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선후보 캠프의 김성주 선대위원장(56)은 자칭 타칭 ‘트러블메이커’다. 선대위원장 임명 후 첫 기자회견 때부터 스키니진에 빨간 운동화 차림의 파격 패션을 선보이며 화제를 모았다. 이날 그는 “난 재벌좌파다” “한국을 확 뒤집어 혁명을 일으키고 싶다” “박 후보를 ‘그레이스 언니’라 부르기로 했다(한자로 뿌리 근에 은혜 혜 자를 붙여 ‘루트 오브 그레이스(root of grace)’라는 뜻에서 ‘그레이스 박’이라고 부르겠다 했더니 박 후보가 좋아했다는 내용)” 등의 기상천외한 발언을 쏟아냈고, 급기야 ‘진생쿠키’ ‘영계’ 발언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김 위원장과의 만남은 서울 청담동 MCM 본사에서 이뤄졌다. 사실 그는 성주그룹 대표로 더 유명하다. 성주그룹은 독일 패션 브랜드 MCM과 영국 브랜드 막스 앤 스펜서(Marks · Spencer) 사업을 전개하는 패션 유통 기업으로, 2005년에는 독일 MCM 본사를 인수해 글로벌 기업으로 발돋움했다. 그의 성공 스토리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고, 그를 닮고 싶어 하는 이들도 많다.
대성그룹 창업주 고 김수근 전 회장의 막내딸인 김 위원장은 연세대를 졸업하고 미국 애머스트대와 하버드대, 영국 런던정경대에서 사회학과 경제학을 공부했다. 하버드대 수학 중 정략결혼을 강요하는 부모에게 반기를 들며 대학 동문인 캐나다인과 비밀 결혼을 해 집안으로부터 내쫓김을 당했다. 재정 지원이 끊긴 건 당연지사. 남편도 아직 학생일 때여서 생활고로 그는 학업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그는 미국 뉴욕 백화점 블루밍데일스에서 온갖 차별과 핍박을 이겨내며 소매 유통업 관련 일을 시작했다. 월급이 적어 부업으로 한국에서 봉제 인형을 들여와 가가호호 팔러 다니기도 했다.
‘재벌좌파’를 당당하게 외칠 수 있는 이유
1989년 오랜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김성주는 아버지에게 3억원을 빌려, 아버지의 집무실 옆방에 책상 하나와 전화, 컴퓨터 각각 한 대를 놓고 ‘대성산업 패션사업부’라는 이름을 달고 직원 한 명 없이 혼자서 사업을 시작했다. 그때 처음 들여온 브랜드가 구찌. 재벌가 딸로서의 모든 프리미엄을 포기하고 한 달에 18만원을 받으며 바닥부터 일을 시작한 그는 ‘가진 자의 의무’와 ‘투명한 손의 경쟁력’을 강조하면서 국내 업계의 뿌리 깊은 부정과 부패 고리를 끊고자 노력했다.
결국 그는 1997년 세계경제포럼의 ‘차세대 지도자 1백 인’, 세계여성지도자회의 총회의 아시아 대표 연설자, 호주 경제잡지 ‘비즈니스 클라스’의 세계 1백 대 여성 기업인으로 선정되는 등 우리나라보다 세계에서 먼저 주목을 받았다. 현재 성주그룹은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해 미국, 유럽, 동남아시아에 이어 일본, 중국으로까지 세력을 넓히고 있다. 그의 1년 평균 해외 출장 수는 85번, 그중 장기 비행만 40회가 넘는다. 이처럼 성공한 사업가인 그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정치판에 뛰어든 이유는 무엇일까. 다음은 김성주 선대위원장과의 일문일답.
▼ 오늘도 ‘김성주표’ 패션을 하고 나오셨습니다. 박근혜 후보 캠프에 들어가면서 처음부터 의도한 건가요.
