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기사에는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김혜수가 선택한 작품이라면 일단 눈길부터 간다. 드라마 ‘하이에나’(2020)의 변호사 ‘정금자’가 퇴장한 지 오래지 않아, 그는 ‘소년심판’(2022)의 판사 ‘심은석’으로 다시 법정에 섰다. ‘소년심판’은 지난 몇 년 사이 첨예한 논쟁을 촉발한 소년법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넷플릭스 드라마다. 공개 이틀 만에 넷플릭스 TV 시리즈 세계 10위, 비영어권 TV 시리즈 1위를 차지하며 시청자들의 관심을 받았다.
“저는 소년범을 혐오합니다.”
‘소년심판’ 예고편에서 김혜수가 한 이 자극적인 대사는 시청자의 흥미를 자극하기에도, 동시에 반감을 사기에도 충분했다. 소년법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며 편향된 여론 몰이에 나서는 작품은 아닐까 하는 우려 섞인 반응도 나왔지만, 뭇 시청자들 반응이 호기심 쪽에 기운 건 배우 김혜수에 대한 신뢰 때문일 것이다. 실제 뚜껑을 열어보니 예민한 사안을 붙들고 치열하게 고민한 작가의 애환이 절로 전해진다. 냉정과 열정 사이를 오가는 소년부 배석 판사 심은석은 실제 한국에서 발생한 소년범죄 사건을 모티프로 구성된 여러 에피소드를 가로지르며 시청자를 설득시켰다.
평소 독서량이 상당하기로 유명한 김혜수가 심은석 판사가 되고자 기울인 노력은 “역시 그답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는 이 작품을 준비하며 판사 여러 명을 만났고 소년범죄 및 소년법의 실태를 배웠다. 그리고 깨닫고 반성했다. 분노, 안타까움, 슬픔 같은 감정 너머에 수많은 진실과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 김혜수는 “촬영 현장을 떠나 잠들기 직전까지도 심은석을 놓고 싶지 않았고, 놓아지지도 않았다”고 털어놨다. 최근 유례없이 많은 언론의 인터뷰 요청을 받고 있다는 그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처음 대본을 읽고 놀랐어요. 작품 구성이나 메시지를 던지는 방식에서 객관성과 균형감 있는 태도를 유지하려고 굉장히 애쓴 게 느껴졌거든요. 이런 이야기를 드라마에서 다루는 것 자체가 반가운데, 단순히 예민한 소재를 가져온 데 그치지 않고 다각적인 시선을 제안한다는 점이 흥미로웠어요. 사회 구성원으로서 소년범죄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됐어요.
이전 작품들과는 또 다른 차원의 부담감을 느꼈을 듯합니다.
어떤 작품이나 책임감이 필요하지만 ‘소년심판’은 드라마 주제가 갖는 무게감이 상당했어요. 심은석 판사를 연기할 때 그의 신념, 소년범이나 피해자 가족을 대하는 태도, 또 법관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 등 작품에서 그려지는 하나하나가 모두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임했어요.
그중에서도 어떤 부분에 가장 집중했나요.
심은석이 소년범에 대해 어떠한 선입견도 갖지 않고, 법관으로서 또 사회 구성원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게 이 작품을 관통하는 메시지거든요. 그 부분에 가장 진심을 다하려고 노력했어요. 소년범죄는 사람의 감정을 건드리지만, 그런 사건을 맡을수록 심은석은 법관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고자 냉담해지죠.
김무열 배우가 연기한 차태주 판사는 소년범에 대한 온정적인 시선을 견지합니다.
초반에 차태주 판사와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부분이 있어요. 리허설을 하는데 제가 소년범에게 좀 더 따뜻하게 접근하는 차태주의 이야기에 동화되는 거예요. 심은석은 그러면 안 되는데요. 그래서 무열 씨에게 “죄송하지만 리허설 없이 가자”고 부탁한 적도 있어요.
