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구슬처럼 맑은 눈망울에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대사를 읊던 여덟 살 꼬마가 어느덧 한 아이의 아빠가 됐다. 아역배우 출신 연기자 정태우(28)의 얼굴에선 이제 더 이상 그 옛날 아이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지난 11월 중순 연극 ‘이’ 공연에 한창인 정태우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났다. 공연을 두 시간 앞두고 분장을 마친 그는 약간 긴장한 듯한 얼굴로 기자를 맞았다.
“이번에 공길 역할을 맡았는데 분장에만 시간이 꽤 오래 걸려서 힘들어요. 평일 하루 한 번 공연하는 건 괜찮은데 주말에 두 번씩 공연하려면 하루 종일 신경을 써야 해서 조금 피곤하기도 하죠. 여러 힘든 부분이 있지만 그래도 좋은 선배들과 함께하고 또 오랜만에 서는 연극무대라 재미있게 연기하고 있어요.”
정태우는 1988년 영화 ‘똘똘이 소강시’로 데뷔한 후 각종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하며 20여 년 동안 연기자로 활동했다. 유년기 어린이 뮤지컬에 출연한 이후 연극은 지난해 ‘에쿠스’가 처음이었다. 12월부터 3개월 동안 연극에 출연하면서 연극의 참맛을 알았다고 한다.
“공연 날짜가 확정이 되면 작품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몇 달 동안 연습에 들어가요. 그렇게 많은 연습시간을 가진 뒤 공연에 들어가도 긴장을 한순간도 놓칠 수 없죠. 하지만 배우들도 감정이 있는 인간이다 보니 그날그날 기분과 컨디션이 달라요. 그걸 배우 개개인이 잘 조절해야 돈을 내고 공연을 보러 온 관객에게 만족을 드릴 수 있죠. 연극을 하는 동안 ‘내 자신을 컨트롤하는 법’을 배운 건 가장 큰 수확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번에 출연하는 연극 ‘이’에서 그는 연산군, 장생과 삼각관계를 이루는 비운의 광대 공길 역할을 맡았다. 곱고 아름답기로 치면 웬만한 여성들보다 한 수 위인 정태우가 맡기에 알맞은 역할인 듯 보였다. 그는 “동성애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은 아니지만 그 이면의 감정을 표현하려고 노력 중”이라고 말했다.
“공길과 연산군, 장생의 관계가 단순히 동성애만 부각되는 관계는 아니라고 보기 때문에 출연을 했어요. 성별을 떠나 우정 이상의 감정을 갖고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인간적인 면을 잘 드러내도록 연기하고 있죠.”
교회 누나 소개로 만난 아내, 속 깊고 성실한 모습에 반해
정태우는 지난해 5월 천생배필을 맞이했다. 한 살 연하의 스튜어디스와 3년 열애 끝에 웨딩마치를 울린 것. 결혼 당시 정태우의 나이가 결혼 연령으로 조금 이른 듯해 속도위반 아니냐는 의심도 많았지만 그는 “3년 연애를 하다 보니 자연스레 결혼 생각을 했던 것뿐”이라며 이를 부정했다. 두 사람은 정태우가 다니는 교회의 지인을 통해 만나게 됐다.
“같이 교회를 다니던 친한 누나가 스튜어디스였는데 제가 만나는 사람이 없다고 하자 후배를 소개해주셨어요. 만나 보니 귀엽더라고요. 첫눈에 반하고 그런 건 아니었어요. 어려 보이는 외모와 달리 만나면 만날수록 속이 깊고 자신의 일도 성실히 하는 모습에 점점 마음을 빼앗겼죠.”
연애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차츰 정태우는 결혼을 생각하게 됐다고. 하지만 신앙심이 깊었던 터라 ‘이 사람이 하나님이 선택해주신 바로 그 배우자’라는 기도응답을 받고 싶었다고 한다.
“작년 1월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매일 새벽, 교회로 나가 기도를 했죠.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만드셨듯 제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여자친구가 하나님께서 점지하신 사람이 맞는지 응답을 내려주세요’라고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런 응답을 하나씩 보내주셨어요. 아나운서 박나림 누나도 같이 새벽기도를 나갔는데 3일째 되던 날 누나가 전화해서는 ‘너와 너의 여자친구가 결혼하는 꿈을 꿨다’는 등 많은 지인들이 비슷한 말씀을 해주시더라고요. 그제서야 내 짝인가 보다 하는 확신이 들었죠.”
