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의 한 스튜디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창가 쪽에 수북이 쌓여 있는 사진 자료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테마별로 구분된 자료에는 ‘나무 2010년 5월(밀착)’ ‘돌 2009년 6월(밀착)’ ‘바다 2008년 9월(밀착)’ 식으로 각자 이름표가 달려 있다. 2007년 연예·패션 등 상업 사진을 찍지 않고 예술 사진을 시작하겠다고 선언한 김중만(57)의 작업실 풍경이다. 스튜디오 곳곳에는 아프리카풍 소품들이 널려 있고, 구관조 3마리가 낯선 이의 방문을 주인에게 고하듯 재잘댔다. 일본으로 보낼 작품집에 한 장 한 장 사인을 하고 있던 김중만은 낮고 굵은 목소리로 기자를 반겼다. 그런데 앗!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레게 머리가 짧고 단정한 커트 머리로 변해 있었다.
▼ 7년이나 고수해온 레게 머리를 자르셨네요. 중요한 심적인 변화가 있었던 건가요?
“다소 거만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너무 알아봐서요. 저는 그게 불편해요. 어디를 가도 거의 10m 전방에서 제 이름이 나와요. 저는 연예인도 아니고 카메라 앞에 서는 걸 별로 안 좋아해요. 카메라 뒤에 있는 걸 좋아하죠. 어느 시점부터 좀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자유로워지고 싶어서 머리를 자르기로 했어요. 그게 첫째 목적이고, 그에 앞서 중요한 게 내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예요.”
▼ 그렇다면 처음 레게 머리를 한 이유는 뭔가요?
“머리를 자르러 미용실에 갔는데, 문득 레게 머리를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침 장발이었거든요. 그날 김종진, 이승철 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10여 명의 가수들이 자선앨범 재킷 사진을 찍으러 이 스튜디오로 왔는데 제 머리를 보고는 웃더라고요. 보통은 저를 보면 사람들이 거의 안 웃어요. 그 머리로 아프리카에 촬영차 갔는데 쉽게 말하면 ‘대박’이었어요. 현지인들이 ‘이런 놈은 처음 봤다’는 눈빛으로 저를 보더라고요(웃음). 어디를 가도 다 저를 보고 웃고 좋아하니까, 레게 머리가 즐거움을 주는 ‘룩’이란 걸 알았죠. 그런 이유로 지금까지 버티다가 얼마 전 ‘무릎팍 도사’에 출연한 이후 알아보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어나서 6월24일 제가 직접 머리를 잘랐어요.”
미용실에서 살짝 머리를 다듬고 그가 향한 곳은 홍대 타투 숍이었다. 인생에 중차대한 일이 벌어졌을 때 문신을 새기는 그는 이번에는 오른쪽 팔뚝에 2011624라는 숫자를 새겼다. 그의 몸에는 20여 년 동안 새겨온 20여 개 문신이 더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서거하셨을 때, 천안함이 침몰했을 때… 주로 마음이 아플 때 문신을 해요.”
상업 사진 포기하자 연매출 17억원에서 8천만원으로
▼ 4년째 예술 사진을 고수하며 얼마 전 첫 전시회를 열었는데 반응은 어땠나요?
“사람들의 반응은 별로 관심없고요. 상업 사진을 그만하겠다고 선언한 후 ‘한국의 재발견’이라는 주제로 전국을 다니면서 사진을 찍었어요. 그 안에 전통 구조물, 계곡, 바다, 나무 등 여러 가지 테마가 있어요. 이번에 돌 시리즈만 선을 보였어요. 돌이 주는 여러 가지 철학적인 의미를 담고 싶었는데, 모진 역경과 풍파 속에서도 아무 소리 없이 견뎌내는 게 우리 민족의 마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 잘 알려지지 않은 곳, 흔히 말하는 오지까지도 파고들었을 것 같은데, 촬영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사진은 제게 결코 쉽거나 행복한 작업이 아니에요. 정말 치열한 작업이죠. 37년째 사진을 찍고 있는데 사진가로서 행복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요. 스스로에게 가끔 물어보죠. ‘너는 행복하니?’ 하고요. 하지만 육체적 정신적으로 받는 중압감이 너무 커서, 그리고 저 자신과의 싸움에서 냉정한 편이라 결코 높은 점수를 주지 않으려고 해요. 끊임없이 제가 하고 있는 사진에 대해 분석하고 판단해서 냉정한 쪽으로 결론을 내리기 때문에 항상 부족함을 느끼며 살고 있어요. 하지만 제가 가고자 한 길이었기 때문에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오로지 나 혼자만 짊어지고 갈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 말씀을 듣고 보니 도예가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을 가차 없이 바닥에 내리쳐 깨뜨리는 모습이 떠오르는데요.