극 중 심은석이 피해자 사진을 책상 앞에 붙여둔 채로 재판을 준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심은석 판사의 직업윤리가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제 대사 중에 “오늘 재판으로 피해자의 억울함이 해소됐는가. 가해자는 반성하고 있는가”라는 문장이 있어요. 이때 심은석이라는 캐릭터가 소년 사건을 대하는 태도를 느꼈어요. 이 장면을 촬영할 때 제가 직접 아이디어를 내고 소품팀에 책상 옆에 붙여둘 사진을 요청했죠. 이 대사에서 느낀 힘 덕분에 심은석이라는 인물에 더 크게 이입할 수 있었어요.
‘소년심판’에는 특히 인상적인 대사가 많습니다.
대본을 보면서 좋았던 점 중 하나는 기교가 없다는 거였어요. 꾸미지 않고 묵직하게 힘을 싣는 대사 덕분에 메시지가 곧장 전해진다고 느꼈어요. 심은석은 틀린 말을 하지 않죠. 누구나 대신 해줬으면 하는 말이 있잖아요. 그걸 하는 사람이에요. 주인공이라서가 아니라 심은석이 극에서 해야 할 역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 표현하기에 까다로운 캐릭터였을 듯합니다.
작품이 다루는 이야기를 더 현실적으로 느끼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많이 고민했어요. 시청자에게 너무 극화된 느낌을 줘서 몰입을 방해하지 않도록 감정의 밀도나 수위를 조절하는 데 집중했어요. 어른 처지에서 소년범을 바라보면 ‘괘씸한 마음’과 ‘외로운 존재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이 공존하잖아요. 양가감정 사이에서 적절한 선을 찾는 것이 중요했어요.
배역의 내면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려면 외적인 부분도 각별히 신경 써야 하죠. 가능하면 판사라는 직업군에 어울릴 옷이나 가방을 선택했어요. 짧은 순간이라도 심은석에게서 김혜수가 드러나 시청자의 몰입을 방해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그런 점을 많이 견제하려고 했죠. 이번 작품을 준비하면서 판사분들을 많이 만나고 그때마다 제가 받은 느낌을 참고했어요.
판사를 실제로 만나보니 어땠나요.
작품에도 소개됐지만 전국에 소년부 판사가 20여 명 정도밖에 안 돼요. 작품 준비하면서 그중 절반 가까운 분을 만났고요. 수많은 소년범죄를 처리할 수 있는 인력이나 시간이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었어요.
이번 작품을 준비하며 소년법에 대한 공부도 많이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작품을 준비하며 크게 깨달은 것이 있어요. 그동안 나름대로 사회 문제에 관심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착각이지 않았나 하는 거였죠. 제 관심의 범위가 무척 편협했다는 걸 느꼈어요. 사실 그게 관심이 아니라 사회 현상에 대한 피상적인 분노, 안타까움, 슬픔을 표현하는 다분히 감정적인 태도에 머물러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새롭게 알게 된 점이 있나요.
소년범죄는 재범률이 상당히 높아요. 반대로 소년범은 어른들이 상상하지 못할 속도로 빠르게 교화되는 경우도 많아요. 실제 법정에서 판사님이 소년 피의자를 야단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어요. 요즘 아이들은 덩치가 커서 어른처럼 보이지만 내면은 그렇지 않대요. 판사가 소리를 높여 야단을 치면 잘못한 걸 알아차린대요. 그만큼 아이들은 가변적이고 유기적인 존재라는 거예요. 불안정하기 때문에 범죄에 가담하기도 하고 범죄 피해자가 되기도 하죠. 그런데 현실에서는 1% 정도에 해당하는 강력 범죄를 저지른 소년범 문제만 다뤄져요. 실제로 그 범죄 양상은 더 악랄해지고 있고요. 사회가 강력 범죄를 저지른 소년범에 대한 처벌을 심각하게 논의하는 것에 반해, 관심 밖에 있는 대부분의 소년범에 대한 주목도는 떨어지죠.
