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 6일. 미국 백악관에서 오바마 대통령의 주례 연설이 있던 날이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날 정부의 중소기업 자금 지원에 대해 발표하면서 한 한인 기업의 성공 사례를 소개했다. 그 기업은 ‘필로스 테크놀러지’. 전 삼보금속 창업자 고종호(67) 필로스 그룹 회장이 1993년 미국 시카고에 세운 열처리 전문 기술 회사다. 금속에 티타늄을 침투시켜 내열성과 강도를 높이는 ‘티타늄 나노 열처리 기술’을 보유한 이 회사는 금형 산업의 발전뿐 아니라 자동차 부품 산업과 우주항공 산업 전반에 이바지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주례 연설이 있기 전날 아이폰을 생산하는 타이완 폭스콘 사와의 회의 때문에 중국 선전에 아들(고봉섭 필로스 테크놀러지 대표)과 있다가 백악관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어요. ‘오바마 대통령의 주례 연설에서 필로스 그룹과 기술 이야기를 해도 좋겠느냐’고 연락이 와서 깜짝 놀랐죠.”
10년 이상 쓰는 명품 주방기구 만든다
고 회장의 아들 고봉섭(사무엘 고) 대표가 이끄는 필로스 테크놀러지는 미국에서 이 기술을 활용한 금형, 자동차 변속장치와 엔진, 우주 항공 부품 등을 생산해 포드, 크라이슬러, 할리 데이비드슨 등 쟁쟁한 세계적 기업에 납품을 해왔다. 최근 필로스 그룹은 조리기구 시장에도 진출했다. 고 회장의 딸 고지승 총괄책임이사가 이끄는 필로스C·S를 통해서다. 이 회사는 2004년 국내에 설립한 티타늄 열처리 용품업체로 티타늄 나노 열처리 기술을 주방용품에 접목해 고강도의 기능성 칼, 가위, 프라이팬 등을 출시하고 있다.
“티타늄 나노 열처리 기술은 우주 산업부터 방위 산업, 의료기구 산업 등 전반적으로 적용되는 기술이에요. 저는 조리기구에 우리의 기술을 적용해서 주방 문화 자체를 바꾸고 싶어요.”
그는 10년 이상 쓸 수 있는 명품을 만들어 주방 문화의 품격을 높이겠다고 했다. 필로스의 조리기구는 금속에 나노 티타늄을 침투시켜 표면을 강화해 내구성을 높였다. 쉽게 벗겨지지 않고, 그 자체로 광촉매 역할을 해 음식 고유의 맛을 살려준다. 이 같은 제품 홍보를 위해 필로스 그룹이 선택한 건 입소문 마케팅.
“우리 제품으로 고기도 구워서 맛보고, 티타늄 골프채로 공도 쳐보는 거죠. 그만큼 제품력에 자신이 있거든요. 부산의 한 아파트 동호회에서 시연회를 해달라고 부탁을 한 적이 있어요. 저희는 어디든 찾아갑니다. 거기서 주부들이 직접 필로스 제품으로 음식을 만들어 맛보면 소문이 확 퍼지는 거든요. 싼 게 비지떡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제대로 된 명품 프라이팬, 칼 하나 사서 건강한 음식을 조리해 먹고 몸까지 건강해지면 좋지 않겠어요. 광고비가 줄어들어 제품 가격의 거품을 뺄 수도 있고요. 시간은 걸릴지 몰라도, 그만큼 자신 있어요. 써보면 살 사람은 사거든요.”
제품이 나오면 제일 먼저 고 회장의 아내가 테스트한다. 그는 “아내가 ‘야당’ 같은 존재”라며 웃었다.
“상품을 개발하면 아내가 6개월에서 1년 가까이 써보고 검증을 해요. ‘아, 그렇게까지 까다롭게 하느냐’고 말해도 소비자가 써봐서 정말 우수하다고 증명해줘야지, 조금이라도 하자가 있으면 쌓아 올린 공이 다 무너진다고 생각하더라고요. 회사 직원들도 제품이 나오면 직접 불판에 고기를 구워서 먹어봅니다. 그렇게 수십 차례 테스트해서 제대로 된 제품이 나오게 되는 거죠.”