주변 사람들에게 결혼 소식을 알리자 의견이 반반으로 갈렸다고 한다. 배우로서 앞으로 할 일이 많은데 너무 이르다는 쪽, 젊은 나이에 결혼해서 빨리 정착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쪽이었는데 그는 어려서부터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었다고. 외국 배우 주드 로가 아이 셋과 함께 거니는 모습을 볼 때면 ‘나도 친구 같은 아빠, 젊은 아빠로 아이와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양가 부모는 이들의 결혼을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3년 연애 기간 동안 서로의 부모에게 인사를 드리고 자주 어울렸던 터라 쉽게 승낙을 얻을 수 있었다.
“데이트를 처갓집이나 저희 집에서 주로 했거든요. 결혼하겠다고 하자 어른들이 더 좋아하셨죠. 결혼하고 나서 자주 찾아뵙고 잘하려고 노력하는데 장모님은 아직도 저더러 사위가 아닌 연예인 같대요(웃음). 언제쯤 편하게 생각해주실지 모르지만 아직 결혼한 지 얼마 안 돼서 그런 거라 생각해요.”
결혼을 앞둔 모든 남자들이 고민하듯 정태우도 프러포즈를 어떻게 할지 한참 고민했다. 상견례를 하고 결혼식 날짜까지 잡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까지 아내는 서운해하는 눈치였다고 한다.
“제가 한화 이글스 홍보대사로 있으면서 어느 날 시구할 기회를 얻었어요. 결혼을 앞둔 상황에서 ‘이거다’ 싶었죠. 아내에게 시구를 하게 됐으니 같이 가서 시타를 해달라고 했어요. 거기에 집중하느라 프러포즈를 할 거란 눈치를 못 챈 것 같더라고요. 프러포즈 영상을 준비해서 관계자에게 5회 말 클리닝 타임 때 좀 틀어달라고 했죠. 한화 김태균 선수와도 친한데 그때 고맙게도 박수도 쳐주고 진심으로 축하해주더라고요. 여자들은 프러포즈를 평생 기억한다고 하는데 그 정도면 괜찮게 한 것 같아요(웃음).”
“저희 부부 똑 닮은 아들 볼 때면 하루 피로가 싹 가셔요”
올해 초 아들 하준군을 얻은 정태우는 요즘 아이 보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고 한다. 공연을 준비할 때도 가끔 아들 하준이의 얼굴이 눈에 밟힌다고.
“연습이나 공연이 없는 날에는 하루 종일 아이와 놀아주니까 굉장히 좋아해요. 참 신기한 게 밤늦게 자다가도 제가 집에 도착해서 번호키를 누르면 깨서는 현관 앞으로 기어 나와요(웃음). 얼마나 귀여운지 하루 동안 쌓였던 피로가 싹 가시는 느낌이 들 정도예요. 아이 태어나고 나서 세상이 달라진 것 같아요.”
보통 임신기간 중에 아내는 예민해지기 마련. 특히 정태우는 아내가 임신했을 때 연극 ‘에쿠스’에 출연하고 있던 터라 신경 쓸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그는 “섭섭해하지 않도록 노력했다”고 말했다.
“솔직히 많이 챙겨주지는 못했어요. 공연 시작 전까지 연습량이 엄청나기 때문에 거의 집에 없거든요. 다행히 아내가 그런 부분을 많이 이해해주더라고요. 하지만 연습이 없을 때는 아내에게 100% 충실했어요. 먹고 싶어하는 것도 사서 나르고,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을 때도 항상 곁에 있어줬죠. 아내가 집안일을 거의 못 하니까 시간 날 때마다 제가 정리를 하고요. 그렇게 했어도 늘 곁에 있어주지 못한 건 좀 미안해요.”
정태우의 정성으로 그의 아내는 무사히 아들 하준이를 낳았고 원래도 밝았던 가정이지만 웃음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더욱 밝아졌다.
어린 나이에 데뷔해 평생 연기만 해온 터라 집안일에 무관심할 것 같지만 정태우는 쉬는 날이면 오로지 가족과 함께하며 집안일을 돕는 가정적인 남편이다. 지금은 잠시 휴직상태인 아내가 집안일을 도맡아하고 있지만 틈틈이 청소·빨래를 돕고 아내가 일을 다시 시작하면 분담해서 할 생각이라고. 가정적인 남편이라 아내가 매우 좋아할 것 같다고 하자 그는 머뭇거리다가 “저는 한다고 하는데 아내 눈에는 모자랄 수도 있어요”라며 멋쩍게 웃음 지었다.
