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규(50) 김국진(45) 김태원(45) 이윤석(38) 김성민(37) 이정진(32) 윤형빈(30). 아무도 이들의 의기투합에 주목하지 않았다. 이미 SBS ‘라인 업’으로 한 차례 실패를 맛본 이경규의 도전에 사람들은 크게 기대하지 않았고,그 역시 1위를 질주하고 있는 KBS ‘1박2일’의 메인 MC 강호동에게 “덕 좀 보자”고 말했을 정도로 불안함을 껴안고 시작했다. 하지만 방영 1년이 지난 4월 중순의 방송분은 시청률 28%를 기록했다. 이경규를 비롯한 ‘남자의 자격’ 7인의 주인공은 이제야 마음 놓고 웃을 수 있게 됐다.
지난 4월1일 촬영을 마친 이들을 만났다. 멤버들은 ‘남자의 자격’이 성공적으로 안착하는 데 공헌한 사람으로 주저 없이 신원호 PD를 꼽았다. 김국진은 신 PD에 대해 “이렇게 배짱 좋은 감독은 처음 봤다”고 말했다. 1년 동안 멤버들에게 시청률을 높여야 한다는 부담감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느긋하게 촬영에 임했기 때문. 하지만 신 PD는 “조급하지 않은 PD는 없다”며 솔직한 심정을 들려줬다.
“1등을 꿈꾸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에요. 매주 강한 미션들을 선보이며 가열차게 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천천히 시청자에게 스며들고 싶었거든요. 보채지 않고 기다리면서 전체적인 맥락만 잡아줬고, ‘뭘 하려고 하지 말라’는 주문을 했죠.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 순간부터 중장년층 남성을 중심으로 공감을 사더니 팬덤이 양산됐어요. 정말 기분 좋았죠.”
‘남자의 자격’은 나름대로의 노력 끝에 이제야 제대로 빛을 보게 됐다. 신 PD는 “지금의 인기를 넘어서려고 조급하게 나서는 것은 독약을 삼키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지금껏 해온 대로 페이스를 유지하며 장기적으로 승부를 내고 싶다고. 멤버들에 대해서는 “이제야 각자 제자리를 잡은 것 같다”고 솔직하게 평했다.
“계산을 하고 캐스팅한 사람은 이경규씨밖에 없고, 나머지는 그냥 섭외했어요. 때문에 ‘의외의 캐스팅이다’ ‘망할 것 같다’ 말이 많았죠. 물론 PD들이 소위 말하는 ‘예능 선수들’을 캐스팅할 수도 있었지만 진짜 모습을 보여줄 사람들을 선택했어요. 예능 카메라 앞에서 쑥스러움을 느끼는 그런 의외성이 있어야 신선할 것 같았거든요. 지금은 한 사람 한 사람 다 캐스팅한 걸 만족해요.”
#36번째 미션 ‘남자, 그리고 청춘에게 고함’ 지상 중계!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지난 4월1일, 서울 경희대학교 강당에서 ‘남자의 자격’ 36번째 미션이 진행됐다. ‘남자, 그리고 청춘에게 고함’이라는 부제로 이제 막 대학생이 된 20대 젊은이들에게 7인의 멤버 전원이 인생 선배로 나서 조언했다. 각자에게 30분의 시간이 주어졌고 제비뽑기로 순번을 정했다. 장장 4시간여에 걸쳐 진행된 강의에서 이들은 자신의 뼈아픈 경험을 통해 깨달은 점들을 두서없이 말해 큰 호응을 얻었다.
첫 번째 주자로 나선 이윤석, 교수답게 짜임새 있는 강의로 호평
대형 스크린에 데뷔 당시 사진이 뜨자 이윤석이 강단으로 걸어 나왔다. 까만 정장에 보라색 나비넥타이를 맨 그는 ‘국민약골’이라는 별명과 달리 자못 교수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준비해온 수십 장의 강의 노트를 부지런히 들여다보는 모습이 살짝 긴장돼 보였다. 하지만 박사 학위를 받고 오랫동안 강단에 서온 그였기에 이내 거침없이 강의를 시작했다.
