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끔찍했던 기억들
지난해 12월20일, 같은 반 학생들의 괴롭힘에 시달려온 중학생 권모군(14)이 A4 용지 4장의 유서를 남기고 자신의 집 베란다에서 몸을 던졌다. 이 사건으로 학교폭력의 심각성이 수면 위로 떠올랐고 여기저기서 질책과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권군이 유서에 남긴 내용을 보면 폭력이 어린아이의 육체와 영혼을 어떻게 병들게 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피아노 의자에 엎드려놓고 손을 봉쇄한 다음 무차별적으로 구타했어요. 또 몸에 칼 등을 새기려고 했을 때 실패하자 오른쪽 팔에 불을 붙이려고 했어요.” “라디오 선을 뽑아 목에 묶고 끌고 다니면서 떨어진 (과자) 부스러기를 주워 먹으라고 했어요.”
권군은 중학교 2학년 때 가해자 A군, B군과 같은 반이 되면서 친해졌다. 하지만 이들과 인터넷 게임 ‘메이플스토리’를 하면서 악몽이 시작됐다. 게임 아이템을 사고팔며 캐릭터 레벨을 높여가는 게임인데, A군이 게임을 잘하는 권군에게 자신의 ID로 게임을 해달라고 한 것이 발단이었다. 그러던 중 A군의 게임 아이템이 해킹을 당하자 권군을 대하는 A군의 태도가 돌변했다. A군은 권군의 부모가 맞벌이라는 사실을 알고 날마다 권군의 집으로 찾아가 게임 등급을 높일 것을 강요하며 폭력을 휘둘렀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A군은 10월 중순부터 두 달여간 권군을 39차례 폭행하고 금품을 빼앗았으며 같은 무리의 B군 역시 19차례에 걸쳐 권군에게 폭행을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은 권군에게 숙제를 대신하게 했고, 교과서를 찢거나 빼앗았으며 각종 심부름을 시키는 등 노예 부리듯 했다.
이들은 문자 메시지로도 권군을 벼랑 끝으로 몰았다. ‘답 늦을 때마다 2대 추가’ ‘(새벽) 2시까지 (게임) 계속해라’ ‘요즘 안 맞아서 영 맛이 갔네’ 등의 협박성 문자를 분 단위로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가해자들의 폭행은 유서에 드러난 것보다 더 심각했다. 다른 동급생 C군도 권군의 집을 수시로 드나들면서 폭력을 휘둘렀고, “친구가 세면대에 물을 받아놓고 권군의 머리를 눌렀다”는 진술까지 나왔다. 또한 이들은 권군의 집에 있던 목검과 단소, 격투기용 글러브 등 각종 도구를 이용해 권군의 엉덩이와 허벅지 부위 등을 상습 폭행했다.
또래에게 이처럼 끔찍한 가해를 받아온 권군은 결국 유서를 통해 부모에게 그동안 자신이 보인 이상 행동에 대해 이해를 구하며, 더 이상 불효하기 싫어 삶을 포기한다고 고백했다. 가족에 대한 사랑이 절절했던 권군은 유서 말미에 “가족과 떨어질 걸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며 자신이 없더라도 너무 슬퍼하지 말고 행복하게 잘 살라는 부탁의 말을 잊지 않았다.
권군 사건 직후, 권군이 다니던 D중학교에서 5개월 전에도 집단따돌림을 이유로 2학년 박모양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학교 측의 방만한 태도에 여론이 또 한 번 들끓었다. 박양은 절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다른 학생들로부터 왕따와 괴롭힘을 당하자 친구를 돕기 위해 나섰다가 끝내 변을 당했다. 고민 끝에 담임 교사에게 익명의 편지를 써 도움을 요청했지만, 교사는 반 학생 전체를 책상에 올라가 무릎을 꿇게 한 뒤 훈계를 했고, 이로 인해 박양은 친구들 사이에서 ‘밀고자’로 낙인찍혔다. 결국 심리적 압박감과 소외감을 견디지 못한 박양은 ‘나를 해친 아이들’ ‘나를 도와주려는 아이들’로 구분해 이름을 적은 쪽지를 외투 주머니에 넣고 인근 아파트에서 뛰어내렸다.
#끝까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자식을 잃은 슬픔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권군과 박양의 어머니를 대구 수성동 권군의 집에서 함께 만났다. 거실 테이블 위에는 초록색 가톨릭 기도서가 놓여 있었다. 성당에 다니는 권군의 어머니 임모씨(47)는 먼저 간 아들을 위해, 그리고 남은 가족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기도밖에 없다고 했다. 권군의 소식이 언론에 알려지자 누구보다 가슴을 쓸어내린 사람은 바로 박양의 어머니 김모씨(45). 김씨는 “딸이 그렇게 간 뒤 조금씩 마음을 가다듬고 있었는데, 권군의 사건을 듣고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중학교 교사인 임씨는 권군이 떠난 뒤 일상생활이 힘들어졌다고 고백한다. 아침에는 고1인 큰아들 등교 준비로 잠시 분주하지만 이후에는 하루 종일 집에서 공허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 다행히 방학이라 업무가 많지 않고, 학교 측의 배려로 급한 일은 집에서 처리하고 있다. 경남 안동에서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인 남편 또한 아들을 잃은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기자가 방문한 날에도 권군의 아버지는 아내에게 인터뷰를 맡긴 채 두 시간 가까이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집 밖을 나가는 게 두려워요. 자식 그렇게 만들어놓고 무슨 낯으로 돌아다니냐고 손가락질받을까 봐요. 무엇보다 아이에게 너무 미안하니까 예전처럼 밥 먹고, 얘기하고, 외출하는 것도 사치처럼 느껴져요. 주말부부로 지낸 남편도 평소 아이와 많은 시간을 함께하지 못하고, 아이 혼자 괴로워하게 만들었다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있어요. 큰아들도 동생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것에 너무 미안해하고요. 모든 가족이 힘겹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이미 반년이 지났지만 사람 대하는 게 힘든 건 박양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김씨는 “권군 어머니의 말에 공감한다”며 “우리도 처음에는 학부모 얼굴이라도 마주칠까봐 집 밖에 나가지 못했다. 또 아이를 못 지켰다는 죄책감 때문에 대인기피증까지 왔다”고 털어놓았다. 간호사로 일하는 김씨는 그 일 이후 직장을 옮겼다. 현재 다니는 병원에서는 그에게 이런 아픔이 있는지 전혀 모른다고 한다.
