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수 인순이 “내 가치관, 내 생각대로 사세요”
“남 앞에서 노래는 많이 해봤는데 이야기는 많이 안 해봤습니다. 이렇게 살라고 말씀드릴 순 없을 것 같고, 제 경험을 말하겠습니다. 그게 더욱 저다울 것 같습니다.”
‘나는 가수다’ 무대를 휘어잡던 화려한 디바는 없었다. 털모자를 쓰고 나온 인순이(54·본명 김인순)는 조곤조곤 어릴 적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어릴 적 저는 젓가락 제일 끝 부분을 쥐고 반찬을 집었어요. 곡예하듯이. 어떤 어르신이 흘러가듯 한 말씀을 가슴에 담았나 봐요. 젓가락 끝을 잡으면 멀리 시집간다는. 뭐라 그러거나 말거나 어린 나이에 고집을 부렸어요. 동네를 벗어나 서울, 부산, 아니 미국으로 시집가고 싶었어요. 지금도 젓가락을 보면 그렇게 한 게 소용없구나 싶어요. 현재는 대한민국 아줌마군에 끼여서 악악대는 주부로 살고 있습니다. 물론 가수는 제 직업이고요.”
학업에 대한 목마름에 검정고시도 알아봐
담담한 목소리에는 울림이 있었다. 어느덧 그는 초등학교 5학년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엄마가 아침에 정말 맛나게 꽁치를 구워줬어요. 그걸 뚝딱 해치우고 발걸음도 가볍게 학교에 가는데 친구가 옆에서 ‘아우, 비린내’ 그러는 거예요. 깜짝 놀랐어요. 초등학교 5학년이면 열두 살 정도죠. 그때부터 스물아홉 살까지 생선을 안 먹었어요. 남들이 싫다고 하는 건 절대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렇게 끊었던 생선을 어느 날 먹고 후회했어요. 먹을 걸…(웃음).”
친구의 핀잔에 맛있는 생선도 포기했던 인순이는 중학생이 됐다.
“중학교 2학년 때 영어 선생님이 결혼하신다고 했어요. 결혼식에 초대받아 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며 1학기 때 쓰던 책을 팔았어요. 갈 돈이 없어서. 그걸 팔아야 차비가 됐거든요. 몇 백원 안 됐어요. 제가 언덕 꼭대기에 살았는데 거기서 내려다보면 버스 정류장이 보였어요. 그날 그 돈을 손에 쥐고 마당에 나와서 정류장을 바라보다 딱 굳었어요. 이 돈이 있으면 우리 식구가 며칠을 먹는데…. 좋아하는 선생님 결혼식이지만 차비로 그 돈을 다 쓰기에는 배가 고팠어요. 그래서 거기에서 혼자 엉엉 울었어요. 어린 나이에 제 선택은 집으로 돌아가는 거였어요. 지금 생각해도 너무 가슴이 아파요. 그 나이에 먹는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는 게. 하지만 그날의 결정은 절대 후회 안 해요. 그 이후 며칠간 엄마와 저, 동생은 굶지 않을 수 있었거든요.”
그는 학력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인순이의 학력은 중졸이다.
“여러분은 고등학교까지 나왔다면 유치원부터 4번의 동창회를 갈 자격이 되겠죠. 그 누군가는 그렇게 가고 싶어서 밤을 지새우며 눈물 흘린, 지금도 부러워하는 곳에 와 계십니다. 어쩌면 자신의 행복을 피부로 못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여러분은 정말 행복하고 부러운 사람입니다.”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는 학력 논란이 일기 전 한 기자로부터 “제보를 받았는데 중학교까지밖에 졸업 못한 사실을 보도해도 괜찮겠냐”는 전화를 받았다.
“그때 이렇게 말했어요. 괜찮은데 부탁 하나 하겠습니다. 가능하면 웃는 사진으로 내보내주세요. 고개 숙이고 있거나 하늘 바라보는 사진까지 나오면 너무 가슴 아플 겁니다. 내일이 우리 엄마 기일인데 그러면 엄마도 슬퍼하실 거예요.”
이튿날 기자로부터 “(반응이) 나쁘지 않다”는 전화가 걸려왔지만 그와는 상관없이 가슴이 아팠다고. 이후에도 검정고시나 온라인 공부 사이트를 알아봤지만 이제는 그 시간에 노래 연습을 더 하기로 마음먹었다. 인순이는 한국에서 혼혈인으로 살며 힘들었던 점도 털어놨다.
‘나가수’ 출연, 이때 놓치면 평생 기회 없을 것 같았다
“당시에는 장애인, 혼혈인이 직장을 잡기 너무 어려웠어요. 시험을 잘 쳐도 면접만 보면 떨어지고, 그때는 혼혈이면 군대도 못 갔어요. 그러던 중 가수가 되지 않겠냐는 제의에 두말없이 따라나섰죠. 저 ‘희자매’, 나름 걸그룹 출신이에요(웃음).”
