
(1895~1943) 1934년 1월호·1936년 5월호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인 단재 신채호의 부인. 총독부의원 간호사였던 박자혜는 3·1운동 당시 부상자들을 간호한 것을 계기로 간호사들의 독립운동 단체인 간우회를 설립했다. ‘신가정’은 1934년 1월호에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후 자결로 생을 마감한 김상옥의 부인 정진주 여사와 독립운동 중 체포돼 뤼순 감옥에 수감돼 있던 신채호 부인 박자혜 여사를 찾아 독립운동가 부인들의 신산한 새해맞이를 전한다. 산파로 일하며 홀로 두 아들을 키우고 있던 박 여사는 “(남편이) 6년 전 수감됐는데, 어린 것이 보고 싶다 하여 한 번 찾아뵌 적이 있다. 3년 전 마지막 편지를 받았는데 ‘잘 있소. 몸 건강하오’ 정도의 내용이 다였다”며 기자에게 되레 선생의 안부를 묻는다. “면회를 한번 가야지 않겠냐”는 질문에는 “귀사에서 기사 재료도 얻을 겸 파견해주시면 재료는 틀림없이 가져다 드리겠다”고 농담으로 응수한다. ‘신가정’은 1936년 2월 신채호 선생 옥사 석 달 후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위로하고자” 다시 한번 박 여사를 방문한다. 기자는 “부엌도 마루도 없는 아래채 단칸방. 너무나도 쓸쓸하게 지내는 여사의 얼굴을 차마 마주하기 어려웠다”고 적고 있다. 박 여사는 이날 인터뷰에서 “15년 전 숙명을 나와 총독부병원 산파과에서 공부하던 중 기미운동에 관련되어 해외로 나가 무엇을 해본다는 것이 결국 그와 결혼하게 되었다. 겨우 3년 살다가 나만 어린 것들을 데리고 귀국해 10여 년을 고단하고 쓸쓸하게 지냈다. 선생의 생각을 알기에 남들처럼 재미있는 살림을 다시 하리라고는 믿지 않았고, 다만 끔찍한 소식이 없기만을 주야로 기도했다”고 토로했다. “임종하는 모습을 보셨느냐”는 질문에는 “전보를 받고 가보니 맥박은 있으나 의식은 없었다. 감옥 규칙 때문에 1시간 동안 면회하고 여관에 있노라니 절명하셨다는 소식이 왔다. 차디찬 바닥에서 돌아가신 것이 철천지한”이라고 답했다.

5. 윤복희
(1946~) 1968년 6월호

1960년대 미니스커트를 유행시킨 대중문화의 아이콘. 6세 때 뮤지컬 ‘크리스마스 선물’을 통해 배우로 데뷔했으며, 1967년 ‘웃는 얼굴 다정해도’라는 곡을 발표하면서 미니스커트 붐을 일으켰다. 여성의 짧은 치마를 금기시하던 당시 풍조에서 윤복희의 미니스커트는 단순한 의복이 아닌 자유의 상징이었다. ‘여성동아’는 1968년 6월호에 하와이, 뉴욕, 시카고, 라스베이거스 등 미국 투어를 마치고 1년 만에 돌아온 윤복희 기사를 게재했는데, 텍사스에서는 재즈 가수이자 트럼펫 연주자인 루이 암스트롱과 TV쇼에 출연해 호평을 받았다고. 특히 ‘여성동아’는 당시 윤복희에 대해 “독특한 바이브레이션과 보사노바 창법이 매력적이며, 얼굴 표정과 몸의 움직임이 크다. 덕분에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으로 확장시켰으며, 신세대의 호응이 크다”고 분석했다. 윤복희는 인터뷰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무대에 서기 때문에 공연이 끝나면 마라톤 경주를 한 것처럼 탈진한다”고 밝혔다. 미니스커트에 대해선 “미국 여성들이 모두 입어서 따라 한 것일 뿐”이라고 시크하게 말했다.



6. 홍숙자
(1933~) 1969년 2월호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홍숙자는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국에서 유학하던 1958년 외무부 장관 보좌관을 시작으로 뉴욕주 총영사관 부영사, UN 대표부 3등 서기관 등을 역임했으며, 영부인 육영수 여사의 통역을 맡기도 했다. 그는 ‘여성동아’ 1969년 2월호 ‘여자 외교관으로서의 10년’이라는 기고 글에서 “청탁에 용기를 낸 이유는 여성들 진출이 없는 분야를 개척, 시도하고 모든 것을 인내하며 10년간 근무해온 나의 발자취가 여성 선후배들의 사회 진출에 자극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라고 밝혔다. 외무부 취직 당시 이미 결혼해 자녀가 있었던 그는 “여성과 기혼이라는 이중 장벽 앞에 좌절하기도 했다”고 고백하는가 하면 “외국은 여성 먼저라는 인식이 강하다”며 한국에서의 여성의 지위에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그는 “외국의 귀빈 부인을 수행하면서 그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같은 인간으로서 그들에게 뒤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공부해야겠다 생각했다”고도 언급했다. 홍숙자는 1987년 직선제 개헌 후 처음 실시된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 여성 대통령 후보로 남았다.

7. 박완서
(1931~2011) 1970년 11월호

어두운 현대사를 따뜻한 문체로 어루만진 한국을 대표하는 문인 박완서는 1970년 11월 ‘여성동아’ 여류 장편소설 공모에서 ‘나목’으로 당선돼 등단했다. 당시 응모작은 33편이었으며, 상금은 50만 원이었다. 당선 소감에서 “글을 쓰는 시간이 무한히 행복하다. 그래서 ‘나목’을 쓰는 동안의 즐거움이 상을 받는 영광보다 더 크다”고 말한 작가는 이후 ‘목마른 계절’ ‘휘청거리는 오후’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등 15편의 장편소설과 100편이 넘는 단편소설, 15편의 산문집과 동화집 등을 펴내며 한국 문단의 거목으로 자리매김했다. 선생 타계 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전을 통해 작가로 등단한 여성동아 문우회원들은 ‘나의 박완서, 우리의 박완서’라는 추모집을 펴내 후배 작가들에게 친정 엄마처럼 푸근하게 베풀었던 고인을 기렸다. 한수경 작가는 “글쓰기에서만큼은 기대고 투정하고 드러내놓고 글 몸살을 앓아도 위로해줄 만큼 그 품이 크고 아늑하게 느껴졌다”고 적었다. 박 작가의 맏딸인 호원숙 작가는 선생 타계 10주기를 맞아 ‘여성동아’ 인터뷰에서 “어머니는 특별한 분이셨다. 두뇌가 명석한 분이었기 때문에 조언을 구하는 이웃들에게 도움도 많이 주셨고, 살면서 자신의 생각을 끊임없이 바꿔나가셨다. 어머니가 참 크게 느껴졌다”고 회고했다.