자라면서 말썽 한 번 피우지 않아 귀여움만 받고 자란 권군은 사건 당일에도 평소와 다름없이 편안한 모습을 보였다. 아침에 일어나 등교 준비를 하고, 교복을 입은 뒤 먼저 출근하는 엄마에게 “잘 다녀오세요”라는 인사까지 했다. 출근한 임씨는 몇 시간 뒤 권군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아이가 학교에 오지 않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순간 불안감이 엄습해온 임씨는 부랴부랴 집으로 차를 몰았다. 차가 신호에 멈췄을 때 휴대전화 단축키로 아이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없는 번호’라는 메시지가 흘러나왔다(권군은 사고 전날 엄마의 휴대전화에서 자신의 번호를 지웠다).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된 임씨는 아이의 전화번호가 도무지 생각이 안 나 남편에게 전화번호를 물어 다시 걸었지만 신호만 갈 뿐 응답이 없었다. 교통사고인가 싶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운전대를 잡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경찰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1층으로 오세요”란 말에 그는 순간 심장이 멎을 듯했다.
“하얀 천으로 덮여 있는 아이를 봤을 때 처음엔 우리 아이가 아니라고 했어요. 절대 그럴 리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천을 들치고 얼굴을 보니 우리 아이가 맞더라고요. 아이를 끌어안고 ‘아기야, 아기야’하고 불렀지만 아이는 대답이 없었어요. 그런데 아이 몸이 너무 따뜻한 거예요. 제 얼굴에 아이 손을 비비며 ‘아직 우리 아이가 따뜻해요. 빨리 의사를 불러주세요’라고 울부짖었지만 이미 의사가 사망 진단을 내리고 간 후였어요. 이건 분명 꿈이라고 생각했어요.”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자 문이 반쯤 열린 베란다 창문이 보였다. 집 안은 그가 출근할 때와 똑같았다. 소파 한 귀퉁이에 매트가 가지런히 정리돼 있었고 베란다 안쪽 거실 창문은 닫힌 채 바깥 창문만 열려 있었다. 권군의 유서는 평소 임씨가 퇴근 후 핸드백을 올려놓는 주방 쪽 다리미판에서 발견됐다.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쥔 임씨는 한 글자도 읽어 내려가지 못했다. 마지막에 써 있는 ‘사랑해요’란 문구만 겨우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박양의 어머니 역시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또렷하다. 어느 날 의기소침한 표정으로 학교에서 돌아온 박양은 몸이 아프다며 학원을 가지 않겠다고 했다. 평소와 다른 모습에 김씨는 아이에게 무슨 일인지를 물었고, 박양은 그제야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털어놓았다. 친구가 겪는 괴로움을 선생님께 편지로 적어냈는데, 단체로 벌을 받았고 다른 아이들이 자신이 편지를 썼다는 걸 알까봐 두렵다는 얘기였다. 김씨는 “우선 아이들에게 사실을 밝히지 말고, 선생님이 알아서 잘 해결해줄 테니 조금 더 기다려보자”며 아이를 다독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날 저녁 잠깐 친구 만나고 오겠다며 집을 나선 박양은 그길로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그전까지 우리 딸은 친구 문제로 고민해본 적이 없어요. 친한 친구들도 많았고 공부도 제법 잘했어요. 애니메이션 작가가 되는 게 꿈이라 집에서는 공부하는 시간 외에는 늘 만화를 그렸죠. ‘고양이’라는 닉네임으로 인터넷 카페도 운영했고요. 오빠와 사이가 참 좋아서 다들 부러워했었어요. 집과 학교에서 모두 모범적으로 생활하는 착한 아이였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지금도 이해하기 힘들어요. 아이가 용기를 내 편지를 썼을 때, 선생님께서 바로 단체로 벌을 주지 않고 일을 좀 더 부드럽게 풀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원망이 커요. 학교 측에 진상 규명을 요청해놓은 상태라 그날의 상황을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아이가 죽음을 선택했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얼마나 공포심이 컸으면, 학교에 가는 게 얼마나 두려웠으면 죽음이라는 마지막 선택을 했을지…. 아이의 마음 깊은 곳에 어떤 응어리가 있는지 끝까지 못 들어줘서 너무 미안해요.”
