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조중필씨의 어머니 이복수씨(69)와 만나기 전, 기자는 몇 차례 질문지를 작성하려 고심했다. 하지만 여의치 않았다. 어머니는 이미 똑같은 질문을 수없이 반복해서 들었을 것이다. 그냥 가서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자택을 찾았을 때, 어머니는 한 여성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영화 ‘이태원 살인사건’에서 피해자 어머니 역을 연기한 배우 김민경이었다. 어머니는 “뉴스에서 패터슨이 검거됐다는 소식을 듣더니 (배우가) 밥이나 한 끼 하자고 해서 식사하고 들어오는 길”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마른 나뭇가지처럼 버석한 얼굴로 기자와 마주 앉았다. 인터뷰하는 내내 아픈 가슴을 후비는 것 같아 걱정됐지만, 어머니는 울지 않았다. 눈물은 14년 동안 이미 흐를 대로 흘러서 다 말라버린 것만 같았다. 그는 “이렇게 인터뷰해서 범인이 잡히고 아들의 억울함을 풀어줄 수만 있다면…”이라며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오히려 그 이야기를 듣는 기자가 표정을 관리하기 어려웠다.
“나 같은 사람보다야 언론이나 국회의원이 한 번이라도 어디에서 말하는 게 낫지. 작년에는 (한나라당) 주광덕 의원님이 많이 도와줬어요. 알아보니까 미국에서는 재판 기록이 인터넷에 뜬다네요. 6월인가 7월쯤에 한 번 판결을 받았다 하더라고. 거기서 얘(아더 패터슨)는 내보내면 안 되고 구속시켜야 한다고. 법원에서는 우리 보고 조용히 있으면 처리하겠다고 했는데, 내가 걱정이 돼서….”
어머니는 아들을 죽인 용의자가 미국에서 잡혀 신병 인도 재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8월 법무부에 전화해보고서야 알았다. 작년에도 몇 번 전화했지만, 소재 파악 중이라는 대답만 돌아오던 차였다. 영화 ‘도가니’가 개봉되고 나서 ‘광주 인화학교 성폭력 사건’이 주목받는 것을 보고 더 몸이 달았다고 했다.
“전화 안 했으면 여태 몰랐겠죠. 방송국 기자한테도 전화하고 의원님 보좌관한테도 전화해서 이렇게 된 거죠. ‘도가니’ 사건을 보니까 우리도 어떻게 좀 해결됐으면 해서…. 우리 중필이 사건도 영화(2009년 ‘이태원 살인사건’)로 만들어졌는데 저거마냥 해결 좀 됐으면…. 마음이 급하더라고요. 날마다 사람들이 ‘공소 시효, 공소 시효’ 하면서 내년이면 끝난다는데, 또 어떤 기자는 도망간 날로 공소 시효가 멈춰서 아직 10년 이상 더 남았다고도 하더라고요. 영화 찍을 때도 스태프들이 이야기 듣더니 패터슨이 범인 같댔는데 검사가 왜 그렇게 했는지.”
법 없이도 살 것 같은 어머니 입에서 ‘공소 시효’니 ‘신병 인도’니 하는 전문 용어가 술술 나왔다. 14년 동안 아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려 얼마나 애태웠을지 짐작하고도 남는 대목. 어머니의 시계는 1997년 봄에 멈춰 있었다.
평소 어머니는 허리가 아파서 잘 걷지 못한다. 주변에서 치료받으라고 해도 “중필이가 이런데…”라며 내버려뒀다. 기자가 혹시 아들이 꿈에 나오지는 않았느냐고 묻자 “요새는 안 나오데”라는 답이 돌아왔다.
“셋째 딸이 (중필이랑) 제일 친했거든요. 한 5년 동안은 걔 꿈에 나왔어요. 내 꿈에도 나와줬고요. 남편도 가끔 ‘꿈에 중필이가 왔다’면서 살아서 만난 거마냥 좋아하더라고요. 꿈에선 한마디도 안 해요. 그래도 다들 걔 보면 꿈이라도 기분 좋아서….”
허리 아파서 함께 여행 못 간 게 마음에 걸려
어머니는 귀퉁이가 노래진 닳고 닳은 가족 앨범을 꺼냈다. 그는 “기자님이 앨범 볼 것 같아서 아예 안 넣었다”고 했다. 앨범을 조심스럽게 넘기자 말 그대로 ‘선한 인상’의 훤칠한 청년이 환하게 웃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검은 파카 입은 건 셋째 딸 졸업식 때. 저 사진은 대학교 때 놀러 가서. 이건 초파일에 절에 가서 찍은 거고….”
어머니는 사진 한 장 한 장을 언제 어디서 찍었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앨범을 넘기는 기자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어머니가 말했다.
“에이고, 이렇게만 해서 일이 해결되면 내가 길에서도 춤을 추고 다닐 거라고 해요. 그 소리 막 하는 게 아닌데, 자식 죽었는데 뭔 춤이야. 범인이 없어졌는데….”
