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생충’과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 이어 영화 ‘내가 죽던 날’로 돌아온 이정은.
1991년 연극 ‘한여름밤의 꿈’으로 데뷔한 그는 초반에는 연기에 재능이 없다고 느껴 연출 쪽에 집중했다. 이런 그를 대중에게 알린 작품은 2008년에 출연한 뮤지컬 ‘빨래’다. 이정은은 이 뮤지컬에서 거의 4년간 주인 할머니와 여직원 역할을 소화했으며, 결국 제1회 젊은 연극인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연극배우 생활이 녹록치 않아 생계를 잇기 위해 연기 선생님, 녹즙 판매원 등 다양한 일을 병행하기도 했다. 방송과 영화로 활동 무대를 넓혔지만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다가 2009년 영화 ‘마더’와 ‘시선 1318’ 출연을 시작으로 조금씩 빛을 보기 시작했다. 2017년에는 넷플릭스 영화 ‘옥자’에서 돼지 옥자의 목소리로 출연해 화제를 모았다. 이후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 (2018), ‘눈이 부시게’(2019), ‘타인은 지옥이다’(2019), ‘동백꽃 필 무렵’(2019), ‘한 번 다녀왔습니다’(2020) 등을 통해 다양한 매력을 선보이며 안방극장에서 당당히 조연과 주연 자리를 꿰찼다. 특히 영화 ‘기생충’에서 남편을 박 사장네 대저택 지하에 숨긴 가정부 문광 역을 맡아 대세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동갑내기 배우 김혜수와의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연대감
이정은은 영화에 함께 출연한 김혜수의 얼굴을 모니터로 보는 것이 즐거웠다고 말한다.
이 작품에서 특히 눈에 들어오는 건 대사 없이 행동과 표정만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이정은의 탁월한 연기다. 쉬는 시간에도 스태프에게 표정과 몸짓으로 의사소통하며 목소리 없이도 감정의 디테일을 전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극 중 소녀에게 손을 내밀어줬던 것처럼 따스하게 빛나던 그를 영화 개봉을 앞두고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완성된 영화를 보니 어떻던가요.
혜수 씨가 연기를 너무 잘하더라고요. 모니터를 볼 때마다 얼굴이 참 좋았어요. 그동안 관객이나 시청자들은 무너져 있는 상태의 혜수 씨 연기를 본 경험이 별로 없을 거예요. 센 캐릭터를 많이 맡기도 했고요. 동료 배우의 연기를 보면서 감흥을 얻는 경우가 흔치 않은데, 그가 표현하는 절망감의 표현들이 마음속에 깊게 다가왔어요.
두 분이 동갑이시죠.
아마 제가 몇 달 빠를 거예요(웃음). 2000년 초반에 처음 만났어요. 당시 혜수 씨가 잘 아는 지인이 연출한 연극에 제가 출연했는데, 혜수 씨가 소장한 의상과 액세서리를 한 트렁크 정도 연극에 제공해줬거든요. 그야말로 아름다운 인연으로 시작했지요. 그때도 정확한 나이는 모르고 비슷한 연배일 거라 짐작해 서로 ‘정은 씨’ ‘혜수 씨’로 불렀어요. ‘정은 씨’라는 호칭은 주로 일하면서 많이 듣는데 대우받는 것 같기도 하고 묘한 흥분감을 주는 듯해요. 동년배만이 느낄 수 있는 연대감 같은 독특한 느낌도 좋고요. 혜수 씨는 평소 표현이 매우 뛰어난 사람이에요. 추울 때 뺨을 쓰다듬어준다거나 안아주기도 하지요. 그럴 때면 세상에서 받아보지 못한 애정 표현을 받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요.
동년배만의 연대감이란 어떤 건가요.
내가 이렇게 살았고, 저렇게 살았다고 구구절절 말하지 않아도 아는 느낌이랄까요. 매번 작품을 할 때마다 변화되는 혜수 씨의 얼굴을 보거나 기사를 접하면 ‘저 사람에게도 삶이 어떻게 보면 파란만장하게 펼쳐지고 있구나’ 자연스레 느껴지더라고요.
노정의 배우는 이번에 한양대 후배가 됐더군요. 작품에서 맞붙는 장면들도 많잖아요.