임씨 또한 “아이가 그 지경이 될 때까지 엄마인 내가 왜 아무것도 몰랐는지, 하루에도 몇 번씩 가슴을 친다”고 말했다. 물론 얼마 전부터 이상한 기미가 있긴 했다. 2학기에 들어서면서 아이는 돈을 달라는 말을 자주 했다. 돈이 왜 자주 필요하냐고 물으면 “먹고 싶은 게 많아요. 친구들이 매점에서 맛있는 거 사먹는 게 부러워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한창 식욕이 왕성한 나이기에 임씨는 아이에게 돈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인터넷 게임 중독에 대해서도 아이와 깊은 대화를 나눠봤지만 아이는 오히려 대수롭지 않다는 듯 “엄마, 요즘은 온라인 게임 하면서 친구들과 만나야 돼요. 제가 지금 사춘기잖아요. 남자아이들은 다 그래요” 하며 오히려 그를 안심시켰다. 또 팔에 든 멍자국을 보고 추궁하는 엄마에게 아이는 “체육 시간에 넘어졌다” “친구들과 단소를 갖고 놀다가 장난으로 맞았다”며 변명을 했다.
“살짝 의심은 갔지만 그때마다 아이가 태연하게 받아들이니까 더 이상 추궁하지 못했어요. 사실 아이가 집에서는 조금도 우울한 내색을 하지 않았어요. 늘 제 앞에서는 춤추고 노래 부르고 밝았어요. 제가 퇴근해서 돌아오면 어깨도 주물러주고, 설거지도 도왔어요. 형과도 사이가 좋았고요. 사고가 있기 전날에도 제가 보는 앞에서는 이상한 낌새를 차릴 수 없을 정도로 꼿꼿하게 잘 걸어 다녔어요.”
임씨는 아이가 끝까지 가족에게 고통을 털어놓지 못한 이유가 자신 때문인 것 같다고 한탄했다. 최근 들어 건강이 좋지 않아 늘 피곤해한 탓에 아이가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한 것 같다고. 그는 “나중에 유서를 읽고 나니, 엄마가 돼서 아이 걱정을 들어주기는커녕 걱정만 사게 한 것 같아 그게 제일 가슴 아프다”고 말했다.
또한 아이들에게 어려서부터 “친구가 때리더라도 같이 때려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던 게 뼈에 사무치도록 후회된다고 털어놓았다. 임씨는 “지금 심정으로는, 한 대 맞으면 두 대 때리라고 가르칠걸, 그러면 적어도 죽지는 않았을 테니까…”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면서 그는 “착한 사람이 잘 살 거라는 믿음으로 아이들을 그렇게 가르쳤는데, 너무 억울하다”며 입술을 떨었다.
정의의 편에 섰다 화를 입은 건 박양도 마찬가지. 친구의 아픔을 대신 알리고자 했던 박양은 평소 화기애애하고 평화로운 교실 분위기를 간절히 원했다고 한다.
“우리 딸이 바란 게 거창한 게 아니에요. 친구들과 재미있게 어울려 공부할 수 있는 분위기를 원한 것뿐인데, 왜 이런 결과가 일어났는지 모르겠어요. 우리 아이는 학생들이 심하게 욕을 하거나 염색하고, 교복 치마를 줄이는 등 교칙을 어기는 걸 매우 싫어했어요. 심지어 친구가 왕따를 당하는데 그냥 눈감고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왜 학교에서는 우리 아이가 나서야만 하는 상황을 만들었는지, 또 아이가 떠난 뒤에도 학교폭력과 관련해 아무런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는지 한심스러워요.”
임씨 또한 학교 측에 서운한 마음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담임 선생님이 조금 더 신경을 써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고 한다.
“아이가 떠나기 얼마 전 담임 선생님한테 전화가 왔어요. 아이가 점심을 안 먹고 책상에 엎드려 울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선생님한테 사실 요즘 아이가 이상하다고 말씀을 드렸어요. 돈 달라는 것부터 컴퓨터 게임 많이 하는 것 등 요즘 정황을 설명드렸죠. ‘잘 부탁드린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나중에 선생님 말로는 그날 바로 상담했는데 큰 문제점을 모르겠다고 하시더라고요. 밥 안 먹고 운 이유를 묻자, 친구가 잘못했는데 자기가 잘못한 걸로 오해받아 선생님한테 꾸중을 들어서 속상해서 울었다고 하더래요. 그게 끝이었어요. 솔직히 그때 선생님이 조금 더 신경을 써줬더라면 하는 아쉬움과 원망이 있어요. 주변 친구들한테 ‘요즘 OO한테 이상한 점이 있니?’라고 한 번만 물어봐주셨더라면….”
실제로 권군의 고통을 아무도 몰랐던 건 아니다. 친한 친구 두 명에게 자신이 어떻게 괴롭힘을 당하는지 털어놓았다고 한다. 하지만 선생님에게 알리겠다는 친구에게 “나 죽는 꼴 보려고 그러냐”며 극구 말렸다고. 대부분의 피해자들이 보복이 두려워 신고를 못하듯 권군도 마찬가지였다. 임씨는 울면서 뒤늦게 사실을 털어놓은 권군의 친구에게 “네 잘못이 아니다. 절대 죄책감 갖지 말라”는 당부를 했다고 한다.
#불쌍한 내 아이, 날마다 그리워
두 아이를 먼저 떠나보낸 임씨와 김씨는 평생 가슴속에 이 아이들을 품고 살아가야 한다. 현재 경찰청 ‘케어팀’에서 지원해주는 정신과 상담을 받고 있는 임씨는 얼마 전 의사로부터 “완전히 잊을 수는 없어요. 하지만 조금씩 견뎌나가야 합니다”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임씨는 아이를 잃은 뒤 가슴 통증과 불면증을 겪고 있다.
