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는 게 도와주는 겁니다. 이혼해야죠.”
도박 중독자들을 상담하는 경륜·경정 클리닉의 김호진 상담팀장(53)은 단호했다. 차갑게 외면하거나 대거리를 하는 것으로는 턱도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마지막 내 편을 잃고도 겨우 정신을 차릴까 말까 한 무서운 병이 중독이라는 것이다. 다소 과격하다 싶은 조언, 김 팀장에겐 이처럼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있었다. 심각한 중독자였던 그 역시 아내와 아이들에게 포기당한 뒤에야 달라질 결심을 한 것. 양심, 체면, 수치심을 잃고 사회적으로 매장된 뒤에도 도박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가족, 집, 끼니 해결할 돈이 거덜난 완벽한 빈털터리가 되고 나서야 조금씩 현실감각이 돌아왔다.
일반인들 눈에 비친 도박 중독자는 천하에 한심한 사람들이다. 수천, 수억 원을 잃고도 왜 ‘지는 게임’이라는 것을 모를까. 하지만 도박 중독은 지능이 모자라거나 어수룩한 바보에게만 찾아오지 않는다.
“일용직 노동자, 목사, 신부님, 정신과 의사까지 상담했습니다. 남녀노소 직업불문하고 도박에 중독될 수 있는 거죠. 연령은 20대부터 80대까지 다양하지만, 경제활동이 활발한 40,50대가 많은 편이에요. 최근에는 인터넷 사행성 게임이 많아지면서 10대들의 중독도 많아지는 추세죠.”
그 역시 멀쩡한 사회인이었다. 전도유망한 경제학 석사 출신 엘리트 공무원. 멀쩡할 뿐인가. 일 잘하는 직원으로 직장에서 신임을 듬뿍 받았다. 사무실에서 먹고 자며 시키는 것 무엇이든 기한 안에 해냈다. 공부도 1등 운동도 1등, 어려서부터 지는 것을 견디지 못했던 기질 탓이 컸다. 그러나 도박을 만난 열정적 승부사 기질은 그의 인생을 나락으로 이끌었다.
그가 처음 도박을 접한 것은 84년 여름. 친구와 동대문의 한 오락실에 갔다가 슬롯머신을 하게 됐다. 한창 파친코가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5천원을 넣자 화면이 빙글빙글 돌아갔다. 결과는 70만원 대박. 당시 한 달 월급인 20만원의 3배가 넘는 액수였다. 그 후 거기에 맛을 들인 그는 매일 오락실에 출근부를 찍었다.
“처음에 큰 금액을 딴 게 문제였어요. 돈을 잃을 때도 초반에 각인된 도박에 대한 환상을 지울 수 없었죠. 잠재의식에 박힌 환상이라 이성으로 통제가 안 돼요. 충동 조절력을 잃은 영혼의 에이즈인 셈이죠.”
도박 중독은 ‘보이지 않는 중독’이라 불린다. 가까운 이에게도 드러내지 않아 주변에서 눈치 채기 어렵다. 그래서 중독자 아내 대부분은 이상한 낌새를 바람피우는 것으로 오해한다. 중독 사실이 알려질 때는 이미 수습 불가한 사태로 악화된 뒤. 사채에 손을 대거나 직장에서 해고돼 구제불능의 지경인 경우가 보통이며, 자기파괴 충동에 사로잡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김 팀장은 5년간 2천만원을 탕진하고 아내에게 들켰다. 무릎을 꿇고 빌어 용서를 받았고, 그에 보답하고자 독하게 마음을 다잡아 89년 미국 워싱턴 DC로 국비 연수를 가게 됐다. 하지만 잠깐 구경하러 들른 미국 카지노에서 잊고 있던 기질이 발동했다. 도박으로 연수시절을 허송세월한 그는 한국에 돌아온 뒤에도 경마에 빠져 살았다. 결과는 밑 빠진 독에 돈 붓기. 경제기획원(현 기획재정부) 동료 18명을 보증 세워 빌린 4억원을 모두 날렸다. 자신을 포함, 중앙부처 공무원 19명의 월급에 동시 차압이 들어오자 97년 그는 결국 퇴출된다.
“퇴출된 뒤 상관이 다시 공기업에 자리를 마련해줬어요. 그런데 거기서도 3년 만에 공금을 들고 도망갔다가 다시 해고됐죠. 빚은 눈덩이처럼 커졌고, 가정은 엉망이 됐어요. 협의이혼을 한 뒤 여관을 전전했죠.”
