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출신 연기자 심은진이 6월 12일 사진전을 열었다. 이날 그를 더욱 돋보이게 한 것은 화이트 컬러의 비대칭 리넨 드레스. 옷에 대한 찬사가 이어지자 심은진은 SNS에 ‘친한 언니’가 만들어준 것이라고 소개했다. ‘친한 언니’의 이름은 임세아(33·본명 임지현). 그는 카타르의 왕비 셰이카 모자 빈트 나세르 알미스네드(이하 셰이카 모자)의 지휘하에 7월 초 론칭 예정인 ‘카타르 럭셔리 그룹’ 소속 패션 브랜드 QELA의 모델리스트 겸 테크니컬 매니저다.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임씨는 디올·셀린·파코 라반 등 명품 브랜드에서 모델리스트로 활약했다.
모델리스트는 건축에 빗대면 설계사와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이다. 디자이너가 스케치를 해서 모델리스트에게 건네면 모델리스트는 인체에 맞게 볼륨을 만들고, 패턴(옷본)을 떠서 착장할 수 있는 옷을 만든다. 디자이너가 그린 평면 그림을 입체화하는 일이라고 보면 된다. 한국과 프랑스에서는 모델리스트, 미국에서는 패턴 디자이너라고 불린다.
6월 중순 출장차 한국에 들어온 임세아 씨를 만날 수 있었다. 이국적인 외모와 큰 키, 시원시원한 팔다리, 탄탄한 몸매가 예사롭지 않았다. 심은진이 어떻게 그 드레스를 입게 됐는지 물었다.
“은진이와는 오래전부터 친한 사이예요. 은진이가 개인적으로 뜻깊은 행사를 연다고 하기에 직접 디자인한 옷을 선물하고 싶었죠.”
발목 부상으로 춤 포기하고 디자인 공부
사진전 오프닝에서 함께한 심은진(오른쪽)과 임세아 씨. 심은진이 입은 드레스는 임씨가 디자인해 만든 옷이다.
모델리스트라는 직업도, 카타르라는 나라도 우리에겐 낯설기만 하다. 그는 어떻게 머나먼 중동 국가에서 모델리스트로 일하게 됐을까.
“파리에 있을 때 파코 라반 패턴실 실장으로 근무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카타르 쪽에서 ‘오트쿠튀르 브랜드를 새롭게 론칭하는 데 함께 일하자’고 연락을 해왔죠. 제가 파코 라반이 재론칭할 때 멤버인 것을 눈여겨 본 것 같아요. 프랑스 파리도 아니라 카타르라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끝에 지난해 8월 합류했어요. 같이 일하기로 하고 서류 작업을 하는데 카타르 측에서 여권을 보더니 ‘프랑스 여권은 없냐’고 묻더군요. 제가 프랑스인인 줄 알았대요(웃음).”
카타르는 에너지로 국부가 창출되는 나라이지만 자원 고갈에 대비해 다양한 사업을 모색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하마드 왕의 아내인 셰이카 모자가 명품 브랜드에 관심이 많아 ‘카타르 럭셔리 그룹’을 세우기로 했다.
“카타르 럭셔리 그룹은 음식과 패션 두 분야로 나뉘어요. 그중 오트쿠튀르 브랜드는 셰이카 모자가 직접 이름을 지었죠. 브랜드 이름은 ‘QELA’예요. 브랜드 론칭을 위해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날 왕비가 오셨어요. 회의실 가득 존재감을 드러내셨죠. 좀 더 가까이서 뵙고 싶었는데, 왕실 예법상 옷깃을 만져서도, 가까이에서 얼굴을 봐서도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QELA는 2013년 7월 카타르 도하에서 정식으로 론칭한 뒤 10월 말 프랑스 파리, 미국 뉴욕, 싱가포르, 영국 런던 등에 차례로 부티크를 오픈할 예정이라고 한다.
임씨의 명함에 인쇄돼 있는 직함은 쿠튀르 테크니컬 매니저.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을 ‘컨설턴트’와 비슷하다고 소개했다.
“패턴실과 디자인실 간 소통을 돕는 일이에요. 모델리스트가 스케치를 보고 대번에 디자이너가 원하는 모양을 만들어내기는 어려워요. 그럴 때 수석디자이너와 함께 상의하면서 기술적인 해결점을 찾는 역할이에요. 컬렉션이 부티크에 걸릴 때까지 옷의 디테일을 살리고, 부족한 점은 보완할 수 있도록 하죠. 그 외에도 트렌드에 대한 조언도 하고 있어요.”
현재 QELA에는 임씨 외에도 총 60명의 직원이 있다. 대부분이 프랑스인이고 미국인도 몇 명 있지만 한국인은 임씨 한 사람뿐이다. 여성에 대한 차별이 심한 이슬람 국가에서 혼자 지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일 터.
