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세월 갈고 닦은 문학에 대한 열정을 살려 앞으로도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는 작가가 되겠다는 장정옥씨.
지난해 11월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 원고 접수 마지막 날, 본지 편집실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원고를 보낸 뒤 다시 읽어보니 부족한 부분이 많은 것 같아 좀 수정했어요. 이 작품으로 심사받는 게 가능할까요?”
이름을 들어보니 이미 일찌감치 원고를 보내온 응모자였다. 소설 공모 규정상 마감일 소인까지 접수가 가능한 상황. 지금 바로 보내면 된다고 설명하자 “그럼 특급으로 보낼게요. 원래 원고는 폐기해주세요” 하는 말과 함께 안도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2천만원 고료 제 40회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서 당선의 영광을 차지한 장정옥씨(51)는 바로 이 통화의 주인공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글을 다듬고 또 다듬은 정성과 노력으로 소설 ‘스무 살의 축제’를 완성한 그는 당선 소식을 듣는 순간 가장 먼저 이날의 통화가 떠올랐다며 활짝 웃었다.
“작품을 다시 보낸 뒤 우체국 문을 나서는데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마음 한 편으로 ‘좋은 소식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했고요. 그런데 정말 당선되고 보니 그동안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행복해요(웃음).”
대구시 남구 이천동에 사는 장씨는 지난 97년 대구지역 일간지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해무’로 당선된 경험이 있는 ‘준비된 작가’다. 1남1녀를 기르며 평범한 주부로 살다 마흔이 넘어 작가의 길에 접어든 그는 “소설이 뭔지도 모르던 시절 덜컥 신춘문예에 당선된 뒤 본격적으로 문학수업을 시작했다”며 “10년의 노력 끝에 다시 이런 영광을 얻어 말할 수 없이 기쁘다”고 말했다.
“처음 소설을 쓴 건 어머니의 죽음을 겪고 난 뒤부터였어요. 지난 93년 정월대보름날이었는데, 그날 마침 볼일이 있어 아침 일찍 집을 나섰거든요. 그리고 저녁이 다 돼 들어갔더니 전화가 막 걸려오더라고요. ‘어머니가 곧 돌아가실 것 같다’는 내용이었죠. 허겁지겁 친정에 갔을 때 어머니는 정말 마지막 숨을 고르고 계셨어요. 제 손을 잡고는 5분도 안 돼 눈을 감으셨죠.”
알고 보니 그의 어머니는 아침부터 계속 숨이 멎을 듯한 고비를 간신히 넘겨가며 삶의 줄을 붙잡고 있었다고 한다. 마치 연락이 닿지 않는 장씨를 기다린 듯한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에 눈물을 쏟다 문득 하늘로 고개를 돌렸을 때, 그의 눈에 막 해가 진 밤하늘 위로 떠오르고 있는 보름달이 들어왔다고.
“제가 어머니 손을 잡을 때만 해도 아직 해가 있었어요. 그런데 해가 지고 달이 뜨는 그 찰나의 시간에 어머니가 유명을 달리한 거죠. 갑자기 우리네 삶과 죽음이라는 것이 다 이렇게 비현실적인 것이 아닐까, 그저 찰나의 환영에 불과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어머니를 잃은 슬픔과 인생에 대한 허무감으로 방황하던 어느 날 장씨가 문학의 길에 들어서게 되는 ‘사건’이 생겼다. 그의 집으로 ‘반월문학회’를 알리는 소식지가 날아든 것이다. ‘반월문학회’는 대구지역에서 소설 쓰기에 뜻을 둔 이들이 모여 문학을 공부하는 모임으로, 장씨는 지금도 그때 그 소식지가 집에 온 것이 운명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저는 제가 문학을 향해 걸어간 게 아니라 문학이 나를 찾아내 다가왔다고 믿고 있어요. 그게 제 자부심이죠. 그날 ‘반월문학회’에 대해 알게 된 순간부터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고, 문학회에 나가 소설의 ㄱ, ㄴ부터 배우기 시작했어요.”
