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꿈을 꾸는 기계’ ‘춤추는 가면: 어둠 먹는 기계’ ‘늑대의 침묵: 비밀 지키는 기계’. 공상과학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런 기계들이 진짜 존재한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더 재미있을 것 같다. 이런 제멋대로의 상상을 현실 세계로 옮겨오는 이들이 진짜 있다. 설치미술 작가인 우주(36), 림희영(33) 씨 부부다.
나무를 정교하게 조각해 만든 톱니바퀴가 기계를 움직인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톱니바퀴가 나대신 나쁜 꿈을 꿔준단다. 이름도 ‘나쁜 꿈을 꾸는 기계’다. 핑킹가위처럼 생긴 기계 아래의 나무가위는 악몽과 나 사이의 선을 뚝 잘라줄 것처럼 움직인다. 다음 작품은 늘어선 가면 위에 달린 뱀 모양의 금속이 무언가를 유혹하는 듯 움직인다. ‘춤추는 가면: 어둠 먹는 기계’다. 유혹의 대상은 어둠이다. 모인 어둠은 이빨 달린 왕관 속으로 들어간다는데 입을 닫아 이빨이 어둠을 삼키면 내부에서 빛이 나온다. 비밀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지켜준다는 ‘늑대의 침묵’이라는 작품은 비밀에 다가가려는 사람에게는 늑대가 털을 세우듯이 기계의 ‘털’이 비쭉 선다.
이 독특한 기계들 외에도 상상 속 기계를 만드는 토대가 되는 드로잉 작품 중에서는 ‘축지법 기계’ ‘우울한 테이블-떨어뜨리는 기계’ ‘사인하는 기계-유명해지고 싶은 기계’ 등 공상과학에서나 존재할 법한 기계들도 있다. 이 자체가 형상화된 것이 신기할 뿐 아니라 엉뚱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몇 가지 기계에는 물욕도 생긴다.
두 사람은 상상 속 기계를 드로잉, 컴퓨터 3D 작업, 가공 및 조립 작업을 통해 현실로 끌어온다. 초창기에는 기계를 만드는 대신 영상을 통해 ‘판타지의 현실화’라는 그들의 작품 세계를 표현했는데, 갈수록 한계점이 드러나 나무와 금속 등을 사용해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기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방법 다르지만 모로 가도 같은 목적지로 향하는 두 사람
1 ‘나쁜 꿈을 꾸는 기계’. 2 ‘춤추는 가면: 어둠 먹는 기계’. 3 ‘설계자들 1, 2’. 우주·림희영의 작품은 기괴해 보이기도 하지만 우리 내면의 상상을 보여준다는 데 의의가 있다.
우주·림희영 작가는 부부이기 전 중앙대 조소과 선후배로, 동료로서 오랜 시간 함께 작업을 해왔다. 군복무 후 복학한 우주 씨와 신입생 림희영 씨는 같은 수업을 듣다가 캠퍼스 커플이 됐고, 2002년 공모전을 준비하면서 공동 작업을 시작해 지금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부부로 살아온 시간보다 예술적 동지로서 함께한 기간이 훨씬 긴 셈이다.
서울 종로구 사간동 갤러리현대의 실험 전시 공간인 ‘16번지’에서 개인전 ‘핑크로드’가 열려 이들 부부를 만나러 갔다. 한눈에도 외모가 닮은 것은 아닌데 느낌만큼은 비슷해서 오누이 같다. 두 사람은 흰 티셔츠에 파란색 바지를 입고 나타났다. 일부러 커플 룩을 선택했느냐고 하자 동시에 아니라고 손사래를 친다. 옷을 골라 입고 보니 닮은꼴이 됐단다. 만난 지 10년, 결혼 3년 차 부부지만 두 사람은 아직도 ‘남편’ ‘아내’라는 말이 어색하다며 ‘우주 씨’ ‘희영 씨’라 부른다. 연애도 오래, 공동 작업도 오래 하다 보니 “부부라기보다 법적으로 허락된 동거를 하는 것 같다”며 웃는다.