8. 김지미
(1940~) 1983년 6월호

1957년 17세에 데뷔해 35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하며 1960~70년대 은막을 주름잡은 주인공. ‘여성동아’ 1983년 6월호에는 홍성기 감독, 배우 최무룡, 가수 나훈아와의 결혼 및 이혼으로 ‘한국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라 불리던 김지미의 심층 인터뷰가 실렸다. 나훈아와 이혼한 지 1년이 지난 시점으로, 그의 사생활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최고조에 달할 때였다. 인터뷰는 서울 정릉에 위치한 그녀의 약 660㎡(200평) 대저택에서 진행됐다. 김지미는 인터뷰에서 “나 자신에게 충실하게 살아왔지만 사람들은 나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스캔들 많은 여배우로 보려 하기 때문에 살아가기 쉽지 않다”고 고백했다. 배우 데뷔의 계기에 대해선 “명동에서 ‘황혼열차’ 여주인공을 물색하던 김기영 감독 눈에 띄어 영화에 출연하게 됐다. 김 감독이 집에까지 찾아와 부모님을 설득했다”고 밝혔다. 길거리 캐스팅의 원조였던 셈. 그는 “영화를 찍는 게 참 좋았다. 사람들이 모이고 카메라가 돌아가고 하는 게 재밌었다”고도 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홍성기 감독과의 운명적인 만남, 파경 후 구원자처럼 나타난 배우 최무룡과의 사랑, 간통죄로 고소당한 전말, 아이를 낳던 날 새벽까지 비를 맞고 촬영한 후 아침 7시에 집에 들어와 9시에 출산한 사실, 아픈 아이를 병원에 두고 다시 영화 작업을 나가야 했던 일 등 자신의 과거사를 담담하게 털어놓는다. 최무룡은 김지미와 결별 당시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김지미는 “홍성기 감독, 최무룡과는 애정에 더해 같은 영화인으로서의 우정이 있었다. 헤어진 이후에도 웃으며 만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연하의 가수 나훈아와의 관계에 대해선 “시작부터 잘못됐다. 실제와 다른 오해와 소문, 나의 고집 때문에 진전도 퇴보도 없는 이상한 관계를 6년이나 지속했다”고 고백했다. 사랑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는 “사랑은 순백의 캔버스 같은 것이다. 앞으로는 영화가 내 사랑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김지미는 인터뷰 이후에도 배우로 왕성히 활동했으며, 1986년에는 영화사 지미필름을 설립하고 제작자로 나서기도 했다.

9. 박경리
(1926~2008) 2005년 1월호

인터뷰하지 않기로 유명한 작가 박경리가 ‘여성동아’ 2005년 1월호에 등장했다. 1969년 집필을 시작해 1994년 완간한 대하소설 ‘토지’가 SBS 드라마로 만들어져 방영된 직후였다. 그는 여러 차례 “내가 행복했더라면 문학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여성동아’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토지’ 집필을 시작했던 때는) 개인의 불행도 불행이지만 우리나라 전체가 불행했다. 6·25를 겪고 얼마 안 된 시기지 않나. 나는 전쟁미망인이었다. 아이 데리고, 부모 모시고, 혼자 벌어먹고 살아야 했다. 불행에서 탈출하고 싶다는 소망이 있기 때문에 글을 썼다”고 부연 설명한다. “통영에서 어시장에 들렀는데 장사하는 분들이 전부 악수를 청하더라. 내가 너무 신기해 작가인 나를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더니 ‘책을 읽었다’고 하더라. 백화점이나 휴게소 같은 데 가서도 인사를 받는다. 음식점 구석에 들어가 밥을 먹고 있으면 뭐 한 가지가 더 나온다”며 작가로서의 행복을 언급하기도 했다. 생전 박경리 선생은 직접 옷 해 입고, 텃밭에 작물을 심어 식재료로 사용하고, 환경단체 공동대표를 맡을 정도로 생명운동에 적극적이었다. 그는 “생명과 생존이 첫째고 정치나 예술은 둘째다. 생명과 생존 이상의 진실은 없다. 그게 있음으로써 문학도 있는 거다. 생명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사조가 나와야 한다”며 생명운동의 중요성을 피력했다.

10. 이미경
(1958~) 2006년 11월호

고(故) 이맹희 CJ그룹 & 명예회장의 장녀 이미경 CJ그룹 부회장은 CJ ENM을 세계적인 콘텐츠 기업으로 키운 ‘작은 거인’으로 불린다. 그는 CJ그룹을 한국 문화를 알리는 국제적 브랜드로 만든 공로를 인정받아 2006년 세계여성상을 수상했다. 아시아인이 세계여성상을 수상한 건 이 부회장이 처음이었다. 그는 ‘여성동아’ 2006년 11월호에 실린 인터뷰에서 엔터테인먼트 분야의 일을 하게 된 계기에 대해 “어릴 때부터 영화를 좋아했다. 보스턴에서 살았던 년 동안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영화를 보러 다녔다”면서 “그 과정에서 영화 자체뿐 아니라 제작 시스템, 감독의 철학 같은 좀 더 전문적인 분야에까지 관심을 갖게 됐다”고 밝혔다. 또 ‘여성동아’ 2014년 3월호(‘블룸버그 마케츠’ 인터뷰 인용)에서 그는 “할아버지에게 사업은 단 한 번도 편하게 먹고살기 위해 돈을 버는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산업을 일궈내고 일자리를 만들어 국가에 기여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서 “그런 가르침은 나와 동생의 DNA 속에 새겨져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미경 부회장은 우리나라 영화사상 처음으로 아카데미 작품상과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영화 ‘기생충’을 비롯해 칸영화제 감독상 수상작 ‘헤어질 결심’의 총괄 프로듀서를 맡았다. 지난해에는 한류의 글로벌 확산과 문화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제 에미상 공로상을 수상했다.

