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발을 내딛을 때마다 최연소, 최초라는 수식어가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팝페라 테너 임형주(27). 1998년 데뷔한 임형주는 2003년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취임식 때 역대 가수 중 최연소로 애국가를 선창해 국내외에 널리 이름을 알렸고, 같은 해 세계 남성 성악가 사상 최연소로 카네기홀에서 첫 독창회를 가졌다. 바로 얼마 전인 2012년 11월 18일 그는 또 하나의 최연소 타이틀을 얻었다. 1988년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개관 이래 조수미, 조용필, 조영남에 이어 네 번째로 단독 콘서트를 연 것. 그는 “성악가로서 이 뜻깊은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동”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쉴 틈 없이 활동해온 임형주에게 2013년은 뜻깊은 해다. 한국 데뷔 15주년, 세계 데뷔 10주년을 맞이했을 뿐 아니라 사비를 들여 세운 아트원 문화재단이 어느덧 설립 5주년을 맞았기 때문이다.
가장 바쁜 시기인 연말연시, 빼곡한 일정 사이에서 임형주와 마주 앉았다. 서울 서초구 염곡동에 위치한 아트원 문화재단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왕자님 같은 미소와 티 없이 맑은 목소리로 기자를 반겼다. 이번에는 음악가 임형주가 아닌 아트원 문화재단 이사로서 자신의 비전을 들려주었다.
사회복지기관의 홍보대사로 활동하며 꾸준히 기부활동을 해온 임형주는 세계 무대에 서면서 음악에 재능이 있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워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는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기관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됐다고 한다.
“워런 버핏이나 오프라 윈프리, 빌 게이츠를 존경하는데, 이들은 모두 나눔 운동을 열심히 하잖아요. 어릴 때부터 외할아버지가 그런 베풂을 강조하셨는데 전에는 철이 없어서 잘 몰랐어요. 나중에야 깨달은 거죠.”
1백억원 기부채납하고 문화재단 설립
임형주는 2008년 1백억원을 서울시에 기부채납해 아트원 문화재단을 설립했다. 아트원 문화재단은 ‘기적의 오케스트라’라 불리는 베네수엘라의 ‘엘 시스테마’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 엘 시스테마는 빈민가 아동이나 청소년들에게 무상 음악교육을 통해 꿈을 심어주는 프로그램. 혜성처럼 나타난 천재 음악가 구스타보 두다멜 LA필하모닉 상임지휘자, 베를린 필하모닉 최연소 콘트라베이스 연주자 에딕슨 루이즈 등 세계적인 음악가도 배출했다.
“재단 설립 후 가장 먼저 마련한 프로그램은 장학과 교육을 한데 엮은 ‘멘토·멘티’ 제도죠. 엘 시스테마 정도는 아니지만 영감을 얻었어요. 주변인의 추천과 인터뷰, 오디션을 통해 선발된 학생을 음악인 및 교수진과 연결해 프라이빗 레슨을 받게 도와줘요. 레슨비는 재단에서 전액 지원하고요.”
2013년 현재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총 17명이 이 프로그램을 통해 교육받고 있다. 그도 성악가 지망생을 직접 가르치고 있는데, 성대가 완전히 발달한 때인 중학교 3학년 이상의 학생만 받고 있다.
아트원 문화재단은 산하에 소르고 유아학교(이하 소르고)를 두고 교육사업도 진행 중이다. 대안 유치원인 이곳은 경쟁이 아닌 상생을 위한 교육을 원하는 엄마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자자하다.
“광고 한 번 하지 않았는데 2012년 2월 개교 후 1년도 채 되지 않아 1백 명의 원아가 모였어요. 입소문으로 인정받은 셈이죠.”
소르고의 교육 목표는 ‘나는 존귀한 사람이에요’ ‘나는 가족과 이웃을 사랑해요’ ‘나에게는 꿈이 있어요’다. 성과 위주의 교육이 아닌 아이의 인성과 내실을 키울 수 있는 교육을 지향한다. 교육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일반 유치원에서 진행하는 언어, 탐구, 표현, 건강(체육) 영역뿐 아니라 인격 형성 및 예절, 리더십 교육을 맡는 성품교육, 매일 오후에 2시간씩 영어특화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교사진은 석사 이상 학위를 소지하고 영어에도 능숙한 사람으로 뽑았다. 2013년부터 원어민 교사도 배치한다.