아내와 아이가 생기고 난 뒤 그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일까.
“독립심이 생겼달까요. 초등학교 때부터 방송 생활을 해왔는데 엄마가 늘 곁에서 다 도와주셨어요. 가족들도 어린아이가 밖에서 일한다고 돌아다니니까 다 맞춰주셨죠. 커서는 매니저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챙겨줬으니 나이 먹고도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어요. 버스나 지하철 요금이 얼마인지, 우체국에서 소포는 어떻게 부치는 건지 등등 하나도 모르고 심지어 밥도 혼자 못 먹었어요. 그런데 결혼하고 나니까 거리낄 게 없더라고요. 요즘에는 연극 연습하러 광화문까지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혼자 다니기도 하고, 아내가 처갓집에 아이를 데리고 가 있으면 집에서 혼자 밥을 해 먹기도 해요.”
아빠 엄마를 닮아 벌써부터 남다른 인기를 자랑하는 아들 하준이 역시 아역으로 키우고 싶은 생각이 없냐고 묻자 그는 “자기가 좋아한다면 막을 이유는 없다”며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하지만 그는 “내심 운동선수가 됐으면 한다. 부모가 보통 자기가 못 한 걸 이뤄줬으면 하는 꿈이 있지 않나. 내 경우에는 운동선수인 것 같다”며 조심스레 희망사항을 내비쳤다.
아역스타로 각광을 받다가도 유년기를 지나 성인 연기자로 바르게 서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정태우는 그 시기를 잘 지나왔다. 그는 “어린 시절 좋은 선배 연기자들을 많이 만나 긍정적인 영향을 받은 덕분”이라고 말했다.
다이내믹한 사극 좋아하지만 장르 구분하지 않고 열심히 연기할 것
“어릴 때 사실 성격이 좋지는 않았어요.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데다 결벽증까지 있었죠. 밖에서 음식을 먹을 때도 제 수저를 챙겨 다니며 그걸로만 먹었고, 친구들이 집에 놀러 와도 밖에서 있다 오면 더러우니까 발을 현관에서 일일이 다 씻고 들어오라고 할 정도였죠(웃음). 그런데 훌륭한 성품을 가진 선배 연기자들을 만나며 여러 조언을 얻고 나서부터는 달라졌어요. 사춘기 때 지금은 목사님이 되신 임동진 선생님과 2년 동안 드라마 ‘왕과 비’라는 작품을 하면서 배우에 대한,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는데 그게 정말 큰 도움이 된 거 같아요.”
정태우를 이야기하다 보면 자연스레 사극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아역 시절 ‘용의 눈물’을 시작으로 ‘여인천하’ ‘무인시대’ ‘대조영’ ‘왕과나’ 등에 출연했고 햇수로 따지면 11년 가까이 사극 촬영장에서 생활을 했다. 사극을 선호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법한데 그는 “특별히 선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극이 좋긴 하다”고 말했다.
정태우는 아들 하준이가 무엇을 하든 응원해줄 생각이라고 한다.
“어렸을 때는 큰 드라마에서 왕 역할을 하니까 멋모르고 좋아서 연기했지만 자라면서는 사극만의 매력이 느껴지더라고요. 전개가 다이내믹하고, 왕실 정치의 세계가 흥미진진하게 흘러가는 것도 상당히 재미있어요. 감정을 표현할 때도 현대극보다 극적으로 표현하는 부분이 많으니까 희열도 느껴지고요. 또 제가 무협물이나 사극액션을 좋아해서 그런 쪽 연기를 많이 했죠. 사극은 한번 찍으면 1, 2년 동안 길게 가니까 시청자분들이 보시기에 제가 사극만 한 것처럼 비춰질 수 있는데 시트콤, 현대물 등 다른 장르도 많이 했어요.”
10여 년 동안 주로 드라마에 출연해온 그는 앞으로 연극뿐만 아니라 영화 등 다양한 장르에 눈을 돌릴 생각이라고 한다.
“요즘 젊은 배우들은 무대에 서는 걸 무서워하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어요. 그런 두려움을 감수하고 연극무대에 서면 배우는 부분이 참 많아요. 저 또한 연극을 처음 할 때는 걱정이 앞섰지만 지금은 정기적으로 드라마와 연극을 병행할 생각을 가지고 있을 정도가 됐죠. 앞으로 스스로에게 채찍을 휘두르며 더 발전하는 모습을 보일 수 있도록 노력할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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