그는 이 대목에서 소년범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줬다. 가족 구성원과 함께 심리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소년범 이야기다.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아이였지만, 어른들이 보호자로서 소홀했던 역할을 인정하자 반성하고 우등생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저는 성적에 대해 말씀드리려는 게 아니에요. 그 아이의 달라진 태도에 정말 놀랐어요. 판사님이 울먹이면서 아이에게 세 번이나 고맙다는 말을 하시더군요. 이런 사례들을 보며 평소 우리가 일부의 소년범죄에 집중해 지나치게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소년심판’은 피해자 보호에 대한 이야기도 중요하게 다룹니다.
심은석이라는 캐릭터를 범죄 피해자 가족으로 설정한 것이 단순히 인물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장치만은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누구나 범죄 피해자 혹은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다고 봐요. 청소년은 보호해야 마땅한 존재이지만 또 언제든 가해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존재이기도 하거든요. 어떨 때는 가해자가 소년이라는 이유로 피해자보다 더 많은 보호를 받기도 하는데, 과연 그것이 사회가 납득할 만큼 합리적인 일인가 하는 질문도 필요하죠. 범죄 피해를 입은 사람을 보호할 제도적 장치를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 감사했던 일이 생각나요. 강원중과 심은석이 사건을 두고 대립하는 장면을 찍은 뒤 마음 한편에 찜찜함이 남았거든요. 최선을 다했지만 어딘가 심은석과 일치하지 않는 연기를 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이미 다른 회차를 촬영하는 중이었는데 양해를 구하고 재촬영을 요청했어요. 폭발하는 감정 연기를 해야 했던 장면이었고, 선배님 연기는 이미 충분했기 때문에 특히 죄송했어요. 그런데 선배님이 흔쾌하게 “얼마든지”라고 하시더라고요. 굉장히 큰 힘이 됐고 무사히 재촬영을 했죠.
영화 ‘내가 죽던 날’(2020)에서 호흡을 맞춘 이정은 배우와도 이 작품에서 재회했습니다.
좋은 배우란 걸 경험으로 아니까 기대치가 있었죠. 정은씨가 연기한 나근희 판사는 제가 예상한 캐릭터와는 또 달랐어요. 굉장히 현실적인 캐릭터를 구현했다고 할까요. 그래서 역시 다르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완성작을 다 모니터링한 정은 씨가 “많이 반성했다”며 문자 메시지를 보냈더라고요. 그런 정은 씨를 보면서 우리가 하는 작업을 얼마나 진중하고 겸손하게 대하는지 느꼈죠. 그런 동료를 만났다는 게 참 좋았어요.
이어 신인 배우의 활약상에 대해 묻자 김혜수는 “심은석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덕분”이라며 소년범으로 출연한 배우를 하나하나 언급했다. 이연(백성우 역)을 실제로 보자마자 대본만 읽었을 때는 그릴 수 없던 배역 이미지가 그려졌다고 했고, 황현정(한예은 역)의 연기는 장선우 감독 ‘꽃잎’에 등장한 이정현을 연상시킨다고 했다. 목소리를 높이지 않은 채 캐릭터의 상황에 집중해 대사를 전달하는 강채영(강선아 역)의 연기를 보고 놀라 제작진에게 이름을 물어봤다고도 했다. ‘소년심판’ 촬영이 끝난 지 8개월이 지났지만 김혜수는 모든 배우의 이름과 배역 이름을 오롯이 기억하고 있었다. ‘소년심판’에 대한 애정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작품이 공개된 후 주위 반응도 궁금합니다.
“우리 부부 어제 밤새 얘기했잖아. 싸울 뻔했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어요(웃음). 이렇게 부모 자식 간이나 친구 사이에 토론을 하기도 하고, 현행 법체계를 찾아보고 공유하는 커뮤니티도 있다고 해요. 다양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굉장히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소년심판’을 준비하면서 진심으로 바랐던 것 중 하나죠. 재미를 충족시키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사회적으로 중요한 화두를 전달하고 담론을 형성하는 것이 영상 매체의 엄청난 순기능이라고 보거든요. 잘해내고 싶은 마음이 컸던 작품인데 관심이 뜨거워서 정말 감사해요.
데뷔작으로 상당히 독특하고 어려운 소재를 택했다.
