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지나면 잊히고 묻히는 일이 있다. 이외수(67)에게 혼외아들이 있다는 것이 그랬다. 아는 사람은 뜬소문인 줄 알고,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았던 이야기. 하지만 3월 30일 ‘혼외아들 인지 및 양육비 청구 소송’에 이외수가 피소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큰 파문이 일었다.
이외수를 상대로 춘천지방법원에 친자인지 및 양육비 청구 소송이 제기된 것은 2월 1일이다. 소송을 제기한 사람은 오모(56) 씨와 그의 아들 오모(26) 군. 두 사람은 같은 성씨를 사용하고 있지만 모자지간이다. 어머니 오씨와 이외수 사이에 1987년 태어난 아들 오군, 두 사람은 오군을 이외수의 호적에 올려(친자인지)주고, 그동안 미지급한 양육비 2억원을 달라고 소송을 제기했다.
26년 만에 양육비 청구 소송
사건이 세간에 알려진 것은 그로부터 두 달 후인 3월 30일. 한 언론사의 기사를 통해서다. 기사에 따르면 오씨는 “아이가 어릴 때 이외수 부부의 강요로 양육비 포기 각서를 썼고 그 후 생활비 명목으로 가끔 돈을 받았으나 10여 년 전 지방으로 내려가면서 연락이 끊긴 뒤 아이 양육과 뒷바라지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주장하며 소송 배경을 설명했다고 전했다.
이와 함께 이외수가 “소송 사실을 통보받고 오씨와 원만한 합의를 끌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호적에 올려 주겠다는 의사를 이미 여러 차례 밝혔고 경제적 지원도 했으나 갑자기 연락을 끊었던 오씨가 지금 와서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한 내용을 담고 있다.
같은 날 이외수는 자신의 트위터에 “심려를 끼쳐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하지만 일부 언론의 보도나 억측은 사실과 다릅니다. 조만간 법적 절차에 따라 원만한 해결이 이뤄질 것입니다. 양측에 피해가 없도록 음해성 억측을 자제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라고 썼다.
하지만 이 사건을 둘러싼 각종 공방은 식을 줄 몰랐다. 먼저 이외수의 아내 전씨가 한 방송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그간 오씨에게 양육비를 지급했다고 밝혔다.
“제가 (오군) 스무 살 때까지 양육비를 줬거든요. 그쪽에서 터무니없는 요구를 한 거고, 내 새끼(이외수와 전씨 사이에서 낳은 아들 둘을 가리킴)도 스무 살에 (금전적 지원이) 끝났는데, 그건 말이 안 되는 거지. (이외수가) 돈을 많이 번 줄 알고 그랬다고 오히려 미안하다고 그러네요. 월요일(4월 1일)에 올라와서 자기가 다 취하하겠대요”라고 말한 전씨의 인터뷰가 전파를 탔다. 이와 함께 방송은 ‘오씨와 아들을 불러 저녁식사를 함께 하기로 했으며 대학등록금을 대주는 선에서 합의하기로 했다’는 전씨의 말을 전했다. 이에 오씨 측은 즉각 반박했다. 오씨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이외수 측이) 소송을 취하했다고 하는데 이해가 안 간다. 취하한 적도 없고 합의한 적도 없다”며 “법적으로 해결하자고 그쪽(이외수 측)에서 통보했으며 합의나 취하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고 밝혔다. 이어 26년이나 지나 갑자기 양육비 청구 소송을 하게 된 것에 대해 “주변에서 양육비는 소멸시효가 없기 때문에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소송하게 됐다”며 “아들이 대학을 다녔지만 휴학 중이고 도움을 주지 못해 안타까운 심정에서 소송을 제기했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이외수의 거짓 해명 논란
양측의 양육비 논쟁은 전혀 엉뚱한 지점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했다. 이외수가 대마초 흡연 혐의로 한 모텔에서 연행된 사건을 다룬 1988년 동아일보 기사 때문이었다. 이 기사는 이외수와 오씨가 함께 연행됐다고 보도했고, 이에 네티즌들은 오씨가 이외수의 혼외 아들을 낳은 오씨와 동일인이 아니냐고 의문을 제기했다. 이미 2010년과 2011년에 이외수가 자신의 트위터에 이 사건에 대해 언급하면서 “거기에 나오는 여자분들은 청소와 빨래를 담당하던 서른한 살 된 종업원들이고 참고인으로 동행, 20분 만에 풀려나셨다”라고 밝힌 바 있었다.
하지만 취재 결과 양육비 소송을 벌이고 있는 오씨가 대마초 사건으로 함께 연행된 오모 씨와 동일 인물임이 밝혀지자 이외수의 지난 거짓 해명에 비난이 쏟아졌다. 이외수가 ‘빨래와 청소하는 종업원들’이라고 말한 오씨는 한 월간지 기자로 근무하다 1984년 취재원으로 이외수를 처음 만났던 것.
1988년 4월 14일자 15면 동아일보 기사. 이외수는 기사 속 ‘소녀’라는 단어가 잘못 사용돼 20년간 악플에 시달렸다고 말한 바 있다.
이에 이외수는 4월 5일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대마초를 피우고 미성년자 문학소녀들과 여관에서 혼숙을 했다는 보도에 저는 20여 년 동안 악플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악플에 시달리던 어느 날 잘못을 바로 잡는 과정에서 오씨 여인을 빼고 말했을 뿐입니다.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감추고 싶었으니까요”라고 해명했다.