아무리 공동 작업을 오래 했다 해도 작업을 하다 보면 생각이 어긋나는 지점이 있지 않을까? 대놓고 언제 싸우느냐고 물었다. 남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다툰다기보다 남자와 여자는 사용하는 단어가 다르구나 생각하죠. 작품 구상을 한참 하다가 제 생각을 말하면 희영 씨가 그건 아닌 것 같다고 해요. 저도 희영 씨가 하는 말이 이해가 안 될 때가 있죠. 그래서 생각한 것을 각자 만들어서 ‘짠’ 하고 내놓으면 결론이 같아요. 왜 우리가 논쟁을 했는지 모를 정도로요. 그래서 이제부터 각자 생각한 것을 말로 하지 않고 보여주기로 했죠.”
각자 취향대로 꺼내 입은 옷이 자연스럽게 커플 룩이 될 만큼 생각이 닮은 부부이니 작업에서의 호흡 일치가 이상할 게 없다. 희영 씨는 “일단 만들고 싶은 게 있으면 아이디어부터 마구 던져본다”고 했다. 아무래도 아내보다는 기계장치와 더 친숙한 우주 씨가 상상에 현실감을 부여하는 장치의 움직임을 담당한다. 때로는 아내의 상상력이 너무 앞서가 제작이 불가능한 경우가 있다.
“움직이는 기계를 만들다 보니 희영 씨가 옆에서 ‘이렇게 움직이게 해보자’ ‘저런 것도 넣어보자’고 주문을 해요. 욕심이 좀 많아요. 저는 좀 더 현실에 기반을 두어서 만들려고 하고, 희영 씨는 처음 했던 상상을 지키려고 애써요. 그렇게 한참을 밀고 당기면 최대한 우리가 만들고자 했던 작품이 탄생하죠.”
우주·림희영 부부의 작품은 현대미술 중에서도 움직이는 예술, 즉 키네틱 아트에 속한다. 국내에서는 아직 생소한 분야라 일반 회화나 조각과 비교할 때 ‘잘 팔리는 작품’과는 거리가 멀다. 게다가 작품을 만들려면 나무를 깎고 금속을 다듬어야 해서 작업실이 ‘공장’ 수준이다.
“제작 과정에서 소음이 심해 주위에서 항의도 많이 들어왔어요. 집주인이 나가는 걸 보고 ‘윙’하고 기계를 돌리고, 돌아오면 바로 끄고 했죠. 한 번은 나무 태우는 작업을 하다가 연기 때문에 불이 난 줄 알고 난리가 난 적도 있어요.”(우주)
“작년 여름 작업실이 강서구의 반지하에 있었는데 홍수로 물에 잠겼어요. 큰 피해를 입은 저희 작업실을 본 선배가 안타까워하며 경기도 파주에 있는 자신의 집 1층을 내주셨어요. 그 덕분에 지금은 아무 때나, 밤늦게까지, 다른 사람 눈치 안 보고 일할 수 있어요. 전화위복이 됐죠.”(림희영)
힘들었던 시절조차 “지금은 다 괜찮다”며 웃으면서 말하는 두 사람의 표정이 해맑다. 작품만으로는 먹고살기 힘들어서 남편은 생계형 일도 병행하고 있지만, 두 사람이 상상하던 세계가 현실이 될 때 즐거움을 생각하면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인터뷰를 마치고 사진 촬영을 하는 부부를 지켜보던 갤러리현대의 아트컨설팅팀 김영경 실장은 기자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한국에서는 아직 키네틱 아트 작품이 잘 판매되지 않아요. 그래도 얼마 전 해외 바이어가 왔을 때 두 분의 작품을 보여줬더니 반응이 좋았어요. 희소성이 있고 작품이 유쾌해서 해외에서 먼저 인정받을 가능성이 크죠.”
무한 긍정 에너지를 지닌 이들 부부는 언젠가 ‘보고만 있어도 힘이 나는 기계’를 턱 내놓을 것 같다. 이번에는 기자의 개인적인 주문. “두 분, ‘출퇴근 시간 반으로 줄여주는 기계’는 만들 생각이 없나요? 꼭 필요해서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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