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민(40)이 최근 삭발을 강행했다. 김명민 주연의 영화 ‘내사랑 내곁에’에서 뇌수술을 받은 후 혼수상태에 빠진 춘자 역을 맡으면서다. 여자 연기자로서 삭발을 결정하기란 쉽지 않았을 터. 더욱이 영화 촬영에 들어가기 전까지 허리에 닿을 정도로 애지중지 길러온 머리카락이다. 임성민은 “다행히 긴 머리보다 낫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며 털털하게 웃었다.
“당초 시나리오에는 삭발이란 말이 없었어요. 감독님도 춘자는 환자지만 보통 사람처럼 혈색도 좋고 예쁘다고 했죠. 촬영에 들어가자마자 머리카락을 어깨까지 잘랐는데, 촬영 중반이 되니까 감독님이 삭발을 하라고 하시더라고요. 순간 당황했지만 연기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 생각하고 눈물을 삼키며 머리를 밀었어요.”
혼수상태에 빠진 환자 역이다보니 대사는 없다고 한다. 그는 “식물원 장면에서 대사가 한 줄 있었는데 그마저 편집됐다”며 웃었다.
‘내사랑 내곁에’ 박진표 감독과는 KBS 입사동기. 임성민이 사표를 내고 프리랜서 선언을 하던 해 PD 출신인 박 감독 역시 영화감독으로 전향했다. 이번 춘자 역은 그동안 그의 연기활동을 관심 있게 지켜본 박 감독이 먼저 제안했다고 한다.
영영 기회 잡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자살까지 생각
지난 2001년 안정적인 아나운서 직을 그만두고 연기자로 변신한 임성민은 2년 전부터 드라마 ‘강남엄마 따라잡기’ ‘애자 언니 민자’ 등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맡으며 조금씩 연기자의 꿈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방송계에서 그의 존재는 여전히 미미하다. ‘아나운서 출신’이라는 굴레가 더욱 그를 힘들게 한다.
“아나운서 하다가 연기자로 돌아선 경우는 제가 처음이라 본보기로 삼을 만한 사람이 없었어요. 소속사에 들어가기도 했는데 매니저들마저 ‘아나운서 출신이라 일이 안 들어온다’고 얘기를 할 정도였죠. 어느날 갑자기 소속사가 문을 닫은 적도 있고…. 운도 참 안 따랐던 것 같아요.”
배역이 들어오지 않자 생활고는 심해졌고, 좌절감이 커지면서 그는 자살까지 생각한 적이 있다고 한다. 임성민은 “집 밖에 나가기가 두려웠다. 사람들에게 ‘왜 아나운서를 그만뒀냐’라는 상처가 되는 소리를 많이 듣다보니 점점 마음의 병이 깊어졌다”고 털어놓았다.
“체계적으로 연기를 하고 싶어 연기학원을 다니고, 대학 교수에게 개인교습까지 받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기회가 오지 않았어요. 몇 년이 지났는데도 제가 품위 유지나 할 요량으로 연기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많더라고요. 저 자신은 정말 절실한데 말이에요.”
‘이러다 영영 기회를 잡지 못하는 건 아닌가’하는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던 그는 지난 2006년 연기자로의 확실한 변신을 위해 모바일 화보 촬영이라는 히든카드를 던졌다.
“솔직히 썩 내키는 제안은 아니었어요. 예전에도 여러 번 비슷한 제안을 받았지만 괜히 안 좋은 파장만 생길까봐 고사했었죠. 하지만 언제까지 오디션만 보면서 배역이 주어지기를 기다릴 수는 없었어요. 남들이 나를 알아주길 바라기 전에, 내가 먼저 나 자신을 보여주자는 생각이었죠.”
아직 보여주지 못한 것 많기에 연기 욕심 더욱 커
그가 9년이란 시간동안 버텨올 수 있었던 건 오로지 연기에 대한 열정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춤과 노래를 좋아하고, 이화여대 재학 시절 영어연극반 활동을 했던 그는 아나운서가 되기 전인 지난 91년 이병헌, 손현주, 노현희 등과 함께 KBS 공채 탤런트 시험에 합격했다. 하지만 그는 집안의 완강한 반대로 탤런트의 꿈을 접어야 했다.
이후 그가 차선책으로 택한 직업이 아나운서. 방송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었던 그는 세 번의 고배를 마시고 나서야 아나운서가 될 수 있었다. 당시 그는 ‘이번에도 떨어지면 수녀원에 들어가자’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방송국에 들어가자마자 일을 많이 맡았어요. 뉴스에서부터 예능프로그램까지, 하루에 2~3시간 밖에 못자고 일했어요. 휴가를 반납하고 라디오 뉴스까지 진행했고 일요일도 없이 방송하는 날이 많았죠. 그 덕에 인정도 받았지만 오락 프로그램 MC로 활동하면서 ‘너무 튄다’는 지적을 받기 시작했어요. 입사 후 7년 정도 지나니까 아나운서로 생활하면서 저 자신을 많이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조금 늦었지만 이제라도 내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자는 생각이 들었죠.”
먼 길을 돌아 다시 연기자로서 출발점에 선 그는 탤런트 동기들이 왕성하게 활동하는 모습을 보면 ‘그때 포기 하지 말걸’하는 아쉬움이 든다고 한다.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면 ‘나라면 이렇게 표현했을 텐데’하면서 혼자 연기를 해 보기도 한다고. 그는 “아나운서를 빨리 그만뒀으면 좋았을 걸 하는 후회가 있다. 성공했든 그렇지 않든 어떤 형태로든 연기를 계속하고 있을 테니까”라며 아쉬워했다.
연기자는 누군가로부터 선택 받아야 하는 직업인만큼, 실력 못지않게 인맥도 중요하다. 하지만 임성민은 사람 사귀는 데 있어 소극적인 편이라고 한다. “친구가 많지 않다”고 말하는 그는 “학창시절에도 친구들이 쉽게 말을 못 걸어왔다. 인간관계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신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가끔 뜻밖의 장소에서 친구를 사귀기도 해요. 얼마 전에는 연기 트레이닝 차 뉴욕필름아카데미에서 주관하는 워크숍에 참석했는데, 그 곳에서 연기 지도자로 활동하는 안나를 만나 친구가 됐어요.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자주 안부를 물어요.”
그는 지금껏 주눅 들어 지내온 게 사실이지만 연기에 대한 열정은 처음과 같다고 자신한다. 아직 보여주지 못한 게 많기에 더욱 욕심이 크다는 것. 기회가 된다면 자신의 장기인 노래와 춤 솜씨를 유감없이 펼칠 수 있는 배역도 맡고 싶다고 했다.
“공포물이나 첩보물처럼 독한 캐릭터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조바심 내지 않고 마음 편하게 기다리면 언젠가 제게도 기회가 오겠죠? 그때까지 초심 잃지 않고 열심히 저 자신을 단련시킬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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