이에 오씨는 한 방송국과의 인터뷰를 통해 “1988년 검거 당시 여관방에서 저랑 같이 있다가 경찰이 쳐들어 왔어요. 여관에서 한 사람은 참고인으로 따라오라고 해서 여관에서 일하던 분이 왔었어요. 그분하고 같이 데려갔던 거죠. 셋이 같이 갔었죠. 트위터에 둘 다 여관종업원이었다고 한 것이, 우리 아들이 제일 분개했던 부분이에요”라며 자신의 심경을 밝혔다.
진행 중인 재판의 핵심은 양육비 액수다. 애초 오씨 측이 요구한 2억원을 이외수 측이 받아들이지 않아 합의를 보지 못하고 재판이 열리게 된 것이다.
첫 공판은 4월 16일 춘천지방법원에서 열렸다. 원고, 피고인 당사자들은 참석하지 않고 대리인인 변호사만 참석해 권순건 판사 심리로 진행됐다. 재판부는 다툼의 쟁점이 양육비 문제인 만큼 양측 변호인에게 조정위원회를 통한 조정을 권고했다. 이에 원고 측 변호인은 동의했으나, 피고인 이외수 측 변호인은 조정위원회를 통한 조정보다 더 신속한 절차 진행을 주장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에 권 판사의 권고에 따라 조정위원회를 열기로 합의하면서 5분 만에 끝났다. 재판에서 이외수 측 변호사는 “8년간 정기적으로 50만원 안팎으로 총 5천여 만원이 입금된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4월 29일 열리는 가사조정위원회에서는 과거양육비 금액에 대한 논의가 이뤄질 것으로 전망된다.
4월 16일 밤에서 17일로 넘어가는 시각에 이외수는 자신의 트위터에 재판에 대한 글을 올렸다.
“재판은 여러분의 염려지덕으로 잘 끝났습니다. 이달 29일 마무리될 예정입니다. 법정대리인만 참석, 4분 정도 걸렸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저쪽 변호사는 한마디도 못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터무니없는 생떼였으니까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이 글은 얼마 후 삭제됐다.
오씨, 지금은 언론 인터뷰 응하지 않겠다
기자가 오씨와 연락이 닿은 것은 재판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이미 여러 매체와 전화 인터뷰를 나눈 상황이었지만 더는 인터뷰를 원치 않는다고 했다.
“지금까지 보도된 내용으로도 많이 힘들었어요. 오해하는 분도 많은 것 같고 여러모로 재판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 인터뷰는 하고 싶지 않네요.”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인터뷰를 고사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며 미안하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거듭되는 기자의 설득에 ‘기사에는 제발 싣지 말아 달라’며 그간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이야기를 조금씩 꺼내 놓았다.
물론 “서로의 주장이 다를 때, 한쪽 주장만 믿고 다른 쪽을 조롱하거나 경멸해서는 안 됩니다”라던 이외수의 말은 틀리지 않다. 하지만 이외수 측 주장을 끝내 들을 수 없었던 기자는 오씨가 겪어야 했던 어려움에 대해 같은 여자로서, 엄마로서 납득할 수 있었다. 양육비를 넉넉히 받았느냐에 상관없이 미혼모로 아이를 키워야 했던 애환과 아버지 없이 살아야 했던 아들의 아픔이 느껴졌다.
최근 한 언론매체에 오씨의 아들 오군이 “어머니가 집안일과 돈 버는 일을 병행했고, 할머니가 편찮으신데 혼자 모시기도 했어요. 일하느라 항상 바빴죠. 집에서 일하거나 취재하러 갈 때도 있고, 여러모로 고생을 해 화장할 여유도 없었던 것 같아요”라고 털어놓았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여자 혼자 아이를 키워나가야 했던 그녀가 얼마나 힘이 들었을지 짐작이 간다. 아들은 “마음 한편으로는 ‘(아버지가) 나를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들로서 대해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는 건 사실이죠”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 아들을 낳을 당시 오씨의 아픔은 “먹고 싶다면 다 구해주던 사람이 임신 6개월째가 되자 ‘아이를 떼면 안 되느냐’고 했다. 뱃속의 생명을 죽일 수 없어 지방으로 도망다녔다”는 언론사와의 인터뷰에도 담겨 있다. 하지만 이 부분은 1988년 한 월간지를 통해 이미 알려진 내용. 기사에서는 이외수의 아내 전씨가 “아이를 떼려고 애썼지만 미스 오(오씨)는 도망다니고 이리저리 몸을 피하며 시간을 벌어 결국 낳을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고 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더욱이 “아이를 낳은 뒤 다시 의논한 끝에 아이는 홀트양자회(지금의 홀트아동복지회)로 보내졌다. 홀트에 가보면 합의서가 있을 거다. 그런데 홀트에서 ‘아이 엄마로부터 아이를 돌려달라고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고 하더라”던 이외수 아내 전씨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988년, 오씨와 이외수는 서울 서대문구 북가좌동에 위치한 여관방에 함께 있다 경찰에게 연행됐다.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인연은 질기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이렇게 다시 법의 도움으로 무언가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 도달했으니 말이다. 오씨가 받아야 했던 양육비의 적정 금액은 법정에서 판가름이 날 것이다. 하지만 이외수의 혼외 아들이 태어난 이튿날 홀트아동복지회로 보내진 이유나 이외수 측의 요구로 ‘양육비 포기 각서’를 강제로 작성했는지에 대한 진실이 법원에서 밝혀질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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