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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부부 마드리드 동행 취재

따뜻한 카리스마 세상을 움직이다

글·김현미 기자 | 사진·동아일보 사진DB파트, UN 제공

2013. 05. 16

2011년 6월 연임에 성공한 뒤 반기문 사무총장은 기회 있을 때마다 “더 열심히 일하겠다”고 다짐해 아내 유순택 여사를 긴장시켰다. “지금도 수험생처럼 생활하는데 지금보다 더 열심히 일하면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유 여사의 우려대로 반 총장은 ‘바보처럼’ 성실히 일해 세계를 감동시켰고, 이젠 갈고 닦은 입담으로 세계를 웃기기까지 한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부부 마드리드 동행 취재

4월 6일 오후 6시(현지시간) 스페인 레알 마드리드의 홈구장인 산티아고베르나베우 경기장에 입장하며 환호하는 관중을 향해 손을 흔드는 반기문 사무총장.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처음 마주한 것은 4월 5일 오후 6시(현지시간) 유엔세계관광기구(United Nations World Tourism Organization·UNWTO) 본부에서였다. 이틀간의 모나코 일정을 마치고 4일 마드리드에 도착한 반 총장은 그사이 기자회견을 하고 마리아노 라호이 스페인 총리와 회담을 했다. 다음날 유엔 산하 기구 기관장들과 회의를 한 뒤, 마드리드 시내 북쪽에 있는 유엔세계관광기구로 이동한 것이다.
유엔세계관광기구는 관광 산업을 통한 경제 성장과 고용 창출, 사회적 기여를 위한 국제적 이해 증진과 협력을 도모하는 국제 기구로, 2011년 10월에는 2년마다 열리는 총회가 경주에서 열려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이윽고 탈렙 리파이 유엔세계관광기구 사무총장의 안내를 받아 반기문 총장 내외가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이날 행사는 반 총장이 전 세계 국가에서 파견돼 마드리드 본부에서 근무하고 있는 직원들을 격려하기 위해 마련한 리셉션. 그러나 칵테일 음료 한 잔 없이 반 총장의 격려사와 기념 촬영이 전부인 조촐한 행사였다. 반 총장이 단상에 오르자 직원들은 일제히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을 찍거나 동영상을 녹화했고, 연설 내내 웃음과 환호와 박수로 호응했다. 유엔 직원들 사이에서도 반 총장은 스타였다.
단상에 오르기 전 반 총장의 모습에서 피로감이 느껴졌다. 한 달 평균 지구 한 바퀴를 돈다는 살인적인 출장, 10분 단위로 쪼개지는 숨 가쁜 스케줄, 하루에 많게는 열세 번까지 했다는 연설, 밥 한 끼도 자유롭게 먹을 수 없는 꽉 찬 삶. 천하장사라도 쓰러지지 않는 게 다행이다 싶을 정도다. 하지만 막상 단상에 오르자 그는 거짓말처럼 힘이 넘치는 목소리로 원고 없이 연설을 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부부 마드리드 동행 취재

1 4월 6일은 2015년 유엔의 ‘새천년 개발 목표’ 달성까지 1천 일을 시작하는 날로, 이와 관련해 언론 인터뷰를 하는 반 총장. 2 마드리드에 본부가 있는 유엔세계관광기구에서 캐리커처를 선물 받은 반 총장. 왼쪽부터 한동주 화백, 탈렙 리파이 유엔세계관광기구 사무총장, 반 총장, 도영심 스텝재단 이사장. 3 한동주 화백이 그린 반기문 총장의 캐리커처.