처음부터 소년부 판사에 대한 이야기를 염두에 둔 건 아니다. 우연히 법정 드라마를 보다가 변호사와 검사가 신랄하게 다투는 장면에서 영혼 없는 판사의 얼굴에 눈길이 멈췄다. 저 판사도 사건 기록을 읽고 고민했을 텐데 너무 인형처럼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때 호기심이 시작됐다. 판사의 사연을 담아보면 어떨까 생각하면서 취재를 다녔고, 소년부 판사님을 알게 되면서 소년 법정 이야기를 구성하기로 마음먹었다.
실제 판사들은 완성된 드라마 ‘소년심판’을 보고 어떤 얘길 했나.
자문에 응해주신 판사님들을 대상으로 시사회를 열었다. 드라마를 보시곤 작품에 등장한 네 명의 판사에 대해 흥미로운 말씀을 해주셨다. 사실은 판사 한 명 안에 이 네 명이 다 들어 있다는 설명이었다. 누군가는 턱끝까지 밀린 사건을 속도감 있게 해결하는 데 중점을 두고, 다른 누군가는 시스템에 대한 회의로 고민하기도 한다. 또 어떤 판사는 심은석과 차태주처럼 교화와 엄벌 사이에서 어떤 선택이 옳은지 갈등한다. 사건을 처리할 때마다 이 네 가지 마음이 싸우고 있다는 말씀을 해주신 것이 기억에 깊게 남았다. 나침반에서 동서남북 가운데 하나의 방위라도 없으면 방향을 찾지 못한다. 그것처럼 네 명의 판사 가운데 한 명이라도 사라진다면 소년을 구제할 수 없는 거다.
#김혜수 #소년심판 #심은석 #소년범 #여성동아
사진제공 넷플릭스
김혜수가 선택한 작품이라면 일단 눈길부터 간다. 드라마 ‘하이에나’(2020)의 변호사 ‘정금자’가 퇴장한 지 오래지 않아, 그는 ‘소년심판’(2022)의 판사 ‘심은석’으로 다시 법정에 섰다. ‘소년심판’은 지난 몇 년 사이 첨예한 논쟁을 촉발한 소년법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넷플릭스 드라마다. 공개 이틀 만에 넷플릭스 TV 시리즈 세계 10위, 비영어권 TV 시리즈 1위를 차지하며 시청자들의 관심을 받았다.
“저는 소년범을 혐오합니다.”
‘소년심판’ 예고편에서 김혜수가 한 이 자극적인 대사는 시청자의 흥미를 자극하기에도, 동시에 반감을 사기에도 충분했다. 소년법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며 편향된 여론 몰이에 나서는 작품은 아닐까 하는 우려 섞인 반응도 나왔지만, 뭇 시청자들 반응이 호기심 쪽에 기운 건 배우 김혜수에 대한 신뢰 때문일 것이다. 실제 뚜껑을 열어보니 예민한 사안을 붙들고 치열하게 고민한 작가의 애환이 절로 전해진다. 냉정과 열정 사이를 오가는 소년부 배석 판사 심은석은 실제 한국에서 발생한 소년범죄 사건을 모티프로 구성된 여러 에피소드를 가로지르며 시청자를 설득시켰다.
평소 독서량이 상당하기로 유명한 김혜수가 심은석 판사가 되고자 기울인 노력은 “역시 그답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는 이 작품을 준비하며 판사 여러 명을 만났고 소년범죄 및 소년법의 실태를 배웠다. 그리고 깨닫고 반성했다. 분노, 안타까움, 슬픔 같은 감정 너머에 수많은 진실과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 김혜수는 “촬영 현장을 떠나 잠들기 직전까지도 심은석을 놓고 싶지 않았고, 놓아지지도 않았다”고 털어놨다. 최근 유례없이 많은 언론의 인터뷰 요청을 받고 있다는 그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드라마가 가진 무게감이 달랐다”
소년범을 전면에 내세운 국내 첫 드라마입니다. 대본을 받았을 때 어떤 기분이었나요.처음 대본을 읽고 놀랐어요. 작품 구성이나 메시지를 던지는 방식에서 객관성과 균형감 있는 태도를 유지하려고 굉장히 애쓴 게 느껴졌거든요. 이런 이야기를 드라마에서 다루는 것 자체가 반가운데, 단순히 예민한 소재를 가져온 데 그치지 않고 다각적인 시선을 제안한다는 점이 흥미로웠어요. 사회 구성원으로서 소년범죄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됐어요.