11. 김은숙
(1973~) 2006년 12월호

김은숙은 ‘파리의 연인’ ‘프라하의 연인’ ‘시크릿 가든’ ‘신사의 품격’ ‘상속자들’ ‘태양의 후예’ ‘도깨비’ ‘미스터 션샤인’ ‘더 글로리’ 등 화제작을 잇달아 선보인 우리나라 대표 드라마 작가다. ‘여성동아’ 2006년 12월호에 실린 그와의 인터뷰는 그의 주옥같은 드라마 사이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던 극소수의 작품 중 하나인 ‘연인’ 방영을 앞두고 이루어졌다. 당시 그는 결혼한 뒤 막 아이를 출산한 상황이었다. 그는 “실제 내 모습이 여주인공 캐릭터와 비슷하다”면서 자신의 말투와 성격이 주인공에게 그대로 들어간다고 말했다. 게다가 정의롭고, 사내답다. 무뚝뚝하고 퉁명스럽게 보이지만 가끔 툭툭 내뱉는 말로 상대를 사로잡는 남자주인공에는 남편의 모습이 투영됐다. 그는 “사실 남편이 그런 스타일”이라고 고백했다. ‘프라하의 연인’ 남자주인공 최상현은 바로 김 작가 남편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는 대사를 맛깔나게 쓰는 비결에 대해 “드라마 화법을 정식으로 배우지 않아서일 것”이라면서 “그래서 오히려 상투적이지 않아 신선함을 주었던 것 아닐까”라고 말했다.

12. 강수연
(1966~2022) 2007년 3월호

만 4세 때 연기자로 데뷔해 대부분의 삶을 카메라 앞에서 보낸 강수연은 영화 ‘씨받이’로 1987년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대한민국 최초의 ‘월드 스타’이기도 하다. 2007년 3월 MBC 주말드라마 ‘문희’로 안방극장에 컴백하며 진행한 인터뷰에서 “연기 생활 40년 가까이 된 지금도 연기는 여전히 어렵고 힘들다”고 고백한다. 그럼 스트레스를 어떻게 푸느냐고 묻자 “그냥 갖고 산다. 연기는 그저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열심히 연기하고, 열심히 작품 만들고… 그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고 답한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도 “연기 이외에 다른 계획은 전혀 없다. 수에 약해서 장사도 못하고, 게을러서 사람 관리도 못하니까 다른 일을 하면 망할 것 같다”고 말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연기를 했지만, 앞으로도 40년은 더할 계획이다. 그래서 정말로 예쁜 할머니 배우가 되는 게 목표”라고 할 만큼 배우 일을 너무나도 사랑한 그는 2015년 부산국제영화제 공동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는 등 영화에 헌신했다. 그러나 끝끝내 자신의 바람처럼 할머니가 되지 못하고 2022년 향년 56세에 하늘의 별이 되었다.

13. 우영미
(1959~) 2008년 1월호

솔리드옴므와 우영미를 통해 한국 패션의 가능성을 확장해온 디자이너. 우영미는 2008년 1월 솔리드옴므 론칭 20주년, 파리 진출 6주년을 맞아 ‘여성동아’와 인터뷰했다. “6년 전 파리 컬렉션 데뷔를 했던 순간이 아직도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처음 파리에 도착했을 때 나는 동양에서 온 신인 디자이너에 불과했다. 텃세가 심한 곳이기 때문에 현지 디자이너보다 10배는 더 열심히 한 것 같다”고 회고했다. 솔리드옴므의 디자인 철학에 대해선 “나는 남성의 몸이 여성의 몸보다 훨씬 섬세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남성의 몸에 어울리는 옷은 감각적인 컬러와 심플한 디자인만으로도 충분하다. 앞으로도 간결한 선과 미니멀한 디자인으로 남성을 좀 더 세련되고 부드럽게 표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인터뷰 이후 우영미는 승승장구를 거듭, 2011년 국내 브랜드 최초로 ‘파리의상조합’ 정회원이 됐으며, 2020년에는 LVMH그룹이 소유하고 있는 파리 봉마르셰백화점 남성관 매출 1위를 차지했다. 지난 9월 파리 명품가인 생토노레에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 우영미 플래그십스토어를 연 그는 “전 세계 모든 럭셔리의 격전지라고 할 수 있는 생토노레에서 잘 자리 잡아 한국을 대표하는 하이패션 브랜드로 우뚝 서겠다”고 다짐했다.

14. 최진실
(1968~2008) 2008년 4월호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 지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의 가슴에 남아 있는 대중문화의 아이콘. ‘질투’ ‘별은 내 가슴에’ ‘그대 그리고 나’ 등 그의 출연작은 거의 모두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김구라와 함께 진행을 맡았던 토크 프로그램 ‘최진실의 진실과 구라’ 녹화가 끝나고 한밤중에 진행된 ‘여성동아’ 2008년 4월호 인터뷰는 그가 세상을 떠나가 전 마지막으로 응한 인터뷰이기도 하다. 내용은 당시 7세, 5세이던 자녀 환희와 준희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아이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은 건 우리나라에는 아름다운 사계절이 있고 자연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속에서 숨 쉬며 살아가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어떻게 보면 아주 사소한 것들이다. 그런데 정신없이 살다 보니 우리 아이들은 회색 아스팔트에 갇혀 부모 없이는 아무 데도 못 나가는 겁쟁이가 돼 있더라. 다들 학원 다니기에 바쁘다 보니 놀이터에는 친구도 없고…. 나는 조기 영재교육이니 주입식교육이니 하는 것들을 선호하는 편이 아닌데 아이들에게 친구를 만들어주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학원에 보내야겠더라. 이왕 보낼 거면 내가 발품을 팔아 알아보는 게 낫겠다 싶어 일일이 어떤 곳인지 확인한 뒤 안전하고 좋은 곳으로 골라 학원 스케줄을 짜주었다”고 언급하는가 하면 “환희에게 직접 한글을 가르쳐주었다. 내가 또박또박 글씨를 써주고 환희가 따라 쓰게끔 했는데 그래서인지 환희 글씨체가 내 글씨체와 비슷하다”고도 말했다. 인터뷰 당시 서울가정법원에 아이들의 성과 본을 자신의 성과 본으로 바꿔달라고 신청한 사실이 알려져 주목받기도 했는데, 이에 대해 “나는 대단한 페미니스트도 아니고 사회를 어떻게 바꿔야겠다는 거창한 목표를 가지고 사는 것도 아니다. 그냥 ‘엄마의 마음’에서 시작했다고 생각해주시면 좋겠다. 처음 시작할 때는 알려지는 게 두렵기도 했지만 이왕 시작한 일이니 잘되어서 나와 비슷한 아픔을 겪고 있는 분들께 작으나마 희망이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15. 이길여
(1932~) 2008년 12월호