“우리 아이가 밤에 베개를 들고 저한테 자주 왔어요. 아빠는 주말에만 오니까 엄마랑 자겠다며 밤중에도 잘 건너왔죠. 아이가 떠나기 전날에도 새벽 1시쯤 안방 문을 열고 아이가 들어왔어요. 잠결에 ‘왜~’ 하고 물었더니 어찌 된 일인지 옆에 눕지 않고 ‘안녕히 주무세요’ 하고 그냥 나가더라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했던 모양이에요. 요즘도 그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눈이 떠지고 안방 문을 쳐다보게 돼요. 살짝 잠이 들었다가도 혹시 옆에 아이가 있나 싶어 살펴보게 되고요. 밥을 먹을 때도 한 자리가 비니까 가슴이 미어지죠. 커피도 꼭 우리 아이가 타줬는데, 이제는 커피도 마시지 못할 것 같아요. 며칠 전 남편과 함께 시장을 갔는데, 아이가 좋아하던 음식 앞에서 저도 모르게 옆으로 고개를 돌려 ‘OO야, 이거 살까?’ 하고 물었어요. 아이는 제 옆에 없는데 말이죠. 의사 선생님 말로는 지금보다 앞으로 더 힘들 거래요. 그래도 다른 가족들을 생각하며 견뎌내야죠.”
김씨 역시 하루도 딸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집 현관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게 딸의 방 창문이다. 퇴근 무렵이면 언제나 창문으로 내다보며 “안녕히 다녀오셨어요” 하고 반갑게 인사하던 딸. 하지만 이제는 불 꺼진 어두운 창문만 쓸쓸히 바라봐야 한다.
“얼마 전 딸이 잠든 추모공원에 다녀왔는데, 제가 해줄 수 있는 건 꽃 한 송이 사서 놓아주는 것밖에 없어요. 아들 옷을 사러 가도, 맛있는 걸 먹어도, 매 순간 딸 생각이 나죠. 엄마로서 평생 죄책감을 가지고 살 것 같아요. 학교에서 우리 아이에게 상처 준 사람이 있다면 앞으로라도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아주면 좋겠어요.”
법적 처벌을 떠나 임씨와 김씨는 자신의 아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가해자들을 과연 용서할 수 있을까. 임씨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들의 가혹한 행위를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린다고 했다. 임씨는 사고 후 경찰과 함께 아들의 싸늘해진 시신을 본 순간 ‘아이가 이미 정신적으로 죽어 있었구나’ 하는 통한이 밀려왔다고 한다. 아이의 몸 전체가 살색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까맣게 멍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가 유서 마지막에 부탁한 것이 가해자 아이들이 더 이상 집에 오지 못하게 현관문 비밀번호를 바꿔달라는 거였어요. 나중에 CCTV를 확인하다가 안 사실인데, 아이가 사고를 당한 날에도 두 명의 가해자가 집에 찾아왔더라고요. 아이가 병원에 있다고 하니까 정말 그런지 확인하러 온 게 아닐까 싶어요. 아이 죽고 난 다음 날 남편과 현관문 비밀번호를 바꾸는데, 이 상황이 얼마나 한탄스럽던지…. 제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예요. 가해자들이 잘못한 만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원칙대로 벌을 받는 거요. 용서요? 만약 우리 아이가 목숨이라도 붙어 있다면 가능할지 모르죠.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잖아요. 솔직히 아직 잘 모르겠어요. 시간이 한참 지난 뒤 용서할 수 있으면 모를까, 내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지금 당장은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박양의 어머니는 비록 늦었지만 아이의 죽음이 헛되지 않으려면 반드시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학교 측에서는 박양이 쪽지에 적어놓은 아이들의 부모를 다 만나봤지만 특별한 단서를 발견하지 못했다며 명확한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고 한다. 담임 교사의 징계도 요청했지만 이 역시 사법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어떤 제재도 가하지 않고 있다.
“학교폭력·집단따돌림 문제는 반드시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해요. 권군, 우리 아이 말고도 학교 가는 걸 두려워하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겠어요. 교과부에서는 학교 폭력 예방을 위해 꾸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 아이가 죽는 순간까지 간절히 원했던 것처럼 아이들끼리 서로 편 가르지 않고, 함께 어울려 즐겁게 학교생활 할 수 있도록 말이죠. 입시 위주의 교육만 할 게 아니라 진정한 우정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아이들 모두 즐겁게 어울릴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많이 만들어야 할 것 같아요.”
임씨 또한 엄마로서 아이에게 진 죄를 속죄하는 방법은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아들과 같은 또래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책임감이 느껴진다는 그는 “지금 당장은 아이들을 보는 게 두렵지만, 앞으로 내가 가르치는 학급에서만큼은 이런 일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인터뷰에 응한 이유 또한 폭력의 잔인성을 알리고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라고 했다. 폭력으로 한 아이의 인생이 어떻게 망가지는지, 그리고 아이의 가족까지 어떤 고통에 시달리는지 세상에 알려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라고 한다.
요즘 권군의 추모공원에는 이름 모르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뉴스를 보고 찾아와 말없이 꽃을 놓고 가는 이가 한둘이 아니다. 임씨는 비록 아들은 다시 못 올 곳으로 떠났지만 진심으로 아들의 명복을 빌고 가슴 아파해주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에 큰 위로를 받는다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장례를 치른 뒤 아들의 바람대로 더 이상 울지 않기로 가족끼리 약속했다는 임씨는 인터뷰 동안에도 결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고마운 분들을 생각하면서 앞으로 살아갈 용기를 얻겠다”는 그의 말이 더욱 애잔하게 다가왔다.