인터뷰 도중 커피가 나왔다. 그는 티스푼을 집어들더니 설명을 이어갔다.
“이 티스푼 하나 만드는 데도 1년 걸렸어요. 무광에 회색인데 이게 티타늄 색깔이에요. 이 티스푼이 촉매 작용을 해서 차나 커피의 잡스러운 맛을 제거해줍니다. 양주 목 넘김도 좋게 해주고요.”
고 회장은 실제로 여행할 때도 자사 제품을 가지고 다닌다고.
“우리가 만든 프라이팬에 음식을 구우면 잡냄새가 없고 타지 않아서 고기 겉과 속이 똑같이 익어요. 육즙이 살아서 맛있죠. 특히 노모께서 빈대떡을 참 좋아하시거든요. 종로에서 빈대떡을 사와서 우리 프라이팬에 다시 구워 드리죠. 기존 음식도 여기에다 다시 하면 참 맛있어요. 기름 냄새나 콩나물 특유의 냄새, 생선의 비릿한 냄새를 나노 티타늄이 분해해주죠. 그래서 해외에 나갈 때도 불판이랑 칼, 가위 다 가지고 다녀요(웃음).”
고 회장의 목표는 필로스 제품을 한국에 온 외국인들이 필수로 사가는 관광 상품으로 만드는 것. 현재 전라북도 군산에 관광객이 필로스 제품을 체험하면서 투어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서울 여의도 사무실 14층에도 제품 시연을 위한 장소가 마련돼 있다.
“한국 사람들이 외국 나가면 휘슬러 제품이나 쌍둥이칼 같은 그 나라 특산품을 사오잖아요. 사실 오랜 역사의 브랜드 가치 때문이지 자체의 기능은 대단한 게 아니거든요. 외국인들에게 K팝이 알려졌지만, 정작 관광객들이 몰려와도 사갈 한국 물건이 없어요. 스위스의 잭나이프, 독일의 쌍둥이칼처럼 한국에도 명품 관광 상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 고종호 회장의 딸인 고지승 필로스C&S 총괄이사는 경영뿐 아니라 홍보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사진은 그가 모델로 출연한 필로스 제품 광고. 2 배재고등학교를 졸업한 고 회장의 신상품 출시를 축하하려 배재총동창회 선후배가 모였다. 고종호 회장의 후배인 탤런트 노주현의 모습도 보인다.
아버지가 물려준 빚과 가난이 나의 힘
고 회장은 1972년 스물일곱 살에 종업원 세 명과 함께 서울 구로구 고척동 공장에 세를 얻어 ‘삼보금속공업사’를 세웠다. 10년 만에 삼보금속을 탄탄한 기업으로 키워냈지만 노사 문제로 어려움을 겪다가, 미국 앨라배마 주지사가 한국에서 진행한 투자 유치 설명회에 참가한 뒤 마음을 굳혔다. 미국에서 티타늄 나노 열처리 기술을 완성하겠다는 것. 1993년 초, 그는 아내와 다섯 자녀를 이끌고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외국에서 기술을 인정받고 세계 시장에서 경쟁하겠다는 꿈도 함께안고 떠났다.
“한국에서도 그랬지만, 미국에서도 바닥부터 시작했어요. 제 아버지는 수학 교사였어요. 한데 대학 전공과는 달리 도금을 연구하셨죠. 많은 사람들이 20대에 시작해 이런 기업을 일궜다는 단면만 보고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많지 않을까 생각하시던데 저, 부잣집 아들 아니에요. 고지식하고 연구와 개발밖에 모르던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것이라곤 빚과 가난뿐이었죠. 하지만 그렇기에 저는 부모님을 존경해요. 고난을 이기는 능력을 주신 거잖아요. 때문에 누구보다 부모님을 사랑하죠. 쉽게 번 돈은 쉽게 사라져요. 요즘 젊은이들은 꿈이 없는데, 그러면 안 돼요. 고진감래라고, 고생고생해서 노력한 것만이 내 자산이 되는 거죠.”