“아니에요. 저는 제가 보기에 나쁜 것도 간직하고 있어요. 그래야 더 발전하거든요. 5년 전에 찍은 사진이 시간이 흐른 뒤에는 다르게 평가 받을 수도 있어요. 또 다른 감성과 해석을 내릴 수 있고, 나의 지나온 모든 시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에 좋든 나쁘든 상관없어요.”
1 외롭게 사는 것. 남한강. 청주. 충북. 대한민국 2011 2 진정한 파랑. 요선암. 영월. 강원. 대한민국 2009
▼ 갑자기 상업 사진을 접겠다고 선언한 이유는 뭔가요.
“쉰 살이 넘으니 더는 소모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사진은 육체적인 일이며 사진가는 일용직 노동자예요. 지금은 더 빨리 이 일을 시작할 걸 그랬다고 후회하고 있어요.”
하지만 상업 사진을 포기하자 수입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일당 2천만원을 받으며 한 해 17억원 매출을 올리던 그가 2008년에는 8천만원밖에 벌어들이지 못했다. 직원들 월급 주고 남는 돈으로 겨우겨우 스튜디오 살림을 꾸려갔다. 다행히 해가 갈수록 수입이 조금씩 늘어나 4년째인 올해는 3억원 정도를 예상하고 있다. 예전에 비하면 한참 줄어든 살림이지만 그는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다. 처음부터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사는 게 그의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 많이 벌다 적게 벌면 당장 생활이 불편할 것 같은데요.
“지금껏 사진을 해서 재테크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돈이 생기는 대로 장비 사고, 프린터 사고…, 스캐너를 하도 많이 쓰니까 고장이 자주 나는데 한번은 수리하러 오신 분이 그래요. 충무로 업체보다 많이 사용하는 개인 스튜디오는 처음 봤다고요(웃음). 저는 오로지 사진밖에 몰라요. 어떻게 해서 지금 필요한 사진 장비를 구입할까, 필름은 어디에서 어떻게 구할까가 주 관심사죠. 물론 돈 굴리는 재주가 없는 건 자랑이 아니지만요.”
▼ 부인의 불만은 없나요.
“다행히 네오 엄마는 그런 걸로 바가지를 긁지 않아요. 제가 아내를 존경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에요. 저를 있는 그대로 다 이해해주는 정말 좋은 여자라고 생각해요. 돈이 있으면 쓰고 없으면 안 쓴다는 주의도 저와 같고요. 지금껏 아내나 저나 사고 싶은 게 있으면 사고 없으면 안 사고 그랬어요. 상업 사진을 할 때와 안 할 때 가장 큰 차이가 뭐냐 하면, 시계를 안 산다는 거예요. 제가 시계를 무척 좋아하거든요. 3백만원 5백만원짜리가 아니라 2천만원 3천만원짜리에 눈에 가요. 사고 싶은 시계가 이제 하나 남았는데 아직 안 샀어요. 4년 전만 해도 길거리를 지나가거나 잡지를 보다가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바로 매장에 전화해 주문하곤 했어요. 3년 전에 포르쉐 자동차를 샀는데, 그건 판단을 잘못해서 돈 잘 벌 때 살 것을 괜히 돈 없을 때 사서 지금까지 매달 4백만원씩 갚느라 엄청 고생했어요(웃음).”
▼ 사고 싶은 것 다 사느라 돈을 못 모았을 것 같은데요.