“웃음기를 뺀 개그맨 이윤석입니다. 오늘 전 개그맨이 아니라 인생 선배로 이 자리에 선 거예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20대를 괴롭히라!’입니다. 젊은 시절에는 목표를 크게 잡으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그렇게 해야 나중에 중간이라도 갈 수 있거든요(웃음).”
그는 스스로를 ‘3.2인자’라고 칭했다. 그나마도 개그맨으로 데뷔했을 때 큰 꿈을 가지고 있었기에 지금의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라고. 그는 이어 현재를 살아가는 방식을 이야기하며 큰 웃음을 줬다. 스스로를 매우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대선배인 이경규 옆에 붙어 있는 거라 말했다.
“이경규 선배는 체력은 강호동에게 지고, 인격은 유재석에게 지겠지만 웃기는 건 최고라고 봐요. 전 그에 비해 많이 부족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하루에 한 번만 웃기자’는 작은 다짐을 하며 살아가요. 하지만 여기까지 오기 위해 큰 꿈을 꿨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안정감 있게 강의를 이어가던 이윤석은 애드벌룬에 공기를 가득 채워야 높이 오를 수 있는 것처럼 20대에는 내면을 채우는 시간도 필요하다는 등 적절한 비유를 하며 학생들의 몰입도를 높였다. 그는 또 학생들에게 시간을 쉽게 여기고 그냥 흘러 보낼 것이 아니라 “시간은 채워야 할 보석”이라는 개념으로 대학시절에 충실할 것을 당부했다.
고단한 인생 진솔하게 고백한 김국진, 감동 선사
이윤석의 뒤를 이어 등장한 김국진은 한참을 어색해하다가 본인의 유행어로 분위기를 띄우고 강의를 시작했다. 그는 ‘롤러코스터’라는 주제로 학생들에게 자신의 인생사를 담담하게 들려줬다.
“여러분은 잘 모르시겠지만 제가 한때는 괜찮았어요. 91년 대학개그제에 입상하며 데뷔한 뒤 이듬해 신인상을 받았는데, 별건 아닙니다. 그냥 그해 입사한 사람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이에게 주는 상을 제가 받은 것뿐이죠(웃음). 이후 신인으로서는 파격적으로 다섯 개의 고정 프로그램을 맡았습니다. 안정적이었지만 이 시기에 미국을 여행하면서 ‘과연 이렇게 사는 것이 맞는가’라는 고민을 했고, 방송을 과감하게 그만두고 유학을 떠납니다. 그게 내리막길이었습니다.”
강연 중간 중간 그는 세대 차이가 많이 나는 학생들이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할 것을 염려해 “나약해 보이지만 상당히 도전적인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처음에는 웃기만 하던 학생들도 그의 고생담을 듣고는 이내 수긍하는 듯 보였다. 이후 그는 미국에서 강도 높은 지진을 겪다가 죽을 뻔한 이야기, 한국에 돌아와 다시 방송을 하려고 했지만 영구 제명당한 이야기, 결혼에 실패한 이야기, 프로 골프선수가 되기 위해 애썼지만 고배를 마신 이야기 등을 마치 남의 일처럼 들려줬다.
“제 인생은 그야말로 롤러코스터였지만 한 번도 겁먹지 않았어요. 내려갔던 반동으로 힘차게 다시 오를 거라는 걸 믿었던 거죠. 저는 5년 동안 진행하는 프로그램이 없을 때도 자신감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 덕분에 바닥을 찍은 후 지금 이 자리에 설 수 있었어요. 인생에는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고, 내리막이 있으면 오르막이 있다는 걸 반드시 기억하세요.”
김국진은 인터뷰를 하지 않는 개그맨으로 유명하다. 자신의 아픈 과거를 들춰 이야기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기 때문. 하지만 그는 이날, 자신의 과거를 희화화하면서까지 가슴을 울리는 메시지를 선사해 학생들에게 큰 감동을 줬다.