“본래 입는 스타일이 이래요. 저는 일을 노예처럼 많이 해요(웃음). 예전에는 빨간 립스틱과 안경으로 피곤한 기색을 가렸는데, 선대위원장을 맡으면서 빨간 립스틱이 너무 도발적인 것 같아 빨간색 스카프나 브로치로 바꿨어요. 스키니진과 운동화는 저의 트레이드마크예요. 검정색 스키니진만 다섯 벌이에요. 가끔 튀고 싶을 때는 빨간색 스키니진도 입어요. 여름에는 파란색과 흰색 스키니진을 입고요. 정장 바지를 입는 날이 거의 없어요. 굽이 3cm 정도 되는 구두도 일 년에 몇 번 안 신어요. 정장 바지를 입을 때 구두를 신는데 잠시만 신고 있어도 눈물이 날 정도로 발이 아파서 패션쇼나 파티가 끝난 뒤에는 바로 맨발로 걷죠(웃음). 일을 불같이 하는 사람은 따로 꾸밀 필요가 없어요. 일터는 전쟁터나 마찬가지예요.”
▼ 갑작스러운 정치 참여가 사업에 지장을 주진 않나요.
“사무실에선 난리가 났죠(웃음). 매일 날아다니던 회장이 하루아침에 없어지니까 여기저기서 악악대요. 현재 MCM 매장이 30여 개국에 진출해 있는데 그곳을 다 커버하려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요. 유럽의 경우 하루에 2~3개 도시를 방문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딱 두 달만 ‘종군’하기로 했기 때문에 직원들도 이해해줄 거라 생각해요. 선거가 끝난 뒤에는 결과에 상관없이 원래 제자리로 돌아갈 겁니다.”
▼ 박근혜 후보와 손잡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정치를 싫어해요. 정치인이 모두 위선적인 건 아니지만 그런 모습들이 제 성향과는 너무 맞지 않아요. 그럼에도 이번 대선에 뛰어든 이유는 국제 정세를 잘 아는 경제인으로서 우리나라의 현 상황을 좌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에요. 이번 추석 때 일이었어요. MCM 동남아시아 진출과 관련해 태국 출장 중이었는데 마지막 날 신문을 보다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신문이 두 개였는데 하나는 한국 신문, 하나는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였어요. 한국 신문 사설에는 ‘현재 한반도는 1백10년 전 구한말의 모습과 같아 걱정된다’는 내용이었고 영국 신문 사설에는 ‘지금 동북아의 정세는 마치 유럽의 제2차 세계대전 직전의 모습과 같다’고 쓰여 있었어요. 사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자신 있게 말씀드리지만 저는 글로벌 경제 최전선에서 일하며 일반인보다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어요. 지난해부터 세계 경제가 심상치 않습니다. 유럽과 동북아 경제는 정말로 심각해요. 어디에서 불씨가 튀어 그게 전쟁으로 이어질지 모르는 상황이에요. 현재 우리나라는 유례 없는 오랜 평화의 시간을 지나고 있어요. 산업별로도 1위인 종목이 얼마나 많습니까. 철강, IT, 한류 등등. 한국의 르네상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하지만 이런 평화가 과연 얼마나 오래갈까요. 그 사설들을 보면서 그동안 나는 무엇을 했나 하는 자책감이 들었어요. 이 나라를 터전으로 하는 기업인으로서, 한 명의 작은 지식인으로서 책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양심의 가책이 들었죠. 만약 또 한 번의 외환 위기가 온다면 그때는 정말 심각합니다. 그걸 미리 대비해야 하고 그러려면 안정된 구조 위에서 확고한 개혁이 필요해요. 이제는 너나 할 것 없이 다 끌어안고 안정된 구조 위에서 정치, 정부, 사회를 개혁하지 않으면 우리 모두 죽습니다. 그래서 박근혜 후보를 돕기로 한 거예요.”
