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기획안이 돌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제가 먼저 해보고 싶다고 했어요. 개인적으로 이 또래 아이들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싶기도 하고, 교육 현장의 살아 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고현정(42)은 다작을 하지 않는 배우다. 2~3년 한 번 출연하는 작품에서는 강력계 형사(히트), 팜파탈(선덕여왕), 대통령(대물) 등 범접하기 힘든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을 주로 연기했다. 3년 만의 컴백작으로 ‘여왕의 교실’을 선택한 이유 역시 여왕이라는 제목과 캐릭터가 주는 무게감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고현정은 “이 또래 아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어서”라는 뜻밖의 이유를 댔다. “내가 (아이들의 세계를) 직접 느낄 수 있는 방법은 드라마밖에…”라며 말꼬리를 흐리는 그의 모습에서 화려한 연예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는 스타, 그리고 여장부라는 단단한 이미지 뒤에 가려진 엄마 고현정이 보였다. 언제나 쿨하고 강해 보였지만 아이들 이야기를 하는 대목에서만큼은 누구보다 여리고 애틋한 그다.
자녀들과 비슷한 또래 아역 배우들과 호흡하며 그리움 달래
‘여왕의 교실’은 초등학교 6학년 교실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교육 드라마다. 고현정은 까다롭고 차가운 성격의 여교사 마여진 역을 맡았다. 학생으로 출연하는 서신애(15), 이영유(15), 김새론(13), 김향기(13), 천보근(11) 등 아역 배우들이 모두 그의 자녀와 비슷한 또래다. 고현정은 전 남편인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과의 사이에 아들(15), 딸(13) 남매를 두고 있다.
두 사람은 2003년 8년 만에 결혼 생활을 마감했는데, 고현정은 이혼 당시 정 부회장 측과 아이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만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현정의 자녀들은 현재 미국에서 유학 중인데, 아들은 서울에서 초등학교에 다닐 때 전교 어린이 회장을 하는 등 리더십이 있고, 딸은 피아노 등 예술 분야에 재능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고현정은 그동안 공식석상에서 여러 차례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을 언급한 적이 있다. 한 인터뷰에서는 “쉴 틈 없이 바쁘게 지내고 싶다. 만일 조금이라도 여유가 생기면 아이들이 생각나 미칠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연예계 절친인 김제동과의 인터뷰에서는 “아이들에게 항상 죄스러운 마음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 또한 그 아이들이 감내해야 할 인생이다. 그 아이들은 나를 포기하는 대신 다른 아이들보다 많은 것을 누리고 있지 않나. 다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TV 속에서 멋진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그뿐이다. 그것을 통해 아이들이 조금이나마 엄마를 기억하고 추억해주면 좋겠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그래서였을까. 고현정은 2009년 ‘선덕여왕’으로 MBC 연기대상을 수상한 후 “아이들이 보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해 보는 이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극 중 6학년 3반 담임 마여진은 초등학생들에게 순수함이나 희망의 메시지 대신 현실 세계의 냉혹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1등이 특혜를 누리는 것은 당연하다며 꼴찌에게 학급의 온갖 허드렛일을 시키고, 행동에 개선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학생에게는 “변하지도 않을 것이면서 잘못했다고 하지 말라”며 아이들의 마음을 후벼 파낸다. 앞으로 닥칠 현실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고 말하면서 마 선생은 어른들의 세계, 즉 현실을 교실에 옮겨놓고 현실의 법칙으로 아이들을 교육한다. 물론 극 초반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마여진이 냉혹한 교사가 된 데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 보인다. 정리해고 대상이 될 바에야 스스로 회사를 선택해 옮겨다니는 쪽을 선택한 ‘직장의 신’의 미스 김처럼. 하지만 교육적 측면에서 보면 논란이 되는 캐릭터다. 고현정도 그 점을 인정했다.