어머니의 죽음 이후 만나게 된 문학이라는 새로운 세계
돌아보면 장씨의 마음속에는 늘 문학을 향한 동경이 있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운영하던 만화방에서 대여용 도서를 닥치는 대로 읽으며 자랐고, 청소년 시절에는 다양한 고전작품을 소장하고 있던 이웃집 오빠 친구의 집에 무시로 드나들며 서머셋 몸, 야마오카 소하치 등의 작품을 읽는 즐거움에 빠져 지냈다고. 결혼 뒤 두 살 터울의 두 아이를 키우느라 잡지 한 권 제대로 읽기 어려울 만큼 바쁘게 살던 장씨는,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비로소 자신의 머릿속에 수많은 작가와 작품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마침 첫째는 초등학교, 둘째는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해 시간적으로 여유가 좀 생긴 때였어요. 그래서 아이들이 집을 비우는 몇 시간 동안 꼼짝도 않고 틀어박혀 글만 썼죠(웃음).”
그리고 3년 만에, 생각보다 훨씬 빨리 당선의 영광이 그를 찾아왔다. 신춘문예 당선을 문학에 뛰어드는 본격적인 출발점으로 생각한 장씨는 그때부터 중앙 문단에 등단하기 위해 더 열심히 글을 썼다고 한다.
“처음엔 1~2년만 실력을 갈고닦으면 중앙일간지의 신춘문예에 등단할 수 있을 줄 알았죠. 하지만 문학이 호락호락 문을 열어주지 않더라고요. 최종심까지 올라 심사평에 제 이름이 언급되는데도 떨어지는 일이 여러 번 반복됐어요. 죽고 싶을 만큼 자존심이 상하고 속상한 채로, 그렇게 8년이 흘렀죠.”
지난 2005년 장씨는 단편소설로 중앙 문단에 도전하는 것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자신이 마지막 문턱을 넘지 못하는 이유는 이미 40대에 접어든 감각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20대 젊은 작가들이 톡톡 튀는 감수성으로 승부를 거는 단편에 매달리기보다는 제가 가진 연륜과 깊이를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장편소설에 도전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떠오른 게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였죠. 제가 가장 존경하고 좋아하는 박완서 선생님이 등단한 무대라는 점이 좋았어요. ‘여성동아’로 등단하면 박 선생님과 다른 선배 문인들이 모여 계신 ‘여성동아 문우회’ 회원이 돼 함께 문학에 대해 얘기하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거라는 점이 가장 끌렸죠.”
그때부터 그는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 당선작을 꼼꼼히 찾아 읽으며 공모를 준비했다고 한다. 10년 넘게 1백장 이내의 소설을 쓰다가 최소 1천장 이상의 장편소설로 스타일을 바꾸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글 쓰는 체질을 바꾸는 데만 1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그 사이 장씨에게 또 한 번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큰 올케가 갑작스런 사고로 세상을 뜬 것이다.
“집에 강도가 들었는데 도망치기 위해 2층 베란다에서 뛰어내렸다가 그만 변을 당한 거예요. 2층에서의 추락사라는 게 흔치 않은 일이었기 때문에 시신을 부검하게 됐고, 제가 가족 자격으로 그 자리에 참석했죠. 바로 잠시 전까지 함께 숨쉬고 얘기하던 사람이 그렇게 순식간에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된다는 걸 정말 받아들이기 힘들더군요.”
장씨는 시간이 흘러도 올케의 죽음이 준 충격에서 쉬 벗어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죽음의 환영을 극복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자신의 온 정신을 사로잡고 있는 죽음의 문제부터 써야겠다고 결심했다고.
장씨의 당선작 ‘스무 살의 축제’는 스무 살 난 주인공이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오랜만에 고향에 찾아가는 내용으로 시작된다. 죽음의 공간인 그곳에서 주인공은 축제를 만나고, 다양한 경험을 겪으며 어린 시절 자신을 버렸던 어머니와 화해하게 된다. ‘스무 살의 축제’에는 그가 실제 체험한 부검 장면에 대한 묘사가 등장하는 등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장씨는 “이번 당선은 한동안 내 삶을 지배해온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고 새로운 문학을 시작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도 뜻 깊다”고 말했다.
“‘스무 살의 축제’를 쓰는 동안 체중이 10kg이나 줄 만큼 힘들었지만, 그보다 더 많이 기쁘고 행복했다”는 장씨의 바람은 앞으로도 계속 소설을 쓰고 또 쓰는 것. 다음번엔 “외로운 사람들, 가난하고 잘나지 못한 ‘3류 인생’에게 따뜻한 손을 내미는 작품”을 쓰고 싶다고 한다.
“가볍고 상큼한 소설이 많이 나오는 세상이지만, 저는 좀 더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문학을 공부하면서 늘 마음에 품었던 ‘많이 팔리는 소설보다 내가 쓰고 싶은 소설을 쓰겠다’는 처음의 소신을 끝까지 지키겠습니다.”
|
||||||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