인터뷰 전 소르고 유아학교의 시설을 둘러봤다. 아트원 문화센터 2층 전체를 사용하고 있는 이곳은 아이들의 천국이다. 인테리어 자재는 모두 친환경. 아이들의 건강에도 신경 썼다. 수업에도 강제성이 없다. 정해진 시간표는 있지만 만일 아이가 몸이 좋지 않거나 공부를 하기 싫어한다면 하지 않아도 된다. 양호실을 겸한 수면실은 언제나 개방돼 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책이 가득 꽂힌 도서관도 있는데, 아침에는 독서 시간이 따로 마련돼 있다. 예절교육을 위한 다도실이 있으며, 지하 1층에는 발레실과 체육실이 있다.
특히 자랑하는 시설은 식당이다. 아침에는 죽, 점심식사와 간식, 종일반 아이들에게는 저녁까지 제공한다. 식재료는 매일 근처에 있는 하나로마트에서 조달한다. 약 3천 명분의 음식도 가능할 만큼 큰 규모를 자랑하는 조리실은 열린 공간이라 조리 과정이 한눈에 보인다. 식사는 연령대 불문하고 모든 학생이 한자리에서 함께 하는데, 공동체 생활을 중시하는 소르고의 철학을 담았다.
1 소르고 유아학교의 발레실. 발레는 아이들의 표현력을 키우고 균형 있는 신체 발달을 돕는다. 2 궁금증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책들로 가득한 도서관. 각 수업실의 중앙에 위치해, 아이들이 오가며 들어가기 좋다. 3 아트원 문화재단 3층에 위치한 공연장. 아이들의 공연 기회도 잦은 편인데, 이를 통해 자신감과 무대와의 친화력을 높일 수 있다.
귀족 유치원이라는 오해 꼭 풀고 싶어
시설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고급 사립 유치원 이상의 비용을 자랑할 듯 보인다. 하지만 교육비는 일반 유치원과 다르지 않은 60만원 선. 여기에 식비·재료비·차량비가 포함돼 있다. 입학금에는 영국 사립학교 교복 디자인을 따온 원복 가격이 포함돼 있다. 정식 유치원이 아니라 정부 보조금을 받을 수 없지만, 같은 금액을 재단에서 지원해 가격을 낮췄다. 학부모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다. 임형주는 소르고에 관련된 오해를 꼭 풀어달라고 신신당부했다.
“2009년 재단에서 A.O.S라는 이름의 국제 유치부를 설립했어요. 이름만 들어도 다 아는 정·재계 인사 자녀도 많이 다녔죠. 탤런트 심은하 씨가 상담하러 찾아오기도 했어요. 이제까지 연예인 보고 두근거린 건 심은하 씨가 처음이었어요. 하하 그만큼 팬이었던 거죠(웃음). 물론 그분이 사정상 자녀를 맡기지는 않으셨지만, 어쨌든 당시 한 달 원비가 1백50만원 선이었어요. 시설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2백50만원이니, 3백만원이라는 소문이 퍼졌죠. 오해가 쌓이는 통에 고민하다 A.O.S의 문을 닫았어요. 저희 재단이 생각하고 있는 바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 느꼈거든요.”
그는 2011년 한 해 동안 유치원 문을 닫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했다. 그렇게 탄생한 소르고 유아학교는 국내에서는 이례적인 대안 유치원이다. 입학 연령은 4세부터이며 7학년제다. 7학년은 초등학교 3학년에 해당한다. 유치원과 초등학교 일부 과정을 합친 터라 ‘유아학교’라는 이름을 붙였다. 7학년까 과정이 끝나면 일반 초등학교에 편입하거나, 조기 유학을 선택할 수 있다. 토론 수업 위주로 진행될 초등부 과정은 2013년 새 학기부터 시작한다.
“초등학교 3학년까지 운영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어요. 예전보다 아이들이 빨리 성숙해 사춘기도 일찍 와요. 학자들은 아이들의 인성이 완벽히 구성되는 시기를 초등학교 3학년까지로 본다더군요. 그래서 그 기간까지 운영하기로 했어요.”