그는 2000년 12월5일을 또렷이 기억한다. 큰아들에게 주먹질당한 날이자 마지막으로 도박을 한 날이다. 손발이 곱도록 바람이 매섭던 겨울, 무일푼으로 혼자 떠돌다 밥을 빌어먹으러 집을 찾았다. 술에 취한 채였다. 집에 가자 당시 고3이던 큰아이가 펀치를 퍼부었다. “너만 없으면 먹고는 사는데, 당신 때문에 집이 엉망이다. 나가달라.” 7년간 서로 투명인간처럼 지낸 아들이 그간 쌓인 감정을 무섭게 터뜨렸다.
갈 곳이 없어진 그가 찾은 곳은 음성 꽃동네. 그곳 정신요양원에서 아이들을 돌봤다. 정신분열증·자폐·복합장애를 앓는 아이들. 그래서 집에서 버려진 아이들에게 옷을 입히고 밥을 먹이고 볼일 보는 것을 도왔다. 자신의 쓸모를 다시 찾게 된 귀한 시간이었다.
“사실 저도 함께 수용된 거죠. 처음에는 몰랐는데 시간이 지나니 아이들 눈빛이 보였어요. 말은 못 해도 고맙다는 눈빛, 배고프다는 눈빛이 읽히더군요. 그때 사랑을 봤고,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자존감을 되찾았어요.”
잠재의식에 남아있는 도박의 맛, 매일 상담하며 예방주사 맞아
평생 봉사자로 남아야겠다는 마음을 먹던 차 상담사 채용공고가 떴다. 강원랜드에서 도박중독 전문 상담사를 뽑고 있었다. 수많은 경쟁자를 제치고 상담과 무관한 일을 해왔던 그가 뽑혔다. “나 같은 사람이 더 안 생기게 노력하겠다”는 진심이 면접관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그처럼 중독에서 벗어난 사람을 ‘회복자’라 부른다. 지난해 미국 도박국제회의에 다녀왔다는 그는 “미국은 회복한 뒤 상담일을 하는 사람이 30%”라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대체로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상담자로 나선다고. 회복자가 상담에 적극적인 이유는 중독자의 아픔을 잘 헤아릴 수 있는데다 자신에게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상담을 하며 자신을 다잡는 하루하루를 “매일 예방주사를 맞는 셈”이라고 표현했다.
“강원랜드에서 3년 7개월, 경륜·경정 클리닉에서 4년 5개월째 상담을 하고 있어요.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제가 완전히 중독에서 벗어난 건 아니에요. 물론 꽃동네 시절 이후 한 번도 도박을 하진 않았지만, 잠재의식은 도박의 맛을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제 발로 상담사를 찾는 중독자는 드물다. 대부분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지 않아 가족들의 손에 억지로 이끌려온다. 방어와 회피 행동을 보이는 것도 중독자의 특징이다. 이름을 속여 말하다가 마음을 연 뒤에야 본명을 밝히는 이들도 많다. 그간 미미했던 정부 차원의 상담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최근 숨어서 앓던 중독자들이 한꺼번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김 팀장은 “중독은 치료가 어려우므로 예방교육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강원랜드에서 일하는 동안 매달 꼬박꼬박 집으로 돈을 부쳤다. 초인적으로 절약해 월 7만원씩 쓰고, 남은 돈 3백50만원을 모두 보냈다. 가족에게 빚진 세월을 그렇게라도 사죄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또 돈이 생기면 도박 생각이 날까 스스로가 못 미덥기도 했다. 그렇게 혹독하게 스스로를 몰아붙이다 보니 잃었던 것이 하나 둘 돌아왔다.
첫 수확은 큰아들과의 화해. 그는 장성한 아들 둘을 뒀다. 어느 날 군 제대를 앞둔 아들이 편지 한 통을 보내왔다. 사춘기 시절 “저 새끼 내일 또 도박하러 갈 것”이라며 자신을 그림자 취급하던 아이가 건넨 ‘아버지’라는 단어에 가슴 한구석이 미묘하게 떨렸다. 아들은 상담사가 됐다는 그를 군대 부모님 초청 강의에 초대했다. 강의를 마칠 즈음 그는 공개적으로 아들에게 화해를 청했다. 마주 선 부자에게 모든 부대원이 일어나 기립박수를 보냈다.