호통 이경규, 칠판 가득 ‘참을 인’ 쓰며 열정적으로 강의
여섯 번째로 나선 이경규는 3시간 넘게 앉아서 강의를 듣던 학생들이 자리를 뜨려고 하자 단상에 오르며 “왔다 갔다 하지 마!”라고 호통을 쳤다. 지쳐 있던 학생들을 깨운 그는 곧 “안녕하십니까. 영화감독 이경규입니다”라고 소개해 웃음과 환호성을 이끌어냈다.
“강의를 하기 위해 장장 여섯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이게 무슨 비도덕적인 경우란 말입니까. 영화 ‘아바타’도 두 시간 반 넘게 보면 지겨워요. 하지만 저는 뒤에서 제 차례를 기다리며 꾹 참았습니다. 강의 주제를 아무리 화가 나도 참자는 의미의 ‘참을 인’으로 정했으니까요.”
짧고 굵게 하겠다는 다짐으로 강의를 시작한 이경규는 먼저 30년 동안 달라진 방송 환경에 대해 이야기했다. 과거에는 하루에 한 회분 녹화를 다 끝냈지만 요즘에는 60분짜리 한 회분을 위해 3백분 동안 녹화를 하는데 그는 후배들이 재미없는 이야기를 할 때면 중간에 끼어들어 다 잘라버렸다고 한다. 그러자 그의 주변에는 사람들이 남아 있지 않았다고.
“제가 지나가면 사람들이 홍해 갈라지듯 비켜섰어요. PD까지 슬금슬금 저를 피했습니다. 깊이 고민한 끝에 ‘이제는 좀 참아야겠다’고 다짐했어요. 마라톤 아시죠?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는 운동인데 이걸 4시간 동안 하라는 겁니다. 방송을 위해 꾹 참아가면서 결국 해냈어요. 마라톤을 하고 나니 이번에는 지리산을 올라가라는 겁니다. 18시간을 올라갔는데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화가 났어요. 다시 내려와야 하니까요. 그래도 저는 꾹 참았습니다.”
그는 참은 뒤부터 일이 잘 풀리고 있다고 웃으며 말했다. 학생들의 웃음을 유도하며 흡인력 있게 강의를 이끌던 그는 잊지 않고 삶의 메시지를 전했다. 자신의 어깨에는 가족을 먹여 살려야한다는 짐이 얹혀 있는데 이를 함부로 내려놓으려 하지 않는다고. 마찬가지로 누구나 어깨의 짐을 내려놓지 말고 부단히 노력하다 보면 어느새 원하던 이상을 이루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1 각자 열정적으로 강의를 끝마친 7인의 멤버들이 소감을 말하고 있다. 2 강당 뒷편에서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멤버들. 사뭇 긴장된 표정이다.
#멤버 7인 고백 “내가 겪은 남자의 자격 1년”
강의가 끝난 뒤 여의도 한 식당에서 밤늦게 이들을 만났다. 지난 1년간 ‘남자의 자격’을 함께 한 소감을 묻자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이경규 “처음에는 잘될 줄 몰랐어요. 이제 이런 프로그램을 하기 힘든 나이인데 ‘야외에서 뛰는 마지막 버라이어티’라 생각하고 임했죠. 물불 안 가리고 이렇게 열심히 하기는 처음입니다(웃음). 인기비결은 중장년층 남성의 공감을 산 것이라 할 수 있죠. 멤버들 각각 몸도 안 좋고, 다 허술한데 그런 모습에서 진정성이 드러난 것 같아요. 지금까지 했던 미션 중 지리산 편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숨도 못 쉴 정도로 힘들었는데 서로 의지하며 올라갔죠. 기회가 되면 국토순례도 한번 해보고 싶어요. 힘들지만 그만큼 돌아오는 게 많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김국진 “연기자·연출자의 능력이 적절하게 섞여야 성공할 수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남자의 자격’은 누구 하나 뛰어난 사람은 없지만 시너지효과를 얻었죠. 전 방송에서 뭘 억지로 하는 걸 싫어하는데 PD도 마찬가지였어요. 눈물 편을 찍을 때, 제가 눈물이 없으니 강요하지 말라고 당부했는데 배려해줬고, 그 덕분에 자연스럽게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가장 기억에 남아요. (곁에 있던 멤버들이 마지막 미션은 ‘김국진 장가보내기가 될 것’이라고 하자) 그런 미션을 마지막으로 생각하고 있었군요. 글쎄요…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것 같은데요(웃음).”