지난해 12월20일, 같은 반 학생들의 괴롭힘에 시달려온 중학생 권모군(14)이 A4 용지 4장의 유서를 남기고 자신의 집 베란다에서 몸을 던졌다. 이 사건으로 학교폭력의 심각성이 수면 위로 떠올랐고 여기저기서 질책과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권군이 유서에 남긴 내용을 보면 폭력이 어린아이의 육체와 영혼을 어떻게 병들게 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피아노 의자에 엎드려놓고 손을 봉쇄한 다음 무차별적으로 구타했어요. 또 몸에 칼 등을 새기려고 했을 때 실패하자 오른쪽 팔에 불을 붙이려고 했어요.” “라디오 선을 뽑아 목에 묶고 끌고 다니면서 떨어진 (과자) 부스러기를 주워 먹으라고 했어요.”
권군은 중학교 2학년 때 가해자 A군, B군과 같은 반이 되면서 친해졌다. 하지만 이들과 인터넷 게임 ‘메이플스토리’를 하면서 악몽이 시작됐다. 게임 아이템을 사고팔며 캐릭터 레벨을 높여가는 게임인데, A군이 게임을 잘하는 권군에게 자신의 ID로 게임을 해달라고 한 것이 발단이었다. 그러던 중 A군의 게임 아이템이 해킹을 당하자 권군을 대하는 A군의 태도가 돌변했다. A군은 권군의 부모가 맞벌이라는 사실을 알고 날마다 권군의 집으로 찾아가 게임 등급을 높일 것을 강요하며 폭력을 휘둘렀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A군은 10월 중순부터 두 달여간 권군을 39차례 폭행하고 금품을 빼앗았으며 같은 무리의 B군 역시 19차례에 걸쳐 권군에게 폭행을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은 권군에게 숙제를 대신하게 했고, 교과서를 찢거나 빼앗았으며 각종 심부름을 시키는 등 노예 부리듯 했다.
이들은 문자 메시지로도 권군을 벼랑 끝으로 몰았다. ‘답 늦을 때마다 2대 추가’ ‘(새벽) 2시까지 (게임) 계속해라’ ‘요즘 안 맞아서 영 맛이 갔네’ 등의 협박성 문자를 분 단위로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가해자들의 폭행은 유서에 드러난 것보다 더 심각했다. 다른 동급생 C군도 권군의 집을 수시로 드나들면서 폭력을 휘둘렀고, “친구가 세면대에 물을 받아놓고 권군의 머리를 눌렀다”는 진술까지 나왔다. 또한 이들은 권군의 집에 있던 목검과 단소, 격투기용 글러브 등 각종 도구를 이용해 권군의 엉덩이와 허벅지 부위 등을 상습 폭행했다.
또래에게 이처럼 끔찍한 가해를 받아온 권군은 결국 유서를 통해 부모에게 그동안 자신이 보인 이상 행동에 대해 이해를 구하며, 더 이상 불효하기 싫어 삶을 포기한다고 고백했다. 가족에 대한 사랑이 절절했던 권군은 유서 말미에 “가족과 떨어질 걸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며 자신이 없더라도 너무 슬퍼하지 말고 행복하게 잘 살라는 부탁의 말을 잊지 않았다.
권군 사건 직후, 권군이 다니던 D중학교에서 5개월 전에도 집단따돌림을 이유로 2학년 박모양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학교 측의 방만한 태도에 여론이 또 한 번 들끓었다. 박양은 절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다른 학생들로부터 왕따와 괴롭힘을 당하자 친구를 돕기 위해 나섰다가 끝내 변을 당했다. 고민 끝에 담임 교사에게 익명의 편지를 써 도움을 요청했지만, 교사는 반 학생 전체를 책상에 올라가 무릎을 꿇게 한 뒤 훈계를 했고, 이로 인해 박양은 친구들 사이에서 ‘밀고자’로 낙인찍혔다. 결국 심리적 압박감과 소외감을 견디지 못한 박양은 ‘나를 해친 아이들’ ‘나를 도와주려는 아이들’로 구분해 이름을 적은 쪽지를 외투 주머니에 넣고 인근 아파트에서 뛰어내렸다.
#끝까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권군의 방. 영정 앞에는 평소 아이가 좋아했던 ‘유희왕 카드’가 놓여 있다.
자식을 잃은 슬픔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권군과 박양의 어머니를 대구 수성동 권군의 집에서 함께 만났다. 거실 테이블 위에는 초록색 가톨릭 기도서가 놓여 있었다. 성당에 다니는 권군의 어머니 임모씨(47)는 먼저 간 아들을 위해, 그리고 남은 가족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기도밖에 없다고 했다. 권군의 소식이 언론에 알려지자 누구보다 가슴을 쓸어내린 사람은 바로 박양의 어머니 김모씨(45). 김씨는 “딸이 그렇게 간 뒤 조금씩 마음을 가다듬고 있었는데, 권군의 사건을 듣고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중학교 교사인 임씨는 권군이 떠난 뒤 일상생활이 힘들어졌다고 고백한다. 아침에는 고1인 큰아들 등교 준비로 잠시 분주하지만 이후에는 하루 종일 집에서 공허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 다행히 방학이라 업무가 많지 않고, 학교 측의 배려로 급한 일은 집에서 처리하고 있다. 경남 안동에서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인 남편 또한 아들을 잃은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기자가 방문한 날에도 권군의 아버지는 아내에게 인터뷰를 맡긴 채 두 시간 가까이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집 밖을 나가는 게 두려워요. 자식 그렇게 만들어놓고 무슨 낯으로 돌아다니냐고 손가락질받을까 봐요. 무엇보다 아이에게 너무 미안하니까 예전처럼 밥 먹고, 얘기하고, 외출하는 것도 사치처럼 느껴져요. 주말부부로 지낸 남편도 평소 아이와 많은 시간을 함께하지 못하고, 아이 혼자 괴로워하게 만들었다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있어요. 큰아들도 동생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것에 너무 미안해하고요. 모든 가족이 힘겹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이미 반년이 지났지만 사람 대하는 게 힘든 건 박양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김씨는 “권군 어머니의 말에 공감한다”며 “우리도 처음에는 학부모 얼굴이라도 마주칠까봐 집 밖에 나가지 못했다. 또 아이를 못 지켰다는 죄책감 때문에 대인기피증까지 왔다”고 털어놓았다. 간호사로 일하는 김씨는 그 일 이후 직장을 옮겼다. 현재 다니는 병원에서는 그에게 이런 아픔이 있는지 전혀 모른다고 한다.