“많은 분이 카타르가 위험하지 않으냐고 물어보세요. 카타르는 다른 중동 국가에 비해 범죄나 테러 위험으로부터 안전한 편이에요. 하루는 제가 가방을 차 안에 깜빡하고 둔 채 회사에 갔어요. 설상가상으로 문도 안 잠그고 갔죠. 퇴근할 무렵에야 생각이 나서 급하게 차에 가봤더니 차키가 꽂혀 있는데 아무도 가방에 손을 안 댔더라고요. 부유한 나라여서인지 범죄가 거의 없어요. 카타르항공에서 일하는 한국인 승무원도 많고, 건설회사 주재원도 많아서 ‘나 혼자’라는 생각도 별로 안 들어요.”
모델리스트라는 직업도 그렇지만, 프랑스로 유학 가기 전까지 그의 이력이 독특하다. 1990년대 혼성듀오 ‘철이와 미애’의 미애가 만든 안무팀 ‘스위치’ 소속 댄서였고, DJ DOC의 ‘런 투 유’와 싸이 ‘챔피언’ 활동 당시 백댄서였다. 댄서라는 직업은 가수를 돋보이게 하는 조력자이고, 모델리스트는 디자이너를 돋보이게 한다. 전혀 상관 없지는 않은 셈이다.
“주변에 음악 하는 친구가 많았어요. 중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세 때 한국에 돌아왔는데 춤을 배우고 싶어서 연습실에 다니기 시작했죠. 그때 알게 된 분이 래퍼 윤희중 씨예요. 윤희중 씨가 저를 미애 씨에게 소개시켜준 덕분에 스위치 멤버가 됐죠.”
춤추는 게 좋았고, 제법 인정도 받았다. 하지만 갑자기 발목 부상을 당해 춤추는 일을 계속할 수 없었다.
“또래보다 1년 정도 늦게 대학에 입학해서 춤과 공부를 병행했어요. 그런데 졸업 무렵 발목을 다쳤죠. 다른 길을 찾아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앞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하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러다 떠올린 게 디자인이었다. 어릴 적부터 그는 이브 생 로랑의 컬렉션에 관심이 많았다. 이브 생 로랑 같은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는 열망이 순식간에 그를 지배했다. 하지만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정작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몰랐어요. 어릴 때부터 공부하던 것도 아니고, 대학에서 패션을 전공한 것도 아니라서 자신감이 없었죠. 지금 돌이켜보면 무모했지만 용기를 갖고 시작하기 잘한 것 같아요.”
프랑스에 대한 아련한 동경이 있어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한 임씨는 2005년 파리로 떠났다.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자신과 궁합이 잘 맞는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도착 직후 프랑스어를 배우던 임씨는 AICP가 신입생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친구로부터 전해 들었다. AICP는 모델리스트 전문 양성학교로 재단사 출신인 라데베즈(Ladeveze)가 1837년 설립한 유서 깊은 학교다. 그는 주저 없이 지원서를 냈고 입학허가를 받았다.
“처음에는 막연하게 패턴 디자인을 배워보고 싶어서 시작했어요. 그런데 AICP에서 공부를 하면서 점점 자신감이 생겼어요. 제 성격이랑 잘 맞았던 거죠. 제가 꼼꼼한 편이거든요. 무척 까다롭고요(웃음). 그런 사람들이 모델리스트에 제격이에요. 패턴을 그릴 때 1~2㎜만 차이가 나도 옷의 느낌이 달라지니 미세한 차이를 잘 잡아내야 하거든요.”
동경하던 도시에 가서 좋아하는 일을 찾았지만 그에게도 어려움이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언어였다.
“프랑스 사람들은 싸울 때 주먹으로 치고받는 게 아니라 말로 싸워요. 말을 못하면 상대에게 무시를 당하죠. 처음에는 프랑스어가 유창하지 못해서 고생을 많이 했어요. 자기네 말을 잘 못한다는 것을 알면 일부러 말도 안 되는 불이익을 주는 경우도 있거든요. 예를 들어 가게 점원이 거스름돈을 엉뚱하게 줘놓고 제가 항의하면 ‘뭐가 문제냐’면서 우기는 식이죠.”
다행히 학교를 졸업하고 일을 시작하면서 프랑스어가 능숙해진 뒤에는 억울한 일은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 외로움이 차올랐다. 모델리스트 생활은 너무 바쁘고, 쇼가 끝난 후 조금이나마 시간이 나 한국에 가려 해도 한국행 비행기 티켓은 너무 비쌌다. 가족이 보고 싶다고 한국을 찾는 것은 사치였다. 그는 한국생활과 친구들이 그리울 때면 검도로 스트레스를 풀거나 한국 드라마를 보며 마음을 달랬다.
한국인 최초 파코 라반 패턴실 실장이 되기까지
임세아 씨는 2006년부터 AICP에서 모델리스트 과정을 수료한 뒤 2008년 디올의 어시스턴트 모델리스트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 후 폴 카(Paule Ka)와 프랑크 소르비에(Frank Sorbie)의 오트쿠튀르를 거치며 경력을 차곡차곡 쌓았다.