▼ 박근혜 후보가 안정과 개혁의 적임자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그렇게 봐요. 국정 운영 능력이나 외교 통상 부문에서 그분을 따라갈 후보가 없어요. 태국 출장에서 돌아온 뒤 마음을 굳히고 박근혜 후보 측과 만났어요. 그날 박 후보에게도 제 특유의 직설법으로 세계가 지금 어떻게 돌아가고 있고, 당신의 국정 운영 능력이 어떻게 빛을 발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드렸어요. 한국은 글로벌 속에서 유기적인 한국이지, 한국 홀로 있는 게 절대 아니에요. 이날 박 후보께 만델라 대통령의 포용력을 차용해야 한다고도 말씀드렸어요. 만델라는 자신을 감옥에 가둔, 바로 직전 백인 통치 체제에서 남아공의 대통령이었던 프레데리크 데클레르크를 부통령으로 삼았어요. 두 번째로 닮아야 할 사람은 독일의 메르켈 총리예요. 그는 그 어떤 남자 총리들보다 정직하고 결단력 있으며 믿음직스럽다는 평을 받고 있는 인물입니다. 또 자신이 한 말은 꼭 지키죠. 박 후보도 메르켈 못지않은 분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박 후보를 지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원칙주의자라는 점이에요. 옆에서 지켜본 박 후보는 부패와 타협하지 않을 분이에요. 이건 한 개인에게도 아주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해요.”
세금 포탈, 비자금, 검은 봉투 없는 비즈니스
김성주는 박근혜 후보에게 만델라의 포용력과 메르켈의 정직함을 닮으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김성주 선대위원장이 부패 척결을 강조하는 이유는 자신의 인생 모토 역시 이와 같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 세 가지 사명이 있다고 했다. 첫째가 ‘여성 바로 세우기’로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여성을 바로 세워 국가에 도움을 주도록 하는 것, 여성들도 얼마든지 일을 잘할 수 있다는 걸 직접 보여줌으로써 이를 실천했다. 둘째는 ‘부패와의 싸움’. 사업을 시작하면서 우리나라의 실상을 처음으로 알게 됐다는 그는 세금 포탈, 비자금, 검은 봉투 없이도 성공할 수 있음을 보여주겠노라고 다짐했고, 결국 온갖 부패의 현장을 목격하면서도 굳건히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실제로 그의 회사는 현재 청담동에서 세금을 가장 많이 내는 기업 2위에 올라 있다. 마지막은 ‘중소기업으로서 글로벌 거대 기업을 따라잡는 것’이었다. 이 역시 그는 향후 5년을 기약했다. 반드시 5년 안에 명품 브랜드 L사를 따라잡겠다고.
▼ 우리 사회는 여전히 남성 위주의 비즈니스 문화가 뿌리박혀 있는데 이를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임신하고 출산과 창업을 동시에 하면서 너무 힘들었어요. 일을 시작해보니 안 썩은 데가 없더라고요. 세관, 공공기관, 백화점, 면세점 등등. 이 나라가 건재한 게 기적이구나 싶었죠. 누구는 사업을 잘하려면 술을 잘 마셔야 하고, 돈 봉투를 바쳐야 하고, 그러려면 세금 포탈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딱 한 가지만 생각했어요. 내 아이가 공의로운 사회에서 살도록 하겠다는 것. 이런 제 소신이 빛을 발한 건 1990년대 말 외환 위기 때였어요. 당시 저희 회사도 상당한 위기에 몰렸죠. 하루아침에 3백억원 이상을 잃었어요. 부도 직전이었죠. 하지만 다행히도 저희가 국내 판권을 갖고 있던 구찌가 엄청난 외화를 벌어들이면서 합작 제의가 들어왔어요. 그때 ‘이건 하늘이 준 기회다’라고 생각하고 합작이 아닌 판권 자체를 팔아버렸어요. 1998년 5월 1일, 2백70억원을 건 기적의 딜이 성사된 거죠. 당시 대기업도 부채가 워낙 많아서 단돈 1원에 팔릴 때였거든요. 저희가 구찌를 제 가격을 받고 팔 수 있었던 건 그만큼 부채가 없었고, 이중장부가 없었고, 속임수가 없었기 때문이에요. 당시 구찌 본사는 돈을 한 푼이라도 덜 주려고 저희 회사 비리를 찾아내겠다며 세 번이나 감사를 왔었어요. 하지만 저희가 제시한 것에서 단 한 건의 오류도 찾지 못하고 2백70억원에 회사를 인수해갔어요. 지금도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저희 회사는 정직하다는 겁니다.”