데뷔 1년이 안 돼 리사이틀을 했는데 관객이 너무 많아 즉석에서 공연이 하루 연장될 만큼 큰 인기를 누렸다. 그는 “그때처럼 마음의 문을 열고 노래를 들어주는 이들 앞에서 노래한 적이 얼마나 오래됐는지 생각했다”며 설레는 마음으로 ‘나는 가수다’에 출연했다고 했다.
“때라는 게 있어요. 해본 후회와 안 해본 후회의 차이. 해본 후회는 해봤기 때문에 갈수록 미련이 사라지지만, 안 해본 후회는 갈수록 커집니다. 그리고 ‘때’와 맞물리죠. 내가 이때를 놓치면, 재다가 못 나가면 같이 경연하는 후배들은 3~4년 뒤에 또 나갈 수 있을지 몰라도, 나는 영영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 뭐가 문젠데. 탈락? 하면 되지. 체면 때문에 무대에 못 서본다면 어쩌면 죽는 날까지 저는 긴장도 없고 관객도 없는 무대만 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출연했어요. 지금도 후회 없이 즐기며 다음 곡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는 무대를 전쟁터라고 했다.
“어떤 가수라도 한 가지 장점은 꼭 있는데, 그걸로 팬들에게 사랑받거든요. 그 사람만의 특별함이 있어요. 무대는 전쟁터입니다. 거기서 튀어야 살아남고 사랑받기 위해 목청을 높이거나 인상을 쓰거나 동작을 튀게 해서라도 주목받아야 하죠. 한창 사랑받던 시기가 지나면 살아남아야 하는 시기가 오게 마련이에요. 제가 걸어왔던 힘든 길을 후배들이 가는 것을 알기에, 모두가 1등 했으면 하는 게 진실한 마음이에요.”
>>> 김영세 이노디자인 대표 “내 안의 인디비주얼리티를 꺼내라”
목걸이형 MP3, 가로 본능 휴대전화, 슬라이딩 팩트…. 모두 디자이너 김영세(61)의 작품이다. 강연장에 들어선 그는 “분위기 죽인다, 노래해야 할 것 같다”라며 즉석에서 ‘Sometimes When We Touch’를 몇 소절 뽑았다.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하하, 재밌다. 오늘 이런 분위기로 죽 갑시다. 오늘의 주제를 소개해야겠죠. 인디비주얼리티(Individuality). 이 말을 전해주고 싶어서 왔어요. 한국 사회에서 왕따 당하고 있는 소중한 영어 단어예요. ‘개인역량주의’라고 할 수 있죠.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정말 커다란 일, 한 사람의 중요성을 뜻하죠.”
그는 “과거엔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Form follows function)’라는 명언에 따라 디자인했지만 이제는 정보시대를 넘어 감성시대”라며 자신이 좋아하는 문구를 소개했다. 그의 뒤로 ‘인간의 우뇌, 감성이 세상을 리드한다’는 문구가 떴다.
대박 비결은 ‘한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
“감성시대에는 우뇌가 세상을 리드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R·D 하면 리서치 앤 디벨로프먼트라고 하잖아요. 나는 로맨스 앤 드림이라고 합니다. 멋있잖아요. 학교에서 로맨스와 드림을 배우고 감성에서 발명하고 사람을 감동시키면서 돈도 벌고, 또 나누고. 이런 기쁨을 전하는 걸 디자인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21세기의 새로운 키워드는 감성, 배려, 창의, 문화 네 가지예요. 그 중간에는 사람이 있고요. 디자인의 최종 목표는 사람의 마음을 차지하는 겁니다.”
그는 3백만 개 이상 팔린 일명 ‘전지현 팩트’, 라네즈 슬라이딩 팩트와 아이리버의 심플한 목걸이형 MP3 탄생 비화를 밝혔다.
“아모레에서 화장품 디자인 프로젝트를 의뢰받고 아내한테 ‘너무 어렵다, 어떻게 콤팩트를 만들지’ 하니까 아내가 자기가 필요한 게 하나 있대. 운전할 때 거울을 보고 싶은데 뚜껑을 열어서 봐야 한다는 거죠. 이거다, 싶어 공항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30분간 머릿속에서 스케치한 게 슬라이딩 팩트예요. 순간의 아이디어를 얻은 거죠. 부지런히 디자인해서 히트도 치고 아내에게 예쁨도 받고요. 이 제품의 인기 비결이 전지현 덕분일까요, 전 아니라고 생각해요. 디자인에 사랑이 담겨 있어서가 아닐까요. 아이리버 MP3도 어느 멋쟁이 여성이 아주 못생긴 MP3를 목에 걸고 지나가기에 ‘저 정도 멋쟁이라면 최소한 이 정도는 목에 걸어야지 않을까’ 해서 만들었는데 대박이 났어요. 이름도 성도 모르던 여자가 나한테는 영감을 주고 간 거죠. 디자인의 중요성은 한 사람을 정말 제대로 이해했을 때 나옵니다.”