이길여 가천길재단 회장은 1978년 여의사로서 국내 최초로 의료법인을 설립한 의료인이다. 재단 산하에 있는 가천대학교에서 총장직을, 가천문화재단·가천대 길병원에서 명예이사장직도 맡고 있다. ‘여성동아’는 2008년 12월호에 자서전 ‘간절히 꿈꾸고 뜨겁게 도전해라’를 출간한 이길여 회장의 인터뷰를 실었다. 자서전에는 ‘깡촌 소녀 이길여’의 성장기와 ‘젊은 산부인과 의사 이길여’의 도전기, 의료 혜택 확대를 위한 노력 등의 이야기가 담겼다. “의료사업은 봉사를 겸해야 한다”는 굳은 뜻을 갖게 된 계기에 대해 “어릴 때 어머니께서 ‘다른 사람에게 덕을 베풀면 후대에 받는다’고 하셨다”면서 “나는 자식이 없으니, 직원들의 자녀가 나중에 다 복 받을 거 아니냐”고 말했다. 자신의 성공 비결로 “열정”을 꼽는 그는 잠자리에 들면서도, 잠에서 깨어나서도 할 일을 계획하고 떠올리면 의욕이 넘친다고 한다. 자다가 벌떡 일어나 좋은 아이디어를 메모지에 적어놓기도 한다는 그는 “좋은 아이디어는 순간 왔다 사라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 젊음의 비결은 “매사에 좋게 생각하는 습관”에 있다고 전한다. 91세인 이길여 회장은 올해 가천대 축제에서 ‘강남스타일’ 댄스를 춘 영상이 인터넷 커뮤니티에 공개되면서 ‘최고령 동안녀’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16. 강수진
(1967~) 2008년 12월호

국립발레단 단장을 4연임 중인 강수진은 세계 5대 발레단 중 하나인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 1986년 최연소 나이로 입단했으며, 2002년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종신회원이 됐다. 1999년에는 동양인 최초로 발레계의 아카데미상인 ‘브누아 드 라 당스’를 수상했다. 또한 독일 정부가 최고 장인 예술가에게 부여하는 ‘캄머탠저린(궁정무용가)’,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정부의 공로 훈장을 받았다. 49세가 되던 해인 2016년 ‘오네긴’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여성동아’ 2008년 12월호에는 강수진 국립발레단 단장 취임 1년의 이야기를 담았다. 그는 단장으로서의 시간을 돌아보며 “단원들이 어떤 작품이든지 흥미를 가지고, 자신이 발전하는 걸 느끼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볼 때 제일 기쁘다”고 말했다. ‘강수진’ 하면 한때 화제가 됐던 굳은살이 박인 발 사진이 떠오른다. 그는 발레리나 시절을 떠올리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연습밖에는 없었다”면서 “그렇게 하니까 결국은 되더라”는 말을 들려줬다. 노력 이외의 것들도 중요했다. 그는 “모나코 왕립발레학교의 마리카 교장선생님은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할 때 저를 붙잡아주셨다”면서 “제게 타고난 것이 있다면서 그것은 연습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하셨다”고 말했다.

17. 지춘희
(1954~) 2009년 1월호

지춘희는 우리나라 정상급 디자이너로, 1979년 미스지콜렉션을 오픈한 이래 지금까지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심은하, 고현정, 황신혜, 최지우 등 당대 최고 스타가 그의 옷을 입고, 패션쇼를 열면 언제나 명사들이 찾아와 객석을 가득 메운다. ‘여성동아’ 2009년 1월호에 소개된 디자이너 지춘희 인터뷰는 그의 영감의 원천이 무엇인지를 담고 있다. 지춘희는 “내게 디자인은 생활”이라면서 “‘뭘 하겠다’는 의도가 많으면 과해진다. 어느 날 문득, 평소 사는 동안 내 안에 녹아 있던 모든 것들이 척 나올 때, 그때 옷이 만들어진다”고 말했다. 그는 영감을 얻기 위해서 책을 많이 읽는다. 일주일에 열 권 정도다. 그는 “소설을 많이 읽고 여행책도 좋아한다”면서 “매일 아침 신문도 다섯 종류를 읽는다”고 말했다. 디자이너의 중요한 자질로 ‘테크닉’보다 ‘변화를 좋아하는 기질’을 꼽는 그가 유일하게 고수하는 원칙은 ‘여자다움’이었다. 지춘희는 “여자다움이란 부드러움, 따뜻함, 감수성 같은 것일 것”이라면서 “일을 할 때 치열하게 매달리는 편이지만, 여자로서 갖고 있는 감성만은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다”고 밝혔다.
지춘희는 여전히 최정상 디자이너로 사랑받고 있다. 그는 2020년 서울패션위크 명예 디자이너로 선정된 후 2021 S/S 서울패션위크 오프닝을 장식했다.

18. 윤여정
(1947~) 2009년 2월호

윤여정은 다채로운 얼굴을 가진 배우다. 1966년 TBC 3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해 1971년 드라마 ‘장희빈’으로 인기를 누렸고, 같은 해 김기영 감독의 영화 ‘화녀’로 주목받았다. 이후 결혼과 이혼 등 개인사로 공백기를 가졌다 복귀해 ‘사랑이 뭐길래’ ‘목욕탕집 남자들’ ‘넝쿨째 굴러온 당신’ 등 다양한 드라마에 출연하는 한편, 영화 ‘하녀’ ‘돈의 맛’ ‘계춘할망’ ‘미나리’ 등으로 필모그래피를 쌓아왔다. 평소 인터뷰 안 하기로 유명했던 그는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 종영 후 ‘여성동아’ 2009년 2월호 인터뷰에서 솔직하고 유쾌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자신을 “일부러 좋은 사람으로 포장하지는 말아달라”는 말로 시작한 인터뷰는 그간의 연기 인생과 아들 이야기까지 다양한 주제로 이어졌다. 그는 롱런할 수 있는 비결에 대해 “재주는 젊었을 때 잠깐 눈에 띄는 거 같다. 정말 나를 유지해주는 건 노력일 것”이라고 말하며 연기자에게 필요한 자질에 대해 “암기력, 집중력, 관찰력, 임금협상력”이라는 명쾌한 답을 들려줬다. 그는 또한 “내가 위기를 겪으면서 느낀 건, 아무 말도 위로가 안 됐다”면서 지금 힘든 일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견뎌라. 견디면 시간이 가더라”는 위로의 말을 전했다. 윤여정은 2021년 영화 ‘미나리’의 순자 역으로 미국배우조합상 영화 부문 최우수 여우조연상, 영국아카데미영화상(BAFA) 여우조연상, 제93회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인 배우 반열에 올랐다.