이전 작품들과는 또 다른 차원의 부담감을 느꼈을 듯합니다.
어떤 작품이나 책임감이 필요하지만 ‘소년심판’은 드라마 주제가 갖는 무게감이 상당했어요. 심은석 판사를 연기할 때 그의 신념, 소년범이나 피해자 가족을 대하는 태도, 또 법관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 등 작품에서 그려지는 하나하나가 모두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임했어요.
그중에서도 어떤 부분에 가장 집중했나요.
심은석이 소년범에 대해 어떠한 선입견도 갖지 않고, 법관으로서 또 사회 구성원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게 이 작품을 관통하는 메시지거든요. 그 부분에 가장 진심을 다하려고 노력했어요. 소년범죄는 사람의 감정을 건드리지만, 그런 사건을 맡을수록 심은석은 법관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고자 냉담해지죠.
김무열 배우가 연기한 차태주 판사는 소년범에 대한 온정적인 시선을 견지합니다.
초반에 차태주 판사와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부분이 있어요. 리허설을 하는데 제가 소년범에게 좀 더 따뜻하게 접근하는 차태주의 이야기에 동화되는 거예요. 심은석은 그러면 안 되는데요. 그래서 무열 씨에게 “죄송하지만 리허설 없이 가자”고 부탁한 적도 있어요.
극 중 심은석이 피해자 사진을 책상 앞에 붙여둔 채로 재판을 준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심은석 판사의 직업윤리가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제 대사 중에 “오늘 재판으로 피해자의 억울함이 해소됐는가. 가해자는 반성하고 있는가”라는 문장이 있어요. 이때 심은석이라는 캐릭터가 소년 사건을 대하는 태도를 느꼈어요. 이 장면을 촬영할 때 제가 직접 아이디어를 내고 소품팀에 책상 옆에 붙여둘 사진을 요청했죠. 이 대사에서 느낀 힘 덕분에 심은석이라는 인물에 더 크게 이입할 수 있었어요.
‘소년심판’에는 특히 인상적인 대사가 많습니다.
대본을 보면서 좋았던 점 중 하나는 기교가 없다는 거였어요. 꾸미지 않고 묵직하게 힘을 싣는 대사 덕분에 메시지가 곧장 전해진다고 느꼈어요. 심은석은 틀린 말을 하지 않죠. 누구나 대신 해줬으면 하는 말이 있잖아요. 그걸 하는 사람이에요. 주인공이라서가 아니라 심은석이 극에서 해야 할 역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 표현하기에 까다로운 캐릭터였을 듯합니다.
작품이 다루는 이야기를 더 현실적으로 느끼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많이 고민했어요. 시청자에게 너무 극화된 느낌을 줘서 몰입을 방해하지 않도록 감정의 밀도나 수위를 조절하는 데 집중했어요. 어른 처지에서 소년범을 바라보면 ‘괘씸한 마음’과 ‘외로운 존재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이 공존하잖아요. 양가감정 사이에서 적절한 선을 찾는 것이 중요했어요.
“아이들은 가변적이고 유기적인 존재”
심은석 판사의 부르튼 입술이나 갈수록 수척해지는 모습도 의도한 건가요.배역의 내면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려면 외적인 부분도 각별히 신경 써야 하죠. 가능하면 판사라는 직업군에 어울릴 옷이나 가방을 선택했어요. 짧은 순간이라도 심은석에게서 김혜수가 드러나 시청자의 몰입을 방해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그런 점을 많이 견제하려고 했죠. 이번 작품을 준비하면서 판사분들을 많이 만나고 그때마다 제가 받은 느낌을 참고했어요.
판사를 실제로 만나보니 어땠나요.
