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트에 청바지, 하이톱 운동화 차림으로 등장한 배우는 바닥을 딛고 폴짝 뛰어 공중을 가르는 역동적인 자세를 연출한다. 거울 좀 보라는 스태프의 권유를 “괜찮다”고 일축한 뒤엔 바닥에 누워 두 다리를 들어 올리는 과감한 포즈도 선보인다. 소품으로 준비된 가면을 들고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어가며 연신 장난을 치는 모습에선 턱시도를 차려입고 곧은 자세로 노래하던 황태자의 자태는 온데간데없다.
2002년 크로스오버 테너로 데뷔한 임태경(45)은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모차르트!’ ‘몬테크리스토’ ‘베르테르’ ‘황태자 루돌프’ 등 굵직한 작품에 연이어 출연하며 ‘뮤지컬계의 황태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이 오래된 수식은 비단 그가 뛰어난 실력자라는 데서만 연유한 게 아니다. 그에게서 풍기는 귀족적인 면모도 한몫한다. 무엇이 진짜 그의 모습인지 묻는 기자의 질문에 들떴던 목소리는 공기 중에 낮게 깔렸고 장난스러운 표정은 자못 진지하게 바뀌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보다는 그 상황이 중요하다고 봐요. 진짜 성격이 어떻든 간에 그 상황에 맞게 행동하려고 해요. 사진 촬영을 할 때는 좀 더 밝게, 인터뷰는 진중하게 하죠.”
뮤지컬 ‘팬텀’의 첫 공연(12월 1일)을 앞두고 만난 임태경은 요즘 작품 속 주인공 팬텀(에릭)처럼 살고 있다고 했다. ‘팬텀’은 세계적인 추리 소설가 가스통 르루의 대표작 ‘오페라의 유령’을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같은 원작 소설을 공유하는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과는 다르게 감춰져 있던 에릭의 유년 시절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며 한 캐릭터에 온전히 집중한다. 임태경이 상황에 따라 모습을 변화시키는 건 이 같은 작품의 영향일지도 모르겠다. 배우가 풀어낸 팬텀은 하나의 모습으로 정의할 수 없는 다양한 색을 가진 인물이기 때문. 그는 이걸 ‘다중인격’이라고 표현했다.
“저는 작품 속 인물이 가지고 있는 성향 가운데 저와 비슷한 부분을 찾아서 그걸 증폭시키는 방식으로 캐릭터에 동화돼요. 그런데 팬텀은 난해한 거예요. 천재적인 예술성을 지니고 있지만 얼굴이 망가진 채 오페라 극장 지하에 숨어 사는, 사회성이 전혀 없는 인물이잖아요. 실제 경험하기 어려운 삶이죠. 그래서 이야기의 실제 무대 배경이 된 파리 오페라 극장(오페라 가르니에)에 다녀왔어요. 그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공간에 들어선 순간 마치 내 집인 것처럼 편안하게 느껴지고 거기서 살고 싶단 생각마저 들더군요. ‘에릭은 숨어서 오페라 공연을 보며 세상의 모습을 상상하지 않았을까. 그럼 이 인물은 작품 속에 다양한 캐릭터가 존재하는 만큼 다양한 사고를 하고 다양한 색깔의 움직임을 가지고 있었겠다’ 추측했죠. 다시 말해 다중인격적인 면모가 다분했겠다 싶은 거예요. 사실 어떤 게 자기 인격인 줄도 모르면서요. 그래서 저도 요즘 ‘다중이’가 되는 게 아닐까 생각하기도 해요(웃음).”
“노래 연습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에요. 목의 피로도 문제도 있지만 너무 연습을 많이 하면 실제 무대에서 습관처럼 노래를 하게 될까 염려돼서요. 모든 공연을 마치 처음인 것처럼 느끼고, 이 감정을 관객에게 그대로 전달하고 싶어요. 사실 큰 욕심이죠. 기술적으로는 늘 준비돼 있어야 하는 거니까요. 연습이라는 게 소리를 안 낼 뿐이지, 그 정서를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노래 외적인 부분에 늘 신경을 쓰고 있어요. 악기를 조율하듯 제 몸과 정신을 광이 나게 닦아놓는 거죠.”
이처럼 그가 무대 위의 자연스러움을 강조하게 된 데는 드라마 출연의 영향도 있다. 임태경은 올해 초 방영된 jtbc 드라마 ‘미스티’에서 사랑하는 여인 고혜란(김남주)을 위해 살인을 저지르고 감옥에 들어가는 하명우 역을 맡았다. 뮤지컬은 필연이었지만 노래 없이 연기만을 선보여야 하는 드라마는 그에게도, 시청자에게도 처음엔 낯섦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대사가 적음에도 강렬한 눈빛과 절제된 감정 연기로 극 중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연출해내면서 그의 연기는 호평을 받았다. 그는 이제 드라마를 통해 깨달은 연기 철학을 뮤지컬까지 옮겨오겠단 포부마저 갖게 됐다.