반 총장이 이번 스페인 방문 일정에서 유엔세계관광기구 방문에 큰 의미를 둔 것은, 유엔의 ‘새천년 개발 목표(Millennium Development Goals·MDGs)’와 관계가 깊다. ‘새천년 개발 목표’란 유엔이 2000년 채택한 의제로, 2015년까지 세계의 빈곤을 반으로 줄이고자 마련된 8가지 개발 목표를 가리킨다. 절대빈곤과 기아 퇴치, 보편적 초등 교육의 달성, 양성 평등 및 여성 능력 고양, 유아 사망률 감소, 모성 보건 증진, 에이즈 등 질병 퇴치, 지속 가능한 환경 보장, 개발을 위한 국제 협력 구축 등 8개 분야에 걸쳐 다양한 실천 계획이 마련돼 있다. 그중에서도 유엔세계관광기구는 최빈국들이 관광자원을 활용해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고자 산하에 빈곤퇴치재단(Sustain of Tourism for Elimination Poverty Foundation·이하 스텝재단)을 두고 유엔의 새천년 개발 목표 달성에 중요한 몫을 담당하고 있다. 더욱이 스텝재단은 대한민국 서울에 사무소가 있고 한국인(도영심)이 이사장을 맡고 있어 반 총장에게는 큰 힘이 되고 있다. 이날 연설에서 반 총장은 “내일(4월 6일)은 새천년 개발 목표의 달성(2015년 12월 31일)까지 남은 딱 1천 일을 기념하는 날이다. 오늘 이 자리에서 카운트다운을 시작한다”라고 선언했다. 연설이 끝나자 단상에서 내려가려는 반 총장을 리파이 사무총장이 붙잡았다. 어리둥절해하는 반 총장에게 리파이 사무총장이 ‘깜짝 선물’로 전달한 것은 한국의 한동주 화백이 그린 반 총장의 캐리커처였다. 반 총장은 즉석에서 “(캐리커처가) 나보다 훨씬 젊고, 핸섬하다”는 농담을 던져 좌중을 웃겼다.

다음 이동 장소는 마드리드 중심가에 있는 레알 테아트로 극장. 저녁 8시부터 이곳에서 ‘2013 누에바 에코노미아 포룸(뉴 이코노미 포럼) 상’ 시상식이 열렸다. ‘누에바 에코노미아 포룸’은 매년 경제 개발과 사회적 응집을 위해 기여한 사람을 선정해 상을 수여하고 있는데. 2008년 메르켈 독일 총리 이후 멕시코, 브라질, 포르투갈, 이탈리아 대통령이 이 상을 받았다. 오페라하우스인 레알 테아트로 극장 1,2층은 스페인 정·재계 인사들과 하객들로 채워졌고 무대 위에는 김용 세계은행 총재를 비롯해 유엔 기구의 수장들이 반 총장을 응원하듯 포진했다. 가르시아-마르가요 스페인 외무부 장관이 직접 나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세계의 빈곤, 불평등, 분쟁, 평화 수호, 소외계층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행동하는 따뜻하고 용감한 세계적 지도자이기에 이 상을 수여한다”고 밝히자 객석에서 힘찬 박수가 흘러 나왔다. 이어 반 총장의 연설과 축사 등 공식 행사가 끝나고 열린 리셉션에서 유엔 사무총장과 눈을 맞추려는 사람들로 긴 줄이 만들어졌다. 물 한 모금 마실 틈도 없이 악수하고 소개하고 또 악수하는 사이 시간은 하염없이 흘렀다.
세계 지도자들의 리더로서 유엔 사무총장의 위상을 실감할 수 있는 자리였지만, ‘세상에서 가장 멋진 일’(코피 아난 전 총장이 유엔 사무총장의 임무를 가리켜 한 말)을 수행하려면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한국 나이로 올해 일흔인 반 총장이 이처럼 살인적인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마지막까지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는 비결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둘째 손녀 얻은 기쁨까지 오늘은 뜻깊은 날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부부 마드리드 동행 취재

등번호 1000을 새기고 경기장으로 들어가는 반 총장. 그는 시축을 통해 전 세계 빈곤 퇴치를 위한 1천 일의 약속을 킥오프했다.