10대 후반의 상처 받은 영혼 역할을 너무 잘해줬어요. 캐스팅이 완료되기 전 감독님이 세진이 역할 오디션 영상을 4개 보여주셨는데 정의 씨가 단연 눈에 띄더라고요. 너무 청초한 분위기라 저 친구가 절망을 보여줄 때 어떨지 궁금했어요. 때가 많이 안 묻어 좋았고요. 정의 씨가 혜수 씨와 저를 두고 양쪽에 교장 선생님 두 분이 계시는 느낌이라고 했는데 무서웠겠죠(웃음). 영화 촬영할 때는 완전 아가였는데 1년 사이에 너무 예뻐져서 놀랐어요.
감독과 세 명의 주연 배우가 모두 여성이에요. 현장 분위기도 다른 영화와 좀 달랐을 듯해요.
섬세했어요. 한 신 한 신 찍을 때마다 현장에서 집중력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줬지요. 또 촬영 중 쉴 때 서로가 하는 놀이나 이야기도 세밀하면서 섬세했고요.
순천댁은 사고로 목소리를 잃고 혼자 남은 아픈 조카를 돌보는 등 인생의 모진 풍파를 겪은 인물이에요. 역할을 제안받았을 때 어땠나요.
뮤지컬 ‘빨래’에서 사지를 쓰지 못하는 코마 상태의 장애인을 데리고 사는 노인 역할을 오랫동안 했어요. 감독님에게 조카를 그렇게 돌보는 고모가 있을까 물었는데 “지금처럼 가족이 분열되고 쪼개져 있는 사회에서 조모가 손자, 손녀를 거두는 등 다양한 가족 형태가 있지 않을까”라고 얘기하시더라고요. 실제로 친오빠에게 아들이 한 명 있는데, 만약 오빠가 없다면 저 역시 조카를 거둘 것 같아 그 말에 공감했어요. 이런 과정에서 역할에 대한 믿음이 생겼고, 배역에 몰입하는 속도가 나더라고요.
또 순천댁은 정상적인 기관을 갖고 있다가 농약을 마셔서 성대가 쪼그라든 설정이잖아요. 이럴 경우 어떤 음색이 나올지 고민했어요. 관객들이 보고 배역에 공감하며 믿을 수 있도록 섬세하게 만들어가는 게 관건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어렵게 목소리를 내뱉는 장면들이 있는데 동시와 후시녹음을 섞었어요.
대사 없이 대부분 행동과 표정으로 감정을 전달해야 했는데 어렵지 않았나요.
감독님과 “과하지 말자”고 자주 얘기했어요. 그게 핵심 포인트였죠. 또 순천댁은 남의 말을 듣고 답을 글로 써서 하거든요. 그러다 보니 표정이 과해지는 부분이 자연스럽게 없어지더라고요.
필담이 많이 나오던데 왼손으로 쓰시더라고요.
오른손잡이인데 왼손으로 썼어요. 제가 필체가 예쁜 편이라 그걸 뭉개고 서툴게 보였으면 했거든요. 순천댁이 어느 정도의 교육을 받았을까 등 그 배경에 대해 생각하다가 시골에 가면 엄마가 ‘밥 먹어’라고 써놓은 것 같은 정감 어린 필체가 어울릴 듯했어요. 글자 중 어느 부분을 틀리고 받침을 놓칠지도 세심하게 고민했고요. 또 극 중에서 혜수 씨와 나누는 필담을 보면 꼭 존대를 하잖아요.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남을 대하는 방식을 그렇게 표현한 듯해요.
이정은은 영화에서 사고로 목소리를 잃은 섬마을 주민 순천댁 역을 맡아 대사 없이 표정과 몸짓으로 연기한다.
제 얼굴이 뚱한 편이에요. 큰 표정이 없다고 얘기하는 분들도 있고요. 노멀하게 생긴 얼굴이 씩 웃거나 감정을 표현하면 의외로 파장이 크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는 너무 애정을 주는 엄마나 이모로 저를 규정해서 보실까 봐 부담스러워요(웃음). 사람들하고 있을 때면 장난꾸러기 같은 성격이고, 표현을 잘 못 하기도 하거든요.
순천댁은 아무 연고도 없는 소녀 세진에게 따뜻하게 손을 내밀잖아요. 영화를 보면서 진정한 어른이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저는 쉰 살이 넘었는데도 아직 어린 것 같아요(웃음). 좋은 역할들을 많이 만나 이미지가 괜찮을 수 있지만 사실 제 나이에 비해 철딱서니도 없거든요. 제가 사람들에게 애정을 많이 베풀고 사는지 질문하게 돼요. 10여 년 전에 연기를 가르칠 때 당시 제자들을 보며 ‘어떤 고민의 타이밍이 맞아야 그 이야기가 수긍이 되는 것처럼, 그들과 타이밍이 맞아야 나도 어른을 배우고 당사자도 성장한다’고 생각하곤 했어요. 어른을 준비한다고 어른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다만 누군가 나에게 도움을 줬으면 좋았을 순간에 그것을 받지 못했다면, 그때를 떠올리며 손길을 내밀려고 해요. 도움이 필요한 순간을 보는 것 역시 어른의 능력인 것 같아요.