19. 조수미
(1962~) 2011년 10월호

조수미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리릭 콜로라투라 소프라노 성악가다. 1986년 이탈리아 트리에스테 극장에서 공연한 베르디 오페라 ‘리골레토’의 여주인공 질다 역으로 데뷔했다. 이후 이탈리아 밀라노라스칼라, 영국 코벤트가든, 뉴욕 메트로폴리탄, 프랑스 바스티유 등 세계 정상급 오페라극장 공연에 주역으로 출연했다. 그와의 인터뷰는 데뷔 25주년 맞아 자신의 음악 여정을 정리하며 ‘리베라’라는 음반을 냈을 때 이루어졌고, 이 내용은 ‘여성동아’ 2011년 10월호에 실렸다. 조수미는 자신에 대해 “나처럼 철저하게 무대 안팎의 모습이 다른 사람도 흔치 않을 것”이라면서 “무대에서는 음악적으로나 시각적으로 강하고 카리스마 있는 모습으로 보여야 하지만, 일을 떠나서는 평범한 보통 여자”라고 소개했다. 그는 대한적십자사 친선 대사로 활동하며 자선 공연을 열고, 저소득층 어린아이들을 위해 공연료를 기부하는 등 사회 공헌 활동에도 열심이다. 이에 대해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연습에만 빠져 살다 보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른다”면서 “음악과 음악 외적인 부분들, 이쪽저쪽을 보면서 더 넓은 길을 가게 됐다고 볼 수 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2021년 국제 무대 데뷔 35주년을 맞은 조수미는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아시아 명예의 전당’에 선정됐다. 조수미는 여전히 바쁜 성악가다. 그는 올해 ‘조수미X베를린 필하모닉 12첼리스트’와 ‘조수미 콘서트 In Love’로 전국 무대를 마련했다.

20. 박근혜
(1952~) 2012년 10월호

박근혜는 2013년 2월 취임한 대한민국 유일의 여성 대통령이다. 1952년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맏딸로 태어났으며, 1974년 어머니가 저격당한 뒤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맡았다. 1979년에는 아버지인 박정희 대통령마저 총격으로 잃었다. 1998년 한나라당 후보로 대구 달성 지역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된 이후 내리 다섯 번 국회의원이 됐고, 두 번째 대권 도전 끝에 대통령이 됐다. ‘여성동아’ 2012년 10월호에는 두 번째 대권 도전에 나선 박근혜 전 대통령을 만나 나눈 인터뷰가 소개됐다. 그는 쉴 틈 없는 스케줄을 소화해내면서 “정치는 애국심으로 하는 게 아니냐고 하지만,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꾸준히 운동하며 체력을 관리해온 자기 관리 비법을 털어놓았다. 그는 ‘열등감’에 대한 질문을 받자 “평범하고 단란하게 가정을 꾸리고 사시는 분들을 보면 부럽다”면서 “다시 태어나면 정치인 말고 평범한 여성으로 살고 싶다”는 소망을 드러냈다.
2017년 탄핵된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21년 1월 대법원에서 징역 20년, 벌금 180억 원을 확정받고 복역하다가, 2021년 12월 특별 사면됐다. 현재 그는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대구 달성군에 머무르고 있다.

21. 황지해
(1976~) 2012년 12월호

황지해는 우리나라 정원의 아름다움을 전하는 가든 디자이너이자 환경 미술가다. 그는 한국 정원의 철학과 아름다움을 담은 정원 작품을 선보여왔는데, 전 세계 가든 디자이너의 꿈의 무대인 영국 ‘첼시플라워쇼’에서 한국인 최초로 3회 금상과 최고상을 수상했다. 2011년 처음으로 첼시플라워쇼에 참가한 그는 ‘해우소 근심을 털어버리는 곳’이라는 작품으로 한국인 최초 아티잔 가든 부문 금상을 받았다. 2012년에는 ‘Quiet Time: DMZ Forbidden Garden’으로 참가해 쇼 가든 부문 금상과 전 분야 최고상인 회장상을 수상했다.

황 작가는 ‘여성동아’ 2012년 12월호에 실린 인터뷰에서 “‘해우소’가 가진 의미는 단순한 화장실이 아니다”라며 “자신과 대면할 수 있는 시간, 버림의 미학, 결국에는 토양을 비옥하게 하고 식물을 살찌울 수 있는, 해우소가 가진 의미가 세계인들에게도 통한 셈”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의 정원에 대해 “게으른 정원, 즉 정형화되지 않은 원시 그대로의 정원”이라면서 “앞으로 이런 한국의 정원에 형태와 장르를 만들어가는 것은 우리 중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황지해 작가는 올해 11년 만에 영국 런던에서 열린 첼시플라워쇼 쇼 가든 부문에서 ‘백만 년 전으로부터 온 편지’로 금상을 수상했다. 특히 올해는 한국 정원의 철학과 아름다움을 담은 작품을 선보여 영국 찰스 국왕으로부터 찬사를 받기도 했다.

22. 장미란
(1983~) 2013년 2월호

‘역도 여제’라는 별명으로 더 익숙한 장미란은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은메달을 시작으로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은메달, 2005·2006·2007·2009년 세계선수권대회 4연패,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금메달 등 여자 역도 최중량급에서 세계 정상을 지켰다. ‘여성동아’ 2013년 2월호에는 장미란의 은퇴 당시 심경이 고스란히 담겼다. 그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는데 어떻게 해나갈지 정리하고 결정을 내리자 아쉬움이 사라졌다”며 “3개월을 고민했지만 이런 마음이 든 지는 열흘도 채 안 된다”고 시원섭섭한 심경을 드러냈다. 그는 “내가 이제 끝인가 싶었지만, 한편으론 인생의 새로운 2막을 여는 희망을 품자 걱정되고 두렵기만 했던 미래가 큰 기대감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30대 여성으로 돌아와서 제일 먼저 하고 싶은 것으로 학교생활을 꼽았다. “꿈에 도전하고자 준비하는 시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면서 “선수 생활을 하느라 누려보지 못한 학교생활에 충실하려고 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장미란은 2015년 용인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이듬해 체육학과 교수로 임용되었다. 이후 2017년 미국 오하이오주 켄트주립대로 다시 유학을 떠나 스포츠행정학 석사를 취득하고 복직했다. 올해 6월 문화체육관광부 제2차관으로 임명돼 지금은 공무원으로 ‘열일’ 중이다.