“대개 뮤지컬은 큰 무대에서 선보이기 때문에 과장된 몸짓과 표정으로 연기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는데, 그런 고정관념을 깨야 해요. 저도 초기엔 ‘뮤지컬은 각이 생명이야’라고 생각했는데 한 단계만 더 들어가 보면 모든 연기는 진정성에서 비롯돼요. 자연스러움에 대한 미학이죠. 예를 들어 사람이 가득한 길거리에서 개개인은 눈에 띄지 않을 것 같지만 한 명 한 명에게 집중하면 알 수 있어요. ‘아, 저 사람은 회사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구나’ ‘저 사람은 데이트를 앞두고 기분이 좋구나’ 하고요. ‘미스티’에서는 속을 알 수 없는 남자처럼 보여야 해서, 이게 연기를 하는 건가 싶을 정도로 절제했죠. 처음엔 이런 모습이 시청자들에게 어필이 될까 고민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론 옳은 판단이었어요. 무대 연기 역시 굳이 과장하지 않아도 관객들은 다 알아요. 드라마 이후에 변화할 뮤지컬 속의 제 연기가 저조차 기대돼요.”
임태경은 마음에 없는 말을 못 하고, 싫은 일을 억지로 하지 못하는 성격이라고 스스로를 설명했다. 스위스의 명문 사립고 르로제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대학과 대학원에서 공학을 전공했던 독특한 이력에 대해 혹자들은 부모의 뜻이었으리라 추측하지만 그는 “공학이 너무 재미있고 궁금했다”라며 한껏 달뜬 얼굴을 내보였다. 그런 그에게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모든 걸 바치는 다소 비현실적인 하명우라는 인물은 충분히 납득 가능한, 일종의 자신의 페르소나(분신)였기에 가보지 않은 길에 발을 내디딜 수 있었다.
“‘미스티’의 제인 작가가 하명우 역할만 캐스팅을 못 했는데 지난해 제가 나온 뮤지컬 ‘나폴레옹’을 보고 ‘임태경이다!’ 싶었다더군요. 처음엔 출연을 거절했는데 작가가 묻지도 않은 배역에 대해 자꾸 설명해주는 거예요. 저도 모르게 캐릭터에 빠져들었죠(웃음). 작가가 말하는 하명우는 여성들의 판타지 속에서만 존재하는 남자였죠. 자신을 위해 모든 걸 해줄 수 있을 것 같은. 그런데 저는 이 비현실적인 캐릭터가 아주 이해가 되는 거예요. 과연 내가 하명우라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살인까지 저지를 수 있을까? 완전히 고개가 끄덕여졌어요. 제 꿈이 평생 한 여자만 만나서 해로하는 거였거든요. 그래서 첫 여자 친구도 늦은 나이에 사귀었어요. 또 어릴 때부터 친구들을 괴롭히는 사람이 있으면 얼굴을 붉히면서 앙갚음을 해줬어요. 주변에서는 절대 안 그렇게 생겼는데 정말 다른 모습이라고들 했죠.”
“예전에는 저로 인해 누군가 행복해하는 게 나의 행복이라고 착각했어요. 그래서 늘 관객들이 행복할 수 있는, 완벽한 무대를 선보여야 한다는 의무감에 지나치게 매몰됐죠. 스태프들에게는 무대 세트에 결함이 있는데 왜 고치지 않느냐고 따지고, 동료 배우에게까지 왜 최선을 다하지 않느냐며 힐난했어요. 지나치게 잘하려고만 하는 모습을 보고 진이 빠진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였고요. 즐기지 못하니 무대에 서는 게 행복하지 않았어요. 그럼에도 다시 뮤지컬을 하게 된 이유는 작품을 하면서 저도 좀 행복해지고 싶어서예요. 지금은 연기도 노래도 재미있어요. ‘팬텀’이라면 저와 관객이 함께 행복할 수 있는 작품이라는 확신이 들어요.”
그의 ‘행복론’은 단순하다. 그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오늘을 위해 오늘을 사는 것이다. 생각의 이정표를 교체한 뒤 그를 보는 세간의 시선도 달라졌다.