“그렇다고 볼 수 있죠. 동대문구 전농동에 40평짜리 아파트 하나 있고, 여기 스튜디오도 있고요. 그런데 이 빌딩 주인이 건물을 부수고 새로 짓겠다고 나가라는 거예요. 어쩔 수 없이 지인을 찾아가서 쫓겨나게 생겼으니 스튜디오 하나만 빌려달라고 했죠. 돈 때문에 누구에게 도움 청한 적 없는데 이번에는 어쩔 수 없었어요. 그래서 올해 초 처음 이런 생각을 했어요. ‘이제 나도 3층 정도 되는 아담한 빌딩 하나를 가져야겠구나’. 여기보다 조금 더 큰 공간에서 작업을 더 많이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그러고 보니 지금껏 돈을 벌겠다는 생각을 한 번도 안 하고 살았더라고요. 빌딩을 짓기로 마음먹고 처음으로 저축이란 걸 시작했어요. 백만원씩 적금 넣고 있는데, 돈 관리는 제자가 다 알아서 해서 제가 신경 쓸 게 없어요.”
세계인에서 한국인으로 돌아오다
김중만은 1990년대 비슷한 시기에 사진계에 입문한 배병우나 구본창과 달리 처음부터 톱스타들의 인물 사진을 찍으며 유명세를 탔다. 하지만 지금은 앞서 예술을 선택한 두 사람과 같은 길을 걷고 있다. 그들과의 경쟁의식은 없을지 궁금한데, 그는 “시간 차이는 시간으로 극복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20, 30년 동안 한국의 아름다움을 찍고 있는 그들과 비교해 자신은 이제 겨우 4년차 사진가라는 것이다. “그래도 김중만인데 뭔가 다르지 않겠냐”고 농담을 하자 그는 “사진은 얼마만큼 절제하고 희생하면서 시간을 쏟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며 “앞으로 해마다 조금씩 점수를 올리겠다”고 다짐한다.
▼ 예술을 하기로 하고 가장 처음 찍은 사진은 뭔가요.
“한국관광공사에서 엽서를 찍어달라는 의뢰가 들어왔어요. 제가 원하는 일이기도 해서 돈은 많이 못 받지만 흔쾌히 하기로 했죠. 덕분에 새로운 세상을 만나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우리나라를 다 돌아보니까 한 가지 안타까운 게 있더라고요. 가장 좋은 비주얼 포인트가 나올 만한 곳은 죄다 군인과 스님들이 차지하고 있다는 거예요(웃음). 그리고 단 한 평도 노는 땅이 없더군요. 땅끝마을 해남에 갔는데 어느 노부부가 밭일을 하고 있고 그 옆 밭에는 ‘부동산 개발’ 푯말이 꽂혀 있었어요. 사진가인 저로서는 그림이 안 되죠. 그래서 다른 마을로 옮겨갔는데 그곳에도 똑같은 풍광이 펼쳐져 있는 거예요. 그렇게 열흘을 다니다 보니 어느 순간 ‘나이 든 노부부는 평생 한 평의 땅을 일구고 살았지만 당신 자식들에게만큼은 그 고통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 저렇게 땅을 팔려고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자식을 생각하는 부모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어요. 그때부터는 그 간판들이 얼마나 예쁘게 보이던지. 그동안 저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너무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봤구나 싶었죠. 우리가 동남아시아 등 후진국을 여행할 때 아무리 후미지고 지저분한 광경도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잖아요. 그런데 정작 내 나라 내 땅은 조금만 더럽고 촌스러워도 금방 고개를 돌려버리더군요. 저 역시 그랬고요. 하지만 그 마음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런 반성하는 마음으로 1년을 돌아다녔고, 그 다음에는 문화재청에서 의뢰가 들어와 또 한국을 찍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어요. 그 후로는 어떤 기관의 도움 없이 혼자 다니며 작업하고 있어요.”
1 김중만의 몸에 짙게 새겨진 문신은 그의 지난 날의 인생이기도 하다. 2 4년 동안 우리나라 곳곳을 돌아다니며 촬영한 자료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3 김중만이 스튜디오에서 키우고 있는 구관조. 실내에 나무가 많은 이유도 새 때문이다.