그는 “한 사람의 영향력은 인류를 품을 수도 있다”라며 “우리가 잘못 이해하는 부분 중 하나는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엄청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점”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그는 “내겐 남들을 기쁘게 해줄 수 있는 능력이 조금 있다. 내 디자인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데서 나의 가치를 느낀다”고 했다.
“우리가 인터그레이터, 종결자라는 말 많이 쓰죠. 저는 스티브 잡스에게서 크리에이터로서의 모습과 인터그레이터의 모습을 동시에 느꼈습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날도 애플의 새 모델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살면서 99.9%의 재능을 소진하고 갈 수 있던 행운아라고 생각해요. 디자인은 Destruct Signature. 고정관념을 부수라는 말입니다. 스티브 잡스가 되려고 하기보다 스티브 잡스 인 미, 내 안의 스티브 잡스 정신을 배웠으면 해요.”
>>> 가수 윤상 “소름 끼치는 클라이맥스 아니라도 감동은 있다”
“저는 1987년 작곡가로 데뷔해 가요계 주변에서 이런저런 일을 24년 동안 하며 많은 일을 겪었어요. 최근에는 ‘위대한 탄생’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 일주일에 한 번 여러분을 만나는 사람이고요. 1990년대 초반에는 여러분이 상상할 수 없는 인기를 몰고 다녔던 적이 있습니다. 별로 중요하진 않아요(웃음).”
작곡가들도 인정하는 뮤지션으로 꼽히는 가수 윤상(43). 그는 “웃기는 재능은 없지만 최선을 다해 강의하겠다”라며 열의를 보였다. 대학에서 수업은 많이 했지만 강연은 태어나서 처음이라는 그는 ‘위대한 탄생’에서 얻은 독설가 이미지에 대해 억울함을 호소했다.
근거 없는 자신감에는 거침없이 독설
“사실, 저 그렇게 독설 안 해요. 요즘 나오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편집의 힘을 느꼈어요. 물론 절반의 책임은 저한테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재수 없는 순간이 있더라고요. 왜? 편집 때문에. 보다가 ‘큰일났다’ 싶었죠. 제가 살면서 모난 짓을 별로 해본 적이 없어서 악플도 거의 없었는데, 평생 먹을 악플을 그때 다 먹은 기억이 나네요. 무엇보다 독설의 빌미를 제공한 친구가 멀쩡하게 편집돼 있더라는 거죠. 자신감은 분명히 필요하지만, 그게 허세가 되면 안 되죠. 의외로 젊은이들은 자신을 너무 몰라요. 잘난 척하며 스스로 만족하는 경우를 자주 봤어요. 심사위원을 내려다보는 태도 앞에서는 독설이 나오더라고요. 게다가 ‘위탄’ PD가 초등학교 동창이거든요. 저를 악역으로 만들어놔도 커버할 수 있겠다 싶었던 거죠. 저도 몰랐던 제 모습, 아내가 ‘오빠 나쁜 사람이야’ 말할 때 몰랐던 ‘그 사람’을 방송에서 봤어요(웃음).”
서른다섯에 미국 보스턴의 버클리 음대로 유학을 떠난 윤상. 그는 그곳에서 학부 생활을 하며 20대 초반의 청년을 많이 만났다.
“그때 과감히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하면서…, 웃어도 되는데(웃음). 저를 바라봐주던 많은 여성 팬의 질타와 비난을 받으며 한 방에 훅 갔습니다. 농담이고요. 이때가 아니면 도저히 공부할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던 차에 장학금을 준대서 떠났는데 도착하자마자 거기에서 본 실기 재시험에서 떨어졌어요.”
아내에게 “나만 믿고 가”라며 의기양양했던 그는 그 사건으로 자존심을 크게 다쳤다.
“자존심으로 버텨온 인생에서 손에 쥐었던 것을 능력 부족으로 놓쳤다는 사실이 실망스러웠죠. 처음에는 룰을 바꿔서 시험을 또 보게 한 학교를 미워하기도 했어요. 한국 학생도 많았고 아내도 있었기에 어떻게든 무너진 자존심을 세우고 싶었어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밤을 새워 공부했죠. 그렇게 공부해서 한 학기 뒤 우수 학생에게 주는 성과급 장학금을 받았어요. 뭔가를 이뤄내기 위해 자존심을 한 번씩 다치는 것은 촉매제가 될 수 있구나 생각했죠.”