“인터넷에 누군가 ‘임태경이 저렇게 자유인 같은 느낌이었나?’라고 쓴 글을 봤어요. 정말 제가 변하긴 한 것 같아요. 한 치 앞을 모르는 세상이잖아요. 사건 사고도 많고. 친구들 부모님도 한 분 두 분 돌아가시고, 몇몇 친구들마저 세상을 떠났어요. ‘이건 나중에 해야지’ 하면 그 나중은 영영 안 올 수도 있어요. 오늘을 위해 오늘을 살고, 하고 싶은 건 꼭 할 거예요.”
올해로 데뷔 16주년을 맞이한 임태경은 그간 희로애락을 함께한 팬들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팬들은 오래전부터 사회복지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고 자선 활동을 활발히 해온 그를 따라 매년 자발적으로 수천만원을 모아 기부를 할 만큼 그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다. 그를 향한 팬들의 사랑은 동시에 임태경을 움직이는 동력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으로서 제 철학을 잘 말씀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저를 따라 팬들도 변했죠. 하지만 그 때문에 팬들이 맘고생도 많이 했어요. 좋은 일을 하면 ‘천사 코스프레’ 한다고 욕을 먹기도 하고, 팬들을 동원한다고 ‘교주’ 같단 얘기도 들었죠. 팬들이 저로 인해 행복하기만 했으면 좋겠는데 안 좋은 영향까지 너무 많이 받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마음 아파하면 그걸 보고 또 팬들이 속상해하는 악순환인 거예요. 그러다 어느 순간 나부터 행복해야 팬들도 행복해한다는 걸 깨달았죠. 지금은 스스로 더 행복하려 애쓰고 있어요.”
늦은 저녁 인터뷰가 끝난 뒤 임태경은 기자와 함께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클래식을 듣고 자란 포도가 더 맛있다”며 조곤조곤한 어조로 이야기하는 그는 그저 편한 친구일 따름이었다.
기획 이한경 기자 사진 조영철 기자 디자인 김영화
2002년 크로스오버 테너로 데뷔한 임태경(45)은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모차르트!’ ‘몬테크리스토’ ‘베르테르’ ‘황태자 루돌프’ 등 굵직한 작품에 연이어 출연하며 ‘뮤지컬계의 황태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이 오래된 수식은 비단 그가 뛰어난 실력자라는 데서만 연유한 게 아니다. 그에게서 풍기는 귀족적인 면모도 한몫한다. 무엇이 진짜 그의 모습인지 묻는 기자의 질문에 들떴던 목소리는 공기 중에 낮게 깔렸고 장난스러운 표정은 자못 진지하게 바뀌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보다는 그 상황이 중요하다고 봐요. 진짜 성격이 어떻든 간에 그 상황에 맞게 행동하려고 해요. 사진 촬영을 할 때는 좀 더 밝게, 인터뷰는 진중하게 하죠.”
뮤지컬 ‘팬텀’의 첫 공연(12월 1일)을 앞두고 만난 임태경은 요즘 작품 속 주인공 팬텀(에릭)처럼 살고 있다고 했다. ‘팬텀’은 세계적인 추리 소설가 가스통 르루의 대표작 ‘오페라의 유령’을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같은 원작 소설을 공유하는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과는 다르게 감춰져 있던 에릭의 유년 시절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며 한 캐릭터에 온전히 집중한다. 임태경이 상황에 따라 모습을 변화시키는 건 이 같은 작품의 영향일지도 모르겠다. 배우가 풀어낸 팬텀은 하나의 모습으로 정의할 수 없는 다양한 색을 가진 인물이기 때문. 그는 이걸 ‘다중인격’이라고 표현했다.
“저는 작품 속 인물이 가지고 있는 성향 가운데 저와 비슷한 부분을 찾아서 그걸 증폭시키는 방식으로 캐릭터에 동화돼요. 그런데 팬텀은 난해한 거예요. 천재적인 예술성을 지니고 있지만 얼굴이 망가진 채 오페라 극장 지하에 숨어 사는, 사회성이 전혀 없는 인물이잖아요. 실제 경험하기 어려운 삶이죠. 그래서 이야기의 실제 무대 배경이 된 파리 오페라 극장(오페라 가르니에)에 다녀왔어요. 그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공간에 들어선 순간 마치 내 집인 것처럼 편안하게 느껴지고 거기서 살고 싶단 생각마저 들더군요. ‘에릭은 숨어서 오페라 공연을 보며 세상의 모습을 상상하지 않았을까. 그럼 이 인물은 작품 속에 다양한 캐릭터가 존재하는 만큼 다양한 사고를 하고 다양한 색깔의 움직임을 가지고 있었겠다’ 추측했죠. 다시 말해 다중인격적인 면모가 다분했겠다 싶은 거예요. 사실 어떤 게 자기 인격인 줄도 모르면서요. 그래서 저도 요즘 ‘다중이’가 되는 게 아닐까 생각하기도 해요(웃음).”