두 번째 수확은 아내와의 재결합. 강원도에서 새 삶을 사는 그에게 아내가 마음을 열어줬다. 혈서를 쓰고 또 도박하러 나가는 자신을 수없이 용서했던 아내, 도박하는 동안 집이 압류돼 아이들과 거리에 나앉은 아내, 가장을 대신해 허드렛일을 하며 살림을 꾸려온 아내였다. 감동적인 이벤트나 살가운 말은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한참을 침묵으로 대화했다. 순간 큰 파도가 ‘솨아아아’ 가슴을 쓸고 갔다.
“아내에게는 감사한 마음뿐이에요. 보통 고맙다는 의미의 감사와는 차원이 달라요.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적시는 그런 감정이죠. 친구들과 재미있게 살던 사람이 일을 해야 했고, 손가락질을 당했고. 어찌 보면 저와 사회적 죽음을 함께한 사람이니까요.”
그는 중독자뿐 아니라 가족, 특히 아내도 함께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가까이서 중독자의 장단에 맞춰 마음을 졸이다 보면 정서적으로 불안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중독자 가족들에게 이런 당부를 전했다. 떠나는 기자의 뒷모습을 향해 거듭 외치는 그의 말에서 과거에 대한 진한 후회와 진심 어린 애정이 묻어났다.
“주변에 중독 사실을 알리고, 중독자가 저지른 모든 일을 스스로 해결하도록 하며, 오늘 즉시 전문가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인연을 끊는다는 각오로 독하게 도와야 해요. 마음이 약해져 돈을 빌려주는 것은 독약을 먹이는 것입니다. 그런 가족이 있다면 당장 저에게 데려오세요.”
도박중독·주식중독 증상 및 해결책
증상 | 파친코나 화투뿐 아니라 경마·경륜, 온라인 게임, 사행성 게임, 온라인 주식 등에 대한 중독 모두를 포함한다. 중독에 빠지면 도박하는 시간이나 거는 돈의 액수가 점차 커진다. 도박에 지더라도 “돈을 딸 수 있었다”는 비합리적 생각으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돈을 땄을 때와 마찬가지의 흥분을 느낀다. 가정과 직장에 도박이 악영향을 준다는 걸 깨닫는 순간 절제를 결심하지만 금단증상으로 번번이 실패하며, 결국에는 정서적 공황상태로 포기상태에 이른다. 특히 최근 문제가 심각한 것은 주식중독. 주가 걱정에 불면증과 우울증에 시달리며, 손해를 만회하기 위해 무리한 대출을 받거나 위험한 매매를 시도한다. 주식은 합법적이라 죄책감을 잘 느끼지 못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더 심각해질 수 있다.
대책 | 시간과 베팅액의 한계를 설정하고 한계를 넘지 않도록 한다. 중독자는 주로 혼자 도박을 하기에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자리를 마련한다. 일정한 간격으로 도박을 하는 것은 습관화를 거쳐 중독에 이르는 지름길이므로, 생활의 이벤트 정도로 간주한다. 또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기타 재산은 모두 도박자의 가족 명의로 돌려놓는다.
한국도박중독예방치유센터(080-7575-535 www.gamblerclinic.or.kr), 유캔센터(080-815-1190 www.ucancenter.or.kr), 경륜·경정 클리닉(080-413-3112 www.c-mclinic.or.kr), 한국단도박모임(02-8888-320 www.dan-dobak.or.kr)
도움말 김교헌 (충남대 심리학과 교수) | 참고도서 ‘중독의 심리학’(웅진지식하우스)
중독자 가족이 알아야 할 7가지
1 | 중독은 충동조절장애라는 정신질환이다.
2 | 갈수록 나빠진다는 사실을 알고 이에 대비한다.
3 | 중독자가 저지른 모든 문제는 스스로 해결하도록 한다. 사채업자가 와서 협박해도 흔들려선 안 된다.
4 | 치료는 오늘 즉시 시작한다. 전문상담사나 정신과 의사, 종교적 도움 등 모든 방법을 활용해야 한다.
5 | 가족·친구·직장동료 등 주변에 중독 사실을 알린다. 그래서 돈을 빌려주는 등 중독행위를 주변 사람이 돕지 못하도록 한다.
6 | 치료는 마라톤이다. 시간을 두고 경과를 지켜본다.
7 | 가족도 스트레스가 심할 테니 함께 치료받을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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