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모자 명단(가나다 순)
곽정례 권상희 김명재 김설원 김정희 김정희 김주앙 김혜진 김희영 류은영 문순복 민병임 박은경 박진숙 박향 서필우 엄두영 염혜정 윤나영 이덕 이미혜 이은영 이재순 이진 장안화 장정혜 장효은 정경진 최미희지 최용자 최유혜 한태순 홍성숙 황선희
예심을 거쳐 최종심에 오른 작품들에서는 눈 덮인 들판을 지나온 고통이 느껴진다. 읽는 이에게 느껴지는 고통은 뜨겁고도 서늘하다. 하지만 고통에서도 향기가 난다. 그래서 아름답다. 올해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류은영씨의 ‘지상의 떠도는 자들’과 김설원씨의 ‘실연한 여자의 동선’이었다.
‘지상의 떠도는 자들’은 60여 년 전 일제강점기 종군위안부였던 할머니를 둔 손녀 영현의 현재를 그렸다. 영현이 현실 어느 곳에서도 머물지 못하고 떠도는 까닭은 종군위안부의 딸이었던 어머니와 종군위안부였던 할머니로부터 대물림된 상처 탓이다. 미친 세월이 시대의 희생양으로 삼았던 여성들의 삶은 수십 년, 3대에 이르러도 여전히 현실로, 굴레로 작용한 것이다. 영현은 할머니와 어머니와 자신까지도 제물로 삼아버린 굴곡진 세월을 거스르며 가해자인 일제와 그 군인들의 현재를 살피고자 한다. 그래서 일본이 주 무대다.
‘지상의 떠도는 자들’은 3대를 아우르는 내용이 섬세하면서도 튼실했다. 수십 년 전의 ‘현장’에 대한 서술 또한 쉽게 읽기 힘들 만큼 진지하고 적나라했다. 그러나 소설적인 구성이 약하고 문장이 불안정했다. 사건을 보는 각 화자의 시각이 화자 나름의 개별성을 획득하지 못한 채 동어를 반복하면서 작품의 긴밀도를 떨어뜨렸다.
‘실연한 여자의 동선’은 막 30대에 들어선 여자 최정수의 발랄한 일상을 담았다. 치위생사인 정수는 그럭저럭 안정된 자신의 직업에 대체로 만족한다. 얼마 전 3년 동안 사귄 남자친구한테 이별을 통고받았으나 그 때문에 앓지는 않는다. 남자친구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 봤고 헤어질 때가 됐다는 것을 스스로도 느꼈기 때문이다. 남자친구와 헤어지기 전에는 어머니를 잃고 의부와 단둘이 생활하다가 의부와도 헤어져 비로소 ‘독립’한다. 하지만 그는 외로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실연한 여자의 동선’에는 엄살이 없다. 가족이나 친구 등 관계에 대한 상실감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실연한 여자의 동선’은 결국 상실에 대한 이야기다. 관계 부재에 관한 우화로도 읽힌다. 관계가 자신이 친밀감을 느꼈던 상대에 대한 정서적·물리적 책임이라고 할 때 이 소설에는 그 책임이 빠져 있다. 물론 작가가 의도한 것이다. 현대인은 숱한 사람을 만나고 하루에만 수십 통의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하지만 정작 누군가가 필요할 때 누가 내 곁에서 내 눈을 바라보고 손을 잡아주고 내 말에 귀 기울여줄 것인가. 내 곁에 그런 상대가 있는지, 나는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인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두 작품의 주제나 소재가 워낙 판이해 주제의 무게부터 소설의 사회적인 책임과 공공성까지 심사위원들이 나눠야 할 이야기가 많았다. 하지만 당선작을 ‘실연한 여자의 동선’으로 정하는 과정은 어렵지 않았다. 소설은 글로 이루어진 이야기인 바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한 온갖 요소가 오랜 훈련과정을 거쳐서 조화롭게 어우러져야 한다는 원론적인 측면에 ‘실연한 여자의 동선’이 부합했기 때문이다. 아픈 이야기를 아프다는 말 대신 시침 뚝 떼고 ‘실연기’로 포장한 작가의 천연덕스러운 뚝심을 높이 샀다. 또한 이 작품이 장편소설이 지녀야 할 안정감 있는 구도를 가볍지 않으면서도 감각적인 문체로 구현했다는 사실에 이견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나온 들판보다 훨씬 험난할 들판을 향해 나서게 된 새 작가의 건투를 빈다.
당선작을 뽑기까지
이번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는 모두 34명이 응모, 총 34편의 작품이 접수됐다. 예심은 문학평론가 권명아씨가 맡아 2편을 본심에 올렸고 하응백·송은일 두 심사위원이 지난 1월12일 열린 본심에서 김설원씨의 ‘실연한 여자의 동선’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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