23. 장영주
(1980~) 2013년 3월호

장영주(사라 장)는 신동 음악가 중 한 명으로, 9세에 주빈 메타가 이끄는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협연 무대로 데뷔했다. 뉴욕 필하모닉 데뷔와 같은 해에 리카르도 무티 역시 자신이 이끌던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공연에 그를 데뷔시켰다. 장영주는 쿠르트 마주어, 사이먼 래틀, 발레리 게르기예프 등 유수의 지휘자들과 10대 시절부터 함께 무대에 올랐다. 30대 초반까지 낸 앨범이 무려 18장을 넘길 정도로 왕성하게 활동했다.

‘천재 음악가’로 각인돼 있던 그는 ‘여성동아’ 2013년 3월호에 또래 여성들과 다름없는 일상을 공개해 친근감을 더했다. “요리를 꼭 배우고 싶다”는 소망을 품어온 그는 “요리책의 지시를 따르기보다는 느낌에 따라 재료를 넣고 빼는 타입”이라며 망친 요리에 대해 스스로 자평하기도 했다. 악기 연주 다음으로 잘하는 것은 “쇼핑”이라면서 “공연하러 다니면서도 여유가 생긴다 싶으면 쇼핑하러 나간다”는 솔직한 이야기도 들려줬다. 바이올린 연주가 아니면 뭘 했을 것 같은지를 묻자 “파티 호스트라면 잘할 거 같다” “파티를 주최할 때 굉장히 즐겁다”고 답했다. 그는 아이를 음악가로 키우고 싶어 하는 어머니들에게 조언을 부탁하자 “누군가 음악 세상에는 음악만이 아니라 비즈니스도 있다는 걸 말해줬다면 좋았을 것 같다”며 자신의 지난 시간을 돌아보기도 했다. 음악계에는 어린 나이에 천재성으로 매스컴과 대중의 주목을 받다가 성장 과정에서 슬럼프에 빠지는 신동들이 많다. 그러나 사라 장은 꾸준한 기량으로 30년 넘게 오랜 연주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지난해에는 데뷔 32주년을 맞아 바로크음악으로 꾸민 ‘사라 장 & 비르투오지’ 전국 투어를 가졌다.

24. 전지현
(1981~) 2014년 1월호

‘엽기적인 그녀’를 통해 첫사랑의 아이콘으로 등극한 전지현은 CF 퀸 그리고 연기력을 갖춘 배우로 자리 잡았다. 2012년 최준혁 알파자산운용 대표와 결혼, 슬하에 아들 둘을 두고 있는 그는 2014년 1월 ‘별에서 온 그대’로 최고의 주가를 올리던 시기에 ‘여성동아’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는 “서른 살이 넘었고, 결혼도 했기 때문에 변화를 체감하고 있다. 좀 더 성숙해지고 여유가 있어지고, 어른이 돼가고 있는 느낌이랄까. 이런 상황 변화가 연기에 영향을 미치는 건 분명하다”고 말했다. “작품을 고를 때도 남편의 외조가 든든하게 한몫한다. 이번 드라마처럼 좋은 작품이 들어오면 지인이나 가족과 당연히 의논한다. 그들의 응원이 없었다면 무슨 일을 하든지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도 했다. 이전까지 전지현은 신비주의 콘셉트를 고수해 대중과 그리 가까운 배우는 아니었다. 하지만 결혼을 통해 배우로서의 삶에 확신을 얻고 대중 앞에 나설 용기를 얻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어릴 때부터 이 일을 해오면서 ‘계속 배우를 해야 하나’ ‘하기 싫다’ 등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신비주의 콘셉트를 의도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배우 생활에 벽이 됐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대중에게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보일 수 있을지 항상 고민하고 갈망해왔다. 지금까지 배우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열심히 연기하는 게 가장 최선의 답일 것 같다”며 오랫동안 대중과 함께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전했다.

25. 플뢰르 펠르랭
(1973~) 2014년 10월호

플뢰르 펠르랭은 한국계 프랑스인 정치인으로, 입양아라는 낙인을 ‘다양성’이라는 훈장으로 승화시킨 입지전적 인물이다. 2012년 아시아계 최초로 프랑스 장관이 되면서 주목받았고, 2012년 프랑수아 올랑드 정권 출범 당시 중소기업 디지털경제부 장관에 발탁된 그는 통상관광 국무장관을 거쳐 2016년까지 문화부 장관을 지냈다. 그의 여권에는 ‘플뢰르 펠르랭 김종숙’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는 이에 대해 인터뷰에서 “‘김종숙’이라는 이름을 빼지 않는 이유는 나의 정체성 중 하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의 양아버지는 그가 어릴 적에 한국에서 한복을 사다 주기도 했다. 펠르랭은 “아버지가 1970년대에 한국을 방문해 ‘종숙’이라는 이름은 ‘완벽한 여자’라는 뜻이라 듣고 와서 내게 말씀해주셨다”고 회고했다. 그는 또한 “내 삶을 돌이켜봤을 때 가장 중요한 원칙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 앞에서 절대로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며 경제위기 속 힘겨워하는 청년들에게 격려의 말을 전했다. 펠르랭 전 장관은 2016년 프랑스 장관 퇴임 후 코렐리아캐피탈을 세워 스타트업 투자자로 변신해 새 삶을 사는 중이다. 사업가로서 2022년 국내에서 에세이 ‘이기거나 혹은 즐기거나’를 펴냈다.