절제된 연기를 배운 드라마 ‘미스티’ 출연
‘팬텀’은 오페라 극장을 배경으로 하는 만큼 뮤지컬 음악들은 모두 정통 클래식으로 꾸며졌다. 처음 출연하는 작품임에도 제 옷인 양 ‘테너’ 임태경에게 맞춤인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넘버가 고난도 성악 발성을 필요로 하는 만큼 배우들의 연습은 더 혹독하리라. 그러나 돌아온 답변은 의외의 것이었다.“노래 연습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에요. 목의 피로도 문제도 있지만 너무 연습을 많이 하면 실제 무대에서 습관처럼 노래를 하게 될까 염려돼서요. 모든 공연을 마치 처음인 것처럼 느끼고, 이 감정을 관객에게 그대로 전달하고 싶어요. 사실 큰 욕심이죠. 기술적으로는 늘 준비돼 있어야 하는 거니까요. 연습이라는 게 소리를 안 낼 뿐이지, 그 정서를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노래 외적인 부분에 늘 신경을 쓰고 있어요. 악기를 조율하듯 제 몸과 정신을 광이 나게 닦아놓는 거죠.”
이처럼 그가 무대 위의 자연스러움을 강조하게 된 데는 드라마 출연의 영향도 있다. 임태경은 올해 초 방영된 jtbc 드라마 ‘미스티’에서 사랑하는 여인 고혜란(김남주)을 위해 살인을 저지르고 감옥에 들어가는 하명우 역을 맡았다. 뮤지컬은 필연이었지만 노래 없이 연기만을 선보여야 하는 드라마는 그에게도, 시청자에게도 처음엔 낯섦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대사가 적음에도 강렬한 눈빛과 절제된 감정 연기로 극 중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연출해내면서 그의 연기는 호평을 받았다. 그는 이제 드라마를 통해 깨달은 연기 철학을 뮤지컬까지 옮겨오겠단 포부마저 갖게 됐다.
“대개 뮤지컬은 큰 무대에서 선보이기 때문에 과장된 몸짓과 표정으로 연기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는데, 그런 고정관념을 깨야 해요. 저도 초기엔 ‘뮤지컬은 각이 생명이야’라고 생각했는데 한 단계만 더 들어가 보면 모든 연기는 진정성에서 비롯돼요. 자연스러움에 대한 미학이죠. 예를 들어 사람이 가득한 길거리에서 개개인은 눈에 띄지 않을 것 같지만 한 명 한 명에게 집중하면 알 수 있어요. ‘아, 저 사람은 회사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구나’ ‘저 사람은 데이트를 앞두고 기분이 좋구나’ 하고요. ‘미스티’에서는 속을 알 수 없는 남자처럼 보여야 해서, 이게 연기를 하는 건가 싶을 정도로 절제했죠. 처음엔 이런 모습이 시청자들에게 어필이 될까 고민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론 옳은 판단이었어요. 무대 연기 역시 굳이 과장하지 않아도 관객들은 다 알아요. 드라마 이후에 변화할 뮤지컬 속의 제 연기가 저조차 기대돼요.”
임태경은 마음에 없는 말을 못 하고, 싫은 일을 억지로 하지 못하는 성격이라고 스스로를 설명했다. 스위스의 명문 사립고 르로제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대학과 대학원에서 공학을 전공했던 독특한 이력에 대해 혹자들은 부모의 뜻이었으리라 추측하지만 그는 “공학이 너무 재미있고 궁금했다”라며 한껏 달뜬 얼굴을 내보였다. 그런 그에게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모든 걸 바치는 다소 비현실적인 하명우라는 인물은 충분히 납득 가능한, 일종의 자신의 페르소나(분신)였기에 가보지 않은 길에 발을 내디딜 수 있었다.
