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안경 쓴 앳된 대학생의 모습은 없었다. 찻집에는 선글라스를 끼고 가벼운 정장 차림의 30대 청년이 앉아 있었다. 가벼운 악수를 나누자 조승연(30) 씨는 특유의 달변으로 10년의 삶을 짧게 쓱 훑어준다.
“여자 친구와 헤어졌고, 뉴욕대를 졸업하고 프랑스에서 미술사를 공부했어요. 27세에 군대를 갔고, 제대한 뒤 라이프스타일 컨설턴트로 일하면서 클래식 음악, 미술, 인문학 강의를 하고 있어요. 세상에 타고난 천재는 없는 것 같아요. 지식의 그물을 얼마나 촘촘하게 짜두었는지, 밧줄과 밧줄을 얼마나 튼튼하게 매듭 지을 준비가 됐는지에 따라 공부의 신이 될 수도 노예가 될 수도 있어요.”
조씨는 뉴욕대(NYU) 스턴 비즈니스 스쿨을 졸업했다. 대학을 다니면서는 클래식에 심취해 줄리어드 음대 야간 과정에 입학하기도 했다. 졸업 후 누구나 월스트리트로 갈 것이라고 믿었지만 프랑스 소르본대 문화어학원에서 외국인을 위한 프랑스 문학 대학 준비과정을 이수하고, 프랑스 국립 미술사 고등교육기관인 ‘에콜 뒤 루브르’에 입학해 미술사를 공부했다.
“어머니(이정숙 KBS 전 아나운서, 커뮤니케이션 전문가)의 영향이 컸어요. 항상 좋아하는 것은 끝을 보라고 강조하셨거든요. 대학 친구들은 교양 과목도 경영학에 도움이 되는 것을 많이 들었어요. 저는 클래식이 좋았죠. 그래서 무작정 줄리어드로 갔어요. 베토벤 모차르트 드뷔시 등 음악이 세계 문화에 끼친 영향을 배우며 음악에 더 깊이 심취할 수 있었어요. 공부 그물망이 더 촘촘해진 것이죠.”
대학 교양 과목까지는 이해가 간다. 하지만 경영을 전공한 이가 느닷없이 미술사를 전공하기 위해 월가의 러브콜을 뿌리친 것은 이해하기가 좀 어렵다.
“하하하. 제 교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교수님은 선생할 것도 아니면서 어째서 그런 선택을 했냐고 되물었죠. 저는 그때 이미 1, 2년의 단기 성과보다 평생의 마스터플랜을 세워놓았어요. 월가로 가면 당장 많은 연봉을 받을 수 있지만 제 미래의 모습은 아니었죠.”
조씨는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할 때 목표점에서 거꾸로 내려온다고 했다. 보통 사람들이 계획하는 명문대 입학→좋은 학점→대기업 입사→결혼→아파트 장만→자식 교육 등 이런 순서로 가면 안 된다는 것. 이렇게 가다 보면 끝도 없고, 목표도 없고,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보장도 없다고 강조했다. 일리가 있다.
“인생의 목표를 명확하게 설정해야 해요. 그 목표에서 한 계단씩 내려오다 보면 결정의 순간을 만나게 되죠. 그게 행복이든 명예든 사랑이든 목표 지점에서 내려오면 더 분명하게 보인답니다.”
10년 전 그는 각종 인터뷰에서 문화 콘텐츠 비즈니스를 하는 것이 꿈이라고 밝혔다. 경영과 음악을 공부했기 때문에 미술사를 더 공부하는 것이 남들에게는 이상하게 들렸겠지만 조씨에게는 꿈을 이루는 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는 꿈을 이뤘다. 미술사를 공부하겠다는 경영학도 아들의 선택에 대해 부모는 뭐라고 말했을까.
“저와 비슷한 생각이셨어요. 어머니는 늘 지금 세상에 굶어 죽는 사람은 없다. 돈이나 성공에 목말라하지 말고 죽을 때 후회하지 않는 결정을 내리라고 하셨어요.”
지금 사회가 원하는 인재는 인문학적 지식과 비판 능력 지닌 토털 인텔리
“뉴욕대를 졸업하고 월가로 진출했던 친구들 대부분이 지금 백수입니다. 그때는 저를 엉뚱하다고 생각한 그들이 지금은 다들 저를 부러워하죠.”
조씨는 최근 자신이 펴낸 ‘세계가 모셔가는 인재로 만들어주는 그물망 공부법’(나비)에서 정치 경제 사회 전반의 최고가 되려면 ‘토털 인텔리’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토털 인텔리는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가 창안한 개념으로,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나 영국 신사 시대에 유럽 귀족 자제들이 목표로 삼았던 최고의 인재상과 같은 개념이다. 다방면의 교양에 조예가 깊고 전혀 다른 분야에 몸담은 사람과도 그 분야에 관해 대화할 수 있는 사람, 높은 인문학적 지식과 비판적 사고를 바탕으로 뛰어난 문제 해결 능력을 갖춘 사람을 말한다.
그는 인문학은 오랫동안 ‘교양’이라는 이름 아래 부자들의 사교 도구로 여겨져 왔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유럽인들은 인문학을 ‘기초 밭 갈기’라고 부른다고. 쌀을 심어 잘 자라게 하려면 먼저 토양을 잘 고르고 갈아야 하듯, 공부를 잘하거나 인생을 잘 살려면 그 바탕이 되는 다양한 기본 지식의 발판을 마련해둬야 한다는 뜻이다.