작품에도 소개됐지만 전국에 소년부 판사가 20여 명 정도밖에 안 돼요. 작품 준비하면서 그중 절반 가까운 분을 만났고요. 수많은 소년범죄를 처리할 수 있는 인력이나 시간이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었어요.
이번 작품을 준비하며 소년법에 대한 공부도 많이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작품을 준비하며 크게 깨달은 것이 있어요. 그동안 나름대로 사회 문제에 관심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착각이지 않았나 하는 거였죠. 제 관심의 범위가 무척 편협했다는 걸 느꼈어요. 사실 그게 관심이 아니라 사회 현상에 대한 피상적인 분노, 안타까움, 슬픔을 표현하는 다분히 감정적인 태도에 머물러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새롭게 알게 된 점이 있나요.
소년범죄는 재범률이 상당히 높아요. 반대로 소년범은 어른들이 상상하지 못할 속도로 빠르게 교화되는 경우도 많아요. 실제 법정에서 판사님이 소년 피의자를 야단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어요. 요즘 아이들은 덩치가 커서 어른처럼 보이지만 내면은 그렇지 않대요. 판사가 소리를 높여 야단을 치면 잘못한 걸 알아차린대요. 그만큼 아이들은 가변적이고 유기적인 존재라는 거예요. 불안정하기 때문에 범죄에 가담하기도 하고 범죄 피해자가 되기도 하죠. 그런데 현실에서는 1% 정도에 해당하는 강력 범죄를 저지른 소년범 문제만 다뤄져요. 실제로 그 범죄 양상은 더 악랄해지고 있고요. 사회가 강력 범죄를 저지른 소년범에 대한 처벌을 심각하게 논의하는 것에 반해, 관심 밖에 있는 대부분의 소년범에 대한 주목도는 떨어지죠.
그는 이 대목에서 소년범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줬다. 가족 구성원과 함께 심리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소년범 이야기다.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아이였지만, 어른들이 보호자로서 소홀했던 역할을 인정하자 반성하고 우등생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저는 성적에 대해 말씀드리려는 게 아니에요. 그 아이의 달라진 태도에 정말 놀랐어요. 판사님이 울먹이면서 아이에게 세 번이나 고맙다는 말을 하시더군요. 이런 사례들을 보며 평소 우리가 일부의 소년범죄에 집중해 지나치게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소년심판’은 피해자 보호에 대한 이야기도 중요하게 다룹니다.
심은석이라는 캐릭터를 범죄 피해자 가족으로 설정한 것이 단순히 인물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장치만은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누구나 범죄 피해자 혹은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다고 봐요. 청소년은 보호해야 마땅한 존재이지만 또 언제든 가해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존재이기도 하거든요. 어떨 때는 가해자가 소년이라는 이유로 피해자보다 더 많은 보호를 받기도 하는데, 과연 그것이 사회가 납득할 만큼 합리적인 일인가 하는 질문도 필요하죠. 범죄 피해를 입은 사람을 보호할 제도적 장치를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작품이 토론 이끌어내 기쁘다”
부장판사 강원중 역할로 등장한 이성민 배우와의 호흡은 어땠나요.개인적으로 감사했던 일이 생각나요. 강원중과 심은석이 사건을 두고 대립하는 장면을 찍은 뒤 마음 한편에 찜찜함이 남았거든요. 최선을 다했지만 어딘가 심은석과 일치하지 않는 연기를 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이미 다른 회차를 촬영하는 중이었는데 양해를 구하고 재촬영을 요청했어요. 폭발하는 감정 연기를 해야 했던 장면이었고, 선배님 연기는 이미 충분했기 때문에 특히 죄송했어요. 그런데 선배님이 흔쾌하게 “얼마든지”라고 하시더라고요. 굉장히 큰 힘이 됐고 무사히 재촬영을 했죠.
영화 ‘내가 죽던 날’(2020)에서 호흡을 맞춘 이정은 배우와도 이 작품에서 재회했습니다.