자라면서 말썽 한 번 피우지 않아 귀여움만 받고 자란 권군은 사건 당일에도 평소와 다름없이 편안한 모습을 보였다. 아침에 일어나 등교 준비를 하고, 교복을 입은 뒤 먼저 출근하는 엄마에게 “잘 다녀오세요”라는 인사까지 했다. 출근한 임씨는 몇 시간 뒤 권군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아이가 학교에 오지 않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순간 불안감이 엄습해온 임씨는 부랴부랴 집으로 차를 몰았다. 차가 신호에 멈췄을 때 휴대전화 단축키로 아이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없는 번호’라는 메시지가 흘러나왔다(권군은 사고 전날 엄마의 휴대전화에서 자신의 번호를 지웠다).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된 임씨는 아이의 전화번호가 도무지 생각이 안 나 남편에게 전화번호를 물어 다시 걸었지만 신호만 갈 뿐 응답이 없었다. 교통사고인가 싶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운전대를 잡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경찰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1층으로 오세요”란 말에 그는 순간 심장이 멎을 듯했다.
“하얀 천으로 덮여 있는 아이를 봤을 때 처음엔 우리 아이가 아니라고 했어요. 절대 그럴 리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천을 들치고 얼굴을 보니 우리 아이가 맞더라고요. 아이를 끌어안고 ‘아기야, 아기야’하고 불렀지만 아이는 대답이 없었어요. 그런데 아이 몸이 너무 따뜻한 거예요. 제 얼굴에 아이 손을 비비며 ‘아직 우리 아이가 따뜻해요. 빨리 의사를 불러주세요’라고 울부짖었지만 이미 의사가 사망 진단을 내리고 간 후였어요. 이건 분명 꿈이라고 생각했어요.”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자 문이 반쯤 열린 베란다 창문이 보였다. 집 안은 그가 출근할 때와 똑같았다. 소파 한 귀퉁이에 매트가 가지런히 정리돼 있었고 베란다 안쪽 거실 창문은 닫힌 채 바깥 창문만 열려 있었다. 권군의 유서는 평소 임씨가 퇴근 후 핸드백을 올려놓는 주방 쪽 다리미판에서 발견됐다.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쥔 임씨는 한 글자도 읽어 내려가지 못했다. 마지막에 써 있는 ‘사랑해요’란 문구만 겨우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박양의 어머니 역시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또렷하다. 어느 날 의기소침한 표정으로 학교에서 돌아온 박양은 몸이 아프다며 학원을 가지 않겠다고 했다. 평소와 다른 모습에 김씨는 아이에게 무슨 일인지를 물었고, 박양은 그제야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털어놓았다. 친구가 겪는 괴로움을 선생님께 편지로 적어냈는데, 단체로 벌을 받았고 다른 아이들이 자신이 편지를 썼다는 걸 알까봐 두렵다는 얘기였다. 김씨는 “우선 아이들에게 사실을 밝히지 말고, 선생님이 알아서 잘 해결해줄 테니 조금 더 기다려보자”며 아이를 다독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날 저녁 잠깐 친구 만나고 오겠다며 집을 나선 박양은 그길로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그전까지 우리 딸은 친구 문제로 고민해본 적이 없어요. 친한 친구들도 많았고 공부도 제법 잘했어요. 애니메이션 작가가 되는 게 꿈이라 집에서는 공부하는 시간 외에는 늘 만화를 그렸죠. ‘고양이’라는 닉네임으로 인터넷 카페도 운영했고요. 오빠와 사이가 참 좋아서 다들 부러워했었어요. 집과 학교에서 모두 모범적으로 생활하는 착한 아이였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지금도 이해하기 힘들어요. 아이가 용기를 내 편지를 썼을 때, 선생님께서 바로 단체로 벌을 주지 않고 일을 좀 더 부드럽게 풀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원망이 커요. 학교 측에 진상 규명을 요청해놓은 상태라 그날의 상황을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아이가 죽음을 선택했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얼마나 공포심이 컸으면, 학교에 가는 게 얼마나 두려웠으면 죽음이라는 마지막 선택을 했을지…. 아이의 마음 깊은 곳에 어떤 응어리가 있는지 끝까지 못 들어줘서 너무 미안해요.”
