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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45년 째 의료 사각 지대 돌보는 최경숙 원장

“혼자가 아닌 팀이었기에 가능했어요”

이진수 기자

2022. 12. 04

45년간 의료봉사를 해온 산부인과 전문의 최경숙 원장은 “어렵고 가난한 사람을 보면 가슴이 저린다”고 말한다.반평생 넘게 봉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건 몸보다 마음이 먼저 움직였기에 가능했다. 

“진료를 마치고 나니 오후 9시 30분이더라고요. 끝날 때까지 힘든 것도 몰랐어요(웃음).”

산부인과 전문의 최경숙(73) 원장은 두 달 전 소아과 의사인 남편과 안과 의사인 둘째 딸, 유방외과 의사인 사위와 함께 외국인 노동자 의료봉사를 다녀왔다. 진료가 끝나갈 무렵 최 원장 앞에는 여전히 산부인과 진료를 기다리는 이들이 길게 줄 서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최 원장은 일행을 먼저 보내고 늦은 저녁까지 홀로 진료를 봤다.

“산부인과 같은 전문 진료는 의료봉사에서 흔히 만나기 어렵거든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곳이 어디든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고려대 의과대학 출신의 최 원장은 산부인과 레지던트 2년 차이던 1976년부터 국내외 의료 사각지대를 돌며 45년째 환자를 돌보고 있다. 소록도 한센병 환자들을 비롯해 외국인 노동자, 다문화 가족, 독거노인 등 취약계층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간다. 현재는 수원에 위치한 여성의원 원장으로 근무하며 선한봉사센터 단장, 고려대 의료봉사단 단장, 한국여자의사회 의료봉사단, 영등포 쪽방(노숙자) 의무이사 등 소속 의료봉사 단체에서 리더이자 팀원으로 활약 중이다.

“오늘 하루 생일 맞은 것처럼”

최경숙 원장의 봉사 파트너 남편 최병한 씨의 모습(오른쪽)

최경숙 원장의 봉사 파트너 남편 최병한 씨의 모습(오른쪽)

최 원장의 일주일 일과는 쉬는 날인 수요일을 제외하고 병원 근무와 의료봉사로 꽉 채워져 있다. 그는 봉사에 앞서 늘 사람들에게 “‘오늘이 내 생일이다’ 생각하세요”라고 말한다. 부담 없이 생일 선물 받듯이 무료 진료를 즐기라는 의미에서다.



최 원장이 이끄는 의료봉사 팀에는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 종합병원 규모의 각종 분야 의료진이 40~50명가량 참여한다는 것이다. 내과부터 안과, 피부과, 영상의학과, 심전도, 골밀도 검사까지 가능하다. 그래서 한번 진료를 나갈 때면 대형 버스 2~3대가 투입된다.

“사람은 의료 혜택 앞에서 누구나 평등해야 해요. 경제적 여건이 안 돼 몸이 아파도 진료나 치료를 받지 못하는 이들에게 오늘 하루만큼은 생일 선물을 받듯이 충분한 의료 혜택을 받으시라고 말하죠. 평소 받기 힘들었던 심전도 검사나 유방·복부 초음파 검사를 받으면 그것 자체로 기쁨을 느낄 수 있거든요. 가능한 한 많이 검사받게 하고, 진료도 열심히 해줘서 환자들이 필요한 약을 잘 처방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게 진정한 의료봉사라고 생각해요.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이에게 사랑을 나눌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합니다.”

최 원장이 산부인과를 택한 것은 봉사 파트너이자 남편인 소아과 전문의 최병한(73) 씨 덕분이다. 두 사람은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의 캠퍼스 커플 출신으로 전공의 시절부터 의료봉사를 함께해왔다. “산부인과가 이 세상에서 제일 싫었어요(웃음).” 사실 최 원장은 처음부터 정신건강의학과(정신과) 전공을 희망했다. “그런데 어떻게 산부인과를 선택했느냐”고 묻자 “남편을 너무 사랑했나 봐요”라며 웃는다. 당시 남자 친구였던 최 씨는 최 원장의 정신과 지망을 반대했다고 한다.