▼ 자연 사진은 인물 사진과 비교해 어떤 다른 감흥을 주나요.
“저는 여태껏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중학교 때 정부 파견 의사인 아버지를 따라 아프리카로 떠났고, 고등학교와 대학을 모두 프랑스에서 다녔어요. 한국에 와서는 끊임없이 톱스타들과 패션 사진을 찍으면서 ‘나는 세계인이다’라는 생각으로 살았어요. 나의 정체성에 대해 잠시도 고민해본 적이 없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이라는 나라 자체에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 그런데 한국의 자연을 찍으면서 한국을 재발견하게 됐고, 저 자신이 누구인지를 되돌아보게 된 거죠. 나의 뿌리는 어디일까. 돌아갈 곳이 어디일까를 고민하는 거예요. 결국 나는 한국인인데 말이죠. 나이 예순이 다 돼 이제야 그걸 깨달았어요. 그것이 제게는 말로 다 설명하기 힘든 새로운 경험이에요.”
▼ 산과 계곡, 바다 등을 돌아다니며 촬영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원하는 장면을 쉽게 얻어내지 못할 때는 어떻게 하나요.
“앞서 말했듯이 사진 찍는 일은 결코 행복하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좋은 점은 무던히 기다릴 수 있는 인내심이 있다는 거예요.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하루가 걸리든 사흘이 걸리든 비를 쫄딱 맞든 아무 상관이 없어요. 어찌 보면 사진가는 원하는 주제를 잡기 위해 모든 걸 바치고 살아요.”
▼ 제자들을 유난히 많이 데리고 다니면서 촬영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아마 저처럼 많은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는 경우도 드물 거예요. 저는 제자들과 일하는 게 좋아요. 그들이 나를 통해 좀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그들 자신도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만족스러워요. 나중에 제자들이 저보다 좀 더 나은 사진가가 될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하죠.”
▼ 제자들 중 외국인도 눈에 띄네요. 제자나 스태프를 뽑는 기준이 있으신가요?
“저 친구는 미국인이에요. 보통 스튜디오에서 일하려면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제출하는데, 저는 그건 그렇게 중요하게 보지 않아요. 오로지 열정이죠. 죽어서 관 속까지 카메라를 들고 갈지 안 들고 갈지만 보죠(웃음). 얼마 전 프랑스에 살던 아들 에니(Eni)가 사진을 배우고 싶다고 저를 찾아왔어요. 처음 월급은 40만원이고 6개월마다 올려주는데 괜찮겠느냐고 했더니 상관없다며 열정을 보여서 일하게 뒀어요. 아들이라고 특별대우는 절대 없어요. 이쪽 바닥은 서열이 중요하기 때문에 스튜디오 청소부터 하고 있어요.”
프랑스 여성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제자로
김중만은 두 번의 이혼과 세 번의 결혼을 했다. 프랑스인인 첫 부인과 이혼하고 신상옥 감독의 전 부인이었던 영화배우 오수미와 재혼해 큰 화제를 뿌렸다. 더구나 그는 신 감독과 오수미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이를 직접 키우는 남다른 부정을 보여줬다. 오수미와 이혼한 후 1988년 당시 톱모델이었던 이인혜씨와 결혼해 90년 아들 네오를 얻었다. 김중만은 프랑스에 살던 아들 에니가 자신에게 사진을 배우겠다고 했을 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그동안 정신적, 경제적으로 아들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그에게 늦게나마 기회가 찾아왔다는 생각 때문이다. 프랑스인인 전 부인도 좋아하기는 마찬가지.
▼ 큰아들 에니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일곱 살 때 제가 내팽개친 착한 아이고 이제는 100% 제 보호를 받게 됐어요. 에니란 이름은 저와 에니 엄마가 좋아하던 레즈바니라는 이란 작가의 이름에서 따온 거예요. 저와는 프랑스어로 대화하지만 한국어를 배우겠다는 의지가 강하고, 사진은 이미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다고 하더군요. 현재 홍대 근처 오피스텔에 살고 있는데 막내 네오가 사는 곳에서 5분밖에 안 걸려요. 네오도 사진을 전공하고 있어서 두 아이가 자주 만나 친하게 지내요. 아주 감사한 일이죠. 제가 자식이 아들 셋에 딸 하나인데, 모두 똑같이 대해요. 방학 때는 에니도 불러 모아서 다 데리고 있었어요. 그래서인지 아이들끼리 사이가 무척 좋아요. 아버지로서 아이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주지 못했는데도 아이들이 다 저를 좋아하고 잘 따라요. 복 받은 일이죠.”
