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곳곳의 오지를 찾아다니며 선교활동을 하는 것이 꿈인 여성이 있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매년 한 번씩 난민 구호 봉사활동에 참가하는 것으로 이루지 못한 꿈을 대신하며 살던 그는 어느 날 난민 구호를 위해 아프가니스탄에 다녀온 직후 전신마비로 쓰러졌고 이혼의 아픔까지 겪었다. 생존 확률이 희박한 무서운 병을 간신히 이겨내고 재활의 걸음을 한 발짝씩 떼고 있을 때 “곁에서 돕고 싶다”는 남자를 만났다. “당신 같은 사람이 불행해진다면 세상이 너무 불공평한 것”이라고 말해주는 남자를 보며 여자는 다시 살아도 되겠다는 희망을 얻었다.
한 편의 드라마 같은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은 동화작가 이미란씨(45)와 김상우 KBS PD(50) 부부. 경기도 양평의 전원주택에서 만난 이들은 잔디밭을 뛰어다니는 두 살배기 아들만 아니면 누가 봐도 평범한 중년 부부의 모습이었다. 사진촬영 때문에 치마폭이 살랑거리는 개량 한복을 일부러 차려입었나 싶었는데 이씨는 “부자연스러운 걸음걸이를 가리기 위해 평소에도 긴 치마를 입는다”고 말했다.
“지체5급 장애 판정을 받았어요. 겉으로 보기엔 멀쩡하죠? 저 자신도 별로 장애라 생각하지 않고 살고 있지만 왼쪽 하반신의 근력이 약해서 지난해에는 무릎이 골절된 적도 있어요.”
의식 또렷한데도 말초신경 마비돼 고통의 시간 보내
이씨는 6년 전 어느 날 ‘길랑바레 신드롬’이라는 이름도 생소한 병으로 쓰러지기 전까지 밝고 긍정적인 성격이었다고 한다. 경비행기 운전을 배울 정도로 활동적이었으며 자신의 일(심리상담치료)과 가정, 무엇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며 살았다는 것. 어릴 적부터 선교사가 되고 싶었던 그는 일 년에 한 번씩 해외로 봉사활동을 다니며 못 이룬 꿈에 대한 아쉬움을 달랬다고 한다.
“일 년에 한 달 정도 집중적으로 봉사활동을 하고 오면 그것이 남은 열한 달을 살아내는 에너지가 됐어요.”
아프가니스탄 전쟁 발발 이듬해인 2002년 그는 난민 구호활동을 떠났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사람들이 갈대로 엮은 천막에 살며 구호물자로 삶을 이어가는 모습은 그에게도 큰 충격이었다고 한다. 지금의 남편 김상우씨를 처음 만난 것도 이때였다고 한다. 당시 KBS 교양제작국 PD였던 김씨 역시 취재차 아프가니스탄으로 날아갔던 것. 김씨는 이씨의 첫인상에 대해 “모든 것이 부족하고 힘든 상황에서 하루 일과가 끝나면 다들 피곤에 지쳐 있는데 20명 가까이 되는 단원들에게 저녁식사를 정성껏 준비해주는 모습을 보고 참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봉사활동 갔던 사람들과 소식을 주고받던 김씨는 그해 겨울,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이씨가 다시 아프가니스탄에 갔다가 병으로 쓰러졌다는 것이었다.
“봉사활동 중 아메바성 이질에 걸려 몹시 아파 급히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일주일 후 24시간 안에 전신이 마비되는 길랑바레 신드롬에 걸렸죠.”
길랑바레 신드롬은 이질이나 독감 등으로 몸의 저항력이 저하된 상태에서 바이러스가 침투해 생기는 병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손 끝 등 신체 말단 부위가 굳어지다가 24시간 안에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고 온몸이 마비되는 병으로 급성기 사망률이 85%에 이른다고 한다.
“다행히 제 경우는 마비가 심장근육 근처까지 진행되다가 멈춘 덕분에 살 수 있었어요. 이 병에 걸려 위기를 넘기고 나면 2년 정도의 회복기를 거쳐 일어나기도 하지만 평생 누워 사는 사람도 있다고 해요.”