“마여진 선생은 안에서부터 아이를 엄하게 가르쳐야 나중에 사회에 나갔을 때 면역력이 생겨 잘 적응하고, 민폐도 끼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죠. 그리고 내 아이는 남이 뭐라고 하기 전에 내가 먼저 반듯하게 교육시켜야 하는 건 당연한 얘기기도 하고요. 하지만 만약 제가 학부모로서 마여진 같은 선생님을 만났더라면 많이 부딪혔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학부모는 자신의 아이 위주로 생각하게 마련이니까요. 시험 시간이라고 화장실에도 못 가게 한다거나 꼴찌라고 낙인을 찍거나 하는 건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이 아니잖아요.”
고현정도 아이들과 함께 지낼 때는 상류층이 선호하는 강남 영어 학원과 영어 유치원을 찾아다니는 열혈 엄마였다. 하지만 여배우로서 여느 엄마들처럼 아이들을 키우는 소소한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대신, 정보를 찾아 학원가를 누비고 입시 전쟁까지 치러야 하는 치열한 교육 현실에서도 비껴나 살았다. 그 덕분에 교육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눈을 갖게 됐다.
고현정은 드라마를 시작하면 늘 대본을 가지고 다닌다. 그의 대본은 빽빽한 메모와 빨간 밑줄이 가득하다.
“우리나라 부모들은 아이들을 쥐고 흔들려는 경향이 있는 데, 그보다는 아이들을 존중해주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살아보니 결국 나는 나고, 아이는 아이더라고요. 아이의 삶을 평생 대신 살아줄 수 없다면 스스로 자신의 일을 결정하고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게끔 지켜봐주는 게 좋지 않을까 해요. 부모는 그저 아이들이 언제든 의지할 수 있는 울타리 정도만 돼주고요.”
학창 시절엔 주눅 들어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해
고현정의 매력은 늘 당당하다는 점이다. 재벌가 며느리였다는 꼬리표를 떼더라도, 화통한 성격에 거침없는 언변, 큰 키와 몸매에서 뿜어져 나오는 특유의 아우라가 어떤 자리에서든 그를 돋보이게 한다. 하지만 고현정이 기억하는 학창 시절 자신의 모습은 늘 주눅 들어 있는 아이였다고 한다.
“그때는 지금과 달리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데다 발육 상태가 기이해서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어요. 지금 이 키가 중학교 1학년 때 키여서 친구들이 ‘쟤는 사실 스무 살이래’라고 수군거리기도 했어요(웃음). 그런 소문도 싫었지만 저 자신이 부끄럽고 창피해서 먼저 마음의 문을 닫았던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 이날따라 청색 계열의 품이 넉넉한 원피스를 입은 고현정이 유난히 커 보인다 싶다. 그 자신도 드라마 하이라이트 영상을 보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이 “살을 빼야겠다는 것”이었다며 껄껄 웃었다. 여배우는 날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거나 예뻐 보이고 싶어서가 아니라 캐릭터를 잘 소화하기 위해서란다.
“이번 드라마를 하면서 중점을 두는 건 두 가지예요. 대사 분량이 많고 집중을 해야 하니까 깔끔한 정신 상태를 유지하는 것, 그리고 감독님이 요구한 게 섹시함이 묻어나는 선생님이었어요(웃음). 그런데 촬영분을 보니 제 모습이 섹시와는 좀 거리가 있는 것 같네요…(웃음). 엄격하고 히스테리컬한 선생님이 토실토실하게 살이 찌면 시청자들이 보기에도 몰입도가 떨어지지 않을까 싶어요. 마 선생의 날카로운 성격을 대사나 눈빛으로만 표현할 게 아니라 몸에서도 날렵함이 묻어나도록 다이어트를 해야겠어요.”
고현정과의 인터뷰는 그의 살빼기 선언으로 마무리됐다. 하지만 굳이 그의 다이어트를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은 없다. 몸매와 상관없이 매력적인 여배우, 그 어떤 가십이나 시선에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게 버텨줬으면 하는 여배우, 그가 바로 고현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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