다양한 브랜드에서 더 많은 경험을 하기 위해 2010년 셀린으로 자리를 옮긴 임씨는 이듬해 파코 라반 측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재론칭을 준비 중인데 패턴실 실장으로 와줄 수 있느냐는 파격적인 제의였다.
파코 라반은 1999년 마지막 컬렉션을 발표한 뒤 오트쿠튀르에서 잠정 은퇴한 브랜드였다. 12년 만인 2011년 새로운 오트쿠튀르 팀을 만들기로 하며 인재를 찾던 파코 라반 측에 임씨가 눈에 띈 것이다. 파코 라반은 전성기인 1960년대 플라스틱과 금속을 엮어 만든 드레스와 페이퍼드레스 시리즈를 발표한 실험적인 디자이너였다. 파코 라반의 정신을 이을 재목으로 인도 출신 디자이너 마니쉬 아로라가 영입됐다. 파코 라반의 실험정신을 토대로 아로라와 임세아 씨가 합류한 새 오트쿠튀르 팀은 2012 봄·여름 파리 컬렉션을 발표하며 파리 패션계에 복귀했다.
파코 라반의 2012 봄·여름 파리 컬렉션을 입은 레이디 가가(왼쪽)와 케이티 페리(오른쪽). 임세아 씨가 제작에 참여했다.
“30년 전 파코 라반은 종이로 옷을 제작했어요. 당시 파코 라반의 새로운 시도가 담긴 드레스를 프랑수아 작티 같은 유명 가수들이 입으며 인기를 끌었죠. 재론칭을 하면서 과거의 컬렉션을 재해석한 작품을 내놓았어요. 만들 때는 너무 힘들었어요. 어떤 옷들은 레이저로 패턴을 각각 잘라서 퍼즐 맞추듯이 하나하나 손으로 직접 연결해야 했거든요. 다행히 발표 직후 반응이 좋아서 파코 라반의 드레스를 입고 싶다는 레이디 가가의 연락을 받았어요.”
파코 라반의 유지를 이어 만든 아로라의 드레스는 레이디 가가와 케이티 페리 등 세계 톱스타에게 선택됐다. 레이디 가가는 2011년 MTV 유럽 뮤직 어워드 시상식에 파코 라반의 드레스를 입고 등장해 새로운 시작을 전 세계에 알렸다.
모델리스트가 된 이후로 1년에 2번 있는 쇼(봄·여름, 가을·겨울)와 2번 있는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면서 일과 한 몸이 된 그는 어느새 결혼 적령기가 됐다. 만나는 사람은 있는지 물었더니 “요즘은 카타르·프랑스·한국을 오가면서 일하다 보니 어디에다 남자친구를 만들어야할지 모르겠다”며 웃었다.
“주로 카타르에서 일하지만 프랑스에도 출장 차 자주 가요. 메인 제품의 샘플은 프랑스에서 만들고 있거든요. 카타르에 와서 좋은 점은 한국에 자주 올 수 있게 된 거예요. 저희 브랜드에서는 한국에도 간단한 제품을 주문하고 있어요. 전 세계를 놓고 봤을 때 좋은 품질의 옷을 빠르게 만들 수 있는 곳은 한국밖에 없기 때문이죠. 프랑스는 제품의 질은 최고지만 시간이 오래 걸려요.”
회사를 옮기고 난 뒤 한국에 자주 오게 되면서 임세아 씨는 서울 강남 청담동의 멀티숍 모리아와 함께 콜래보레이션을 시작했다. 그는 “댄서로 오래 일을 했더니 연예인 친구가 많아 행사가 있을 때면 드레스를 만들어줬다”며 “이제는 체계를 잡고 모리아 바이 세아림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에서도 활동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콘셉트는 ‘정직한 옷’이에요. 예쁘게 보여서 샀는데 입어보면 이상한 옷이 많잖아요. 패턴을 잘못 만들어서 그런 거예요. 그래서 좋은 패턴, 좋은 원단, 좋은 디자인을 담은 좋은 퀄리티의 옷을 선보이고 싶었죠. 아직은 아니고 나중에는 저만의 브랜드를 갖고 싶기도 해요. 좋은 협력자가 나타나서 함께 일할 수 있게 되면요.”
임세아 씨는 패션 공부를 위해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조언했다.
“패션에는 다양한 직군이 있는데 많은 사람이 자신이 잘하는 것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디자이너’라는 꼬리표만을 갖고 싶어 해요. 막연히 스타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는 마음만 갖고는 에스모드 같은 좋은 패션학교를 나와도 디자이너로 일할 수 없어요. 좋은 학교를 선택하는 것보다 자신이 잘하는 것부터 꼼꼼히 파악한 뒤에 적성에 맞는 직군(디자이너·모델리스트·패션마케팅 등)을 찾는 것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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