이정은 배우에게 드라마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을 함께했던 故 김영애 선생님이 ‘진정한 어른’ 같은 존재였을 듯해요.
훌륭한 선배들과 연기하는 일은 후배들 입장에서 좋은 경험이에요. 저 역시 이런 경험이 저를 지탱하는 큰 힘이 되고 있고요. 제가 일본에 일이 있어 가는 바람에 선생님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어요. 일본에 가기 전 찾아뵙는데 다 아시는 듯 잘하라고 하시더라고요. 평소 선생님은 “정은이 너는 약간 몽상가니 돈도 생각해라. 작품을 많이 하고, 부를 때마다 거절하지 마라” 말씀하시곤 했어요. 선생님이 돌아가신 뒤 정말 그 말씀처럼 지냈는데, 자연스럽게 운도 잘 따라주더라고요. 결국 사람운으로 지탱하는 것 같아요.
세진에게 친절을 베푸는 순천댁처럼 그런 친절을 베풀거나 받았던 적이 있나요.
선배님들과 작업할 때 제가 경험이 부족하다 보니 촬영 현장에서 말문이 막힐 때가 있었어요. 이럴 때마다 선배님들이 “시간을 줘라. 잘할 수 있다”고 격려하며 커버를 많이 해주셨어요. 저 역시 요즘 현장에서 후배들을 만날 때면 그대로 하게 돼요. 자기 기운이 충분한 친구들은 두려움 없이 잘하지만, 사실 신인일 때는 그게 쉽지 않거든요. 여유 있게 봐줄 수 있는 선배 입장을 많이 배웠고, 후배들이 능력을 잘 발휘하도록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주려고 노력해요.
요즘 가장 바쁜 여배우 중 한 명이잖아요.
여러 군데서 찾아주시는 게 감사하고 좋아요. 운이 좋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기생충’ 이후에 많은 주목을 받으니 부담이 되는 순간들도 있더라고요. 요즘에는 극의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하는 역할을 많이 제의해주세요(웃음).
공연계가 참 힘든 시기인데 연극이나 뮤지컬 계획은 없으세요.
내년까지 작품들이 예정되어 있어서 우선은 공연을 못 할 듯해요. 하지만 저는 ‘연극배우’라는 호칭을 너무 좋아해요. 왠지 있어 보이고 약간 문학적인 느낌도 들지 않나요(웃음). 공연계에 도움이 되도록 작품들과 관련된 홍보나 언론 노출에는 적극적으로 나서려고 해요.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한 번 다녀왔습니다’도 큰 인기를 모았어요. 극 중 이필모 씨와의 러브 라인도 화제였는데 일상은 어떠세요.
어디선가 얘기한 적이 있는데 제가 그렇게 눈이 좋지 않아요(웃음). 연애를 하면 너무 잘 빠져서 일을 안 하고요. 지금은 에너지가 분산되는 것보다 일에 매진하는 게 필요한 시기인 듯합니다. 좋은 사람을 만난다면 예전처럼 풍덩 빠지는 연애가 아닌, 서로 격려해주고 북돋워주는 친구 같은 사이를 꿈꿔요.
앞으로 도전해보고 싶은 연기는요.
연극할 때를 제외하고는 지금껏 대체적으로 센 역할을 많이 해온 것 같아요. 앞으로는 평범하면서 잔잔한 역할에 도전해보고 싶어요. 이런 역들은 얼핏 보면 단순하고 쉽게 느껴지지만 진중하게 유지하는 게 어렵거든요.
이번 작품을 통해 관객들이 어떤 점을 얻었으면 하나요.
삶의 이면에는 말하지 못하는 고통들이 있는데, 잘 봐야 알 수 있으니 여유를 갖고 상대방을 이해했으면 해요. 요즘 우리 삶을 돌아보면 너무 각박하지 않나요. 신문 기사만 보더라도 절망하는 사람들의 아우성이 많은데, 단순히 글로만 소비하지 말고 그 이면을 많이 봐줬으면 해요.
사진제공 워너브러더스코리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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