4월 6일의 상황도 다를 게 없었다. 하루 종일 유엔 산하 기관 회의가 이어졌고, 스페인 청소년들과 대화의 시간을 갖고, 스페인 명문 축구팀인 레알 마드리드의 홈구장으로 이동해 호날두, 라모스, 카카 등 스타 플레이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시축을 했다. 이날 경기는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레알 마드리드와 레반테 전. 반 총장이 가슴엔 UN 로고가, 등에는 1000이라는 숫자가 큼지막하게 새겨진 흰색 티셔츠를 입고 등장해 공을 찰 준비를 하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의 발에 집중했다. 이윽고 반 총장이 머뭇거림 없이 달려가 힘차게 공을 차자 “와” 하는 함성이 쏟아졌다.
반 총장이 시축을 통해 전 세계인들에게 전하고자 한 것은 등번호 1000의 의미였다. 그는 시축에 대한 소감을 묻자 “I’m here to kick off one thousand days of action for MDGs. Together we can kick out poverty and score the goals for the world”라고 했다. 해석하자면 “나는 새천년 개발 목표 시행 1천 일을 시작하러 여기에 왔다. 우리가 함께라면 가난을 걷어차고 세계를 위해 골을 넣을 수(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가 된다. 짧은 문장 안에 그는 하고 싶은 말을 꽉 채웠다. 그러면서도 “레알 마드리드는 세계 최고의 팀 가운데 하나다. 나는 특별히 카시야스(레알 마드리드 골키퍼) 선수를 좋아한다. 그는 유엔 새천년 개발 목표를 위한 UNDP(유엔개발계획)의 훌륭한 친선대사”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는 유엔의 새천년 개발 목표에 대한 전 세계인의 관심과 동참을 촉구하는 한편, 세계의 평화와 빈곤 퇴치에 스포츠 선수들도 앞장서 달라는 일종의 ‘압박’으로 들렸다.
4월 7일 오전 반기문 총장의 일정표에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행이 적혀 있었다. 아들에게 양위(4월 30일)를 앞둔 네덜란드 베아트릭스 여왕을 만나기 위해서다. 이어 로마로 가서 교황을 만나고 뉴욕으로 돌아갔다가 또 워싱턴으로 가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만나 한반도의 안보 위기 상황에 대해 논의한다. 굵직한 행사만 채워도 하루 일과표에 빈 자리가 없다.
결국 반 총장이 암스테르담행 비행기에 오르기 전 인터뷰를 위해 조찬을 방해할 수밖에 없었다. 반 총장은 불청객인 기자에게 “이번 행사를 취재하러 서울에서 여기까지 왔느냐”며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어제가 저한테는 참 의미가 많은 날이에요. 미국에 있는 아들(반우현) 부부가 손녀를 낳았다는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아들에게 첫째 딸이 있는데 이번에 둘째를 본 것이지요. 그리고 어제 레알 마드리드 홈구장에서 한 시축은 유엔 새천년 개발 목표 1천 일을 킥오프(kick-off)해서 국제적인 관심을 제고하기 위한 자리였습니다. 이를 위해 마드리드에 유엔 기관장들이 다 모였습니다. 김용 세계은행 총재 한 분만 움직여도 뉴스거리인데 유엔 시스템을 이끄는 기관장 30명이 한자리에 모여 결의를 다졌으니 당연히 전 세계가 주목할 일이죠.”
반 총장의 공 차는 솜씨가 나쁘지 않았는데 평소 운동을 하시냐고 묻자 “따로 운동은 안 하지만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공을 차지 않느냐”며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러나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공을 찬다’는 것은 단순한 운동 이상의 의미가 있다.
“사무총장을 하면서 몇 번 시축을 했고 자선 축구에 직접 참가하기도 했죠. 특히 2009년 오랜 내전으로 수많은 청소년들이 장애를 얻어 비참하게 살고 있는 시에라리온을 돕기 위한 기금 마련 자선 축구가 뉴욕에서 열렸는데 그때 선수로 뛰었어요. 제가 한 번 뛰면 누군가 5만 달러를 후원하는 식이지요.”
“알고보니 유엔 사무총장은 몸값이 비싼 선수”라고 하자 반 총장은 곧바로 “에이, 레알 마드리드의 호날두 선수는 9천6백만 유로를 받았다는데”라고 해 한바탕 웃고 말았다. 호날두가 2009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레알 마드리드로 옮길 때 당시 한화로 약 1천3백60억원의 이적료를 챙긴 것을 빗대 한 말이다.