▼ 오수미씨의 아들·딸·사위가 사진가이고 막내아들 네오군까지 사진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이 모두 사진을 하는데 아버지로서 만족스러운가요.
“자신들이 원하는 걸 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요리사가 되든 목수가 되든 상관없어요. 그런데 아이들이 다 사진을 하니까 내심 좋긴 해요. 왜냐면 제가 그동안 사 모은 장비를 물려줄 수 있으니까요(웃음). 또 사진가라는 직업 자체가 매력적인 건 사실이에요.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그로 인해 인생의 소중한 경험들을 할 수 있으니까요.”
두 번의 추방, 정신병원 감금… 되돌아보니 의미 있는 기억
그는 프랑스 니스 국립응용미술대에서 영화를 전공하다 사진과 만났다. 어느 날 사진 하는 친구를 따라 암실에 들어갔다가 이내 사진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사진은 그에게 많은 시련을 안겨주기도 했다. 1980년대에는 한국 국적을 포기했다는 이유로, 또 프랑스 국적을 가지고 전시회를 열었다는 이유로 두 번이나 강제 추방을 당했고, 절망감에 미국에서 1년 동안 마약에 빠져 지냈다. 93년에도 마약을 복용한 혐의로 구속돼 두 달 동안 형을 살았고, 정신병원에도 감금당했다.
▼ 한국을 많이 원망하셨겠군요.
“상당히 보수적이고 폐쇄된 사회에서 저 같은 사람이 나타났으니 곱게 볼 리 없었죠. 하지만 되돌아 생각해보면 당시의 강압적인 행위로 저 자신이 많이 성숙해진 것 같아요. 마약을 하지도 않았는데 했다고 해서 정신병원에 감금됐을 때는 출강하던 대학에서도 잘리고, 어려움이 많았어요. 하지만 살면서 정신병원에 가보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돈 주고도 갈 수 없는 곳이죠. 그곳에서 3일 정도 있으니까 ‘대한민국이 나를 진짜 예술가로 만들려고 작심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웃음).”
▼ 결국 미국으로 떠나 3년 동안 그곳에 머물렀는데, 생활은 힘들지 않았나요.
“아니요. 좋았어요. 할리우드에서 일했기 때문에 미국 배우들과 주로 작업을 했고, 한국 친구들도 카탈로그 등을 만들어달라면서 일을 많이 줬어요. LA에서 수영장 딸린 아파트에 살면서 나름대로 재미있게 살았어요. 그런데 갑자기 금융위기가 닥쳤고 모든 일이 끊겨 월세 5백 달러짜리 아파트로 이사를 갔고 곧 빈털터리가 됐죠. 그 후 1년 동안 죽도록 고생했어요. 1달러가 없어서 밥을 못 먹었을 때도 있었죠. 하지만 이상하게 마음만큼은 편안했어요. 결국 아내에게 1년만 시간을 달라고 한 뒤 이장희 선배(가수)를 찾아가서 더는 가족들 고생시키기 싫다며 전시회를 열게 도와달라고 했어요. 결국 장희 형 도움으로 전시회를 열었고 거기서 나온 수입으로 한국행 비행기 표를 샀어요. 그리고 다시 열심히 일을 하기 시작했죠.”
▼ 최근 세시봉 열풍이 불면서 이장희씨가 회자되고 있는데, 그분과는 어떤 인연인가요.