이씨는 투병 중 “말초신경이 마비돼 꼼짝하지 못하면서도 중추신경은 멀쩡하기 때문에 명료한 의식으로 자신의 상태를 지켜보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고 말했다. 또한 또렷한 의식으로 말을 해도 혀가 굳어서 주위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하는 참혹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근육이 다 없어지고 뼈와 피부만 남아 몸무게가 34kg까지 줄었지만 이씨는 병원에서 주는 진통제를 먹지 않고 버텼다고 한다.
“통증으로 굉장히 고통스러웠지만 약을 먹으면 정신이 몽롱해지는 게 무섭고 싫었어요. 신체장애보다 정신적인 장애가 남을까봐 더 두려웠던 것 같아요.”
희귀병을 극복하고 제2의 삶을 살고 있는 이미란씨를 김상우씨가 따뜻한 눈길로 지켜보고 있다.
전신마비보다 고통스러웠던 이혼의 아픔, 새로운 사랑으로 치유
병원에서는 6개월은 입원해야 한다고 했지만 이씨는 22일 만에 코에 집어넣은 유동식 튜브를 빼고 퇴원을 감행했다. 목 근육이 약해져서 물 한 컵 마시는 데 1시간이 걸리고 코앞에 있는 화장실까지 가는 데 30분이나 걸렸지만 집에 돌아와 혼자 회복기를 버텨냈다. 그렇게 차츰 아주 더디게나마 건강을 회복해가고 있을 무렵 이번에는 이혼이라는 시련이 찾아왔다.
그는 이혼한 뒤 대전으로 이사했다. 작은 오피스텔을 얻어 두 딸과 함께 살면서 병을 앓기 전 했던 심리 상담을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그 즈음 김씨와 연락이 닿아 다시 만나게 됐다고.
“그때 남편이 심리치료 쪽에 관심이 있다고 하기에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제 연구소에서 하는 강의가 있으니 와서 들으라고 했죠.”
당시 이혼을 앞두고 별거 중이던 김씨는 일주일에 한 번씩 이씨의 연구소로 강의를 들으러 다니면서 어려운 상황에서도 밝은 웃음을 잃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감동받았다고 한다. 두 사람은 2005년 결혼, 이듬해 아들을 낳았다. 몸은 아직 부자유스럽지만 생명까지 위협했던 병에서 놓여나 새로운 가정을 꾸민 지금, 이씨는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를 거치면서 깨달은 지혜들을 동화를 통해 전달하고 싶다는 희망으로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뜨겁다”고 말했다.
“아무리 목이 타도 내 손으로 물 한 잔 마실 수 없는 상태로 누워 있을 때 저를 살린 것은 상상의 힘이었습니다. 이전의 삶에서 체험했던 행복했던 순간, 예를 들면 자전거를 타고 초원을 달리던 순간이나 경비행기를 운전해 공중으로 떠오르던 순간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진통제 없이 고통을 이겨냈어요.”
동화 ‘무지개 뜨는 마을에서는 어른도 가슴이 뛴다’ ‘도토리가’ 등에 이러한 자신의 경험과 시련을 딛고 일어서기까지의 과정을 녹여낸 이씨는 2009년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 어린이 책 전시회 ‘볼로냐아동도서전’에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는 동화와 애니메이션을 출품할 계획이라고 한다.
죽을 고비를 넘긴 후 장애가 남아 있는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꿈을 펼쳐보이는 아내의 모습을 따뜻한 눈으로 지켜보던 남편은 “이제부터라도 아내가 가진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며 자유롭게 거침없이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도움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견디기 어려운 시련으로 마음의 상처를 입는다 해도 자기 안에 있는 행복에 대한 열망을 잃지 않는다면 반드시 일어나 새로운 희망을 향해 달려갈 수 있다는 메시지가 아내의 작품을 통해 은은히 세상으로 퍼져가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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