아트원 문화재단이 위치한 염곡동 일대에는 보금자리주택단지가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소르고를 연 뒤 보금자리주택에 사는 아이들도, 유명인의 아이들도 똑같이 이곳에서 공부한다. 소르고가 추구하는 것은 부모에게 소득 격차가 있더라도 아이들이 받는 교육에는 차별이 없어야 한다는 점. 아이들에게 등하교 시 되도록 스쿨버스 이용을 권하고, 부모가 차로 데려다주는 일이 없도록 미리 양해를 구한다.
“아이가 태어나 처음 경험하는 공동체 생활이 유치원이잖아요. 소르고 유아학교 출신들은 부모에 관계없이 모두 아트원 소사이어티의 멤버라고 봐요. 저는 아이들이 만든 이 작은 사회가 졸업 후에도 꾸준히 이어지기를 바라죠.”
임형주는 일정이 없는 날이면 꼭 문화재단에서 시간을 보낸다. 아이들과 만나고 다양한 주제로 특강을 할 때도 있다.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유치원생 나이의 아이들이 너무 귀엽다고 말하지만 때로는 아이들에게 무서운 선생님이기도 하다.
“동요를 가르쳐주고, 무대 예법이나 공연 관람 예절도 알려줬어요. 우리가 초·중학교 때 배우는 클래식 작곡가인 헨델, 바흐, 모차르트에 대한 선행학습도 해줬고요(웃음). 선행학습 과목이 좀 다르죠? 하하. 아이들이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무섭게 대하기도 해요. 지금 배우는 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인지할 필요가 있다고 보거든요. 사랑이 없고 아이를 안 키워봐서 이런 게 절대 아니에요. 애정이 있어서 무섭게 대하는 거예요.”
소르고에서 글로벌 리더 나오길 바라
임형주는 소르고 출신이나 ‘멘토·멘티’ 프로그램 수혜자 중에서 글로벌 리더가 나오기를 소망한다. 음악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이들이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을 배출하는 것이 그의 꿈이자 목표다.
“제가 어린 나이부터 세계 무대에서 활동을 했잖아요. 줄리어드 예비학교에서 2년, 이탈리아 피렌체, 오스트리아 빈에서도 공부하며 유럽과 미국의 유학 시스템도 거쳐봤고요. 하이 소사이어티의 문화와 에티켓도 직접 체험했죠. 제 경험을 바탕으로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이를 토대로 아이들이 꿈을 넓게 가지면 좋겠어요.”
문화재단 3층에는 소공연장이 있다. 아이들은 이곳에서 다양한 역으로 무대를 경험해본다. 세상은 펼쳐진 무대이고, 그 위에 당당히 설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누구보다 해맑고, 호기심에 가득 차 있는 아이들이 세계 무대에 당당히 서기까지 아낌없이 투자할 생각이라는 임형주의 다음 계획은 무엇일까.
“12월 29일에 ‘투머로 소사이어티’라는 모임이 출범해요. 창립기념 자선음악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노소영 나비아트센터 관장을 주축으로 하는 미래회 자녀들과 유명 인사의 자녀, VVIP 대우를 받는 10, 20대의 영 리더들이 멤버예요. 우리가 받은 것을 사회에 환원하고, 보탬이 되자는 뜻에서 만들었는데, 저는 이 모임의 창립 멤버이자 예술고문으로 활동할 예정이죠.”
1월에는 새 앨범을 발표한다. 제목은 ‘클래식 스타일’. 1집부터 4집에 수록된 클래식 곡을 엄선했고, 미발표 신곡을 추가했다. 그로서는 처음 발매하는 클래식 앨범인지라 “새로운 앨범으로 찾아올 임형주를 꼭 기대해달라”고 덧붙였다.
또 새해부터 동아일보와 서울신문에 칼럼을 연재할 예정이다. 2013년 초부터 너무 많은 일을 시작하는 게 아니냐고 하니 “노래를 더 좋아해야 하는데 글쓰기가 재미있으니 어떡하죠?”라고 되묻는다.
쉴 새 없이 타오르는 열정으로 바쁜 와중에도 사회에 봉사하는 임형주. 그의 발자취를 좇는 것만으로도 분명 그의 아이들은 사회에 보탬이 되는 사람으로 성장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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