김태원 “체력적으로 많이 힘들었어요. 해병대 편을 찍고 나서는 그만둘까 심각하게 고민했을 정도로요. 그때 ‘내가 이 프로그램에 방해가 되는 건 아닌가’ 싶었거든요. 국진이(둘은 65년생 동갑내기다)랑 별로 친하지도 않을 때였는데 그날 밤 국진이가 술 한잔 하자고 불러서는 이런저런 얘기를 해줘서 감동받았죠. 경규 형도 음악인이라고 잘 챙겨주셔서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사실 처음에는 ‘국민 할매’라는 별명도 싫었어요. 난 로커인데 사람들이 놀리는 줄로만 알았죠. 그런데 ‘친근감의 할머니’라는 걸 안 후부터는 만족하고 있어요. 하고 싶은 미션이요? 여기서는 말조심해야 돼요. 전에 우스개로 대한해협 건너겠다고 하니까 PD 눈이 번쩍하더라고요(웃음). 그냥 노코멘트 할래요.”
이윤석 “대부분 40대 이상 아저씨들이잖아요. 약간의 서글픔도 배어 있고 하니까 동년배 시청자에게 확실히 어필하는 것 같아요. 전 사실 크게 웃기는 개그맨은 아니잖아요. 외모, 언변도 별 볼 일 없고요. 하지만 이 프로그램에서만큼은 미션을 하면서 진가를 보여드릴 수 있었죠. 다른 멤버는 지리산·마라톤 등의 미션이 좋았다고 하는데 전 자격증 미션이 가장 마음에 들어요. 도배 자격증을 지금 준비하고 있는데 다양한 사연을 가진 어른들을 만나 대화하면서 인생의 참의미를 많이 깨쳤어요. 앞으로도 주어진 미션을 성실히 하면서 즐거움을 드리고 싶어요.”
김성민 “왜 제 별명이 ‘김봉창’인지 모르겠어요. 그냥 열심히 할 뿐인데 말이에요. 처음으로 예능에 출연했는데 다들 좋아해주셔서 감사하고 있어요. 배우 이미지가 희석될 것 같아 걱정이긴 하지만 연기할 때만큼은 진지하니까 걱정 안 하죠. 전 야외촬영을 좋아하는 터라 해병대 편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전투기 훈련도 상당히 재미있었죠. 앞으로 서커스, 아마존 탐험, 스카이다이빙 등 액티브한 미션이 많으면 좋겠어요.” (그가 이렇게 말하자 다른 멤버들의 표정이 점점 굳어져갔다)
이정진 “시작할 때 우스개로 ‘101개(남자가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101가지라는 의미로 이들에게는 총 101개의 미션이 주어질 예정이다)가 아니라 11개만 해도 다행’이라고 말했는데 벌써 1년이라니 기적 같아요. 드라마와 다른 현장 분위기에서 적응하느라 힘들었지만 지금은 멤버들과 많이 친해져서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남자의 자격’의 매력은 진정성인 것 같아요. 그냥 웃기기보다는 시청자와의 약속을 지켜가고 있으니까요. 다들 걱정하지만 전 망가지는 것쯤은 두렵지 않아요. ‘비덩’도 ‘이배우’도 생애 처음 얻는 별명이라 상당히 좋거든요.”
윤형빈 “‘개그콘서트’ 동료들이 부러워해요. 박성호 선배가 로비를 시작했을 정도죠(웃음). 농담이고, 잘 챙겨 보고 있으니까 힘내라고 격려해줘요. 처음에는 대선배들 앞이라 말 한마디 못하다가 다 편집됐는데 이제 조금씩 적응해서 자리를 찾았어요. 감독님이 언젠가는 제 역할을 할 거라 믿어주셔서 감사하죠. 촬영 때문에 멤버들을 거의 매일 보다시피 하니까 이제는 형제처럼 느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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