스키니진과 스니커즈를 교복처럼 착용하는 김성주.
▼ 사업가가 정직하다고 말하기 쉽지 않을 텐데요. 이런 인생의 신념은 어디에서 비롯된 건가요.
“어린 시절 ‘돈암장’이라는 천 평이 넘는 대저택에 살았어요. 당시 일하는 사람만 10명이 넘었고, 운전기사가 5명이나 됐죠. 그때는 모든 사람들이 저처럼 사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중학교 올라갈 무렵 입시 제도가 폐지되면서 일명 ‘뺑뺑이’로 학교를 갔는데, 그때 일반 중학교에 가면서 사회 실상을 알게 됐죠. 가난한 아이들이 많더라고요. 점심을 못 싸와서 제가 매일 도시락을 두 개 가지고 가 나눠 먹던 친구가 있었는데 하루는 그 친구가 무단결석을 하자 선생님이 반장인 저더러 그 아이 집에 가보라고 하셨어요. 방과 후 세 시간을 헤매 겨우 찾은 집은 사람이 과연 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곧 허물어질 것 같은 판잣집이었죠. 어두컴컴한 곳에서 누더기 이불을 뒤집어쓰고 신음하는 친구를 본 순간 큰 충격과 함께 죄책감에 휩싸였어요. 집에 돌아와 어머니께 ‘왜 하나님은 저에게는 이렇게 안락한 환경을 주시고, 제 친구에게는 그런 고통을 주시는지 원망스럽다’고 울면서 말했어요. 그때 어머니가 하셨던 말씀이 평생 제 가슴에 박혔어요. 어머니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빚진 자들이다. 우리가 가진 건 결코 우리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잠깐 우리에게 맡겨두셨을 뿐, 우리는 그것을 정직하게 잘 활용해서 반드시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실제로 어머니는 절제가 몸에 밴 분이었어요. 여느 재벌가 안주인답지 않게 늘 시장에서 파는 수수한 옷을 입으셨고, 생전에 ‘대한기독교여자절제회’를 만드셔서 종교를 초월해 각종 절제운동을 펼치셨죠. 어머니가 물려주신 정직함과 절제의 미덕을 제 피와 뼈에 묻으려고 애썼어요.”
어머니가 물려주신 건 정직과 절제
그가 자신 있게 ‘재벌좌파’를 외치는 이유 역시 평생을 ‘빚진 자’의 마음으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는 1960·70년대 정부가 재벌을 육성한 과정을 언급하면서 재벌이 자신들의 자산을 100% 사유화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정부가 세제 혜택 줬지, 정부사업권 줬지, 노동자들이 피땀 흘리는 헌신 속에서 재벌이 키워졌음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부를 너무나 당연하게 여긴다”고 말했다. 또 김 위원장은 회사 수익의 10%를 사회에 환원하고 있는데 그중 상당 부분이 북한 주민을 돕는 일에 쓰인다. 북한에 백신, 의료기기 보내기 운동을 전개 중이고, ‘월드비전’을 통해 북한 어린이를 위한 고영양의 빵을 만드는 공장을 여럿 세웠다. 연변과학기술대 이사인 그는 평양과학기술대를 만드는 데도 참여했다.
▼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정신적 유산을 딸에게도 물려주고 있나요.(현재 그의 딸은 미국 애머스트대 4학년에 재학 중으로 러시아문학을 전공하고 있다.)