26. 김수현
(1943~) 2016년 3월호

김수현은 50년간 활동해온 드라마 작가다. ‘드라마의 대모’ ‘언어의 마술사’ 등으로 불리며, 대가족극부터 통속극까지 다양한 장르를 선보여왔다. 특히 사람다움에 가치를 둔 ‘가족 드라마의 장인’으로 유명하다. 그는 ‘사랑이 뭐길래’를 비롯해 ‘청춘의 덫’ ‘사랑과 야망’ ‘목욕탕집 남자들’ ‘부모님 전상서’ ‘엄마가 뿔났다’ 등 드라마 역사에 획을 그을 만한 작품을 발표해왔다. ‘여성동아’ 2016년 3월호는 김수현 작가의 신작 SBS 주말드라마 ‘그래, 그런거야’ 첫 방송을 앞두고 그와의 인터뷰를 공개했다. 그는 대가족 드라마를 일관되게 써온 이유에 대해 “우리의 뿌리는 가족”이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가족 드라마를 쓰면 (출연자들) 다 주인공이 된다”면서 각자의 이야기를 진행하는 과정에 “서로 힘을 보태고 보듬으면서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고 밝혔다. 작가는 인터뷰에서 “이제 일을 그만둬야 할 때가 왔다”고 말했듯, ‘그래, 그런거야’ 이후 작품 활동을 중단한 상태다. 2020년 그의 고향인 충북 청주시는 작가의 작품 세계를 선보이는 전시 공간이자 문화공간인 김수현드라마아트홀을 개관했다.

27. 김혜수
(1970~) 2020년 11월호

김혜수는 1986년 영화 ‘깜보’로 데뷔 후 영화계뿐 아니라 드라마, 쇼 프로그램 등에서 활동해온 다재다능한 재능을 가진 독보적 배우다. 그는 4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여러 작품에서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하며 관객과 호흡해왔으나 일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도 있었다. 영화 ‘내가 죽던 날’ 개봉을 앞두고 이뤄진 ‘여성동아’ 2020년 11월호 인터뷰에서 “어느 순간 잠자리에 누웠는데 ‘왜 이 일을 하는 거지’라는 생각에 마음이 복잡해지기도 했다”면서 “앞으로 창의적이고 즐거운 일을 하고 싶다”고 고백했다. 그렇게 30대를 보내고 마음속으로 ‘만 40세가 되면 그만두리라’는 생각도 했단다. 그러나 “영화 일을 하면서 취향이라는 게 생기고, 나라는 사람이 형성됐고, 거기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니 그만둘 수가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렇다면 그는 어디서 위안을 받는 걸까. 그는 “사람, 음악, 시, 글, 아이들, 자연”에서 인생의 즐거움을 찾는다며 “그런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에서 충전이 되니까 사는 것 같다”고 전했다. 김혜수는 지난해 넷플릭스 드라마 ‘소년심판’과 사극 ‘슈룹’에 출연해 호평받았고, 올여름 개봉한 영화 ‘밀수’에 출연했다. ‘밀수’는 올해 ‘범죄도시 3’ 이외에 유일하게 관객 500만 명을 넘긴 흥행작이다.

오은영
(1966~) 2019년 2월호·2020년 11월호

오은영 박사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이자 방송인이다. SBS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에 이어 2020년부터 채널A ‘금쪽같은 내 새끼’에 출연, 수많은 금쪽이 부모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고 있다. 그는 ‘여성동아’와 두 차례에 걸쳐 인터뷰를 나눴고, 2019년 2월호와 2020년 11월호에 게재됐다. 그는 짧은 영상만 보고 아이의 상태, 부모와의 관계까지 파악하는 비법에 대해 “아이들은 부모나 어른에게 그게 말이든 눈빛이든 신호를 보낸다”면서 “평소에 아이가 어떤 신호를 보내는지 잘 관찰하고, 그것이 반복될 때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부모들이 아이의 신호를 파악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곁에서 돕는 능력을 조금씩 배양해주는 게 내 목표”라는 신념도 밝혔다.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며 “부모님께서 자식을 남녀 차별 없이 사랑하셨고, 자신감을 잃지 않게 독려해주신 덕에 내가 지금 하나의 사람으로 자랐다”고 털어놨다. 또한 그는 “세상에 자식을 키우는 것보다 가치 있는 일은 없다. 그걸 모두 잊지 말았으면 한다”는 조언을 남겼다.

29. 이영애
(1971~) 2020년 1월호

이영애는 1990년 CF 모델로 데뷔해 CF 스타 겸 연기자로 활동해온 배우다. 2003년 드라마 ‘대장금’으로 세계적인 한류스타가 됐고, 2005년 박찬욱 감독의 영화 ‘친절한 금자씨’로 연기 변신에 성공해 최고의 여배우로 자리매김했다. 2009년 사업가 정호영 씨와 결혼해 쌍둥이를 낳은 후 10년간 공백기를 가지다가 2019년 영화 ‘나를 찾아줘’로 복귀했다. 영화 개봉을 앞두고 이영애와 나눈 인터뷰가 ‘여성동아’ 2020년 1월호에 공개됐다. 그는 데뷔 30년이 넘은 지금까지 ‘산소 같은 여자’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외모와 우아하고 기품 있는 애티튜드로 사랑받고 있다. 그는 아이들이 2세 되던 해부터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경기 양평 문호리에서 살았는데, 그 시간이 도움이 많이 됐다고 했다. “텃밭에서 유기농 채소를 가꿔 먹고 산을 헤치고 다니며 계곡물 흐르는 소리, 산새 소리 들으며 혼자 사색도 했다”면서 “그렇게 보낸 7~8년이 배우로서의 감성을 풍부하게 하는 것은 물론 정신적, 신체적으로도 큰 자산이 된 것 같다”고 밝혔다. 또 그는 “연예인이라는 직업은 풍선 같다”면서 “자기도 모르게 하늘로 올라가지 않기 위해선 심지의 기둥을 확실히 세우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자신을 점검하고 돌아볼 수 있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라고 소신을 밝혔다. 이영애는 2021년 JTBC 드라마 ‘구경이’에서 ‘형사 출신의 히키코모리’라는 배역을 안정적인 연기로 소화하며 호평을 이끌어낸 바 있다. 올 연말 tvN 드라마 ‘마에스트라’의 차세음 역할로 컴백할 예정이다.