아들은 1남3녀 중 막내였다. 큰누나와는 일곱 살 차. 딸 셋 낳고 어렵게 낳은 아들이었다. 어머니는 막둥이를 낳고 하늘을 날 것 같았다고 했다.
고 조중필씨는 1남3녀 중 막내로 가족과 주변 사람에게 잘하던 착한 청년이었다.
“요즘에야 딸이 낫다고 하지만 어렵게 중필이를 낳았을 때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어요. 딸 셋 낳고 아들 낳았으니 얼마나 좋아요. 세상을 다 얻은 것 같고 사는 데 힘이 생기더라고. 아들이 죽 착하게 크니까 예뻐했고. 그 애가 또 워낙 주변 사람한테 잘했어요. 하늘같이 의지했어요. 남편보다도 더.”
늦게 얻은 아들은 크면서 어머니 속 한번 썩인 일이 없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줄곧 우등상과 표창장을 받았다. 성적 대부분은 ‘수’와 ‘우’. 상장도 많았다. 담임선생님은 성적표에 ‘체육과와 미술과에 능력이 뛰어남’이라고 적었다. 홍익대학교 전파공학과(지금은 없어졌다) 재학 당시 10과목 중 9과목에서 A와 A+를 받았다. 이동통신 회사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에 다녔다. 당시 아들에게는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의 집이 이태원이었다.
“우리는 이태원이 어떤 덴지, 그렇게 험한 곳인지도 몰랐어. 가보질 않았으니까. 에휴, 거긴 왜 가서…. 언젠가 여자친구가 찾아와서 저 때문에 죽은 거 같다고, 미안하다고 하더라고요. 중필이는 군대에 늦게 갔어요. 96년 군대 가기 전에 시간이 있으니까 엄마랑 여행 가자고 하는 걸 내가 95년부터 허리가 아파서 잘 못 걸어 못 간다고 했지. 97년에는 그 애가 다리가 아파서 의가사로 제대하더니 또 진해에 벚꽃이나 보러 가자고 하더라고. 아버지가 기차 타고 가라고 그러는데 내가 허리가 아파서 기차를 못 타잖아요. 그래서 또 못 갔는데 그런 일을 당한 거지. 난 속으로 ‘7일쯤 가자 그래볼까’ 했었는데….”
막내아들 스님 만든 애끊는 모정
어머니는 불교 신자다. 아들이 떠나고 난 뒤에는 한 달에 두 번씩 아들이 있는 절을 찾는다.
“중필이 어렸을 때부터 봉은사를 다녔어요. 이리 된 뒤에는 아리랑 고개 넘어가면 있는 작은 절(자인사)에 중필이를 갖다놨죠. 한 달에 두 번 가는데 요새는 허리가 아프니까 그것도 잘 못 해요. 요즘은 영혼 결혼도 많이 시키는데, 아들이 나이가 있으니까 큰스님한테 여쭤봤죠. 그랬더니 차라리 스님을 만들자고…. 올해 스님 계명을 받았어요. 등명 스님. 저기 큰절, 쌍계사에서 받아왔어요.”
어머니는 죽은 아들을 불가에 입적시켰다.
“워낙 선한 애니까 죽어서도 좋은 데로 갔으려니 생각해요. 짧은 생 살면서 누구한테 나쁘게 안 하고 어려서도 남의 거라면 연필 하나 가져오는 법이 없었으니까. 한번은 딸이 꿈을 꿨대요. 아주 높은 계단 위에서 중필이가 집에서 키우던 검은 개를 안고 있더래. 그래서 좋은 데 갔나 보다 해서, ‘얘, 거기 가면 할머니 할아버지 만나니’ 하니까 ‘아니야, 가는 데가 다 따로 있어’ 하더래요.”
자식을 무참히 잃은 어머니의 한을 어떻게 풀 수 있을까.
“이번에는 범인 잡아서 벌 좀 줬으면…. 맘 같아서는 사형 주고 싶은데 우리나라 법이 그렇게 돼요? 사람 죽여도 벌은 가볍게 주더구만. 아들은 죽었는데 죽인 놈은 없고, 누가 죽인 건지도 모르고 답답하잖아요. 중필이는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큰스님 되고, 스님이 됐어도 우리 아들은 아들이니까…. 얼른 억울함 풀려서 마음 편히 좋은 데 가서 살라고 하고 싶어요.”
불가에는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이라는 말이 있다. 석가가 열반에 들기 전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남긴 말로 ‘저마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아 의지하라. 또한 진리를 등불로 삼아 의지하라’는 뜻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발길을 옮기며 차가운 갈바람을 느꼈다. 문득 고인이 피안에서 언제까지고 사랑하는 가족을 지켜보고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바세계에서 한을 풀지 못하고 떠난 고인이 열반에 들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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