7년의 유학 생활을 버틸 수 있었던 건 가족 덕분이다.
“원래는 유학 가서 좋은 음악 많이 듣고, 설렁설렁 공부하려고 했어요. 역시나 신은 저에게 그런 시간을 허락하지 않으셨고요. 가족이 있어서 자존심이라는 걸 느꼈고, 두 아이가 태어나면서 아빠가 돈은 못 벌더라도 학교는 열심히 다녀야지 않나 싶었고요. ‘아빠’라는 건 엄청난 책임이자 환희죠. 아이를 낳아보지 않은 분은 모르실 거예요. 가장 달라진 점은 제가 여러분 앞에서 편하게 말할 수 있게 됐다는 거예요. 유학 떠나기 전에는 불만투성이였거든요. 열아홉 살 때부터 사람들이 알아보는 직업을 가졌기에 타인과의 소통이 조금 서툴렀어요. 학교 다니면서 자존심을 내려놓고 소통하는 법을 알게 돼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지금의 윤상을 만든 건 ‘콤플렉스’
‘위대한 탄생2’에서 멘토로 활약하고 있는 윤상.
그는 자신을 지금까지 있게 만든 건 ‘콤플렉스’라며 “인생에서 콤플렉스가 8할을 넘게 차지한다”고 했다.
“제 이미지가 어떠세요. 곱게 자랐을 것 같죠. (청중들이 ‘네!’라고 외치자) 겁나게 맞고 자랐습니다(웃음). 물론 아픔이나 콤플렉스는 지극히 상대적이죠.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유년기 때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가정적 이유도 있었고 경제적 이유도 있었고요. 결국 제가 드리는 이야기는, 자존심과 뭔가 자신감이라는 것은 정말 안에 내실이 있기 전에는 위험한 것이고 결과가 안 좋으면 보통은 핑계를 댄단 말이죠. 젊음의 특권 중 하나는 핑계를 대도 어느 정도 용서가 된다는 점이에요. 하지만 나이 들수록 핑계는 면죄부가 될 수 없고, 핑계 대는 사람치고 멋있어 보이는 사람 없을 겁니다.”
학창 시절 전교 꼴찌를 한 사실도 공개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선생님께 너무 근거 없이 혼나서 그때부터 한 번도 숙제를 해본 적이 없어요. 여름방학부터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단 한 번도 숙제를 안 했습니다. 그래서 제 점수가 어땠을 것 같나요. 전교 꼴등도 한 거죠. 그런 시절이 있었기에 서른다섯 살에 유학을 결심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대중음악가에게 유학이 발전만 주었을까 하면 그렇지는 않아요. 히트곡은 유학 가기 전에 훨씬 많았습니다(웃음). 그래도 사람은 자기가 아쉬운 것을 결국 하게 되는구나 생각했어요. 저처럼 강박관념 속에서 학교에 충실하지 못했던 시간을 후회한다면 언젠가는 꼭 이룰 수 있어요. 그때 이후로 학교와는 거리를 두고, 대중음악을 열심히 해왔던 것 같아요. 결국에는 저와 전혀 상관없던 도예과에 입학했는데 어머니께서 대학에 안 가면 약을 드시겠다고 하셨거든요. 손재주가 있어 1년 동안 화실에서 그림만 그렸죠. 일단 합격하고 바로 휴학한 뒤 주변의 좋은 선배들 공연을 따라다녔죠. 포스터도 붙이고 조명 보조도 하면서 제 데모 테이프를 전해드릴 수 있었어요. 뜻이 있다면 고개를 조아리는 것도 요령이라고 생각해요. 소신만 지킨다면요.”
생애 첫 강연을 위해 윤상은 자신의 강연 내용을 미리 정리해서 작가에게 들려줬다고 했다.
“그분이 ‘소름 끼치는 클라이맥스가 아니라도 감동을 줄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우리는 전율을 느껴야만 감동이라고 생각하는 이상한 고정관념이 있어요. 이건 밸런스의 한 부분일 뿐이죠. 일부러 티를 안 낼 필요는 없지만, 조용하게 느끼는 전율이야말로 정말 엄청난 감동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마지막에 그는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가 연주한 바흐의 음악 ‘다카포 아리아(Aria da capo)’를 들려줬다.
“흔히들 진정성이라는 말을 화두로 던집니다. 진정성에 대해서 음악이 어떻게 말을 걸고 있는지, 그 감정을 알려드리고 싶어요. 글렌 굴드는 피아노라는 악기를 위해 평생 자신의 체형을 악기에 맞추는 수도승 같은 인생을 살았어요. 이 곡을 들었을 때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음악이 우리에게 진정성을 가지고 어떤 이야기를 거는지 생각할 기회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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