30. 임세아
(1980~) 2020년 1월호

임세아는 명품 브랜드 디올의 아틀리에에서 일하는 패턴 디자이너다. 제77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샤를리즈 테론, 제니퍼 애니스톤, 다코타 패닝 등 세계적인 여배우 3명이 그의 손길이 머문 드레스를 선택하며 화제가 됐다. ‘패턴 디자이너’란 디자이너의 디자인을 실제 옷으로 구현하는 직종이라고 한다. 임세아는 불문학을 전공했지만, 대학 시절부터 춤에 빠져 여성 댄스 팀 ‘스위치’ 멤버로 활동했다. DJ DOC ‘Run To You’와 싸이 ‘챔피언’ 활동 당시 백댄서로 참여했지만, 발목 부상을 당하며 댄서 생활을 그만해야 했다. 그는 “다른 길을 찾으려고 고심하다가 떠올린 게 디자인”이었다. 그러나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이미 대학을 졸업할 나이였고, 패션 디자인을 전공한 것도 아니라 어려움이 있었다. 다행히 패턴 디자이너 양성 학교인 AICP에 입학 허가를 받으며 패턴 디자이너의 길에 들어섰다. 2008년 디올의 어시스턴트 모델리스트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고, 2010년에 셀린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2012년 파코라반이 오트쿠튀르를 재론칭할 때 패턴실 실장으로 스카우트됐다. 이후에는 패션 브랜드 QELA에 몸담기도 했다. 이처럼 여러 브랜드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다 보니 다시 마음의 고향과도 같은 디올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패턴 디자이너가 결코 쉬운 직업은 아니다”라면서 “하지만 그 어떤 직업보다 매력적인 것도 사실이다. 패턴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 분이 계시다면, 끈기를 가지고 도전하라고 말하고 싶다”는 조언을 남겼다.

31. 박세리
(1977~) 2020년 7월호

박세리는 ‘한국 여자 골프 전설’이라 불리는 전직 골프선수다. 그는 1998년부터 LPGA 투어를 제패하고, 2007년 LPGA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등 입지전적 성적을 남겼다. 특히 US여자오픈 연장전에서 맨발로 연못에 들어가 악전고투 끝에 우승했던 모습은 아직도 회자되고 있는 명장면이다. 그는 2016년 은퇴 후 올림픽 여자 골프 국가대표 팀 감독을 맡았고, MBC ‘나 혼자 산다’ 등 다양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한다. ‘여성동아’ 2020년 7월호는 ‘국민 언니’로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박세리 선수 이야기를 실었다. 그는 인터뷰에서 “방송 덕분에 대중에게 부담 없이 다가갈 수 있는 동네 언니가 된 것 같다”면서 “이제 남은 삶은 다른 많은 걸 배우고 적응하면서 새롭게 시작해야겠다. 물론 그 삶에도 여전히 골프는 함께할 것 같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는 30년간의 선수 시절을 돌아보며 “선수 생활의 밑거름이 됐던 건 도전 정신과 자신감”이라면서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에 물러서거나 겁이 없었고, 나에 대한 자신감이 컸다”고 회고했다. 선수 시절에는 긍정적인 성격이 크게 도움이 됐다. “선수 생활하면서 성적이 처지거나 안 좋은 일도 있었지만, 이 또한 자연스럽게 겪는 과정이라 생각하고 크게 연연하지 않았다”며 “대신 한 번 더 배우고 성숙해지려 애썼다”고 마인드컨트롤 비법을 전했다.

박소희
(1996~) 2021년 2월호

패션 브랜드 미스소희를 운영하며 런던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 박소희는 한국적 아름다움을 담은 소재인 소나무, 사슴, 파도, 산 등을 활용한 패션 작품을 선보여 해외 유명 스타들 사이에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그가 디자이너로 유명해진 건 SNS를 통해서였다. 졸업 작품전에 출품할 의상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다가 여러 차례 공유되면서 패션 매거진과 세계적인 팝 스타까지 협찬·협업을 의뢰해온 것. 그간 카디 비, 벨라 하디드, 마일리 사이러스, 아리아나 그란데, 카일리 제너, 리타 오라, 젬마 찬, 나오미 캠벨 등의 할리우드 스타가 그의 옷을 입었다. 그는 ‘여성동아’ 2021년 1월호에 실린 인터뷰에서 “꽃에서 영감을 많이 얻는다”며 “이전에 누구도 하지 않은 나만의 방식으로 꽃을 재해석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192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의 의상들을 보면 강한 매력을 느낀다”면서 “클래식하면서 글래머러스한 과거의 이미지로부터 얻은 영감을 최대한 모던하게 풀어내고 싶다”는 바람을 밝혔다. 셀러브리티들의 미스소희 사랑은 ‘여성동아’ 인터뷰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에는 최연소 빅토리아시크릿 전속모델 테일러 힐이 미국 자선 행사 ‘멧 갈라’ 레드카펫에서 그의 드레스를 입었고, 중국의 톱스타 판빙빙과 메간 폭스 역시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을 앞두고 열린 오스카 파티에 그의 의상을 입고 참석했다.

33. 김은희
(1972~) 2021년 9월호

김은희는 ‘장르물의 대가’로 불리는 극작가다. 2006년 이병헌, 수애 주연의 ‘그해 여름’을 통해 극본가로 데뷔한 뒤, 남편 장항준 감독과 함께 2010년 tvN 드라마 ‘위기일발 풍년빌라’를 집필했다. 이후 2011년 SBS 드라마 ‘싸인’, 2012년 SBS 드라마 ‘유령’, 2016년 tvN 드라마 ‘시그널’ 등 장르물로 마니아층을 형성했다. 2019년에는 넷플릿스 오리지널 드라마 ‘킹덤’ 시리즈로 세계적인 사랑을 받는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김은희 작가는 ‘여성동아’ 2021년 9월호를 통해 자신의 창작 방식을 공개했다. 그는 “내 안에 내재된 생각, 호기심을 키우고 키우다가 작품의 소재로 쓰는 편”이라면서 “역사를 좋아해 책이나 다큐멘터리를 많이 찾아보는 편이었고, 좀비물도 워낙 좋아해 즐겨 봤다. 사극과 좀비물이 만나 ‘킹덤’이 탄생하는 식이다”라고 설명했다. 그의 작품에서는 평범한 인간 군상의 삶과 권선징악의 메시지가 잘 그려진다. 그는 “대본을 쓸 때 ‘이 캐릭터는 무엇을 위해 달려가지?’ ‘이 이야기는 무엇을 향해 가지?’ 그런 방향성에 대해 늘 생각한다”면서 “작품을 만들다가 힘든 순간에 그걸 떠올리면서 ‘내가 기획의도를 또 놓쳤구나’ 깨닫기도 한다. 앞으로도 작품을 통해 무슨 이야기를 하려 하는지 놓치지 않으면서 가려고 한다”는 신념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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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박해윤 기자 동아DB 
사진제공 국가보훈부 연세대학교 기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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