임씨 또한 “아이가 그 지경이 될 때까지 엄마인 내가 왜 아무것도 몰랐는지, 하루에도 몇 번씩 가슴을 친다”고 말했다. 물론 얼마 전부터 이상한 기미가 있긴 했다. 2학기에 들어서면서 아이는 돈을 달라는 말을 자주 했다. 돈이 왜 자주 필요하냐고 물으면 “먹고 싶은 게 많아요. 친구들이 매점에서 맛있는 거 사먹는 게 부러워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한창 식욕이 왕성한 나이기에 임씨는 아이에게 돈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인터넷 게임 중독에 대해서도 아이와 깊은 대화를 나눠봤지만 아이는 오히려 대수롭지 않다는 듯 “엄마, 요즘은 온라인 게임 하면서 친구들과 만나야 돼요. 제가 지금 사춘기잖아요. 남자아이들은 다 그래요” 하며 오히려 그를 안심시켰다. 또 팔에 든 멍자국을 보고 추궁하는 엄마에게 아이는 “체육 시간에 넘어졌다” “친구들과 단소를 갖고 놀다가 장난으로 맞았다”며 변명을 했다.
“살짝 의심은 갔지만 그때마다 아이가 태연하게 받아들이니까 더 이상 추궁하지 못했어요. 사실 아이가 집에서는 조금도 우울한 내색을 하지 않았어요. 늘 제 앞에서는 춤추고 노래 부르고 밝았어요. 제가 퇴근해서 돌아오면 어깨도 주물러주고, 설거지도 도왔어요. 형과도 사이가 좋았고요. 사고가 있기 전날에도 제가 보는 앞에서는 이상한 낌새를 차릴 수 없을 정도로 꼿꼿하게 잘 걸어 다녔어요.”
임씨는 아이가 끝까지 가족에게 고통을 털어놓지 못한 이유가 자신 때문인 것 같다고 한탄했다. 최근 들어 건강이 좋지 않아 늘 피곤해한 탓에 아이가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한 것 같다고. 그는 “나중에 유서를 읽고 나니, 엄마가 돼서 아이 걱정을 들어주기는커녕 걱정만 사게 한 것 같아 그게 제일 가슴 아프다”고 말했다.
또한 아이들에게 어려서부터 “친구가 때리더라도 같이 때려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던 게 뼈에 사무치도록 후회된다고 털어놓았다. 임씨는 “지금 심정으로는, 한 대 맞으면 두 대 때리라고 가르칠걸, 그러면 적어도 죽지는 않았을 테니까…”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면서 그는 “착한 사람이 잘 살 거라는 믿음으로 아이들을 그렇게 가르쳤는데, 너무 억울하다”며 입술을 떨었다.
정의의 편에 섰다 화를 입은 건 박양도 마찬가지. 친구의 아픔을 대신 알리고자 했던 박양은 평소 화기애애하고 평화로운 교실 분위기를 간절히 원했다고 한다.
“우리 딸이 바란 게 거창한 게 아니에요. 친구들과 재미있게 어울려 공부할 수 있는 분위기를 원한 것뿐인데, 왜 이런 결과가 일어났는지 모르겠어요. 우리 아이는 학생들이 심하게 욕을 하거나 염색하고, 교복 치마를 줄이는 등 교칙을 어기는 걸 매우 싫어했어요. 심지어 친구가 왕따를 당하는데 그냥 눈감고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왜 학교에서는 우리 아이가 나서야만 하는 상황을 만들었는지, 또 아이가 떠난 뒤에도 학교폭력과 관련해 아무런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는지 한심스러워요.”
임씨 또한 학교 측에 서운한 마음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담임 선생님이 조금 더 신경을 써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고 한다.
“아이가 떠나기 얼마 전 담임 선생님한테 전화가 왔어요. 아이가 점심을 안 먹고 책상에 엎드려 울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선생님한테 사실 요즘 아이가 이상하다고 말씀을 드렸어요. 돈 달라는 것부터 컴퓨터 게임 많이 하는 것 등 요즘 정황을 설명드렸죠. ‘잘 부탁드린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나중에 선생님 말로는 그날 바로 상담했는데 큰 문제점을 모르겠다고 하시더라고요. 밥 안 먹고 운 이유를 묻자, 친구가 잘못했는데 자기가 잘못한 걸로 오해받아 선생님한테 꾸중을 들어서 속상해서 울었다고 하더래요. 그게 끝이었어요. 솔직히 그때 선생님이 조금 더 신경을 써줬더라면 하는 아쉬움과 원망이 있어요. 주변 친구들한테 ‘요즘 OO한테 이상한 점이 있니?’라고 한 번만 물어봐주셨더라면….”
실제로 권군의 고통을 아무도 몰랐던 건 아니다. 친한 친구 두 명에게 자신이 어떻게 괴롭힘을 당하는지 털어놓았다고 한다. 하지만 선생님에게 알리겠다는 친구에게 “나 죽는 꼴 보려고 그러냐”며 극구 말렸다고. 대부분의 피해자들이 보복이 두려워 신고를 못하듯 권군도 마찬가지였다. 임씨는 울면서 뒤늦게 사실을 털어놓은 권군의 친구에게 “네 잘못이 아니다. 절대 죄책감 갖지 말라”는 당부를 했다고 한다.
애니메이션 작가를 꿈꾸던 박양은 ‘고양이’라는 닉네임으로 온라인 카페에 자신이 그린 그림을 자주 올렸다.
#불쌍한 내 아이, 날마다 그리워
두 아이를 먼저 떠나보낸 임씨와 김씨는 평생 가슴속에 이 아이들을 품고 살아가야 한다. 현재 경찰청 ‘케어팀’에서 지원해주는 정신과 상담을 받고 있는 임씨는 얼마 전 의사로부터 “완전히 잊을 수는 없어요. 하지만 조금씩 견뎌나가야 합니다”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임씨는 아이를 잃은 뒤 가슴 통증과 불면증을 겪고 있다.