좋은 배우란 걸 경험으로 아니까 기대치가 있었죠. 정은씨가 연기한 나근희 판사는 제가 예상한 캐릭터와는 또 달랐어요. 굉장히 현실적인 캐릭터를 구현했다고 할까요. 그래서 역시 다르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완성작을 다 모니터링한 정은 씨가 “많이 반성했다”며 문자 메시지를 보냈더라고요. 그런 정은 씨를 보면서 우리가 하는 작업을 얼마나 진중하고 겸손하게 대하는지 느꼈죠. 그런 동료를 만났다는 게 참 좋았어요.
이어 신인 배우의 활약상에 대해 묻자 김혜수는 “심은석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덕분”이라며 소년범으로 출연한 배우를 하나하나 언급했다. 이연(백성우 역)을 실제로 보자마자 대본만 읽었을 때는 그릴 수 없던 배역 이미지가 그려졌다고 했고, 황현정(한예은 역)의 연기는 장선우 감독 ‘꽃잎’에 등장한 이정현을 연상시킨다고 했다. 목소리를 높이지 않은 채 캐릭터의 상황에 집중해 대사를 전달하는 강채영(강선아 역)의 연기를 보고 놀라 제작진에게 이름을 물어봤다고도 했다. ‘소년심판’ 촬영이 끝난 지 8개월이 지났지만 김혜수는 모든 배우의 이름과 배역 이름을 오롯이 기억하고 있었다. ‘소년심판’에 대한 애정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작품이 공개된 후 주위 반응도 궁금합니다.
“우리 부부 어제 밤새 얘기했잖아. 싸울 뻔했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어요(웃음). 이렇게 부모 자식 간이나 친구 사이에 토론을 하기도 하고, 현행 법체계를 찾아보고 공유하는 커뮤니티도 있다고 해요. 다양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굉장히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소년심판’을 준비하면서 진심으로 바랐던 것 중 하나죠. 재미를 충족시키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사회적으로 중요한 화두를 전달하고 담론을 형성하는 것이 영상 매체의 엄청난 순기능이라고 보거든요. 잘해내고 싶은 마음이 컸던 작품인데 관심이 뜨거워서 정말 감사해요.
‘소년심판’ 작가 김민석이 답하다
김혜수는 인터뷰 동안 수차례 시나리오에 대한 호평을 쏟아냈다. “꾸미지 않고 묵직하게 힘을 싣는 대사”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다각적인 시선을 제안하는 각본”을 쓴 김민석 작가가 3월 8일 ‘라이브 토크’에서 한 말 일부를 옮긴다.데뷔작으로 상당히 독특하고 어려운 소재를 택했다.
처음부터 소년부 판사에 대한 이야기를 염두에 둔 건 아니다. 우연히 법정 드라마를 보다가 변호사와 검사가 신랄하게 다투는 장면에서 영혼 없는 판사의 얼굴에 눈길이 멈췄다. 저 판사도 사건 기록을 읽고 고민했을 텐데 너무 인형처럼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때 호기심이 시작됐다. 판사의 사연을 담아보면 어떨까 생각하면서 취재를 다녔고, 소년부 판사님을 알게 되면서 소년 법정 이야기를 구성하기로 마음먹었다.
실제 판사들은 완성된 드라마 ‘소년심판’을 보고 어떤 얘길 했나.
자문에 응해주신 판사님들을 대상으로 시사회를 열었다. 드라마를 보시곤 작품에 등장한 네 명의 판사에 대해 흥미로운 말씀을 해주셨다. 사실은 판사 한 명 안에 이 네 명이 다 들어 있다는 설명이었다. 누군가는 턱끝까지 밀린 사건을 속도감 있게 해결하는 데 중점을 두고, 다른 누군가는 시스템에 대한 회의로 고민하기도 한다. 또 어떤 판사는 심은석과 차태주처럼 교화와 엄벌 사이에서 어떤 선택이 옳은지 갈등한다. 사건을 처리할 때마다 이 네 가지 마음이 싸우고 있다는 말씀을 해주신 것이 기억에 깊게 남았다. 나침반에서 동서남북 가운데 하나의 방위라도 없으면 방향을 찾지 못한다. 그것처럼 네 명의 판사 가운데 한 명이라도 사라진다면 소년을 구제할 수 없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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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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