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과의 소통이 어긋나자 괴로움 끝에 자살을 택한 고등학생 기태(영화 ‘파수꾼’). 참혹한 전쟁에서 입은 내면의 상처가 깊은 모르핀 중독의 청년 중대장 신일영 대위(영화 ‘고지전’). 이는 배우 이제훈(28)에게 지난해 신인상 수상의 영광을 안긴 작품들이다. 2011년 ‘신인상 5관왕 그랜드슬램(대종상·청룡영화상·부일영화상·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대한민국 문화연예대상 영화 부문)’을 달성한 그는 충무로 최고의 다크호스다.
충무로는 그의 양면적 매력에 주목하고 있다. 청춘의 불안함과 순수함이 뒤섞인 눈빛, 우수와 분노가 공존하는 표정. 고등학생부터 풋풋한 첫사랑의 감정을 간직한 대학생, 모르핀 중독의 군인, 동성을 사랑하는 남자까지 연기 폭도 넓었지만 맡은 캐릭터마다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영화 ‘고지전’을 함께 촬영한 배우 신하균도 “(이제훈이) 잘될 줄 알았다”며 치켜세울 정도로 그의 열정은 대단하다. 그는 신인상을 휩쓴 소감을 묻자 “연기를 하기로 마음먹고 늘 꿈꿔왔던 순간이 드디어 왔다”고 했다.
“기분이 무작정 좋기보다는 복잡해요. 신인상은 앞으로의 제 행보를 지켜보겠다는 의미잖아요. 허투루 시간을 쓰지 말아야죠.”
이제훈+연기=무한대
어릴 때부터 이제훈은 장기자랑 시간에 춤과 노래를 선보이면 남들의 이목을 끌고 박수를 받는 것이 좋았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연극영화과에 가려고 했지만 부모의 반대에 부딪혔다. 수학을 좋아해서 2003년 고려대학교 생명정보공학과에 입학했다. 넘치는 끼를 학내 댄스 동아리에서 힙합을 추며 풀어봤지만 뭔가 부족했다. 더 늦기 전에 하고 싶은 것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2학년 때 휴학계를 내고 극단과 독립영화계를 기웃거렸다. 오디션을 보고 뮤지컬 무대에도 섰다. 처음에는 한두 해만 연기해보고 이 길이 아니다 싶으면 돌아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하면 할수록 연기에 빠져들었고, 인생을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학교로 돌아가는 대신 2008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연기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지금 충무로에서 가장 ‘핫’한 스타가 됐다. 처음엔 아들이 연기자가 되는 것을 반대하던 부모님도 신인상을 연달아 수상하자 “진작 연기하게 할걸”하며 흐뭇해했다.
이제훈은 SBS 수목드라마 ‘패션왕’ 주연 자리를 꿰차고 본격적인 TV 시청자 공략에 나섰다. ‘패션왕’은 패션을 모티프로 젊은이들의 도전과 성공, 사랑과 욕망을 담은 작품이다. 드라마 ‘별은 내 가슴에’ ‘천년지애’ ‘발리에서 생긴 일’ 등을 쓴 이선미·김기호 작가와 ‘불량커플’ ‘자명고’를 연출한 이명우 PD가 의기투합했다. 이제훈은 극 중 훤칠한 외모에 실력까지 갖춘 까칠한 재벌가 후계자 정재혁 역을 맡았다.
“젊은이들의 성공과 사랑을 여러 인간 군상을 통해 보여주는 시놉시스가 특히 마음에 들었어요. 부족함 없고 거칠 것 없던 인생에 영걸(유아인)과 가영(신세경)이 갑작스럽게 나타나면서 성공에 대한 집착과 사랑에 대한 갈등을 느끼고 변화하는 인물을 맡았어요. 시청자들 눈에 어떻게 비칠지 고민이 돼 그만큼 대본을 자주 보게 되네요. 1회부터 연기를 되짚으며 배역에 녹아드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어요. 지켜봐주세요.”
그는 “새롭게 창조해야 하는 인물이라 부담이 있다”라며 “정재혁은 접근하기 어려울 정도의 날카로운 인물이지만, 어느 정도는 인간적으로 보였으면 한다”라고 밝혔다. 재벌 후계자에 ‘차도남’은 처음 해보는 캐릭터라 대본을 보면서 표정이나 대사의 강약을 많이 연구한다고.
“드라이아이스처럼 차갑고 손이 닿으면 베일 듯 냉정하고 날카로운 인물로 그리려고 해요. 유아인 씨와는 극 중 라이벌인데 사이가 너무 좋아서 걱정이에요. 서로 극과 극의 감정을 표출해야 하는데, 아인 씨 얼굴을 보면 웃음부터 나요. 작품 촬영 전부터 서로의 팬이었어요.”
유아인은 지난해 말 한국아이닷컴과의 인터뷰에서 “또래 배우 중 관심 있게 지켜본 사람이 있냐”라는 질문에 “두 명 있다. 김수현과 이제훈”이라며 “두 사람 모두 나를 신경 쓰게 만든다”고 답한 바 있다. 이제훈은 “출발이 다른 두 남자의 성공 스토리를 각기 다른 색깔로 풀어낼 것”이라며 작품을 기대해달라고 말했다.
이제훈-연기=제로
그는 올해 개봉 예정인 영화 ‘점쟁이들’에서는 공학 박사 출신의 괴짜 점술가 역을 맡았다. 그동안 무겁고 잔향이 오래가는 배역을 주로 맡았다면 이번에는 가볍고 활달한 캐릭터로 연기 스펙트럼을 넓힐 요량이다. 연기하는 매 순간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는 이제훈. 이유는 하나다. 나중에 자신의 인생을 돌이켜봤을 때 후회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연기에서 중시하는 것은 ‘진정성’이다. 영화 ‘건축학개론’ 개봉에 맞춰 ‘무비위크’와 가진 인터뷰를 들여다보면 될성부른 나무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짐작해볼 수 있다.
“처음 연기를 시작할 때는 ‘진짜 열심히 해보자, 그러다 실패하면 다른 걸 열심히 하면 돼’라는 생각이었다면, 지금은 연기 말고 다른 건 못할 것 같아요. 생명공학과를 다니다가 그만두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에 들어가며 ‘한 5년 뒤에는 연기 잘하는 배우가 돼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막상 와보니 아직도 갈 길이 멀어요. 연기라는 게 할수록 어렵더라고요. 이젠 연기를 빼고는 이제훈이라는 사람을 이야기할 수 없을 만큼 큰 부분이 됐어요. 돌이킬 수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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