“우리 아이가 밤에 베개를 들고 저한테 자주 왔어요. 아빠는 주말에만 오니까 엄마랑 자겠다며 밤중에도 잘 건너왔죠. 아이가 떠나기 전날에도 새벽 1시쯤 안방 문을 열고 아이가 들어왔어요. 잠결에 ‘왜~’ 하고 물었더니 어찌 된 일인지 옆에 눕지 않고 ‘안녕히 주무세요’ 하고 그냥 나가더라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했던 모양이에요. 요즘도 그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눈이 떠지고 안방 문을 쳐다보게 돼요. 살짝 잠이 들었다가도 혹시 옆에 아이가 있나 싶어 살펴보게 되고요. 밥을 먹을 때도 한 자리가 비니까 가슴이 미어지죠. 커피도 꼭 우리 아이가 타줬는데, 이제는 커피도 마시지 못할 것 같아요. 며칠 전 남편과 함께 시장을 갔는데, 아이가 좋아하던 음식 앞에서 저도 모르게 옆으로 고개를 돌려 ‘OO야, 이거 살까?’ 하고 물었어요. 아이는 제 옆에 없는데 말이죠. 의사 선생님 말로는 지금보다 앞으로 더 힘들 거래요. 그래도 다른 가족들을 생각하며 견뎌내야죠.”
김씨 역시 하루도 딸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집 현관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게 딸의 방 창문이다. 퇴근 무렵이면 언제나 창문으로 내다보며 “안녕히 다녀오셨어요” 하고 반갑게 인사하던 딸. 하지만 이제는 불 꺼진 어두운 창문만 쓸쓸히 바라봐야 한다.
“얼마 전 딸이 잠든 추모공원에 다녀왔는데, 제가 해줄 수 있는 건 꽃 한 송이 사서 놓아주는 것밖에 없어요. 아들 옷을 사러 가도, 맛있는 걸 먹어도, 매 순간 딸 생각이 나죠. 엄마로서 평생 죄책감을 가지고 살 것 같아요. 학교에서 우리 아이에게 상처 준 사람이 있다면 앞으로라도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아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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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적 처벌을 떠나 임씨와 김씨는 자신의 아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가해자들을 과연 용서할 수 있을까. 임씨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들의 가혹한 행위를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린다고 했다. 임씨는 사고 후 경찰과 함께 아들의 싸늘해진 시신을 본 순간 ‘아이가 이미 정신적으로 죽어 있었구나’ 하는 통한이 밀려왔다고 한다. 아이의 몸 전체가 살색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까맣게 멍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가 유서 마지막에 부탁한 것이 가해자 아이들이 더 이상 집에 오지 못하게 현관문 비밀번호를 바꿔달라는 거였어요. 나중에 CCTV를 확인하다가 안 사실인데, 아이가 사고를 당한 날에도 두 명의 가해자가 집에 찾아왔더라고요. 아이가 병원에 있다고 하니까 정말 그런지 확인하러 온 게 아닐까 싶어요. 아이 죽고 난 다음 날 남편과 현관문 비밀번호를 바꾸는데, 이 상황이 얼마나 한탄스럽던지…. 제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예요. 가해자들이 잘못한 만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원칙대로 벌을 받는 거요. 용서요? 만약 우리 아이가 목숨이라도 붙어 있다면 가능할지 모르죠.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잖아요. 솔직히 아직 잘 모르겠어요. 시간이 한참 지난 뒤 용서할 수 있으면 모를까, 내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지금 당장은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박양의 어머니는 비록 늦었지만 아이의 죽음이 헛되지 않으려면 반드시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학교 측에서는 박양이 쪽지에 적어놓은 아이들의 부모를 다 만나봤지만 특별한 단서를 발견하지 못했다며 명확한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고 한다. 담임 교사의 징계도 요청했지만 이 역시 사법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어떤 제재도 가하지 않고 있다.
“학교폭력·집단따돌림 문제는 반드시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해요. 권군, 우리 아이 말고도 학교 가는 걸 두려워하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겠어요. 교과부에서는 학교 폭력 예방을 위해 꾸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 아이가 죽는 순간까지 간절히 원했던 것처럼 아이들끼리 서로 편 가르지 않고, 함께 어울려 즐겁게 학교생활 할 수 있도록 말이죠. 입시 위주의 교육만 할 게 아니라 진정한 우정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아이들 모두 즐겁게 어울릴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많이 만들어야 할 것 같아요.”
임씨 또한 엄마로서 아이에게 진 죄를 속죄하는 방법은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아들과 같은 또래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책임감이 느껴진다는 그는 “지금 당장은 아이들을 보는 게 두렵지만, 앞으로 내가 가르치는 학급에서만큼은 이런 일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인터뷰에 응한 이유 또한 폭력의 잔인성을 알리고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라고 했다. 폭력으로 한 아이의 인생이 어떻게 망가지는지, 그리고 아이의 가족까지 어떤 고통에 시달리는지 세상에 알려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라고 한다.
요즘 권군의 추모공원에는 이름 모르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뉴스를 보고 찾아와 말없이 꽃을 놓고 가는 이가 한둘이 아니다. 임씨는 비록 아들은 다시 못 올 곳으로 떠났지만 진심으로 아들의 명복을 빌고 가슴 아파해주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에 큰 위로를 받는다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장례를 치른 뒤 아들의 바람대로 더 이상 울지 않기로 가족끼리 약속했다는 임씨는 인터뷰 동안에도 결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고마운 분들을 생각하면서 앞으로 살아갈 용기를 얻겠다”는 그의 말이 더욱 애잔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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