“단순한 스펙을 쌓는 시대가 가고 있습니다. 정보기술이나 금융에서도 토털 인텔리가 각광받고 있지요. 사실 인문학이 정통이고 경영학은 여기저기 인류학이나 심리학 같은 학문을 조합한 것이잖아요. 광고학도 미술사에서 왔고, 금융은 수학과 물리학에서 왔고…. 긴 뿌리를 가진 학문을 공부해야만 성공할 수 있어요.”
그는 배경지식을 넓혀놓은 그물망 공부법으로 토털 인텔리가 되면 하나의 전공에 갇혀 살지 않아도 된다고 덧붙였다. 예를 들면 심리학을 전공한 사람이 경영컨설팅을 하면 대단한 도약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물망 공부법으로 공부한 사람은 마케팅과 심리학 모두 사람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고 연구하는 같은 종류의 학문이라는 것을 안다는 뜻이다.
조씨가 경영학을 전공하고 음악사, 미술사를 공부한 것이 지금 그를 라이프스타일 컨설턴트, TV 패션 프로그램 기획자, 작가, 클래식 음악 강연자로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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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엄마들 자식 사랑 대단하지만 한편으론 지나치다
뉴욕대에서 비즈니스를 전공한 조승연 씨는 줄리어드 음대 야간과정을 거쳐 프랑스에서는 미술사를 공부하는 등 다방면의 지식을 쌓았다.
조씨의 어머니 이정숙 씨는 의도적으로 자식을 방치하는 것이 훌륭한 엄마라는 교육관을 갖고 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이들의 매니저 노릇을 하는 대한민국 학부모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교육관이다. 사랑으로 키워도 부족할 판에 방치를 하다니 말이다.
“어머니가 일을 하셨기 때문에 형과 저는 도우미 아주머니와 집에 있었죠. 엄마가 늘 집에 있는 친구들이 부러울 때도 있었지만 세련되고 지적이고 정확한 엄마의 모습이 좋았어요.”
조씨는 갑자기 왜 부가 되물림되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선뜻 답하지 못 하자 금방 이야기를 이어간다.
“가정 교육 덕분이에요. 그들만의 오랜 전통을 가지고 노하우가 전수되는 것이죠. 부모는 자식보다 인생을 먼저 살아온 사람들이에요. 부모에게 그런 노하우를 전수받지 못한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죠.”
그는 공부는 태어나자마자 부모가 보여주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강조했다. 숨 쉬는 것처럼 부모의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아이의 몸에 새겨지는 것이라고. 부모와 자식이 같은 혹은 비슷한 직업을 갖는 것도 모두 그런 이유 때문이다.
“며칠 전 한 식당에서의 일이에요. 엄마가 왜 성적이 오르지 않느냐고 아이를 닦달하더군요. 엄마는 계속 아이에게 이유를 답하라고 소리쳤지만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어요. 엄마가 과외 선생 욕을 하며 당장 바꾸겠노라고 했어요. 그래도 끝까지 아이는 대답하지 않더군요. 슬펐어요.”
조씨는 한국 어머니들의 자식 사랑이 한편으로는 대단하고 한편으로는 지나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부모와 자식 간에 지켜야 할 선이 있어요. 그게 있을 때 소통할 수 있는 거지요. 부모는 내가 갖고 싶은 것을 모두, 무조건 사주는 사람도 아니고 자식은 부모의 못다 이룬 꿈을 이뤄주는 인형도 아니거든요.”
조씨가 소개한 독일과 프랑스 엄마 이야기다.
독일에서는 아이가 울면서 엄마에게 춥다고 문을 닫아달라고 하면 엄마는 문을 활짝 열어놓고 나가버린단다. 프랑스에서는 시간을 정해놓고 아이에게 간식을 준다. 그 전이든 이후든 아이가 간식을 달라고 하면 주지 않는다고. 가혹하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문을 닫아주지 않은 부모는 아이가 약하게 자랄까봐 강하게 만들기 위해 그랬던 것 같고, 간식 시간은 아이에게 시간 개념을 만들어주죠. 간식을 한두 번 안 먹는다고 죽는 것은 아니죠. 그래야 엄마도 자신을 위한 시간을 계획할 수 있지요.”
조씨는 남과 다르게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이 원하는 일을 찾고, 꿈을 향해 달려갈 수 있었던 힘은 어머니의 ‘의도된 방치’ 덕분인 것 같다고 했다.
“어머니가 퇴근할 시간이 되면 언제나 긴장을 했어요. 엄마와 약속했던 일 중 무엇을 안 했는지 점검하면서. 자연스럽게 약속을 지키는 훈련이 됐죠.”
그렇다면 전업주부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꼭 일하는 엄마가 멋있다는 말은 아니에요. 본인이 재미있게 살고 봉사든 취미 생활이든 자신의 일로 바빠야 한다는 것이죠. 엄마는 집에서 살림 하고 아이들을 따라다니며 잔소리만 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 아이의 뇌리에 박혀야 한다는 겁니다.”
그는 아이의 눈에 비치는 엄마의 모습이 멋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이가 엄마를 팬으로 생각할 때 공부든 인생이든 무엇이든 소통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아이의 손끝에서 그림자처럼 존재하는 엄마보다 무슨 일을 하든 프로처럼 열정적으로 일하는 엄마를 아이들이 원한다.
“아이가 사춘기를 지나면서도 ‘엄마처럼 아빠처럼’이라고 이야기한다면 정말 소통이 제대로 이뤄진 가정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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