갈고 닦은 입담으로 세계를 웃기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부부 마드리드 동행 취재

올 1월 1일 유엔 한국대표부 신례하례식에서 만난 반 총장과 가수 싸이.



무엇이든 잘 하고, 못 하는 게 있으면 지독한 반복과 연습으로 끝내 해내고야 마는 반 총장의 성실성은 워낙 유명해서 “공부가 취미인 사람” “무결점의 완벽한 모범생”으로 불리기도 했다. ‘왈츠의 본고장’ 오스트리아 대사 시절에는 연말 외교 행사에 춤이 빠지지 않아 곤혹스러운 일이 잦자 아내 유순택 여사와 함께 댄스 교습소에 등록해 춤을 배운 일화는 유명하다. 그런 반 총장의 마지막 아킬레스건이 유머 감각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반 총장과 고향 친구로 40년간 가깝게 지낸 경희대 안영수 교수는 “선한 사람이지만 유머 감각은 없어요. 아마 세계 사람들 상대하려면 그런 점을 좀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할 것 같아요. 그런데 평소에 항상 공부하듯이 유머도 공부하겠다고 들면 어떻게 하죠?”라고 한 적이 있다(‘조용한 열정 반기문’ 중에서).
그의 예언대로 반 총장은 유머 감각까지도 갈고 닦은 것 같다. 나날이 그의 입담이 화제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올 1월 1일 뉴욕 맨해튼 유엔 한국대표부 신년하례식에서 반 총장과 가수 싸이의 입담 대결이 화제를 모았다. 반 총장이 “새해가 되면 결의를 하는데 올해 결의 중 하나는 어떻게 하면 싸이만큼 유명해질까 하는 것”이라며 “내가 출연한 싸이 패러디 동영상이 강남스타일 유튜브 조회기록(11억 뷰)을 깨려면 2만 년은 걸릴 것 같다”고 선수를 쳤다. 이에 싸이는 “외신 기자들이 누가 말춤을 췄을 때 가장 영광스러웠느냐고 자주 묻는데 그때마다 총장님이라고 답했다. 그 이유는 춤을 전혀 안 추실 것 같은 분이 춤을 춰서”라고 응수해 폭소를 일으키더니 “총장님이 업무차 전 세계를 돌아다닌 여행거리(마일)와 하루 4개국씩 이동하는 기록은 못 깰 것 같다”고 존경을 표하기도 했다.
3일간의 짧은 스페인 방문 일정에서 그는 수십 차례 연설과 모두(冒頭) 발언을 했다. 놀랍게도 대부분 원고 없이 즉흥 연설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했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유머로 좌중을 웃겼다. 이처럼 수많은 일정을 소화하려면 혹시 연설 순서가 뒤바뀌는 일은 없느냐고 슬쩍 물었더니 “정신없지만 신경을 바짝 쓰니까 괜찮다”라고 했다.
“1년에 7백~8백 회쯤 연설을 합니다. 하루에 많게는 13회까지 했으니까요. 사무총장으로 일한 지 6년이 돼 연설문을 정리해보자 했더니 6천 개쯤 돼요. 그걸 다 엮어 연설문집을 내면 아무도 안 읽을 테니까(웃음) 1백 개를 고른 겁니다(올 2월 2007~2012년 주요 연설문을 묶어 유엔에서 출간한 ‘Building a better future for all’을 가리킴). 그런데 1백 개를 선정하는 데 유엔 직원들끼리 싸움이 났어요. 부서마다 자기네 것이 더 중요하다고 좀처럼 양보하지 않았으니까요.”
반 총장은 국제 정치, 지속 가능 개발, 기후 변화, 인권, 여성 등 9개 분야에서 제일 중요하고 잘 된 연설들만 엮은 것이니 공부가 많이 될 거라며 기자에게 꼭 한 번 읽으라고 권했다. 그러더니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뭔가를 열심히 찾아 보여준다. “오늘 아침에 전송받은 둘째 손녀 사진이에요. 태어난 지 이틀밖에 안 됐는데 또렷하게 생겼죠?” 손주라면 누구에게라도 자랑하고 싶은 할아버지의 마음은 유엔 사무총장도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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