타국 생활이 쉽지만은 않았다. 티타늄 열처리 기술 하나 가지고 시작한 사업. 앨라배마에서 처음 안경테 제조 사업을 시작했지만 어려움이 닥쳤다. 인종 차별과 언어 문제였다. 영어가 되지 않으니 영업도 쉽지 않았다. 사업 실패의 쓴 잔은 ‘내가 죽으면 보험금으로 가족들이 잘살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까지 하게 만들었다. 실제로 자살 시도를 했지만, 그런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은 아내가 흘린 눈물의 기도였다. 다섯 명의 아이들과 사랑하는 아내를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티타늄 나노 열처리 기술 특허 출원에 총력을 기울였다. 노력이 결실을 본 건 미국에 온 지 10년째 되는 해였다. 원자력 발전소에 제품을 납품하기 시작하며 미국 중소기업청 회원사의 스타가 됐다. 2009년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올해의 중소기업인상 시상식. ‘필로스 테크놀러지’는 동양인 기업으로는 유일하게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고 회장은 “미국은 기술을 우대해주는 나라였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라며 “인생에서 10년 주기가 굉장히 중요하더라”라고 웃었다. 칠순을 바라보는 정정한 고 회장은 권위적인 게 싫어 인터뷰할 때 넥타이도 매지 않는다고. 건강 비결을 묻자 “티타늄을 오래 만져서인지 몸도 마음도 건강한 것 같다”라며 웃었다.
티타늄 스케이트 날 상용화 눈앞
권위적인 게 싫어 인터뷰할 때 넥타이를 매지 않는다는 고종호 회장은 소비자와 생산자 모두 고정관념을 깨고 ‘혁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필로스 그룹 제품 카탈로그와 광고 포스터에서는 긴 웨이브 머리의 늘씬한 여성을 만날 수 있다. 필로스의 프라이팬과 골프채를 들고 미소 짓고 있는 여인은 고 회장의 딸 고지승 필로스C·S 총괄이사. 학창 시절 무용을 전공한 고 이사는 아버지 고 회장으로부터 누구보다도 엄격한 경영 수업을 받았다. 고 회장은 “여성과 함께하는 주방용품을 개발하다 보니 딸의 섬세한 예술적 감각이 경영에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고 딸 자랑을 아끼지 않았다.
맨주먹으로 시작해 세계적인 기업을 키워냈지만 고 회장에겐 아직 갈 길이 남아 있다.
“제 목표는 한국이라는 나라를 키우는 겁니다. 한국을 빛낼 3년 계획을 세우고 있어요. 필로스 그룹에서 개발한 스케이트 날의 상용화가 거의 마무리 단계입니다. 세계 스케이트 선수들이 쓰는 날은 대부분 네덜란드 제품인데, 올해 가을부터 국산 스케이트 날로 바꾸는 것이 목표죠. 0.001초를 다투는 빙판에서 필로스의 스케이트날을 타야만 세계적인 선수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예전부터 인터뷰할 때마다 피겨화를 완성하면 제1호는 김연아 선수에게 주고 싶다고 공언했는데, 마침 김연아 선수가 2014년 소치 동계 올림픽까지 나갈 거라고 하더라고요. 꼭 선물할 생각입니다(웃음).”
그룹명 ‘필로스’는 ‘하나님의 영원한 친구’라는 뜻이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고 회장은 “‘세계인의 친구가 되는 기업’을 만들겠다는 마음이 담긴 이름”이라고 했다. 평생을 긍정 마인드로 살아온 그는 “주부들이 자신의 주방에 필로스 제품이 있다는 데 자부심을 느끼도록 하겠다”고 했다. 된다고 생각하면 된다. 필로스 그룹의 사훈이다. 세계 산업을 제패한 우리 기술로 만든 명품 주방기구가 각국 가정에 한 자리씩 차지할 날도 그리 멀지 않아 보인다.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