“‘미스티’의 제인 작가가 하명우 역할만 캐스팅을 못 했는데 지난해 제가 나온 뮤지컬 ‘나폴레옹’을 보고 ‘임태경이다!’ 싶었다더군요. 처음엔 출연을 거절했는데 작가가 묻지도 않은 배역에 대해 자꾸 설명해주는 거예요. 저도 모르게 캐릭터에 빠져들었죠(웃음). 작가가 말하는 하명우는 여성들의 판타지 속에서만 존재하는 남자였죠. 자신을 위해 모든 걸 해줄 수 있을 것 같은. 그런데 저는 이 비현실적인 캐릭터가 아주 이해가 되는 거예요. 과연 내가 하명우라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살인까지 저지를 수 있을까? 완전히 고개가 끄덕여졌어요. 제 꿈이 평생 한 여자만 만나서 해로하는 거였거든요. 그래서 첫 여자 친구도 늦은 나이에 사귀었어요. 또 어릴 때부터 친구들을 괴롭히는 사람이 있으면 얼굴을 붉히면서 앙갚음을 해줬어요. 주변에서는 절대 안 그렇게 생겼는데 정말 다른 모습이라고들 했죠.”
무대를 떠나 있던 2년 동안 찾아온 변화
그는 최근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일일 DJ로 출연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최종 목표는 사회복지를 위해 일하는 것이었는데, 아주 오만한 생각이었다”라고 말했다. 뮤지컬 배우의 최종 목표가 사회복지라는 것도 꽤나 낯설지만, 선행을 목표로 하면서 스스로를 오만하다고 하는 이유는 뭘까. 거기엔 타인의 행복을 책임지겠단 이가 정작 자신의 행복을 담보하지 못한 데 대한 자책이 있다. 그는 완벽한 무대를 보여줘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혀 스스로 행복에서 멀어졌다고 했다. 급기야 2015년에는 더 이상 뮤지컬을 하지 않겠다고 ‘보이콧’하기도 했다. 그렇게 2년 넘는 성찰의 시간을 보내고 지난해 다시 무대로 돌아올 수 있었다.“예전에는 저로 인해 누군가 행복해하는 게 나의 행복이라고 착각했어요. 그래서 늘 관객들이 행복할 수 있는, 완벽한 무대를 선보여야 한다는 의무감에 지나치게 매몰됐죠. 스태프들에게는 무대 세트에 결함이 있는데 왜 고치지 않느냐고 따지고, 동료 배우에게까지 왜 최선을 다하지 않느냐며 힐난했어요. 지나치게 잘하려고만 하는 모습을 보고 진이 빠진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였고요. 즐기지 못하니 무대에 서는 게 행복하지 않았어요. 그럼에도 다시 뮤지컬을 하게 된 이유는 작품을 하면서 저도 좀 행복해지고 싶어서예요. 지금은 연기도 노래도 재미있어요. ‘팬텀’이라면 저와 관객이 함께 행복할 수 있는 작품이라는 확신이 들어요.”
그의 ‘행복론’은 단순하다. 그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오늘을 위해 오늘을 사는 것이다. 생각의 이정표를 교체한 뒤 그를 보는 세간의 시선도 달라졌다.
“인터넷에 누군가 ‘임태경이 저렇게 자유인 같은 느낌이었나?’라고 쓴 글을 봤어요. 정말 제가 변하긴 한 것 같아요. 한 치 앞을 모르는 세상이잖아요. 사건 사고도 많고. 친구들 부모님도 한 분 두 분 돌아가시고, 몇몇 친구들마저 세상을 떠났어요. ‘이건 나중에 해야지’ 하면 그 나중은 영영 안 올 수도 있어요. 오늘을 위해 오늘을 살고, 하고 싶은 건 꼭 할 거예요.”
올해로 데뷔 16주년을 맞이한 임태경은 그간 희로애락을 함께한 팬들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팬들은 오래전부터 사회복지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고 자선 활동을 활발히 해온 그를 따라 매년 자발적으로 수천만원을 모아 기부를 할 만큼 그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다. 그를 향한 팬들의 사랑은 동시에 임태경을 움직이는 동력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으로서 제 철학을 잘 말씀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저를 따라 팬들도 변했죠. 하지만 그 때문에 팬들이 맘고생도 많이 했어요. 좋은 일을 하면 ‘천사 코스프레’ 한다고 욕을 먹기도 하고, 팬들을 동원한다고 ‘교주’ 같단 얘기도 들었죠. 팬들이 저로 인해 행복하기만 했으면 좋겠는데 안 좋은 영향까지 너무 많이 받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마음 아파하면 그걸 보고 또 팬들이 속상해하는 악순환인 거예요. 그러다 어느 순간 나부터 행복해야 팬들도 행복해한다는 걸 깨달았죠. 지금은 스스로 더 행복하려 애쓰고 있어요.”
늦은 저녁 인터뷰가 끝난 뒤 임태경은 기자와 함께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클래식을 듣고 자란 포도가 더 맛있다”며 조곤조곤한 어조로 이야기하는 그는 그저 편한 친구일 따름이었다.
기획 이한경 기자 사진 조영철 기자 디자인 김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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