“그러려고 노력하죠. 딸이 일곱 살 되던 해부터 회사 창고와 매장에서 일을 시켰어요. 저 역시 어린 시절 아버지 구두를 닦거나 물건을 정리해 용돈을 벌었고 해마다 아버지와 임금 협상을 해 용돈을 올렸거든요. 딸이 열한 살이 됐을 때는 말라리아 주사를 맞혀 인도 갠지스 강 옆 빈민촌으로 봉사 활동을 보냈어요. 최근에도 아프리카 케냐의 빈민촌에서 봉사 활동을 하고 돌아왔어요. 어머니는 저희 형제 어느 누구도 과외 한 번 시키지 않고 방목하셨는데, 저 역시 제 딸에게 그랬어요. 우리 딸 하는 말이, 자기는 엄마 같은 딸이고 저는 딸 같은 엄마래요(웃음). 실제로 지금껏 딸의 숙제 한 번 봐주지 않았어요. 한국에서 외국인학교에 다녔는데 유학 가기 전 유일하게 시킨 공부가 한글과 한국 역사, 문화 공부였어요. 글로벌 인재로 키우되 뿌리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역시 그때 가르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일생 최대 소명은 북한 돕는 것
▼ 최근 ‘진생쿠키’ 발언(여성들이 육아 때문에 일을 못한다고 하는데, 아이 젖 먹이면서 웰빙 진생 쿠키를 만들었다고 구글에 올리면 전 세계에서 주문을 받을 수 있는데 왜 젊은이들이 수동적으로 대응하느냐라고 말해 논란을 빚었다)이 화제였습니다. 김 위원장이 육아의 고통을 모른다는 비난의 목소리도 높은데요.
“육아의 고통은 저 역시 많았어요. 특히 딸이 생후 8개월 때 심각한 화상을 입어서 죽다가 살아났어요. 일주일 동안 의식 불명 상태였는데 저 역시 중환자실에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3개월 반을 살았죠. 의사들은 아이가 죽을 거라고 포기하라고 했어요. 하지만 그때 처음으로 기적을 체험했어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그날 아이가 거짓말처럼 ‘응애’ 하고 울음을 터뜨리면서 소생했습니다. 하지만 그 후유증으로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 말을 못하고 자폐 비슷한 증상을 보였어요. 고열로 두뇌에 손상을 입었던 거죠. 또 온몸을 미라처럼 붕대로 친친 감고 살았고요. 단 하루도 울지 않은 날이 없었어요. 아이를 일반 초등학교에 입학시키려고 데려 갔더니 특수학교에 가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가슴이 무너지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정신이 아득해요. 다행히 한 선교사님이 자신이 아이를 맡아 돌보겠다고 하셨고, 그때부터 아이의 말문이 서서히 트이더라고요. 그때 경험이 없었다면 오늘의 김성주는 없을 거예요. 생명의 소중함과 겸손함을 배웠고, 지금 우리가 두 다리로 멀쩡하게 걸어다니는 게 그냥 평범한 게 아니라 하루하루가 기적이란 걸 그때 알았죠.”
▼ 앞으로 정치는 어떤 식으로 참여할 생각인가요.
“선대위원장까지 했으니 앞으로 정치에 욕심을 낼 거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전혀 아닙니다. 저는 종군하러 왔고 봉사하고 깨끗이 물러날 거예요. 딸에게도 그렇게 약속했어요. 처음 박근혜 캠프에 들어가겠다고 했을 때 딸이 울면서 말렸어요. 그때도 같은 말로 딸을 설득했어요. 제가 앞으로 해야 할 필생의 일은 북한이 열리는 걸 준비하는 거예요. 지금 회사를 열심히 키우는 이유 역시 전 재산을 북한을 위한 일에 바치기 위해서예요. 이건 새누리당의 입장이 아니라 개인적인 소신입니다. 은퇴 후에는 북한에 가서 봉사할 생각이에요. 그때는 북한이 열릴 것이고 우리의 형제자매들을 품고 싶어요. 그러려면 남한의 경제가 강해져야 하고 안정된 기반 위에서 경제 부흥으로 통일을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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