“1979년 처음 한국에 와서 한 일이 가수 김정호씨 앨범 재킷 사진 촬영이었어요. 그를 통해 김현식, 조용필, 전인권 등 음악 하는 친구들을 많이 알게 됐죠. 이장희 선배 덕분에 김현식을 만났어요. 어느 날 아주 눈빛이 맑고 매력적인 친구를 데리고 와서 “얘가 가수를 할 건데 네가 앨범 재킷을 찍어줘야겠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20만원을 건넸어요. 아주 파격적인 제안이었죠. 앨범 CD 만드는 데 5만원이 들 때였으니까요. 조용필 선배와의 만남은 지금 생각해도 참 재밌어요. 이번에도 앨범 사진을 찍어 주라며 저한테 모시고 왔는데, 단발머리에 반짝이 옷을 입은 모습이 촌티의 극치인 거예요(웃음). 그걸 보고 관심 없다며 도망쳐버렸어요. 그런데 보름 만에 다시 형들한테 붙잡혔고, 대신 조건을 붙였죠. 머리를 자르고 집에 있는 옷을 모두 버리는 걸로요. 그렇게 하기로 하고 3년을 붙어다녔어요.”
▼ 최근 성시경씨 7집 앨범 재킷 사진을 찍었는데, 인물 사진은 더 이상 찍지 않기로 하셨잖아요.
“가수들 일은 해줘요. 대중문화의 전체적인 밸런스를 놓고 볼 때 지난 5~6년 사이에 대중가요가 완전히 죽어버렸어요. 가수한테는 대부분 돈을 받지 않고 일을 해주지만, 시경이는 나름의 레벨이 있기 때문에 받았어요. 꽤 받았어요. 저는 음악을 좋아해서 예전부터 음악 하는 사람들한테는 웬만하면 돈을 받지 않아요.”
▼ 주로 어떤 음악을 즐겨 들으시나요.
“장르 구분 없이 들으려고 해요. 단 아이돌 노래는 따라 하기도 힘들고 나이가 드니까 잘 안 듣게 돼요. 아, 그러고 보니 클래식도 좋아하지 않아요. 그런데 최근 김선욱이라는 피아니스트와 작업을 했는데 정말 천재더군요. 놀라웠어요.”
▼ 아이돌 음악도 좋아할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 밖이네요. 혹시 여전히 젊다고 생각하시나요.
“(잠시 한숨을 내쉬며) 아니요. 몇 달 전 한국민족사진가협회 김영수 회장님이 작고하셨어요. 평소 존경하는 선배님이고 또 말년에 춤 사진을 혼신의 힘을 다해 찍은 분이신데, 암으로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그분의 제자이자 민족사진가협회 사무총장인 조은숙씨가 저를 찾아왔어요. 선생님 유언도 있고 협회인들 생각도 그렇고, 제가 회장직을 맡아줬으면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대뜸 “나는 아직 그 나이 안 됐어” 했더니, 저를 빤히 쳐다보면서 “그 나이 되셨습니다” 하더라고요. 그때 제 나이를 알고 깜짝 놀랐어요. 그동안 나이를 잊고 살았던 거죠. 결국 회장직을 수락하긴 했는데, 대신 조건을 붙였어요. 우선 민족사진가협회라는 이름은 너무 이념적이니 대한민국사진작가협회로 바꾸자고 했죠. 그리고 임기도 4년에서 2년으로 단축해 젊은 친구들에게 회장직의 기회를 주자고 했어요. 그렇게 하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상당히 씁쓸하더군요.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그 나이는 아닌 것 같아서요.”
▼ 상업 사진에서 예술 사진으로 전환하신 것처럼 앞으로도 또 다른 변신을 계획하시나요.
“글쎄요. 아직 정확한 건 없지만 사진에 대한 열정과 꿈, 제게는 그거 하나밖에 없어요. 다행히 사진의 역사가 2백 년밖에 안 됐어요. 미술은 2천 년이나 됐잖아요. 앞으로 사진 역사의 한 페이지에 이름을 남기는 게 목표라면 목표예요. 물론 생전에 이루기 힘들 수도 있고, 영원히 불가능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 꿈을 포기하지 않고 살 거예요. 37년 동안 단 하루도 사진을 찍지 않은 날이 없는데 앞으로도 끊임없이 새로운 걸 찍으며 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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