“남편이 굉장히 엄한 집안에서 자랐어요. 시아버지가 교장선생님이었거든요. 정신과는 너무 험하고 힘들어서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본인은 소아과를 지원하겠대요. 저는 소아과도 싫었어요(웃음). 계속 고집을 피우다간 헤어질 것 같아서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으니 산부인과를 갔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옛날에는 소아과랑 산부인과를 같이 두고 개업하는 병원이 많았거든요. 그때만 해도 남편 될 사람의 말을 존중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결국 고민 끝에 최 원장은 산부인과를 지망했다. 정신과를 마음에 두고 있던 터라 처음에는 적응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최 원장은 “공부를 해보니 선택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더라”며 “직접 경험해본 것과 안 해본 것에 차이가 있듯, 진료할 때 같은 여자로서 환자들에게 ‘공감’할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임신했을 땐 어떤 게 힘든지, 나이대별로 여자의 몸은 어떤 변화를 겪는지 잘 알기에 세심한 진료가 가능하다는 얘기다. 이제는 산부인과 의사가 되길 잘했다고 생각하는지를 묻자, 그는 “그냥 ‘잘했구나’가 아니라, 다른 일했으면 큰일 날 뻔했죠(웃음)”라고 답했다.

봉사의 전환점을 맞다

제 22회 우정선행상 시상식에서 대상을 수상한 최 원장(오른쪽)과 이웅열 이사장.

제 22회 우정선행상 시상식에서 대상을 수상한 최 원장(오른쪽)과 이웅열 이사장.

최 원장의 봉사 인생은 딸로 인해 한 번의 전환점을 맞았다. 당시 명문 예술 중학교에 다니던 딸이 평소 알고 지내던 교회 전도사를 따라 소록도로 봉사활동을 다녀오면서다. 당시 한센병에 대해 잘 몰랐던 최 원장은 봉사 가기 전날 딸에게 소독약과 장갑을 챙겨주며 환자를 만질 땐 꼭 장갑을 끼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봉사에서 돌아온 아이의 가방을 열었는데, 장갑이 사용하지 않은 채 그대로 있는 거예요. 깜짝 놀라서 ‘왜 안 꼈냐’고 하니까, 아이가 ‘엄마, 죄송해요. 하지만 장갑을 끼고 환우들을 만지기에는 너무 미안해서 마음이 아팠어요’라고 말하는 거예요. 이미 피고름으로 고통스러운 환자들을 어떻게 자기가 장갑을 끼고 만지냐는 거였죠. 그 말에 저도 큰 충격을 받았어요. 어른이자 의사인 저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거였거든요. 그날 아이 표정을 보는데, 정말 천사가 따로 없었어요(웃음).”

그 일을 계기로 최 원장은 처음 소록도를 방문했다. 앞서 딸 편에 환우들을 위한 선물을 보냈던 터라 그가 소록도에 도착하자 사람들은 “최경숙 선생님이 오셨다”면서 순식간에 몰려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제가 선뜻 그분들에게 다가가지 못했어요. 피부가 썩은 모습을 보니 저도 모르게 긴장이 되더라고요. 환자들을 만지지도, 끌어안지도 못하는 저 자신이 너무 한심해서 집에 돌아와 펑펑 울었어요. 그때부터 불이 붙어서 의료 봉사를 다녔죠. 의료봉사를 더욱 진심으로 마주하게 된 순간이었어요.”

1993년 최 원장은 남편, 지인들과 함께 ‘소록밀알회’를 꾸려 소록도 정기 봉사를 시작했다.

최 원장은 10월 25일 그간의 노고를 인정받아 코오롱그룹 오운문화재단 제22회 우정선행상 대상에 선정됐다. 부상으로 상금 5000만 원도 받았다. 최 원장은 상금은 의료 기계 구입에 사용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산부인과, 안과와 같은 전문 진료는 특수한 기계가 필요해요. 봉사하면서 가장 아쉬운 게 바로 이런 기계예요. 이제 상금도 받았으니 꼭 필요한 걸로 장만하려고요.”

가장 시급한 것이 안과 기계라고 한다. 1억 원이 넘는 고가라 중고 기계도 값이 만만치 않다고. 최 원장은 “안과 기계를 구입해 어느 봉사단이든 필요하면 가져다 쓸 수 있도록 하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매번 한뜻으로 모여 봉사하는 의료진에 대한 믿음이 나의 가장 큰 재산”이라고 덧붙였다.

“이번 상도 제가 대표로 받았을 뿐, 저 혼자만의 상이 아니에요. 언제나 든든하게 뒷받침해주는 우리 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거죠. 앞으로도 체력이 허락하는 한 의료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갈 겁니다(웃음).”

#산부인과최경숙원장 #코오롱문화재단 #여성동아

사진 지호영 기자 사진제공 코오롱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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